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걱정? 날 걱정한다고?”
죽으라고 보내 놓고 이제 와서? 9살짜리를 혼례 시키는 건 하나도 걱정이 안 되었나 봐? 웃기고 앉았네.
라는 뒷말은 간신히 삼켰다.
그래도 이미 튀어 나간 반문에서 어이없는 심정이 고스란히 느껴졌을 텐데, 사신으로 온 인간은 별반 놀라지 않았다.
“오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황녀 전하께서 이 나라에 보내지신 건 선황의 뜻입니다. 지금의 황상께선 생각이 다르십니다. 처음부터 이 혼례를 크게 반대하셨으니까요. 선황께서 완강하셔서 어쩔 수 없으셨을 뿐입니다. 드러내지 않으셨을 뿐, 정말로 안타까워하셨습니다.”
말이 아주 청산유수다. 따지고 들기 힘든 이유를 대는 걸 보니 미리 다 준비하고 온 것 같고.
‘다 죽은 선황 탓이고, 지금 황제는 처음부터 반대했으니까 관계없다는 얘길 하고 싶은 모양인데.’
영 못마땅하다.
황제의 권력은 고스란히 물려받고 싶은데 황제가 만든 원한은 물려받기 싫어? 거참 단물만 빼먹고 싶다는 소리를 거창하게도 하네.
높은 자리에 올랐으면 그만큼 책임감도 있어야 할 것 아니야.
‘진짜로 원한을 무마하고 싶다면 억울하건 말건 사과하고 보상하겠다는 태도부터 보여야지.’
모름지기 권력자라면 자기 잘못이 아니라 해도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 책임지고 해결하라고 권력을 쥐여 준 거니까. 그게 위에 올라선 자의 본분이다.
우의정과 마주했던 세자처럼 말이다.
“의도가 아니었다 해도, 나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났지. 그 책임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지 않네.”
비교를 안 할 수가 없다.
내 표정이 저절로 구겨졌는지, 두꺼비 같은 남자가 짐짓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황상께서 태자 시절에 황녀 전하를 많이 아끼셨는데, 어린 나이셔서 기억을 못 하시는 모양입니다.”
“그러게, 하나도 기억이 안 나네.”
전에 석죽이 얘기 들었을 때도 생각한 거지만, 업경으로 본 세루화의 짧은 인생에서 평의 태자에 관한 기억이란 제사 때 축문 읽다 쓰러지는 모습 본 것밖에 없다.
‘그것도 구석에서 일방적으로 보기만 한 거고, 서로 대화는커녕 눈도 마주친 적이 없던데.’
황후가 낳은 적장자인 태자와 볼모나 다름없는 소수민족 후궁이 낳은 천덕꾸러기 11황녀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다.
그런데 뭐? 많이 아껴?
‘세루화는 황궁에서 밥도 잘 못 얻어먹고 컸는데!’
듣다 보니 성질이 나려 한다.
나는 평의 사신을 똑바로 응시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내가 정말 하나도 기억이 안 나서 그런데, 태자 저하, 아니, 지금의 황제 폐하께서 어떻게 나를 아끼셨던 거야? 구체적으로 좀 알려주겠어?”
“그…….”
사신이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내가 이렇게 대놓고 따지고 들 줄은 예상 못 한 모양이다.
평에서 아는 ‘세루화’란 제대로 교육받은 적 없고 말도 더듬는 어린애니까 적당히 구슬리면 넘어갈 수 있을 줄 알았나 보지.
내가 가늘어진 눈으로 노려보자, 사신은 손수건으로 땀을 닦더니 웃는 얼굴을 만들어 보였다.
“……깊은 궁궐에서 두 분이 나누신 우애를 일개 신하인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분명한 것은 황제 폐하께서 전하를 정말로 아끼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사신이 재빨리 제 뒤의 종사관들에게 명했다.
“여봐라! 황녀 전하께 어서 선물을 바치거라!”
“예이.”
안시와 김 상궁이 도끼눈을 뜨고 주시하는 가운데, 내 앞에 온갖 금은보화가 펼쳐졌다.
두꺼비를 닮은 인간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 선물들을 보십시오. 운의 임금께 올린 것보다 귀하고 좋은 것입니다. 폐하께서 머나먼 이국에 계신 여동생을 그리워하며 친히 챙기신 선물입니다.”
