소설리스트

95화 (97/136)

95화

“바로잡는다니, 우상 대감이 어떻게?”

“없던 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가장 깔끔합니다. 아이들이 겁에 질려 착각을 한 거라고 증언을 번복하고, 그림자 속에서 있었던 사건들을 재구성하면서, 세자빈 저하께서 사실은 신내림을 받지 않았다는 증거를 제시하겠습니다.”

이 아저씨가 무덤덤한 얼굴로 파격적인 계획을 내놓네. 나는 당황해서 되물었다.

“그거 결국 사실을 날조하겠다는 소리 아니야?”

“날조라니요, 포장을 다시 하는 정도일 뿐입니다. 미신에 휘둘리는 자들이 납득할 수 있는 수준으로 말입니다.”

“아니…….”

“기다리고 계시면 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세자빈 저하께서는 작은 도움 몇 가지만 주시면 됩니다. 우선…… 지금 정확히 어떤 상태십니까? 몸주신을 모시고 계신 겁니까? 혹 급하게 신내림을 받은 탓에 정식 내림굿이 필요하시다면 조용히 준비를—”

“자, 잠깐만.”

이미 다 구상해 둔 건지, 막힘없이 이어지는 우의정의 말을 겨우 멈췄다.

‘이 사람, 확실히 유능하긴 유능해. 저대로 맡겨 놓으면 알아서 깔끔히 문제가 해결되겠지.’

이전에 내가 만능 핑계 설족을 써서 넘어간 것처럼, 신내림을 받지 않았다는 방향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제 그러면 안 돼.’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성술관을 세우고 나 역시 괴력난신으로서 그곳에 입학해서 지푸라기 신 후보들을 찾아야 하니까.

‘이런 몸치로 무사가 되는 건 어불성설이고, 내 신력을 꾸준히 써야 하는 마당에 그걸 계속 도술이나 주술인 척 포장하는 것도 쉽지 않고.’

그러니 ‘천명공주를 강신한 무당 세루화’로 지내는 게 최선인데, 여기서 무당이 아닌 척을 하게 되면 앞으로의 계획이 어그러진다.

‘신내림을 안 받은 척하는 게 아니라, 내가 강신을 해도 문제없는 상황으로 바꿔야지.’

관습을 바꾸고 미신을 떨쳐 낸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어쩌겠어? 그게 향후 10년간 주술사나 도사인 척하는 것보단 쉬울 테니.

게다가 ‘천명공주의 하위 신이 될 후보’를 찾는 것도 그냥 괴력난신보단 ‘천명공주의 무당’인 편이 훨씬 나을 거고.

머릿속으로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뒤 입을 열었다.

“우상 대감, 전에 온설공주 자가께 듣긴 했어. 운국에서 무당은 무당 외의 다른 지위를 가질 수 없다고. 가문을 망하게 할지도 몰라서 그렇다고.”

“예.”

“그런데 다른 나라에서도 그래?”

“…….”

“다른 나라는 무당을 그런 이유로 차별하는 일이 없다고 들었거든. 내가 자란 평 제국에서도 그랬고.”

이건 내가 온설공주를 만난 뒤 궁금해서 따로 알아봤던 일이다.

무당이 잡신이나 잡귀에 넘어가 주변 사람을 해치는 일은 다른 나라에서도 가끔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가문에 무당이 나면 가문이 망한다는 속설이 생겨나 완전히 자리를 잡고, 무당이 가문에서 쫓겨나거나 출가해야 하는 관습까지 생긴 건 운국뿐이었다.

‘아무래도 이상하지.’

우의정은 내 질문에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가라앉은 낯으로 무언가 고민하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세자빈 저하께서는, 제 손녀인 연주에게 주술을 가르치라 하셨지요.”

“응? 그랬지.”

무당 얘기를 하다가 왜 이연주 얘기가 나오지?

의아했지만, 내친김에 걱정하던 것을 말했다.

“참, 그 애가 그슨대의 그림자 속에서 묘두사의 요력에 홀렸다는 거 들었지? 주술사가 될 자질이 있으면 요괴의 영향을 잘 받으니까, 설령 요괴를 키우지 않더라도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해서 연주에게 주술을 조금 배우게 하는 편이 나을 거야.”

“운국에서는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왜?”

“운의 괴력난신들은 대부분 대가 끊겼기 때문입니다.”

