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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화 (118/136)

116화

어디서 기운이 조금 비슷한 잡신을 몸에 담고는 그걸 처용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는 모양이다. 아니면 자기 신이 처용이 아닌 걸 알면서도 모른 척 사기 치고 있다거나.

저걸 어쩔까 고민하면서 지켜보고 있으려니, 사이비 무당은 굿판 한가운데까지 나아가며 우렁차게 외쳤다.

“무당이란 무엇인가! 신을 모신 몸으로 신을 위한 춤을 추는 자가 아닌가! 그런데 어찌 무무 하나 추지 못하는 자를 믿고 굿을 맡기는가! 어리석도다, 어리석어!”

춤을 추듯 걷는 무당의 몸 주위에 푸른 기운이 신비롭게 맴돌았다.

그 광경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백탐솔이 너울을 쓴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금줄로 묶인 집주인의 아들이 무당을 향해 애타게 외쳤다.

“신어머니! 도와주십시오!”

“오냐, 신아들아! 내가 너를 저 가짜 무당으로부터 구하러 왔으니 걱정 말아라!”

무당이 부채를 흔들며 솟대로 다가오자 아들을 억누르고 있던 하인들이 바짝 긴장했다. 집주인이 기겁하여 백탐솔을 불렀다.

“제허신녀님! 저, 저 허주 무당을 쫓아내 주십시오! 제 아들을 구해 주기로 하셨잖습니까!”

“어리석구나! 누가 진정 허주 들린 무당인지 아직도 모르겠느냐!”

남색 옷의 무당이 그를 향해 커다랗게 호통을 쳤다. 집주인이 찔끔 놀라 움츠러들자 무당은 접은 부채를 손으로 탁탁 치며 당당하게 말했다.

“십수 번 절을 해야 신이 내려올까 말까 한 저 가짜와, 지금 이 순간에도 처용님과 함께하고 있는 이 몸을 보면서 느끼는 바가 없느냐?”

“하, 하지만…… 당신이 내 아들에게 내림굿으로 붙여 준 신이란 것이 내 딸과 집안 일꾼들을 다치게 했소! 사람을 해하는 그것이 바로 허주 아니오!”

“신께서 노하시도록 행동해 놓고, 어찌 신께 사죄하진 못할망정 노한 신을 허주라 몰아붙이느냐! 이러다 신께서 허주 취급에 더 노하시어 더 큰 벌을 내리면 어찌하려고!”

무당이 버럭 소리치자 집주인의 낯빛이 불안해졌다. 무당은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그놈의 허주, 허주! 신을 제대로 모시지도 못하는 것들이 하는 말에 휘둘리고 말이지! 어리석은 백성이 가짜에 속아 넘어가는 꼴을 내 참다 참다 못하여 이리 찾아왔다!”

무당이 성큼성큼 걸어 백탐솔 앞에 서더니 부채로 그녀를 겨누었다.

“허주굿이랍시고 무고한 무당들을 괴롭히더니 이젠 감히 내 신아들까지 노려? 통탄할 노릇이로다! 네가 정녕 참된 신을 모시는 무당이라면, 제대로 된 무무로 신이 함께하심을 증명해 보아라!”

백탐솔은 물끄러미 무당을 마주 보았다. 너울에 가려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덤덤하게 대꾸했다.

“지금은 무무를 출 수 없습니다.”

“역시 못 추는 거로구나!”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백탐솔은 돌아서서 굿상으로 다가가더니 다시 절을 하기 시작했다. 뭐라 떠들든 자기 할 일을 하겠다는 태도였다.

“허…….”

무당이 기가 찬 듯 탄식하고는 어깨를 으쓱이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다들 이 꼴을 보고도 이 자를 제허신녀입네 하고 믿으시오?”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커졌다. 의심이 퍼지고 있었다.

무당이 부리는 파도 같은 기운에 날아갔던 하인들은 잔뜩 겁을 집어먹고 떨며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집주인마저 안색이 변하고 있었다.

“누구는 부채질 한 번에도 신이 함께하시는데, 누구는 상 차려 놓고 수십 번 절을 해야 신이 내릴까 말까 하는구나!”

“오늘은 아예 그마저도 응답이 안 올 기세인데?”

