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화 (101/136)

99화

나는 한동안 재방을 떠나서 온설공주 밑에서 공부를 하고 오라는 말을 백탐솔에게 직접 전달했다.

“이참에 정식 무당으로 무당 명부에 이름도 올리고 오셔요. 온설공주께서 스승님의 신어미가 되어 정식으로 올려 주시겠다 하셨어요.”

조 뭐시기 사이비가 쫓겨난 뒤, 백탐솔은 스승 없는 신딸로만 무당 명부에 기록되어 있었다.

정식 무당이 되려면 내림굿을 받은 뒤 다른 무당의 아래에서 공부를 하고 인정을 받아야 하는데, 백탐솔은 인정해 줄 신어머니나 신아버지가 없어 정식 무당이 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참에 정식 무당이 되어서 성술관 교관이나 사범이 될 수 있게 해줘야지.’

내가 성술관에 입학하면 재방이 애매해진다.

시강원의 기호철도 세자를 따라 성술관 교관이 될 예정이니, 재방 빈객인 백탐솔도 성술관 교관이나 사범으로 오라고 권할 생각이다.

아무래도 나이가 열여덟 살밖에 안 되니까 교관보다는 그 아래에서 보조하는 사범이 자연스럽겠지?

‘어쨌든 성술관에도 같이 가고 싶어.’

아직 무속에 대해 배울 게 더 많이 남았고, 백탐솔의 무무도 못 봤는걸.

“공주 자가께요? 재방을 떠나서 말입니까……?”

백탐솔은 내 말에 불안한 듯 앞머리를 아래로 잡아당겼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영영 떠나시라는 건 아니에요. 몇 달만 공부하고 다시 돌아오시는 거예요. 제 스승님이시잖아요.”

“하지만…… 온설공주 자가께서, 저 같은 것을 신딸로 삼으신다니요…….”

백탐솔은 제 앞머리를 재차 내리누르며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보기 흉하다 하시지 않을까요, 라고.

백탐솔의 이마를 온통 뒤덮은 화상 자국.

확실히 보기에 예쁘진 않지만, 저런 흉 같은 건 백탐솔이라는 인간에게 아주 작은 일부분에 불과한데.

불꽃이 타오르는 초롱의 덮개에 있는 조그만 그을음 자국 같은 것. 불이 빛나는 데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

‘그래도 백탐솔에게는 가리고 싶은 부분인 거니까…… 슬슬 이걸 줄 때려나?’

나는 미리 챙겨 둔 불가사리의 기름으로 만든 연고를 백탐솔에게 내밀었다.

“이거, 스승님께 드리는 선물이에요.”

“선물이라니요?”

“효과가 탁월한 연고인데, 흉 진 곳에 꾸준히 바르시면 나아질 거예요.”

“아…… 감사합니다, 저하.”

작게 웃는 소녀의 대답에는 기쁨은 있어도 열기는 없었다. 큰 기대가 없는 듯이.

그렇겠지. 이렇게 심한 흉이 고작 연고 좀 바른다고 사라질 거라 믿긴 어려울 테니까. 그것도 나 같은 어린애가 주는 연고라면.

꾸준히 바르게 하려면 일단 효과를 보여 줘야겠네.

“지금 한번 발라 보실래요?”

“네?”

긴 앞머리 사이로 백탐솔의 눈동자가 요동치는 것이 보였다.

나는 서안을 치우고 불가사리 연고를 손에 덜었다. 키가 작은 탓에 무릎을 세우고 다가앉아야 했다.

연고를 묻히지 않은 손으로 백탐솔의 앞머리를 쓸어 옆으로 넘기니 애가 흠칫 굳는다.

“저, 저하?”

“제가 발라 드릴게요.”

“예, 예? 세, 세자빈 저하께서 어찌 저 같은 것에게 직접…….”

“제자와 스승이잖아요? 제자가 스승께 약 좀 발라 드릴 수도 있죠.”

이마부터 콧잔등까지 얽어 뒤덮인 화상 자국 위에 꼼꼼히 연고를 발랐다.

백탐솔은 나를 차마 말리지도 못하고, 얼어붙은 채로 눈만 깜박였다. 숨도 안 쉬고 있는 것 같다.

쥐어 짜낸 듯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징그럽고 더러운 것을, 저하께선 어찌 맨손으로…….”

