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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화 (132/136)

130화

관장의 분위기에 압도된 아이들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몇몇이 마른침을 삼키는 것이 보였다.

성정심 관장은 무뚝뚝한 투로 말을 이었다.

“현재 성술관의 반들은 착요갑사의 실전 부대인 혈매대(血梅隊), 은란대(銀蘭隊), 절국대(節菊隊), 죽엽대(竹葉隊)와 마찬가지로 사군자에서 이름을 따왔습니다. 착요갑사의 각 부대가 어떤 업무에 특화되어 있는지 아는 사람?”

난데없이 날아든 질문에 아이들이 입을 꾹 닫고 슬금슬금 시선을 피했다.

나도 그냥 입을 다물었다. 착요갑사 창설에 관여했다 보니 정답은 당연히 알지만, 굳이 눈에 띄고 싶지 않아서.

‘안 그래도 이놈의 은발 때문에 세자빈인 게 바로 티 나는데, 입학하자마자 주목받고 싶진 않아.’

세자도 모를 리가 없는데 얌전히 있었다. 얘도 신분상 너무 나서는 건 안 좋다고 판단했나 보네.

침묵이 이어지자 관장이 서릿발 같은 시선으로 아이들을 훑었다.

“아무도 없습니까?”

그러자 한쪽에서 소심하게 손을 드는 아이가 있었다. 흔치 않게도 안경을 쓴, 열두세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었다. 관장이 소년에게 턱짓했다.

“말해 보세요.”

“주, 주주주죽엽대는 기동력과 돌파력이 우수한 부대로 전투의 선봉을 맡거나 도, 도주하는 적을 추격하는 임무를 맡습니다. 저, 절국대는 은밀하고 탐색에 가, 가, 강점이 있어 정찰이나 기습 임무를 주로 수행합니다. 은란대, 대는 바바방어와 지원에 특화된 부대로 민간인 보호와 호위를 주로 맡으며, 다른 부대의 임무를 보조하기도 하, 합니다…….”

더듬거리는 말투와 달리 내용은 청산유수였다. 평소에 관심이 많았던 건지 얼마든지 더 설명할 수 있을 듯한 기색이었다.

“……그, 그리고 혀, 혀, 혈매대는 착요갑사 최강의 전투 부대로, 가장 어려운 전투를 전담합니다. 가, 각 부대 명칭의 뜻과 부대별 특징은…….”

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 거기까지. 정확합니다. 훌륭하군요.”

“가가감사합니다아…….”

소년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로 고개를 푹 숙였다. 성정심 관장은 좌중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 성술관의 반은 착요갑사의 실전 부대와 이름만 비슷할 뿐, 해당 부대와 유사한 점도 없고 반별로 차이도 없습니다.”

“…….”

“하지만 이제부터는 이름만 비슷한 게 아니라, 후일 해당 부대에 투입 가능한 후보가 될 수 있도록 적성에 맞추어 반을 재편성하겠습니다.”

“……!”

“즉, 매화반은 혈매대 후보생, 난초반은 은란대 후보생, 국화반은 절국대 후보생, 청죽반은 죽엽대 후보생이 되는 것입니다. 자, 모두 옆 사람과 거리를 두고 바닥에 앉으십시오. 배소월 교관, 주성찬 교관, 준비하세요.”

나른한 인상의 여자와 성격 좋아 보이는 남자가 나타났다. 남자 쪽은 아는 얼굴이었다.

‘세자 검증 때 그 주술사다! 저 사람이 주술 교관이겠네.’

두 교관이 돌계단을 내려와 아이들을 줄 맞춰 앉히기 시작했다.

팔다리를 휘둘러도 옆 사람에게 닿지 않을 정도로 간격을 벌린 채 아이들이 모두 바닥에 앉자, 교관들이 마당의 양 끝에 나누어 섰다.

성정심 관장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지금부터 반 편성 시험을 시작하겠습니다. 이 시험에서 어떻게 대처하고 어떤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지에 따라 여러분의 반을 정할 겁니다. 아, 그리고 시험의 목표는 생존과 탈출입니다.”

“네? 생존이요?”

“예? 탈출? 어디서요?”

아이들이 화들짝 놀라 되묻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관장이 교관들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그들이 수인을 맺으며 무언가를 발동했다.

“으아악!”

“흐억!”

동시에 다양한 비명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나 역시 움찔 놀랐다.

조금 전까지 분명 성술관 전각이 올려다보이는 넓은 마당에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주변 풍경이 울창한 숲속으로 바뀌었으니까.

애들도 여럿 사라졌다. 100명이 넘던 아이들 중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건 겨우 10명 남짓이었다.

심지어 내 바로 앞에 앉아 있던 세자마저 사라졌다.

‘환각?’

문득 바람이 불었다. 나뭇잎이 서로 스치며 쏴아아 소리를 내었고, 짙은 숲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습한 공기가 호흡을 따라 들어온다. 바닥을 짚은 손아귀에 차갑고 촉촉한 흙의 감촉이 생생하다.

‘……환각이라기엔 너무 실감 나는데.’

이 정도 환각을 만들려면 신령급, 그것도 거의 신선에 준하는 큰 산의 산신령쯤은 되어야 한다.

‘환각이 아니고 진짜 숲인가? 미리 마당에 진을 깔아 두고 발동해서 애들을 순간 이동시켰나? 축지법으로?’

불현듯 짐승이 우는 소리 같은 것이 빽빽한 나무들 너머에서 들려왔다. 오싹 소름이 끼칠 만큼 불길한 울음이었다.

“엄마아…….”

