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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화 (125/136)

123화

얘는 대체 언제 철이 들까? 나이를 어디로 먹었기에 애가 이러지?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고는 꽝철이에게 경고했다.

[사고 치지 마.]

[그, 그렇게 큰 사고는 안 쳤…….]

[치긴 쳤다는 거지? 꽝철아, 안시는 널 봐줘도 난 이제 너 안 봐줘. 한 번만 더 사고 쳤다간 바로 용신한테 제사 올릴 거야.]

[그것만은 안 됩니다! 저 진짜 죽는다고요! 이제 진짜로 얌전히 지낼 테니까—]

[말로만 하지 말고, 잘하자?]

[……네.]

꽝철이가 시무룩해져서 내 손목 위에 축 늘어졌다. 조그만 용이 울먹울먹한 눈망울로 풀이 죽은 모양새가 보기에는 제법 귀엽고 짠했지만…… 속에 든 게 술주정뱅이 사고뭉치다 보니 딱히 위로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대체 뭘 했길래 안시가 몽둥이까지 마련한 건지 나중에 물어봐야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시가 돌아왔다.

“처음 써 보는 방법이라 시간이 조금 걸렸사오나, 다 무사히 재웠사옵니다! 이제 들어가시면 되옵니다!”

“고생했어.”

꽝철이 팔찌를 돌려주고, 나는 담벼락과 정원수가 만들어 내는 그늘에서 빠져나와 중궁전에 당당히 걸어 들어갔다.

복도 곳곳에서 나인들이 여기저기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 대충 봐도 다친 이들은 안 보이는 게, 안시가 일을 잘한 듯했다.

왕비는 넓은 침전에서 홀로 잠들어 있었다. 별일 없이 푹 자고 있다는 안시의 보고와는 달리, 만인혈석을 손에 쥔 채로도 식은땀을 흘리면서.

‘야위었네.’

마지막 문안 인사 때 봤던 것보다 볼이 더 홀쭉해져 있었다. 그간 얼마나 고생이 많았는지 한눈에 티가 났다.

‘엄마도 이렇게 힘드셨겠지.’

엄마는 왕비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정도로 힘드셨을 거다.

그런데도 끝내 나를 포기하지 않고 낳아 주셨으니.

‘삼신할미는 내가 스스로 점지를 거부했다고, 태어나길 원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난 그런 거 전혀 기억 안 나.’

태어나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아예 해 보지 않았다고는 못 하겠다.

오히려 꽤 여러 번 했지. 너무 아플 때나, 내가 아픈 것 때문에 다들 힘들어할 때. 엄마 아빠한테 미안해질 때.

하지만 그래서 정말로 태어난 걸 후회하느냐고 한다면, 망설이지 않고 답할 수 있었다.

‘후회하지 않아. 태어났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는걸.’

되돌아보면 내가 살아온 210년의 삶에서 싫었던 기억보단 좋았던 기억이 훨씬 많다.

그러니까 아마 태어나기 전의 내가 점지를 거부한 건…… 살기 싫어서가 아니라, 엄마 아빠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부모님이 날 포기하지 않고 낳아 주신 게 고마워.’

심하게 힘들 때는 나쁜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결국 이게 내 진심이었다.

낳아 주셔서 고맙고, 태어난 게 기쁘고, 더 오래 살고 싶다.

‘너도 그렇지 않을까?’

나는 왕비의 배 속에 있을 아기에게 속으로 말을 걸었다.

‘가족들이 네가 생겼다는 걸 알았을 때 얼마나 좋아했는지 아니? 다들 너를 반가워했어. 너도 무사히 태어나서 가족들을 만나고 싶겠지?’

사실 왕비의 상태가 안 좋아지면서 태아를 포기하자는 논의가 계속 오가는 중이었다.

인간들로서는 대체 왜 임신한 왕비가 계속 몸이 상하는지 알 수 없었겠지만, 그들도 어쨌든 복중 태아가 원인이라는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으므로.

조정은 침묵했다. 왕은 동의했다. 왕비가 거부했다.

세자도 힘겹게 얻었던 왕비는 간신히 생긴 둘째를 절대 포기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왕은 태어나지 않은 자식보다 아픈 왕비가 더 중했다.

의견이 충돌한 부부는 깊은 대화 끝에 할 수 있는 한 버텨 보기로 했다.

‘만인혈석이랑 안시의 봉음이 없었다면 아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써 왔을 거야.’

다행히 왕비는 아직 버티고 있었다.

‘그래도 더는 안 돼.’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는 데다가 원래 몸도 튼튼한 편이 아니었고 2년이나 혼수상태였던 경험까지 있는 왕비다.

‘오늘 내가 실패하면 포기해야 해.’

그러니 아가야, 너도 힘내 주렴. 내가 최선을 다해 도울 테니까.

“안시야, 누구 안 오게 경계 잘 서 줘.”

“걱정 마시고, 무리하지나 마시옵소서.”

안시가 방문 앞에 기대섰다.

나는 까만 도자기 호리병을 왕비 머리맡에 내려놓고, 기연이 담긴 거울을 양손으로 들었다.

‘이 신물, 솔직히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내가 이해한 기연의 개념과 세자를 치료했을 때를 떠올려 보면, 시도해 볼 만한 방법들이 있다.

‘우선 강신을 하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무시무시하게 많은 신력을 가진 내 본체와 연결된 목숨줄로부터, 이 인간의 육신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신력을 빌려 온다.