“대가 끊겼다고……?”

우의정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혹시 100여 년 전, 운국에서 벌어진 삿갓 전쟁에 대해 아십니까?”

“응, 배웠…….”

나는 기호철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대답하다가 멈칫했다.

문득 떠오른 게 있어서.

“기령검가는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아주 큰 검가였고, 저 외에도 무수한 전승자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저와…… 다음 전승자가 될 영준이밖에 남지 않았지요.”

기호철이 했던 말. 그리고 삿갓 전쟁에 대해 세자가 했던 말.

“100여 년 전 괴력난신들이 큰 요괴에 대항해 싸운 전쟁이었고, 많은 괴력난신 분파와 가문들이 그때 희생되었다는 것만 압니다.”

착요갑사가 해산한 것도, 그때 너무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라고 했지.

‘아, 그렇구나…… 그래서 대가 끊겼다고.’

나는 떠올린 것을 입 밖에 내었다.

“혹시 삿갓 전쟁 때 괴력난신들의 피해가 너무 커서, 선대의 지식이나 기술이 제대로 전수되지 못하고 실전된 거야?”

“정확하십니다. 현재 운국은 비전(秘傳)을 온전히 유지하고 있는 괴력난신 분파나 가문이 극히 드문 상황입니다.”

“……그렇다고 운국에서 실전된 것들을 타국에서 알아 오기도 어렵겠지. 괴력난신의 기술은 나라의 힘이 되니까 유출을 막잖아.”

“예.”

고개를 끄덕인 우의정이 씁쓸하게 덧붙였다.

“운은 삿갓 전쟁을 치르며 많은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나라의 정승이라는 저조차 주술을 배우지 않으면 요괴의 영향을 받기 쉽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정도로 말입니다.”

“……기술이 실전된 거면 괴력난신의 숫자도 100년 전에 비해 많이 줄었겠네. 그나마 남은 이들도…… 착요갑사에 다시 불려 가고 싶지 않아서 궐과 엮이는 일을 최대한 피하려 들겠고.”

“…….”

“대부분 음지로 숨거나 궐과 연락이 안 되는 거겠지? 개중에서도 주술사가 드문 거구나. 우상 대감이 손주에게 주술을 제대로 가르칠 사람을 찾기 어려울 만큼.”

“……역시 저하께서는 참으로 영명하시군요. 연치가 어리신 게 믿기질 않습니다.”

우의정이 감탄과 경악이 섞인 기색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그에 반응할 새도 없이 급하게 물었다.

“그럼, 무당이 차별받게 된 것도?”

“이전에는 무당에게 내린 신이 날뛰는 일이 드물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삿갓 전쟁 이후로 내림굿을 제대로 받지 못하거나 스승을 구하지 못한 무당이 늘었고, 그 탓인지 몸주신이 노하여 사람을 해치는 사례가 급증했습니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가 결국 이런 관습이 생겨난 거지요.”

나는 그 말에 속으로만 고개를 저었다.

‘저런 건 몸주신이 노한 게 아니야.’

아무래도 저건 내림굿 문제라기보다는 잡신과 진짜 신을 구별하는 법을 선대로부터 배우질 못한 탓이다.

‘잡신을 구별하는 지식이 실전되어서 사기당하는 사례가 늘어난 거지.’

내림굿이 이상하면 신들은 그냥 강림을 안 하고 말지, 굳이 사람을 해쳐서 업보를 쌓으려 들진 않을 테니까.

‘아, 어떻게 보면 내림굿 문제도 맞겠네. 내림굿이 잘못되니 신들이 잘 안 내려오고, 대신 잡신들이 끼어드는 거야.’

이야기를 듣고 보니 백탐솔처럼 대단한 신을 모신 인간이 조 뭐였지, 하여간 그런 사이비 밑에 있었던 이유도 좀 알 것 같다.

아무리 그놈이 자원했다지만 그런 사이비가 세자빈인 나를 가르치러 올 수 있을 정도로 활개 치고 다닐 수 있었던 이유도.

‘운은 지금 제대로 가르쳐 줄 선대의 무당도, 제대로 된 무당도 많지 않은 상황이란 거지.’

삿갓 전쟁을 상처뿐인 승리라 할 만했다.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는데, 우의정이 망설이며 말을 꺼냈다.

