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전하께서요?”
“예.”
기쁜 듯 고개를 끄덕이는 세자의 손에 들린 흑각궁이 보였다. 예전에 저 활에 대해 얘기했던 게 떠올랐다.
“그러다 여덟 살 생일에 이제 진짜 활을 가져 보라 하시며 이 흑각궁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열 살이 넘으면 이것으로 사냥도 함께 다니자 하셨는데…….”
그때는 쟤가 다 포기한 듯한 얼굴로 저 활을 봤는데, 이제는 세자로서 정식 군복을 입고 저걸 들고 있네.
뿌듯한 기분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주상 전하께서 함께 사냥 가자는 약속을 지키셨네요.”
내 말에 세자가 자기 활을 내려다보더니, 다시 내게 시선을 주었다.
“예, 부인께서 말씀하신 대로 되었습니다.”
뺨까지 붉어진 걸 보니 엄청 기쁜 모양이다. 행복해 보이는 꼬맹이를 보니 나도 행복해진다.
따라 웃고 있자니 세자가 가슴을 쭉 폈다.
“제가 털이 고운 것을 잡아 오겠습니다. 겨울이 다가오니, 부인께서 쓰실 모피를 마련해야지요.”
“전 괜찮으니까 무리하지 마세요, 저하.”
고개를 내젓자 소년이 살짝 풀이 죽었다.
“……별로 기대하지 않으시는 모양입니다. 혹 모피 같은 것은 싫어하십니까?”
“아뇨, 싫은 게 아니라, 저하께서 다치실까 봐 걱정하는 거죠.”
“군에서 준비한 공식적인 수렵 행사입니다. 부인께서 걱정하실 일은 없습니다. 즐거이 기대만 하셔도 됩니다.”
“그래도 저하께는 첫 사냥이잖아요. 아직 어리시고.”
저 어린애가 산속에서 말 타고 사냥을 한다니 솔직히 안심이 안 된다.
쟤는 어둑서니라 보통 꼬맹이가 아닌 건 잘 알지만, 이게 군에서 주관하는 행사라 안전할 거라는 것도 알지만, 그래도…… 애가 만인사랑 싸우다가 죽을 뻔한 걸 한 번 보고 나니까 아무래도 걱정되어서.
“아무것도 못 잡으셔도 괜찮으니, 다치지 않고 무사히 돌아오시는 걸 우선해 주세요.”
“흐으음.”
가느스름해진 눈으로 나를 보던 세자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부인께서 저를 걱정하시는 걸 보니, 속이 상하고 미안합니다.”
“네? 그게 왜 미안해요?”
“제가 부인께 그간 걱정을 많이 끼쳤다는 뜻이니까요.”
“그건…….”
“이런 건 남편 된 도리에 어긋납니다. 앞으로는 부인께서 저를 걱정하시는 게 아니라 든든하게 여기시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선비처럼 단정하고 진중히 말한 세자가 문득 개구지게 씩 웃었다.
“그러니 지켜봐 주십시오, 부인. 이번 수렵에서 깜짝 놀라게 해 드리겠습니다!”
소년처럼, 아니, 소년답게 웃은 세자가 활을 들고 사슴처럼 날랜 걸음으로 막사를 뛰쳐나갔다.
‘……쟤가 저렇게 웃기도 하네.’
멍하니 애가 나간 문을 보고 있었더니 구석에서 입 다물고 있던 안시가 비죽거렸다.
“인간 어린애 주제에 공주마마를 놀라게 해 주겠다니, 건방지기 그지없사옵니다. 공주마마께옵서 보고 놀라시려면 꽝철이 정도는 사냥해 와야 할 텐데 말이옵니다.”
“야, 거기서 왜 내가 나오냐?”
안시 손목에 팔찌처럼 감겨 있던 꽝철이가 억울한 듯 따졌다. 안시는 말없이 꽝철이 주둥이를 꽉 쥐었다.
“꽤액!”
나는 꼬리를 파닥거리는 하찮은 용을 바라보며 작게 대꾸했다.
“……왜, 귀엽잖아.”
“예? 이딴 게 귀여우시옵니까? 공주마마, 어디 편찮으신 것 아니옵니까?”
안시가 화들짝 놀라 펄떡거리는 꽝철이를 들어 올려 보이며 물었다.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 걔 말고. 세자 말이야.”
“…….”