상라궁 보물고 장식장 하나만 털어도 저것보다 대단한 것들이 더 많이 나온다.
그래도 옆에서 김 상궁 눈이 휘둥그레진 걸 보니 인간 기준에선 꽤 호화로운 선물들이긴 한 모양이지.
나는 별 감흥 없이 번쩍거리는 것들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뭘 노리고 이렇게 밑밥을 까는 거지?’
평 제국이 ‘세루화’를 처리하려 했던 건 그들이 설족을 잔인하게 정벌했기 때문이었다.
황녀가 자라서 제 배경을 이해하게 되면 원한을 가질 수밖에 없겠다 싶을 만큼.
‘세루화가 설족 혼혈인 것도 마음에 안 들었을 거고. 특수능력이 발현할까 봐 찝찝할 테니.’
그런데 이게 황제가 바뀌었다고 해서 손바닥 뒤집듯 바뀔 만한 상황은 아니잖아.
‘세루화의 출신은 변하지 않는 사실인데……. 제국에서 설족 정복한 걸 사죄하고 배상해주면서 아예 설족 인식을 달리하겠다면 모를까.’
설족 생존자들을 구하러 다니고 있는 설등화, 석죽과 종종 연락을 주고받은 덕에 잘 알고 있다.
제국에서 설족의 대우가 달라질 기미 같은 건 전혀 없다.
그러니 평은 여전히 세루화를 죽여 치워버리고 싶을 텐데.
‘대체 뭔 수작이지? 혹시 두억시니랑 관련이 있나? 일단 사신단에 인간으로 위장한 요괴 같은 건 없긴 하지만…….’
무슨 의도로 이러는지 우선 들어나 보자.
나는 휘황찬란하게 쌓인 선물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일부러 좀 누그러진 듯한 목소리를 냈다.
“……옛날엔 어땠는지 몰라도 지금 폐하께서 날 생각해주신다는 건 확실한 것 같네.”
“그렇습니다!”
슬쩍 던진 미끼를 사신이 바로 받아 물었다.
“황제 폐하께선 진심으로 황녀 전하를 아끼고 사랑하십니다. 제위에 오르시고 정비를 끝내자마자 이리 사신부터 보내실 정도로 말입니다.”
“으음…….”
“그래서…… 설 귀인의 장례도 성대하게 치르실 예정입니다.”
두꺼비가 짐짓 안타까운 표정으로 덧붙였다.
“이미 들으셨지요? 황녀 전하의 모친께서 선황과 함께 돌아가셨다는 것을.”
“…….”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평의 사신단이 운룡궁에 도착한 건 11월 17일, 사흘 전의 일이다.
이들은 절차에 따라 휴식을 취하고 왕을 알현한 뒤 마지막으로 나를 만나보러 온 거고.
설등화의 가짜 사망 소식은 왕을 통해 내게 이미 전해졌다.
‘그 소식 때문에 요즘 계속 주변 사람들이 내 눈치를 보며 조심하고 있지.’
다들 난데없이 엄마를 잃은 내가 굉장히 슬퍼할 거라 여기고 있으니까.
‘……사실이 아닌데, 미안하게 말이야.’
이 와중에 멀쩡하게 나다니면 이상할 것 같아서 나는 되도록 방에 틀어박혀 있는 중이다.
‘설등화는 심장마비에 걸린 황제를 보고 자진한 것으로 하기로 했었는데.’
실제로는 설등화가 황제를 독살하고 죽은 척한 거지만, 일부러 사고로 보이도록 처리했다.
설등화가 황제를 암살한 죄인이 되어 버리면 ‘세루화’의 입지가 위험해지니까.
‘사고사든 뭐든 황제가 죽었는데 옆에서 못 막은 죄인이니 설등화의 장례 같은 건 제대로 안 치러 줄 거라 짐작했고, 실제로도 그냥 시체를 들에 내다 버렸다 했었잖아.’
그런데 뒤늦게 장례를 성대하게 치르겠다고? 설등화가 도망쳐서 시체도 안 남아 있을 건데?
