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미래시(?)
길을 막던 사내의 표정이 밝아졌다.
“오! 하영아! 살아 있었구나. 그렇지 않아도 연락이 끊겨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길을 막아섰던 사내의 이름은 ‘권오석’.
하영이 어렸을 적부터 모녀를 살뜰히 챙겨 주었던 사람으로 하영도 삼촌이라 부르며 잘 따랐다고 한다.
우직한 상남자이자 전형적인 의리파였던 권오석은 하영의 어머니도 신경쓰지 않고 하영을 홀대하는 구찬성에게 바른말을 하다가 눈 밖에 났다.
그래서 지금은 이렇게 외딴곳의 던전이나 지키는 신세가 되었다.
“안녕하십니까? 미리내 아카데미의 최운 교수라고 합니다. 이쪽은 영국의 S급 헌터인 저메인 스피어와 율리아 세이렌입니다.”
소개에 맞춰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는 스피어와 세이렌.
그러자 권오석뿐만 아니라 던전을 지키는 인원 모두가 깜짝 놀랐다.
이런 산속 던전에 갑자기 세계적 스타 둘이 동시에 나타났으니 놀랄 만도 했다.
“아… 아. 네. 반갑습니다. 저는 현무 길드 소속 A급 헌터 권오석입니다.”
권오석은 당황한 가운데도 금세 신색을 회복하고 인사를 했다.
“그런데 이곳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보아하니 등산이 목적은 아닌 것 같은데요.”
S급 헌터 둘을 앞에 두고 권오석은 당당히 본인이 할 말을 했다.
이런 우직함이 뱀 같은 구찬성에게는 불편하게 느껴졌을 만도 했다.
“S급 헌터가 그것도 둘이나 손 놓고 있는다면 되겠습니까? 범세계적 문제에 한 손 보태고자 왔습니다.”
헌터로서의 사명을 다하겠다는 뉘앙스의 말에 반색을 하는 권오석.
“그렇군요. 역시 영국을 대표하는 헌터분들 답습니다.”
감탄하는 권오석 뒤쪽으로 시선을 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 던전은 누가 공략하기로 되어 있는 곳인가요?”
그러자 난감한 표정을 짓는 권오석.
“사실 이 던전은 B급 던전입니다. 제가 팀원들과 던전을 공략하려고 했지만 길드장님이 이 던전을 공략할 사람을 보낸다고 던전을 지키고 있으라고만 하셔서….”
이 던전으로 이득을 보려고 재고 있는 중인 것인가?
세이렌에게 눈짓을 하자 센스있는 세이렌이 짐짓 굳은 표정으로 심각하게 말했다.
“지금도 몇시간이 멀다하고 던전이 생겨나고 터져 나가는데 충분히 공략할 수 있는 전력이 있는데 방치하고 있다고요? 현무 길드장은 무슨 생각이죠? 설마 다른 의도가 있나요?”
세이렌의 말에 당황하여 손사래를 치는 권오석.
“아닙니다. 사실은 길드장님의 아들이자 A급 헌터인 구하진 팀장이 공략 1팀을 데리고 이곳으로 오고 있다고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때까지는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구하진이라는 이름이 언급되자 눈에 띄게 표정이 굳는 하영.
이능학부로 갔어야 할 하영이 전사학부로 온 것이 오빠에 대한 경쟁심 때문이었다고 했었지.
“현무 길드는 현 사태를 너무 쉽게 보고 있는 것 아닌가? 이번 사태로 전 세계적으로 죽은 사람만 무려 억대를 넘어가는데 한가하게 자기 아들 명성이나 올리자 이런 던전을 방치해?”
스피어가 타이밍 좋게 으르렁거렸다.
“오석 씨라고 했나요?”
땀을 뻘뻘 흘리는 권오석에게 세이렌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저는 소드 앤 매직 길드 동아시아 지부장 율리아 세이렌이예요. 제가 알기로는 대한민국에서 던전의 사유화는 법으로 금지되어 있는 걸로 아는데 맞나요?”
막 대답하려는 권오석의 대답도 듣지 않고 세이렌이 말을 이었다.
“저희 길드 동아시아 지부가 서울이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공부한 것이 대한민국 각성자 특별법이에요. 지난 10일 사이에 법이 바뀌지 않은 이상 제가 아는 것이 맞을 거예요.”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권오석.
“그러니 당신. 이 던전 공략할 것 아니면 비켜 주었으면 좋겠군요. 이것은 소드 앤 매직 길드 동아시아 지부장으로서 하는 말이에요. 혹시 이에 대해 문제를 삼으려거든 언제든 길드로 연락 주세요.”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던 권오석은 하영의 얼굴을 한번 흘낏 보더니 편안해진 표정으로 명령했다.
“지원 4팀. 방어 태세로 전환한다.”
권오석의 말에 하영과 4팀 팀원들의 표정이 당황으로 물든다.
“우리는 소드 앤 매직 길드가 던전을 공략하는 중 만에 하나 던전에서 밖으로 나오는 몬스터를 대비한다.”