남색 옷의 무당과 같이 있었던 인간들이 앞장서서 목청을 키웠다. 바람잡이들이 떠들어 대자 다른 이들도 한마디씩 보탰다.

“그러고 보니 제허신녀가 수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네. 얼굴도 안 드러내, 무무도 안 춰.”

“허주굿도 사람 가려 가며 해 준다며? 사실 자기가 이길 수 있을 만한 약한 신만 골라서 쫓아낸 거 아니야?”

아니지, 인간들아. 그건 진짜 신을 모신 사람과 허주에 들린 사람을 구별해서 받은 걸 텐데?

“굿에서 저렇게 절만 하는 무당은 본 적이 없소.”

“접신까지 시간도 너무 오래 걸리고…….”

“정말 가짜 아니야?”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백탐솔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양 절만 했다.

옆에서 세자가 난감한 듯 중얼거렸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갑니다.”

“그러게요…….”

“그냥 무무를 추시면 금방 해결될 듯한데, 빈객께서 혹 그러지 못하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네, 있어요.”

멍하니 대꾸하면서, 나는 백탐솔과 마지막에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온설공주에게 보내면서 불가사리 연고를 주었을 때.

“신아버지가 시켜서, 굿판에서 대신 무무를 춘 적이 있습니다. 얼굴을 들자 사람들이 욕을 하고, 아이들이 비명을 질렀지요.”

“신아버지는 이제야 네 주제를 알겠냐고 하셨습니다. 그제야 저는 제가 무무를 선보일 주제가 안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백탐솔이 사람들 앞에서 무무를 추지 않게 된 이유.

‘그 일은 확실히 큰 상처가 되었을 거야. 무무를 보이는 걸 꺼리는 게 이해가 돼.’

그래도 꾸준히 연고를 발랐다면, 흉은 이미 거의 사라졌을 텐데.

흉이 사라졌는데도 아직 남들 앞에 맨얼굴로 나서는 건 두려운 걸까.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래서 너울을 쓰고 있는 거라면…… 너울을 쓴 채로 춤을 추어도 될 텐데.’

아니면, 설마…….

“제가, 무무를 출 용기가 생기면…… 반드시 저하께 가장 먼저 보여 드리겠습니다.”

……나한테 처음 보여 주겠다는 그 말을 지키려고 저렇게 버티는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근데 스승님 성격을 생각해 보면…… 그 설마가 맞을지도.’

백탐솔은 대체로 무미건조하고 담담했다. 말투도 단조롭고 표정 변화도 적다.

춤과 관련된 이야기를 할 때만 유일하게 생기가 돌았고, 흉에 관련된 일 외에는 잘 동요하지도 않아서, 처음엔 그냥 만사에 별로 관심이 없고 둔감한 성격인 줄 알았다. 

‘하지만 수업을 듣다 보면 내가 지나가듯 한 질문도 다 기억했다가 하나하나 대답해 줄 정도로 꼼꼼했지. 늘 섬세하게 내 반응을 살피고…….’

그렇게 몇 달을 함께 재방에서 지내며 깨달았다.

백탐솔은 예민하고 섬세한, 예술가적 기질이 강한 인간이다. 지나치게 예민해서 쉽게 피로해지기 때문에 오히려 둔감해 보이는 것일 뿐.

‘예를 들면…… 냄새를 예민하게 잘 맡을수록 미세한 냄새도 강하게 느끼고 쉽게 코가 마비되어서, 냄새를 못 맡는 사람처럼 보이게 되는 거지.’

백탐솔은 스스로가 너무 예민하기에 의도적으로 세상과 거리를 두고 살고 있다. 불행한 과거도 남의 일처럼 자기 자신과 분리해서 보고 있으니 덤덤하게 말할 수 있었던 거고.

그리고 아마도 백탐솔이 그런 자신의 예민함을 발산하는 유일한 수단이 춤일 것이다.

‘춤 얘기할 때만 다르니까.’

억누르고 있던 것들을 승화하는 열정. 초롱 덮개 속에 숨겨 놓은 불꽃 같은 것.

그러니까 지금 백탐솔은 나한테 한 말을 기억하고 지키려는 동시에…… 그 핑계로 불꽃을 계속 초롱 속에 담아 놓고 싶은 것 아닐까?