“모양이 좀 다를 뿐 똑같은 사람 피부인데, 뭐가 더러워요?”

“…….”

잘 씻어서 깨끗하기만 한데?

‘사이비 놈이 더럽다 더럽다 세뇌라도 했나? 못된 놈.’

속으로 사이비를 욕하며 연고를 다 바른 뒤, 잠시 기다렸다.

불가사리의 기름은 역시 효과가 대단해서 벌써 흉이 옅어지고 있었다. 울룩불룩하던 부분이 확연히 줄어들었다.

완전히 흉을 다 지우려면 제법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 정도면 누가 봐도 효과를 느낄 거다.

나는 얼른 경대를 가져와 백탐솔 앞에 내려놓았다.

“한번 보세요, 스승님.”

“……!”

백탐솔은 반사적으로 거울을 피하며 양손으로 앞머리를 당겨 가렸다가, 내가 가만히 기다리자 천천히 손을 내렸다.

“아……?”

거울 속을 멀거니 들여다보던 소녀의 까만 눈에 빛이 새벽별처럼 떠오르는 게 보였다. 지켜보는 내 마음속도 별이 떠오르는 듯 설렜다.

‘기뻐하는 걸 보니까 뿌듯하네.’

나는 거울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소녀의 손에 자개 장식이 된 동그란 연고 통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그런 흉, 스승님께서 공주 자가의 신딸이 되는 데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요. 온설공주 자가께서도 이미 스승님에 대해 다 알고 계시고요.”

“…….”

“그래도, 스승님께서 신경 쓰시는 것 같아서…… 그동안 가르침 받은 제자로서 드리는 보답이에요. 스승님께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뻣뻣하게 굳어 있는 백탐솔의 손을 내 손으로 감싸 연고 통을 쥐게 했다.

“제 예상보다도 효과가 좋으니까, 꾸준히 바르시면 완전히 사라질 거예요.”

그제야 거울에서 시선을 뗀 백탐솔이 멍하니 풀린 눈으로 나를 보고, 제 손에 쥐어진 연고를 내려다보고, 다시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이 흉은.”

“네?”

“……저는 날 때부터 고아였습니다. 함께 지내던 거지들은 동냥 받을 때 어린애가 있으면 도움이 되니까 저를 주워다 기르는 거라고 했습니다.”

“…….”

“그러다 제가 조금 자라니까…… 나이를 먹어 동정을 덜 받는다고, 횃불을 얼굴에 들이대었습니다.”

“설마…….”

“……이 흉은, 그렇게 생긴 흉입니다.”

나는 벌린 입을 다물질 못했다.

인간이 악할 때는 한없이 악해진다는 걸 알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나.

동정받으려고 고아 어린애를 끌고 다니고, 그 애가 좀 자라서 동정을 덜 받으니까 얼굴을 불로 지졌다고? 그러면 더 불쌍해 보여서 동냥을 더 받아 올 테니까?

‘요괴가 따로 없네. 아니, 요괴만도 못해.’

얼이 빠져 있는 내 앞에서 백탐솔은 특유의 무미건조한 어조로 물 흐르듯 말을 이었다.

“상처가 좀 낫자마자 도망쳤습니다. 도저히 그곳에 있을 수가 없어서요. 그렇게 밤중에 숲을 떠돌다가 신아버지를 만났습니다. 제게 무당의 자질이 있다 하시더니 무당이 될 생각이 있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따라간 거예요?”

“예.”

고개를 끄덕인 백탐솔이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거지들이 부르던 이름을 쓰기 싫어서, 이름이 없다 했습니다. 신아버지께선 귀뚜라미 우는 밤중에 주웠으니 이름을 귀뚤이라 하자고 하셨지요……. ‘백탐솔’은, 아무래도 귀뚤이란 이름으로는 무당 명부에 오를 수 없겠다 싶어 제가 스스로 지은 이름입니다.”

“…….”

“신아버지께서 부르시는 이름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거지들이 부르던 이름보단 나았습니다. 그는 저를 걸핏하면 걷어차거나 주먹으로 때렸지만, 동냥을 시키거나 얼굴을 불로 지지진 않았습니다. 제게 욕을 하고 사기를 치는 데에 협조하게 했지만, 무속을 공부할 책들은 계속 구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오랜 과거를 바라보듯 소녀의 눈길이 허공을 떠돈다. 그 눈에 열기가 깃들었다.