의구심을 감추며 우울한 표정을 짓자, 평의 사신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황상께서는 설 귀인의 장례에 황녀 전하께서 직접 참석하길 원하십니다.”
“……!”
“폐하께서는 전하를 무척 걱정하고 그리워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전하께서 평에 돌아오셔서 상을 치르시고, 잘 지내고 계신다는 것을 돌아가신 모친과 오라비이신 황상께 보여주십시오.”
나는 입매가 비뚜름해지는 것을 참기 위해 애썼다.
아하, 이게 목적이었구나.
날 평 황궁에 불러들이는 거.
이 제안을 위해 태자가 날 아꼈네 어쩌네 하는 헛소리를 해댄 거였네.
‘그냥 장례에 참석하라고 하면 내가 당연히 거절할 테니까.’
죽으라고 보내진 걸 뻔히 아는데, 안 죽고 살아남았더니 다시 돌아오란다.
이러면 아무리 어린애라도 순순히 돌아갈 리가 없지.
그렇다고 일국의 세자빈이 된 황녀를 억지로 끌고 갈 수도 없고.
자기들도 그걸 아니까 현 황제는 선황과는 다르고 어쩌고 하며 선물까지 바리바리 싸 들고 온 거였다.
내가 길게 침묵하자 김 상궁이 안절부절못하며 나를 살폈다. 두꺼비도 슬금슬금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안시만이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저 병아리 조는 것 같은데.’
하긴, 이런 인간들 얘기는 봉황에겐 하나도 재미없을 테니. 쟤는 두억시니와 평의 관계나, 내가 두억시니를 무찔러서 격을 높일 목적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고.
나는 안시에게서 시선을 떼고 두꺼비를 다시 바라보았다.
“황제 폐하께서 나를 아끼신다고 했지?”
“예, 그러니…….”
“그러면 어머니의 시신을 여기로 보내달라고 전해 드려.”
“예?”
“나를 그렇게 아끼신다면, 내 어머니의 장례는 내가 직접 치를 수 있게 해 주셔야지.”
“그, 그런…… 황상께서 더 성대하게, 정식으로 치러 주실…….”
“소중한 여동생이 오라버니께 처음으로 드리는 부탁이야. 다른 것도 아니고 내 어머니의 장례에 관한 부탁. 폐하께서 정말 내가 소중하다면, 이 정도 부탁쯤은 들어주시겠지?”
“허나…….”
“이런 부탁도 들어주시지 않는다면, 나는 폐하께서 날 아끼신다는 말을 못 믿을 것 같아. 나는 정말 오라버니와 함께 보낸 시간이 하나도 기억 안 나거든.”
“…….”
두꺼비가 사색이 되어 입을 다물었다. 나는 덤덤히 계속 말했다.
“내가 무사히 잘 지내는 건 경이 이미 봤잖아? 본대로 전해 드리도록 해. 아, 폐하께 편지도 쓸 테니 가져다드리고.”
“편지라니요, 전하, 폐하께서는 전하를 직접 보고 싶으셔서…….”
“보고 싶은 인간이 와야지, 누굴 오라 가라 해? 난 하나도 안 보고 싶은데.”
“……예?”
아차, 짜증 나서 그냥 대놓고 말해버렸네.
시침 떼고 말을 이었다.
“그렇게 보고 싶으시다니까, 편지에 내 초상화도 첨부해서 보내드릴게. 됐지?”
“…….”
이번에는 저 인간, 기가 막혀서 말문이 막힌 것 같다.
뭐, 어쩌려고? 내가 어쨌건 세자빈이기 이전에 평의 황녀였는데, 시집간 황녀가 좀 건방지다고 전쟁이라도 일으킬 거야?
‘기껏해야 암살 시도나 하겠지. 그리고 그건 내가 설족 혼혈인 이상 가만히 있어도 들어올 암살이고.’
그러고 보니 지금 이거, 황실에 원한 있는 황족이 동맹국 세자빈이 되더니 입지까지 탄탄히 다지고 있는 상황이네.
게다가 내가 무당이 되어 운국 괴력난신들 돕고 있는 것도 사신들이 왔으니 알게 될 거잖아? 설족 특수능력 발현된 것 아닐까 불안해지겠네?
‘와, 진짜 죽이고 싶겠다. 그래서 불러들이려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