‘이걸 팍팍 써서 본체의 신력을 줄일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바닷물을 숟가락으로 퍼내는 꼴이라 이 정도론 턱도 없다.

자그마한 신력은 하늘거리는 옥빛 날개옷이 되어 내 몸에 휘감겼다.

‘이제 천명안으로…….’

신력을 눈에 담고, 왕비의 배를 바라보았다.

‘전보다 제법 많이 자랐구나.’

태아는 커진 몸을 한껏 옹송그린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자기가 움직이면 엄마를 더 다치게 한다는 걸 알기라도 하는 듯이.

나는 손에 든 거울에 아기를 비추어 보았다.

‘가장 알맞은 행운을 이어 주는 게 기연. 그러면 기연의 신물은…… 비춘 사람에게 적합한 인연을 가르쳐 주지 않을까?’

이 경우에는 그게 아기가 미처 받지 못한 천지신명의 점지가 되겠지. 가장 필요한 거니까.

‘……반응이 없네?’

나는 초조하게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거울을 내려다보았다. 거울의 표면은 밤의 호수처럼 검고 어둡기만 했다.

‘그냥 비추는 것만으로는 안 되나? 그럼…….’

신력을 손에 모아 ‘기연’의 개념을 담았다. 신력이 맴돌며 그늘에 집어넣은 것처럼 어둑어둑해진 손을 왕비의 배 위에 조심스럽게 올렸다.

‘왕비가 자면서도 만인혈석을 쥐고 있으니까, 이 정도는 괜찮겠지.’

손끝에서 실오라기처럼 가늘게 신력을 뽑아내서 태아와 이었다. 인간의 몸에 파고든 신력이 왕비의 배에 미세한 상처를 냈지만, 만인혈석이 반짝거리며 즉시 치유했다.

‘그래도 다치게 하는 건 안 좋아. 서두르자.’

얼른 손을 뗐다. 의도한 대로, 내게만 보이는 거뭇한 신력이 태아의 배꼽과 내 손끝을 실처럼 잇고 있었다. 탯줄이 둘이 된 듯한 느낌이다.

나는 실이 이어진 손을 거울에 가져다 댔다.

‘제발 내 생각이 맞길…….’

그렇게 ‘기연’으로 거울과 태아를 연결하고 손을 떼 보았다.

태아와 연결된 신력은 수면에 던진 낚싯줄처럼 거울 속으로 잠겨 들었다. 그러자 까만 거울 표면에 물결이 동심원을 이루며 퍼져 나갔다.

반응이 있다!

환호성을 지르고 싶은 것을 참고 유심히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신력이 거울 속으로 길게 뻗어 나갔다. 곧이어 아무것도 없던 거울 안에 기묘한 것들이 비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밤하늘의 은하수 같았다. 한없는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모여 별처럼 반짝이고 흘렀다.

뻗어진 실이 그 속에 스며들었다. 둥근 거울에 은하수 안의 풍경이 비치자, 나는 그것들이 사실 별이 아니라 무언가의 형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가까이에서 보니까 저 어둠도 밤하늘이 아니야. 뭔가 달라.’

깨끗하고 맑은 밤의 어둠과는 확연히 다르다. 일렁이고 들끓는 늪, 혹은 자욱하게 고여 뒤엉키는 안개. 태초에 있었다는 혼돈이 이런 모습일까 싶은.

그 불안정하고 요동치는 덩어리 속에 다양한 빛을 내는 것들이 이리저리 떠다녔다. 두루뭉술한 느낌이라 구체적인 생김새는 알 수 없어도 대강 어떤 생물인지는 구별이 되었다.

사람 같기도 하고, 짐승 같기도 한 빛나는 형상들. 형태도 빛의 색도 크기도 모두 천차만별이었지만 딱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둥글게 웅크려 있다는 것. 배 속의 태아나, 알 속의 새끼들처럼.

‘이게 천지신명이 자아낸다는 운명들인가?’

정확한 건 운명들을 태어날 아기에게 점지해 주는 일을 맡은 삼신할미에게 물어봐야 알 수 있겠지만, 아마도 맞을 것 같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기연’의 실은 알아서 그 혼돈 속을 헤엄쳤다. 스스로 물고기를 찾는 낚싯줄처럼.

그러다가 작게 웅크린 어느 아기의 형상 앞에서 멈추더니, 배꼽 부분으로 쏙 들어갔다.

‘와.’

나는 왕비 배 속의 실제 아기와 거울 속에 있는 빛나는 아기의 형상을 번갈아 보았다. 기연을 담은 신력이 탯줄처럼 두 아기의 배꼽을 연결하고 있었다.

‘성공한 걸까? 된 거겠지?’

이제 저 ‘운명’이 아기에게 오기만 하면, 점지가 받아지는 거겠지?

기대에 찬 눈으로 기다렸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 일도 없었다.

연결은 되었는데 점지가 내려오질 않는다.

혹시 싶어서 조심스럽게 이어진 신력을 잡아당겨 보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신력이나 힘이 부족해서 생긴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왜?’

의아하게 바라보다가 퍼뜩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기연은 주어지는 기회일 뿐, 그걸 잡아채고 받아들여 살리는 건…… 당사자가 쌓아 온 일생과 의지였지.’

따라서 기연이 기회를 줄 수는 있어도, 그걸 받아들이는 건 다른 문제였다. 문제가 기연이나 점지 쪽이 아니라, 아기한테 있을 수도 있다는 소리다.

‘설마.’

나는 멍하니 아기와 아기의 운명을 번갈아 보았다.

‘아기가…… 점지받기를 거부하고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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