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2화 (104/136)

102화

“네.”

“허어.”

영의정이 탄식하며 수염을 쓸어내렸다.

“세자빈께선 참으로 상상력이 풍부하십니다. 어린 나이에 무당이 되신 이유를 알겠습니다. 멀쩡한 사람에게 요괴라니요, 허어.”

신선처럼 풍채가 좋은 노인이 한숨을 내쉬며 안쓰럽게 나를 보았다. 대신들도 당황하며 웅성거렸다.

“영상 대감이 요괴라니…….”

“역시 어린애는 어린애…….”

왕도 내가 이런 고발을 할 줄은 몰랐는지 놀란 기색이었다. 그래도 그는 바로 나를 타박하는 대신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세자빈, 그 말에 근거가 있느냐? 궐에는 국무들이 있는 성수청이 있고 도사들이 일하는 관상감이 있으며, 무공을 익힌 군관들도 많다. 영상이 그 모든 괴력난신들의 눈을 속인 요괴라는 말이냐? 수류견이라는 요괴가 그리 대단하더냐?”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영상 대감은 수류견이 조종하는 꼭두각시 인형이에요.”

“뭐라고?”

“요괴가 아니라 인형이라서, 다들 알아차리지 못한 거고요.”

“듣자 하니 너무하십니다, 세자빈 저하.”

영의정이 벌게진 낯으로 끼어들었다.

“소신 구장생, 궐에서 20년을 넘게 나랏일을 하며 살아왔습니다. 세자빈 저하의 연치보다 긴 세월을 궐에서 보냈단 말입니다. 그런 신이 누군가의 꼭두각시 인형이란 말입니까?”

“네, 그래요.”

“……세자빈 저하께선 그 말을 책임지실 수 있습니까? 증좌도 없이 사람을 요괴니 꼭두각시니 우겨 대시는 걸 보아하니 역시 세자빈이란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증좌라면 있어요.”

나는 소매에 손을 넣으며 말을 덧붙였다.

“지금 바로 부정할 수 없는 증좌를 보여 드릴게요.”

내 팔목에 감겨 있던, 이연주로부터 빌려 온 작은 요괴가 툭 튀어나왔다.

묘두사.

둔갑쥐는 도깨비들이 만든 꼭두각시 인형이지만, 원형은 비슷한 주술을 부리는 쥐 요괴다. 묘두사는 뱀 몸뚱이의 요괴지만 본성은 고양이에 더 가깝다.

‘쥐 잡는 덴 역시 고양이지.’

뱀도 쥐의 천적이긴 마찬가지고.

새끼 고양이의 머리가 내 소매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영의정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쭉 뻗은 목이 먹잇감을 노리듯 흔들거린다.

세로로 갈라진 고양이의 동공을 마주한 영의정, 아니, 둔갑쥐의 낯빛이 삽시간에 창백해졌다.

나는 묘두사가 튀어나온 소매를 영의정에게 겨누며 속삭였다.

“나비야, 잡아.”

애오옹!

어린 묘두사가 제법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며 펄쩍 뛰어올랐다.

그래 봤자 손아귀에 들어올 정도로 조그만 요괴. 평범한 사람이라면 깜짝 놀랄지언정 겁에 질릴 정도는 아닌, 하찮은 기세였다.

그러나 둔갑쥐에겐 천적 그 자체였다.

‘쥐라서 일반 고양이나 뱀도 꺼릴 텐데, 묘두사는 심지어 요괴 고양이면서 요괴 뱀이기까지 하니까.’

손바닥만 한 묘두사가 날아올라 영의정의 가슴팍에 달라붙었다. 영의정이 수염을 흩날리며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그것의 입에서 공포에 질린 비명이 튀어나왔다.

찌익!

누가 들어도 쥐의 울음소리였다.

사람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저, 저게 무슨!”

“왜 쥐 울음소리가……?”

“세자빈 저하, 저것이 무엇입니까? 고양이…… 뱀…… 요괴?”

“영상 대감! 괜찮으십니까!”

인간들이 난리가 나거나 말거나 나비는 순식간에 영의정의 어깨를 타고 올랐다. 어린 묘두사가 늙은 인간의 목 근처를 노려보며 위협하듯 울었다.