“쪼끄만 게 날 놀라게 해 주겠다고 자신만만한 모습이 귀엽지 않아? 뭘 사냥해 올지 좀 기대되네.”
“기껏해야 토끼나 잡아 오지 않겠사옵니까. 그게 딱 인간 어린애 수준이옵니다.”
“첫 사냥에서 토끼면 대단한 거지!”
“……요즘 공주마마께옵서 저 인간을 점점 더 친근히 여기시는 것 같사옵니다. 몸이 다 자랄 때까지만 여기 계시려던 것 아니었사옵니까? 너무 정 붙이시면 나중에 떠날 때 힘드실 것이옵니다.”
“으음, 뭐…… 안 떠날 수도 있지.”
계획대로 무사히 시한부 극복에 성공하면 떠날 필요가 없고, 그러면 세자 꼬맹이랑 계속 친하게 지내도 상관없잖아.
‘원래 다 크면 놀러 다니려고 했는데.’
조금 살아 보니까, 세자빈으로 있어도 인간 세상 체험하는 데에 별달리 문제가 없는 것 같다.
나중에 크면 세자랑 같이 놀러 다니지 뭐. 그게 혼자 노는 것보다 더 재미있을 거 같고.
내가 어깨를 으쓱이자, 안시의 눈이 동그래졌다.
“……안 되는데, 상제 폐하께서 공주마마랑 인간 어둑서니랑 너무 가까워지지 않게 하라 하셨는데…….”
안시가 창백해져서 무어라 입속으로 웅얼거렸다. 뭐라는 거야? 방금 엄마 얘길 한 것 같은데?
“안시야, 방금 뭐라고—.”
“세자빈, 안에 있습니까?”
밖에서 돌연 나를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비의 목소리였다.
“네, 있어요.”
내가 반사적으로 대답하자 곧 왕비가 상궁 하나와 함께 입구의 천을 걷으며 들어왔다.
왕비가 날 왜 찾아왔지?
당황스러웠지만 일단 안시를 시켜 차를 내오고 의자를 꺼내 자리를 마련했다.
맞은편에 앉은 왕비가 데려온 상궁을 밖으로 물리기에 나도 안시를 내보내고, 둘이서 마주 앉았다.
운국의 국모, 중전 심우연.
세자는 선인 같은 풍모와 또래보다 큰 체격을 왕에게서 물려받았지만, 깊은 물처럼 검은 눈과 단정한 자태는 왕비에게서 물려받았다.
이렇게 마주 앉아 보니 눈매와 코가 특히 세자와 닮은 것이 티가 난다. 세자처럼 고요하고 정갈한 분위기도 그렇고.
‘그러고 보니, 왕비랑 단둘이 만나는 건 처음 아닌가?’
이전에 만날 때는 항상 세자랑 같이 있었으니까. 문안 인사도 세자랑 같이 드렸고.
어색한 기분에 찻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왕비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갑자기 이리 방문해 놀랐겠지요.”
“아, 아니에요.”
“조금 전 주상께서 세자와 함께 수렵을 떠나셨습니다. 짧으면 닷새, 길게는 열흘쯤 지난 후에 돌아오시겠지요.”
왕비는 차를 한 모금 넘기고는 말을 이었다.
“돌아오실 때까지 딱히 할 일이 없구나, 하고 있다가, 생각해 보니 세자빈도 혼자 있겠다 싶어 찾아와 보았습니다.”
차분히 말을 잇다 말고 왕비가 장난스럽게 눈꼬리를 휘었다.
“사실 나는 늘 딸이 가지고 싶었거든요.”
“네?”
“세자빈의 모친께선 먼 곳에 계시지요. 그 빈자리를 내가 여기에서나마 대신하고 싶습니다.”
설등화가 공식적으로는 사망했다는 걸 아직 모르는 왕비는 다정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대견하고 사랑스럽다는 표정.
나는 내심 긴장해 굳어 있던 어깨를 늘어뜨렸다.
‘아, 진짜 그냥 날 예뻐하고 싶어서 찾아온 거구나.’
세자의 어머니가 나를 딸처럼 예뻐하고 싶으시다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지. 이 사람과는 나도 친해지고 싶고.
나는 방긋 웃으며 귀엽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감사해요, 중전마마.”
“감사는요, 시모도 어미니 당연한 일이지요. 그럼, 흐음, 큼.”
왕비가 헛기침을 하고 슬그머니 주위를 둘러보더니 내게 속삭였다.