그녀가 그저 내게 한 약속을 지키고 싶었을 뿐이라면 진작 연락했을 거다. 약속대로 내게 첫 무무를 보여 주겠다고 말이다.

저렇게 힘들여 허주굿을 하면서 내게 아무 연락도 없었다는 건…… 아직도 다른 사람에게 무무를 보일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다는 거지.

‘불이란 건 예민해서 조그만 바람에도 꺼져 버릴 수 있으니까, 덮개 밖으로 꺼내기가 무서울지도 몰라.’

그 불을 함부로 꺼냈다가 꺼뜨리게 되는 것보다는 사람들이 야유하고 의심하는 것을 견디는 게 더 나아서.

‘그런 상황이면 아무래도…… 떠밀어주는 사람이 필요하겠지.’

엄마는 능력 있는 신하가 자신감이 부족해서 일을 피할 때면, 어떻게든 그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아넣는다고 하셨다.

억지로라도 시작하게만 하면 의외로 별것 아닌 것을 금방 깨닫고 잘 해낸다고.

백탐솔도 틀림없이 그럴 거다.

‘스승님의 무무가 처용 모시는 척 사기 치는 저 무당보다 못할 리가 없어.’

“……그런데도 왜 무무를 추지 않으세요?”

“추고 있습니다. 매일같이.”

남들에게 보이지 않을 뿐, 백탐솔은 늘 춤을 추고 있었으니까. 줄곧 불씨를 품고 있었으니까.

‘스승님에게는 계기가 필요해.’

백탐솔이 첫 무무를 보여 주기로 했던 내가 바로 그 계기가 되어야겠지.

어떻게 떠밀어주는 게 자연스럽고 효과적일까. 고민은 짧았다.

‘보통 무무는 부채와 방울을 들고 추는데, 지금 스승님은 방울만 들고 있지.’

춤을 출 생각이 없어서 일부러 부채를 안 가지고 나온 거겠지만…… 이 상황을 써먹을 수 있겠다.

바로 옆에 앉은 안시에게 심어를 보냈다.

[안시야.]

[네, 공주마마.]

[팔주령으로 보물고에서 부채 하나 꺼내서 나한테 줘. 눈에 안 띄게 조심해서.]

[상라궁 보물고에 부채가 한두 개가 아니잖사옵니까. 어떤 부채가 필요하시옵니까?]

[아무거나…… 아니, 아니다.]

그러고 보니, 지푸라기 신 계획의 신물들 중에도 부채가 있다. 공교롭게도 ‘불’과 비슷한 성질의 신력이 담기던 신물이.

문득 무언가 운명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혹시.

[지푸라기 신물들 중에 있던 부채. 그걸로 줘.]

[알겠사옵니다!]

안시가 치맛자락에 손을 숨기고 꼼지락꼼지락 움직이더니, 상 밑으로 내게 부채를 건네주었다.

붉은 부챗살에 흰 비단으로 만들어진 무늬 없는 접부채.

나는 그 부채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백탐솔을 불렀다.

“스승님!”

백탐솔은 반응이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웅성대고 있는 상황이라 내 목소리가 파묻혀 버린 모양이다.

“부인?”

옆에 있던 세자만 깜짝 놀라 나를 돌아보았다.

“잠시만요, 저하.”

세자에게 작게 속삭인 뒤 사람들을 헤치며 앞으로 나갔다.

[안시야, 바람으로 내 목소리 좀 퍼뜨려 줘.]

[네! 그런데 지금 어딜 가시는 것이옵니까?]

[저기 앞에, 백탐솔한테.]

걸음을 옮기면서 강신을 했다.

하늘에 있는 내 몸과 이어진 목숨줄을 통해 본체의 신력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중 불과 비슷한 기운을 손에 든 부채에 나누어 담았다. 요즈음 계속 연습하고 있었던 터라 신력은 쉽게 나뉘었다.

‘이게 완전히 분리되지 않고 금방 되돌아오는 게 문제지.’

나는 내 신력을 담은 부채를 높게 들어 올리고 다시금 백탐솔을 불렀다.

“스승님! 놓고 가신 부채를 제자가 가져왔어요! 이제 춤을 추실 수 있을 거예요!”

안시가 불러일으킨 바람 덕분에 내 목소리는 낭랑하게 사방에 울려 퍼졌다.

백탐솔이 내 쪽을 홱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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