“아니, 이렇게 다짜고짜 이상한 곳에 떨구는 법이 어디 있어!”

울먹이는 아이와 화내는 아이가 보였다. 다들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물론 나도 혼란스러웠다.

‘설마 진짜로 여기서 살아남아 탈출하는 게 반 편성 시험이라고? 이렇게 막무가내로? 애들이 심하게 다치거나 죽기라도 하면 어떻게 수습하려고?’

당황한 채로 우선 세자가 어디로 갔는지 찾으려는데, 손목에 감긴 꽝철이가 심어를 보냈다.

[어, 이거 인간치곤 머리를 잘 썼는데요?]

[응?]

[아까 그 세조대에 걸려 있던 술법 말입니다. 그거랑 여기 마당 주변에 깔아 둔 술법을 연동해서 실감 나는 환각을 만들었네요.]

[이게 환각이라고? 이 정도 환각을 만들려면 신령급은 되어야 할 것 같은데?]

[술법 대상에게 도구를 직접 착용하게 해서 환각에 걸리기 쉬운 상태로 만든 겁니다. 그 세조대를 착용한 상태에선 벗어나기 어려울걸요? 세조대를 풀면 환각인 게 금방 티가 나겠지만…….]

[……환각에 걸리기 쉽게 만든다고? 너는 이 세조대에 그런 기능이 있는 걸 나한테 말도 안 한 거야?]

[에이, 제가 있는데 이런 게 뭐가 위험합니까? 자세한 건 물어보지도 않으셨잖아요!]

[그건 네가 술타령을 해서…… 아니다, 그냥 말을 말자.]

딱밤을 때려 주려 손가락을 말아 쥐자 꽝철이가 기겁하며 말했다.

[히익! 고, 공주마마께는 진짜로 안 위험하니까 말 안 한 거라고요! 어, 그, 눈 말고 기로 한번 살펴보세요! 이제 천명안으로 기의 흐름을 볼 수 있으시다면서요! 그럼 제 말이 맞을 겁니다!]

[틀렸으면 넌 딱밤 두 대야.]

[……주인이나 신수나 똑같…….]

[뭐라고?]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꽝철이의 입을 다물게 해 놓고 일단 강신을 했다. 날개옷은 만들지 않고 조용히 신력을 눈에 끌어모은 뒤 천명안을 떠 보았다.

‘……!’

진짜 환각이잖아? 굉장한데?

[거봐요, 제 말이 맞죠? 천명공주마마께는 이런 거 아무것도 아니라니까요! 헤헤, 칭찬은 안 해 주셔도 되니 포상은 술로…… 악!]

칭찬해 줄 마음도 안 들게 깐족거리는 꽝철이를 한 대 쥐어박은 후 기의 흐름을 집중해서 살펴보았다.

내 귀와 코와 눈은 계속해서 주변을 숲속이라 하고 있었지만, 신력이 깃든 천명안에 보이는 풍경은 완전히 달랐다.

‘환각 너머로 진짜 풍경이 보이네.’

우리가 있는 곳은 아까 마당 그대로였다. 꽝철이 말대로 세조대의 구슬과 마당 곳곳에 숨겨져 있는 무수히 많은 주술 도구들이 공명하며 환각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렇게 보니까 뭐랄까…… 흐르는 물속에 있는 것 같아.’

짙은 기가 주변을 물처럼 가득 뒤덮고 있는 와중에, 사람은 각자 다른 색깔의 물감으로 칠한 그림자처럼 보였다.

곳곳에서 굽이치고 소용돌이치는 물길은 이 환각을 구성하는 기의 흐름이고, 사람 그림자에서 번져 나오는 물감은 그 사람이 쓰는 기운이다.

마구 휘저어지는 물처럼 어지러운 흐름 속에서 아이들은 제자리에 주저앉은 채로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었다.

‘몸은 그대로 있고, 정신만 환각에 빠져 있는 건가?’

개중에는 간혹 환각에 대고 공격을 하려는 건지 물감이 짙어지는, 그러니까 기를 끌어올리는 애들도 있었는데, 세조대에 달린 구슬이 그 아이들이 쓴 기운을 흡수해 주변에 여파가 미치지 않도록 처리하는 듯했다.

‘고작 애들 반 편성 시험에 대체 얼마나 공을 들인 거야?’

어이가 없어서 관장 쪽을 돌아보았다가, 관장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

“…….”

비구름처럼 희끄무레한 잿빛으로 칠해진 관장의 형상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녀가 한쪽 눈썹을 치켜든 채 입술을 달싹거렸다.

‘입 모양이…… ‘보입니까?’ 같은데.’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관장의 다른 한쪽 눈썹마저 위로 치솟았다. 그녀가 미묘한 표정으로 내게 손짓했다.

‘앞으로 나오라는 건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걸어 나갔다. 맨눈으로는 나무 기둥을 그대로 들이받을 듯한 길이었지만, 천명안에는 아지랑이 같은 숲 너머로 마당이 보여서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야, 야, 어디 가?”

“어어…… 쟤 막 혼자서 숲속으로…….”

“잠깐만, 은발? 설마?”

내 근처에 있던 애들이 당황하며 나를 불러 댔지만 못 들은 척 그냥 걸음을 옮겼다. 이게 다 환각이라고 설명해 주는 건 시험을 방해하는 일이 될 것 같으니까.

관장 앞에 서자 그녀가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보더니 물었다.

“어떻게 알았습니까?”

“강신해서 신력을 눈에 담았어요. 그러면 기의 흐름이 보이거든요.”

“그냥 앉은 그 자리에서 강신을 했다고요? 제사도 제물도 없이, 무무도 추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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