애오오옹!

그러자 영의정의 입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그 안에서 찌이익, 찍, 하고 쥐가 울부짖는 소리가 나더니, 목구멍에서부터 나무를 깎아 만든 쥐 인형이 툭 튀어나왔다.

“으억!”

“아악!”

기괴한 광경에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대전 한복판에 뛰어내린 나무 조각 쥐는 찍찍거리며 허겁지겁 도망쳤다. 묘두사가 영의정의 어깨에서 뛰어내려 날쌔게 둔갑쥐를 쫓기 시작했다.

둔갑쥐가 빠져나간 영의정의 몸뚱이는 톱밥 가루가 되어 푸스스 흘러내렸다. 전에 내가 상시로 보았던 광경처럼.

톱밥 더미 위에 주인을 잃은 붉은 관복이 흘러내려 덮이고, 관모가 툭 떨어졌다.

비명이 잦아든 대전은 쥐 죽은 듯한 침묵에 잠겼다. 찍찍거리며 달아나는 둔갑쥐 인형과 애옹거리는 나비의 울음소리만이 가득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묘두사가 자랑스럽게 목각 쥐를 문 채 돌아왔다.

나는 바닥에 내려서서 허리를 굽히고 나비에게 팔을 뻗었다. 노란 털의 묘두사는 둔갑쥐를 문 채 얌전히 내 손을 타고 올랐다.

이연주한테 빌릴 때도 느꼈지만, 나비가 나한테 유난히 온순해졌다.

‘전에 그슨대 그림자 속에서 내가 자길 치료해 준 걸 기억하는 것 같네.’

나는 목각 쥐 인형을 야무지게 물고 손바닥 위에 똬리를 튼 묘두사를 들어 올리며 선언했다.

“이것이 증좌입니다.”

인간들 턱 빠지겠네. 왕은 눈이 빠지겠고.

사전에 얘기를 들었던 우의정마저 동공에 지진이 났다.

하긴, 이런 광경을 보는 건 흔치 않겠지.

날개옷 두른 세자빈이 묘두사를 꺼내 놓으니 영의정에게서 둔갑쥐가 튀어나오고 몸뚱이는 톱밥 가루가 되었다, 라.

인간들 사이에서 설화나 민담으로 전해질 만한 일이긴 하다.

‘제법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겠지? 사관이랑 궁인들도 보고 있으니, 소문 쫙 퍼지겠네.’

나는 말도 못 꺼내고 얼어붙어 있는 사람들을 한 바퀴 돌아본 후, 왕을 향해 물었다.

“전하, 이것으로 충분히 증명되었을까요?”

“어? 아, 아, 그래. 그렇구나. 맙소사, 세상에 이런……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왕이 얼빠진 낯으로 횡설수설했다. 평소라면 체통을 지키라 따져 댔을 대신들도 제정신이 아니라 뭐라 하질 못하고 있었다.

나는 슬쩍 우의정에게 눈길을 주었다. 놀라 굳어 있던 그가 내 눈짓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급히 목소리를 높였다.

“전하! 지금 당장 착요갑사에게 명을 내려 주시옵소서!”

“무, 뭐라? 갑자기 무슨 명령을?”

“영상 대감이 정말로 꼭두각시 인형이었음이 밝혀졌으니, 바로 수류견을 찾아 퇴치해야 하옵니다! 그 요괴가 도망치기 전에 전하께서 착요갑사에 명하여 잡으라 하시옵소서!”

“아.”

넋이 나가 있던 왕이 비로소 침착해졌다. 그는 급히 우의정에게 물었다.

“착요갑사는 준비되어 있느냐?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 만큼?”

“예, 전하께서 명만 내리시면 충성을 다할 것이옵니다.”

“그 수류견이란 것은 그럼 지금 어디에…….”

왕이 말끝을 흐리며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얼른 답해 주었다.

“요괴는 영상 대감의 집에 숨어 있을 거예요.”

“알겠다. 세자빈이 오늘 정말 큰일을 해 주었구나.”