“그는 긴 소매와 화려한 옷자락을 휘날리며 춤을 추었습니다. 신아버지는 나쁜 사람이었고, 손속도 악독했지만, 춤을 출 때만큼은 아름다웠습니다. 그래서…… 계속 따랐지요. 저도 그러한 춤을 추고 싶었습니다.”

“……그런데도 왜 무무를 추지 않으세요?”

“추고 있습니다. 매일같이.”

“제겐 한 번도 안 보여 주셨잖아요.”

“신아버지가 시켜서, 굿판에서 대신 무무를 춘 적이 있습니다. 얼굴을 들자 사람들이 욕을 하고, 아이들이 비명을 질렀지요.”

“……!”

“신아버지는 이제야 네 주제를 알겠냐고 하셨습니다. 그제야 저는 제가 무무를 선보일 주제가 안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사이비 무당 놈이, 저보다 똑똑하고 제대로 된 신을 모시는 애가 자기보다 무무도 잘 출 것 같으니까 일부러 짓밟은 거 아니야? 무속 공부할 책 구해 줬다는 것도, 사기 치는 데 애를 써먹으려고 그랬던 거겠지!

이미 벌 받은 놈이지만 다시 찾아내서 더 벌주고 싶어진다.

나는 절로 갈리려는 이를 꾹 물고 겨우 입을 열었다.

“그건 오해예요, 스승님. 춤추는 데 얼굴 흉이 무슨 상관이에요? 욕한 사람들이 이상한 거라고요.”

“…….”

“저는 스승님 무무 꼭 보고 싶으니까,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보여 주세요. 네?”

멍하던 백탐솔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참 신기합니다.”

“……?”

“이리 어린 저하께……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가 쉽게 나오고, 위로받는 기분이 든다는 것이.”

그야 나는 사실 신이니까.

인간들의 하소연을 들어 주고, 때로는 복을 내리고, 때로는 벌하고, 가끔은 위로하고, 또 가끔은 죄를 사하여 주는.

그것이 인간이 바라보는 신이고, 인간들이 신에게 기도하는 이유잖아.

그러니까 반쪽짜리 신인 내게도 인간의 고해(告解)를 들을 자질이 있는 거야.

그런 거라고 믿고 싶다. 그렇게 되고 싶어.

그러니까.

“얼마든지 얘기해도 돼요. 제가 스승님께 위로가 될 수 있다면, 더욱이요.”

백탐솔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연고 통을 쥔 손에 꾹 힘이 들어간다.

그리고 소녀는 속삭이듯 말했다.

“제가, 무무를 출 용기가 생기면…… 반드시 저하께 가장 먼저 보여 드리겠습니다.”

조용한 불씨가 그 눈 속에 있었다.

나는 그 씨앗이 불꽃처럼 화려하게 피어오를 날을 기대하기로 했다.

* * *

세자빈이 신내림을 받았다는 소문이 나라 전체에 퍼졌다.

구중궁궐의 일인데도 불구하고 소문은 제법 구체적이었다.

사특한 요괴가 참배 중이던 세자와 세자빈, 우의정의 손주들을 납치했는데, 세자가 암령술을 써서 그 요괴를 퇴치했다고. 그 와중에 크게 다친 세자를 세자빈께서 신내림을 받아 치료했다고.

“아직 두 분 다 어리신데, 참으로 대단하시지 않나.”

“세자 저하께서 괜히 용에게 절을 받으신 게 아닌 모양이야.”

“운룡의 후예시니 그 나이에 요괴를 물리치신 게지!”

“세자빈께서는 주상 전하와 왕비 전하도 치료하시더니, 이제 세자 저하도 치료하시는구나!”

“세자 저하도 세자빈 저하도 이렇게 어릴 때부터 탁월하시니, 나라의 앞날이 밝구먼.”

세루화의 부탁으로 우의정이 은밀히 손을 쓴 덕에, 소문은 아주 구체적이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퍼져 나갔다.

동시에, 자연스럽게 현재 조정에 빗발치는 상소에 대한 얘기도 나왔다.

“그런데 신내림을 받았으면 세자빈 저하께서는 출가하셔야 하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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