“세자빈, 부탁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네, 말씀하세요.”
“……세자빈의 머리를 땋아 보게 해 주세요.”
“네?”
“세자빈, 내가 딸을 낳으면 아기자기하게 해 보고 싶은 게 정말 많았답니다. 그런데 어째 갓난쟁이 때부터 점잔을 빼는 아들만 하나 덜렁 낳아서는…….”
한숨을 푹 내쉰 왕비가 간절히 나를 바라보았다.
“특히 딸아이 댕기 머리 직접 예쁘게 땋아 주는 게 내 꿈이었거든요. 한번 해 보면 안 될까요?”
정말 예상치 못한 부탁이긴 한데,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요. 잘 부탁드려요.”
“고마워요!”
왕비는 신이 나서 품에서 주머니를 꺼냈다.
거기서 자개 장식을 한 얼레빗에 앙증맞은 배씨댕기까지 줄줄이 튀어나오는 걸 보니, 아무래도 예전부터 벼르다가 기회를 틈타 온 것 같았다.
돌아앉아 머리를 내주고, 거울을 통해 보니 왕비의 뺨이 들떠서 빨개져 있었다.
‘은근히 귀여운 사람이네.’
그렇게 머리 땋기를 시작으로, 왕비는 매일같이 내게 놀러 오게 되었다.
수틀을 가져와 수놓는 법을 가르쳐 주더니 같이 수를 놓자고도 하고, 예쁜 장신구와 옷을 가져와 내게 입혀 보기도 하고, 직접 만든 간식거리를 가져다주기도 하고.
어느 날엔 실뜨기를 가져왔고, 다음 날엔 쌍륙 놀이판을 가져왔고, 나중에는 헝겊 인형과 소꿉 장난감들을 가져와서 소꿉놀이까지 했다.
소꿉놀이를 나보다 더 좋아하는 다 큰 어른 왕비를 보고 있자니 드는 생각이…….
‘……그동안 심심해서 어떻게 살았대?’
아무래도 왕비는 이런 아기자기한 놀이에 관심이 지대해 보였다. 가져오는 소꿉이나 인형, 놀이판 등의 수준이 평범하질 않았으니.
“이 소꿉들은 사실…… 예전에 주상께서 특별히 만들어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수줍게 웃으며 하는 말을 듣자 하니 왕도 왕비의 이런 취향을 아주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진짜 그릇이나 솥을 축소한 듯한 정교한 장난감들을 잔뜩 선물했으니까.
“중궁전에는 인형들이 사는 집도 있답니다. 내가 직접 만든 인형 옷도 있고요. 다음에 꼭 구경하러 오세요.”
“네!”
궐에 돌아가서도 놀러 오라는 왕비의 은근한 유혹에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재미있어. 그동안 정신없이 바빴는데 이제야 쉬는 기분이 들고.’
왕비랑 노는 게 꽤 즐거웠다. 엄마라기보다 상라궁 선녀들 같은 느낌에 가까웠지만.
우리 엄마는 바빠서 이런 놀이는 같이 못 해 주셨거든.
‘친해지고 나서 입학례 얘기를 슬쩍 꺼내 보려 했는데…… 그건 그냥 궐에 돌아가서 생각하자. 여기선 좀 쉬고.’
그렇게 결심하고 맘 편히 놀다 보니 사냥터에서의 시간이 금방 흘러서, 금세 왕과 세자가 돌아올 때가 되었다.
“전령 말로는, 오늘 오후쯤 도착하신다고 합니다.”
오늘 왕비가 가져온 건 옥을 깎아 만든 공깃돌이었다.
그녀는 나랑 놀아 준다는 핑계로 열정적으로 공기놀이를 하고는 숨을 돌리며 차를 마셨다.
“세자빈, 같이 점심을 먹고 산책할 겸 나가서 맞이하는 게 어떤가요?”
“네, 좋아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왕비가 기쁜 표정을 지었다.
“세자빈은 정말…… 하늘이 내린 복입니다. 주상을 낫게 하고, 나를 깨우고, 세자를 도와준 것만 해도 기적 같은데, 이리 사랑스럽기까지 하시어…… 우웁.”
왕비는 행복하게 말을 잇다 말고 갑자기 헛구역질을 했다.
“욱, 우웁.”
“중전마마?”
그녀가 입을 틀어막은 손가락 사이로 새빨간 것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피?
나는 등줄기가 서늘해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중전마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