고개를 주억거린 왕이 군관과 도승지에게 각각 명했다.

“곧바로 착요갑사에게 영상 대감의 집으로 가서 수류견을 잡아 오라는 여의 명을 전하거라! 생포가 불가능하면 그 자리에서 죽여도 좋다! 도승지는 즉시 의금부에 보낼 교서를 작성하도록 하라! 그슨대 습격 사건의 배후는 물론, 세자빈이 언급한 사건들에 대한 재조사가 필요하다!”

“예, 전하!”

군관이 허겁지겁 뛰쳐나가고, 도승지는 빠르게 붓을 놀렸다. 구석에서 사관이 도승지보다 빠르게 붓을 놀리고 있는 게 보였다.

‘착요갑사가 지금 출동하면 늦겠지. 둔갑쥐가 찍 소리를 냈을 때부터 수류견은 이미 도망치려 했을 테니까.’

어쩌면 내가 고발한 순간부터 도주 준비를 했을 수도 있고.

‘그래 봤자 못 도망치겠지만!’

석란이와 꽝철이가 영상 대감의 집 근처에서 대기 중이다. 수류견이 튀어나오면 막아서고 집에 도로 몰아넣으라고 해 놨다.

그렇다고 직접 잡지는 말고, 위협해서 붙들기만 하라고.

‘수류견이 착요갑사의 첫 토벌 업적이 되어 줘야 해.’

만들어지자마자 큰 성과를 올리면 소속된 괴력난신들의 사기도 올라가고 착요갑사의 위상도 높아질 거다.

‘성술관의 필요성도 더불어 올라갈 거고 말이지.’

세루화 복수도 하고, 두억시니 끄나풀도 처리하고, 착요갑사도 성공적으로 자리 잡고.

이게 바로 일석삼조 아니겠는가.

‘아, 일석사조네. 내 폐위 소리도 이제 안 나올 테니까.’

명령을 끝마친 왕이 대전을 슥 훑어보더니 상소 두루마리 중 하나를 들어 보였다.

“세자빈이 무당이 되었으니 나라를 망하게 할 거라고?”

“…….”

“경들은 허구한 날 마주 보는 영상 대감이 사람인지 톱밥 인형인지도 몰랐으면서, 세자빈이 나라를 망하게 할지 복을 가져올지는 잘도 아는가 보오.”

“…….”

“경들이 눈앞에 있는 요괴도 못 알아보고 세자빈을 폐하라는 상소나 써 재끼는 동안, 정작 우리 세자빈은 궐에 숨어든 요괴를 찾아내었는데 말이오.”

“…….”

“이러고도 조정에서 우리 세자빈에 대해 왈가왈부한다는 이야기가 퍼지면 민심이 어떨지 참으로 기대가 되는구려. 백성들이 나라 꼴 잘도 돌아간다고 하겠소, 쯧.”

“…….”

대신들은 합죽이마냥 입을 다물었다. 왕이 보란 듯이 혀를 차 대고는 상소 두루마리를 홱 내던졌다.

“여봐라, 저 쓰레기들 치우거라!”

“예!”

내관들이 우르르 달려가 상소 더미를 들어 날랐다. 왕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앞으로 이런 미신에 휘둘려 아까운 종이 낭비하며 헛짓거리를 할 시간이 있으면, 글이라도 한 줄 더 읽고 나랏일이나 더 고민하시오. 알겠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대신들이 줄줄이 허리를 굽혔다. 나는 폴짝폴짝 뛰고 싶은 것을 참고 담담한 척 서서 속으로만 해죽거렸다.

‘좋아, 일석사조다!’

물론 착요갑사가 수류견까지 깔끔하게 잡아야 완전히 성공이지만, 뭐, 천 년 묵은 매구랑 용신의 아들이 몰래 도와주는데 수류견 하나를 못 잡겠어?

아무리 운국 괴력난신들이 대가 많이 끊겨서 약해졌다지만 말이야.

‘밥상 다 차려 놨으니 잘 떠먹기만 해 줘라, 인간들아.’

* * *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착요갑사는 차려진 밥상을 잘 받아먹긴 했다. 먹다가 좀 흘려서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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