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멘토링
‘멘토링.’
- 멘토링(S)을 시전합니다.
- 멘토와 멘티를 정해 주십시오.
‘멘토 차진산, 멘티 지용석.’
- 멘토 차진산이 멘티 지용석을 대상으로 멘토링(S)을 시작합니다.
- 주의, 멘토와 멘티의 친밀도가 최악입니다.
- 멘토링의 효과가 급감합니다.
- 멘토링의 스킬 등급이 S급입니다.
- S급 효과로 멘티는 멘토에게 있는 최소 하나 이상의 스킬을 배울 수 있습니다.
- 멘토링의 기간은 30일입니다.
- 정해진 기간 이전에 멘토링을 해제할 시 멘토링을 통해 얻은 효과가 모두 사라집니다.
차진산과 용석이 사이에 나만이 볼 수 있는 끈이 이어지는 것을 확인하고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그런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현서와 하영.
“용석이를 왜 차진산 교수한테 보내는지 궁금해?”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들.
“뭐, 생각해 보면 간단해. 용석이는 누가 봐도 탱커 포지션이고, 우리 아카데미에서 탱커를 가장 잘 이해하고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차진산 교수이기 때문이야. 지금 용석이에게 필요한 것은 몇 가지 잡스러운 기술들이 아닌 자신의 포지션에 대한 이해와 훈련이라고 생각했고, 마침 기회가 좋았을 뿐이야.”
“하지만, 차진산 교수님이 우리 막내를 제대로 가르칠까요? 아무리 맹세의 서약서를 썼다고 하지만 걱정이 돼요.”
가위바위보를 졌다는 이유로 생일은 제일 빠르지만 장비 포지션이 된 용석을 막내라고 부르는 찐막내 하영의 걱정은 누가 보면 친동생을 걱정하는 누나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래, 걱정되겠지. 하지만 나는 용석을 믿고 보낸 거야. 그리고 차 교수도 용석이에게 함부로 하지 못할걸? 아니 오히려 잘해 주려나? ‘뿌리 내린 다리’ 특성 때문에 느리긴 해도 이제 ‘몸치’ 특성이 없어진 용석이는 그 잠재력이 A급 탱커라는 차진산 교수보다 높다고 볼 수 있거든. 그러니 잘해 줘서 회유를 하든, 자기 윗선이랑 연결을 해 주려고 하든 더 성심성의껏 잘 가르칠 수도 있겠지.”
나의 예측에 감탄을 하는 현서.
“와, 역시 ‘EPL의 여우!’”
이 녀석이 내가 제일 싫어하는 별명을!
“그러니 용석이는 기말고사 전 반드시 성장해서 돌아올 거야. 그러니 너희는 너희들 성장을 걱정해야 할걸? 용석이가 돌아와서 서열 정리 다시 하자고 하면 안 밀릴 자신 있어?”
서열 정리라는 말에 하영이 살짝 긴장한 기색을 보였다.
“걱정 마. 너희에겐 차진산 교수보다 더 탁월한 내가 있으니까. 자! 훈련하자! 가볍게 모래주머니 100kg 차고 훈련장 50바퀴 도는 걸로 시작해 볼까?”
안쓰러워 보이던 용석이 갑자기 부러워지는 현서와 하영이었다.
* * *
현서와 하영에게 새로운 훈련 스케줄을 짜 준 뒤 교수 연구실로 돌아와 논문을 준비했다.
5월 말.
대한 스킬 연구 학회 춘계 포럼이 열리는데, 그 시기에 맞춰 발표하려면 자료를 만들고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빠듯한 시간이었다.
현서와 하영의 옆에서 일일이 훈련 스케줄을 체크해 주면서 도움을 주는 것도 좋겠지만, 현서가 워낙에 FM이라 조금 느슨한 하영도 잘 이끌어 주며 훈련을 할 것이라 믿고 나에게 새로운 힘이 되어줄 ‘시너지 스킬’ 논문에 집중하기로 했다.
한참을 이런저런 자료들을 정리하고 있는데, 누군가 교수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 똑똑.
“누구세요?”
문이 빼꼼 열리며 보인 얼굴은 김란주 교수였다.
“어? 어서 오세요. 교수님!”
“네, 교수님. 바쁘신데 찾아온 건 아닌가요?”
“아이고, 김란주 교수님이시라면 없는 시간도 내드려야죠. 일단 들어오셔서 여기 앉으시죠.”
김란주 교수를 소파 상석에 앉히고 커피 믹스를 한 봉 타서 내밀었다.
“제 방에 마실 것이 믹스 커피밖에 없어서……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네요.”
믹스 커피 잔을 받으며 상큼하게 웃었다.
내일모레 마흔 되실 분이 저런 상큼함이라니…….
김란주 교수가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은 이유가 있었다.
카리스마 넘치는 냉미녀의 면모와 순간순간 보여 주는 과즙미 넘치는 귀여운 상반된 매력이 있으…….
흠흠…… 너무 가 버렸다.
“대한민국 사람치고 믹스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저도 헌터로 생활할 때 입에 달고 살았어요.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딱 대접하는 사람 부담 안 될 정도까지 말도 참 이쁘게 하신다.
“그건 그렇고 어떻게 오셨어요?”
믹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은 김란주 교수는 조금 굳은 표정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은 교수님 논문 때문에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어요. 급히 알려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제 논문이 왜…….”
“사실은 한승태 교수가 비슷한 주제로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리가 들려서요.”
한승태가?
갑자기?
영문을 몰라 어안이 벙벙했다.