“그리고 그 전쟁 이후로, 괴력난신이 되고자 하는 사람 자체가 줄었습니다.”

“……너무 많이 죽어서?”

“예. 저만 하여도…… 제 손주들이 그런 험한 것을 배우고 익히지 않았으면 했습니다. 괴력난신 같은 것이 되지 않고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 자라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길 바랐지요. ……그러다 이번에 손주들을 둘 다 잃을 뻔했지만 말입니다.”

우의정이 눈을 내리깔았다.

“두억시니가 다시 나타날지도 모르는 마당에, 이제 그런 안일한 마음으로 지낼 수는 없겠지요. 연주 같은 경우는 주술을 배우지 않으면 위험하다고도 하시니, 무슨 수를 써서든 가르쳐야겠습니다.”

안타까운 기분으로 그 이야기를 듣다가, 머릿속에 벼락이 쳤다.

‘잠깐, 이건…….’

선대가 다 죽어서 실전된 기술. 줄어들고 숨어든 괴력난신들.

제대로 된 무당이 적어져서 생겨난 편견. 그로 인해 생긴 출가의 관습. 나를 폐위시키라는 상소.

‘……결국 전부 연결되어 있어.’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바꿔 놓을 두억시니의 재출현. 시대의 변화.

늘어놓고 보니 착요갑사 재건과, 성술관 건립과, 무당의 편견 문제까지 몽땅 엮어서 해결할 길이 보인다.

덤으로, 두억시니와 관련 있어 보이는 영의정 놈을 처리할 길도.

‘그슨대 습격의 배후 문제부터 시작하면 돼.’

내가 정신 차리기 전까지 조정에서는 두억시니에 모든 주의가 쏠려 습격 배후 수사가 흐지부지되어 있었다.

배후가 요괴면 인간을 수사할 게 아니라 상대할 괴력난신부터 모아야 하니까.

‘아마 영의정이 그쪽으로 유도한 것도 있겠지? 영의정이 그슨대랑 연관 있다는 걸 아는 게 나밖에 없으니까.’

그슨대가 나를 보며 중얼거렸던 영의정의 이름을 나 말고는 아무도 못 들었으니까, 당연히 영의정에게는 아무런 혐의가 씌워지지 않았겠지.

‘좋아, 이참에 영의정도 갈아 치워보자. 이왕이면 우상 대감으로.’

일단 영의정에 대해 조사하고, 그슨대의 배후부터 성술관 건립까지 이어질 판을 깔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우상 대감.”

“예, 저하.”

“내 폐위 상소 문제, 해결하는 게 아니라 지연시킬 수 있어?”

“예?”

“내가 신내림을 받은 걸 없던 일로 덮는 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해결하고 싶어. 그러니 우상 대감이 시간을 좀 끌어 줘.”

“다른 방식이라니요?”

우의정이 의아한 듯 반문했다. 곁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세자도 놀라 나를 돌아보았다.

“부인, 설마 출가하시려는 건 아니시지요?”

세자 눈에 지진이 났다.

꼬맹이는 버려진 강아지 같은 얼굴을 하고는 내 손을 움켜쥐었다.

“제 세자빈으로 살겠다 하셨잖습니까. 인제 와서 저를 버리고 떠나시면 안 됩니다.”

아니, 내가 언제 출가한대? 왜 이렇게 겁을 먹어?

애가 다급했는지 손을 잡은 힘이 좀 세다. 나는 내 손을 잡은 꼬맹이의 손을 도닥이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저하. 저 출가 안 해요. 저하 곁에서 떠나려는 것도 아니고요.”

10년 후에는 어떻게 될지 나로서도 장담하기 어렵지만, 어쨌든 지금은 여기서 떠날 생각이 없다.

“상소 문제는 출가 말고 다른 방식으로 해결할 거예요.”

“어떻게 말입니까?”

“판을 흔들려고요. 저를 폐위하니 어쩌니 따질 틈이 없을 정도로요”

“예?”

세자와 우의정의 얼굴에 더 큰 의문이 떠올랐다. 나는 그들을 보며 생각했다.

‘삿갓 전쟁에서 괴력난신들이 너무 많이 죽어서 비전이 실전된 게 결국 모든 문제의 근원이잖아?’

그런데 내가 사실 공교롭게도 저승의 공주라서.

‘잃어버렸다는 비전이 뭔지, 죽은 사람들한테 직접 물어보면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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