“그런데 이 소문이 돌기 시작한 시기가 우연이라고 치기엔 절묘해서요. 오늘 아침부터 한승태 교수가 자기 입으로 소문을 내고 다니더라고요.”
오늘 아침부터라면 어젯밤 사대천왕과 시너지 스킬 효과 검증을 하고 나서부터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 듯하다.
차진산이 정보를 준 것이겠지.
그리고 오산 길드가 함께 해 주면 승산이 있다고 보는 건가?
그나저나 아침부터 자기 입으로 소문내고 다녔다는데, 나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너무 아웃사이더를 자처해서 그런 것인지 이제는 귀를 좀 열고 살아야겠다.
“분명히 차진산 교수가 소스를 흘리고 한승태 교수가 오산 측 도움을 받아서 연구를 진행하려는 걸 거예요.”
김란주 교수도 나와 같은 생각인 것 같다.
한승태와 차진산은 김창식 라인이고 김창식은 오산 오너 일가이니 당연히 오산 길드까지 엮여서 ‘시너지 스킬’을 연구하겠지.
하지만 시기가…….
“그런데 시기가 너무 촉박하지 않나요? 춘계 포럼까지는 대략 한 달밖에 남지 않았는데, 아무리 오산이 도와준다고 해도 불가능할 것 같은데요?”
나의 의문에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김란주 교수.
“제 생각도 같아요.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그들이 준비하는 논문은 춘계가 아닌 추계 포럼에서 발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춘계 포럼에서 최 교수님이 논문을 발표하시면 소용없어질 연구를 왜 한다는 것인지…….”
말끝을 흐리지만 그녀 스스로도 어느 정도 결론을 내리고 온 표정이다.
“사실 억측일 수도 있지만, 당분간 최 교수님 여러모로 조심하셔야 할 것 같아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한 교수가 추계 포럼에서 그 논문을 발표하려면 춘계 포럼에서 최 교수님이 발표를 못 하실 상황을 만들어야 할 것 같거든요. 한 교수가 워낙 정치력이 좋고 승진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 안 가리는 사람이라서 걱정이 돼서 찾아왔어요.”
“그렇군요. 한 달 안에 제 연구를 가로챌 방법이 있든, 아니면 제가 논문을 발표하지 못하게 할 방법이 있든 둘 중 하나겠네요. 더군다나 형 동생 하며 잘 지내는 차진산 교수가 저에게 이를 갈고 있을 테니 결코 깨끗한 방법은 아닐 것 같고요.”
“그래요. 그래서 혹시 모르니 보안에 더 많이 신경 쓰시고 가능하시다면 아카데미 바깥으로 나가실 일이 있을 때는 경호업체를 이용하시는 것도 생각해 보세요. 차진산 교수가 각성하기 전에 어두운 쪽으로 일을 하던 사람이라는 소문이 있어요.”
진심이 듬뿍 담긴 걱정 어린 표정으로 나를 보며 이야기하는 김란주 교수의 말은 나에게 특별한 감동을 주었다.
세상에 몇 없는 나를 위해 주는 사람들이 보여 주는 표정을 오며 가며 몇 번 마주쳤을 뿐인 김란주 교수가 보여 주니 고마우면서도 묘한 기분이 들었다.
“고맙습니다. 제가 아카데미 내의 소문에 밝지 못해서 모르고 넘어갔으면 큰일 날 뻔했네요. 말씀처럼 주의하겠습니다.”
“사실 저도 사명감으로 교수를 하고 있긴 하지만, 전사학부장 라인 쪽 사람들이 보여 주는 모습들은 마음에 들지 않아요. 올해 갑자기 ‘지도 교수 선택제’를 시행한 것도 사실 최 교수님을 쫓아내려고 억지로 만들어 낸 거잖아요. 처음에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최 교수님의 숨겨진 면모를 보니 최 교수님처럼 유능하고 학생을 위하는 분을 왜 쫓아내려고 하는 건지도 이해가 안 가요. 아무튼 최 교수님. 혹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도와드릴게요.”
훅 치고 들어오는 김란주 교수.
교수진 내에도 내 편이 생긴 느낌, 아주 괜찮았다.
김란주 교수를 돌려보내고 한참을 소파에 앉아 있었다.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되고 나자 탁자에 놓인 식어 버린 조금 남은 커피 믹스를 원샷하고 일어났다.
한승태가 아무 생각 없이 떠들고 다녔을 리는 없다.
분명히 무슨 일을 꾸미는 거겠지.
어차피 아카데미 외부로 나갈 일은 없으니 내 연구실과 2학년 E반 훈련장 보안에만 신경을 쓰면 춘계 포럼 당일까지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춘계 포럼으로 향하는 순간이 가장 위험한 순간이 될 것이다.
김란주 교수의 도움을 받거나 경호업체의 도움을 받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다.
하지만 한승태와는 어차피 한배를 탈 수 없는 사이.
그 윗선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결국 오산 길드까지 적으로 상정하고 움직여야 하는데, 안전한 방법만 선택한다면 이리저리 몰아치는 공격을 방어만 거듭하다가 말라 죽게 되겠지.
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아주 작은 균열들부터 시작해 차곡차곡 누적시켜 놔야 한다.
그래야 일발역전 하다못해 백도어라도 노려볼 수 있을 테니.
그러기 위해서 이번엔,
‘내가 미끼가 된다.’
다소 무모한 작전을 세워야 하겠지만, 무모하면 무모할수록 오산이라는 벽에 더 깊은 균열을 새길 수 있을 것이다.
내 안에 녹슬었던 승부사의 감각이 다시 깨어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