결연한 표정의 권오석.
그 표정에서 그의 굳은 의지가 느껴졌다.
많이는 없겠지만 현무 길드에도 권오석 같은 자들이 몇몇은 있을 것이다.
하영에게 권오석과 관계를 유지하며 그런 자들을 포섭해 보라고 해야겠다.
그리고 세이렌은 그런 권오석에게 머리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양보해 주셔서 감사해요. 혹시나 이후에 이 일로 불이익을 당하신다면 연락 주세요. 소드 앤 매직 길드에선 그런 상황을 좌시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권오석은 그저 고개를 무겁게 끄덕이곤 길을 터주었다.
던전이라.
스피어와 세이렌은 지겹게 가 보았을 것이고 하영도 현무 길드에서 조기 교육 차원에서 몇 번 가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첫 던전이라 설레기도 하면서 막연한 두려움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각성자의 세계에 발을 들였으니 피할 수 없는 일.
앞으로 드림팀을 최고의 팀으로 키우기 위해서라도 익숙해져야 하는 상황이다.
스피어와 세이렌이 던전으로 들어가고 내 차례가 되었다.
던전 차원 문으로 한 걸음 내딛는데 세상이 암전되었다.
* * *
“구하진! 너… 네가 가… 감히….”
피를 토하며 무릎을 꿇고 있는 중년의 사내.
“거 노친네 명줄 한번 질기네. 내가 평소에 누누이 말했을 텐데? 등 뒤를 조심하라고… 그런데 나한테 등 뒤를 맡기니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 아니야?”
썩은 미소를 지으며 싸가지 없이 말하는 구하진이라 불린 사내.
적어도 30대는 넘어 보였다.
하영의 오빠는 이제 25세라고 했는데, 다른 구하진인가?
“내가… 이 철권 김한철이 겨우 이런 상처쯤은… 크악!”
갑자기 입으로 엄청난 피를 토해 내는 중년의 사내.
그런데 이름이 김한철이라고? 철권 김한철? 오산 길드장?
“그래도 철권 이름값이 있는데 겨우 칼빵 하나로 안심할까? 포이즌 스네이크가 같이 왔지. 짜릿할 거야. 그 녀석의 독은 특별하거든.”
그러자 김한철의 표정이 굳어졌다.
“서… 설마, 네놈 빌런들과 손을 잡은 것이냐?”
“이봐, 철권 나으리.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내 아버지 구찬성. 네가 죽였잖아? 협력이니 뭐니 사탕발림으로 꼬셔서… 뭐, 아버지 복수를 해 줄 만큼의 의리는 없지만 이대로라면 다음은 나일 텐데 가만히 당해 줄 수는 없잖아?”
“그래서 그 악독한 놈들과 손을 잡은 것이냐!”
김한철의 분노에 갑자기 웃음을 터트린 구하진.
“프하하하하하! 빌런보다 더 한 놈이 뭐라고? 누워서 침 뱉기도 그 정도면 프로급이십니다요. 파하하하하! 오랜만에 재밌는 농담을 들었네.”
비꼬는 구하진의 말에 분노한 김한철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놈! 나는 철권 김한철이다. 적어도 네놈 하나는 지옥길 동무로 삼을 수 있다는 말이다. 흐압!”
피를 쏟아 내던 복부와 입에서는 말 그대로 폭포수 같은 피가 흘렀지만 김한철의 전신 근육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혼신의 일격.
구하진을 죽이고 말겠다는 의지의 발현이 김한철의 주먹에서 쏘아졌다.
붉게 빛나는 구체가 구하진을 향해 날아갔다.
저것이 터진다면 도시 하나는 날려 버릴 위력은 나오지 않을까?
붉은 구체가 구하진에게 다다랐을 때쯤, 구하진이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하고 있던 머플러가 몸집을 키워 구하진을 감싸면서 붉은 구체를 휘감았다.
순식간에 구체는 빛을 잃었고 엄청난 폭발로 이어져야 할 에너지도 씻은 듯 사라져 버렸다.
고요 그 자체.
마치 처음부터 붉은 구체가 없었던 것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휘유~ 괜히 철권이 아니었네. 죽는 줄 알았잖아? 그나저나 이 머플러를 그때 얻지 못했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네. 봉인된 상태가 이 정도인데, 봉인이 풀리면 얼마나 대단해질지 기대가 되는데?”
이마에 땀을 훔치는 구하진과 모든 기운과 피를 쏟고 과다 출혈로 죽은 김한철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시야가 흐려지며 눈앞이 깜깜해졌다.
어둠 속에서 잠깐의 어지러움을 느끼고 눈을 뜨자 일행의 얼굴이 보였다.
걱정스러운 표정의 일행.
“이봐, 럭키. 괜찮아? 아무리 처음이라지만 기절은 좀 심한 거 아닌가?”
스피어의 말에 던전에 진입하며 내가 정신을 잃었다는 것을 알았다.
“운. 괜찮겠어요? 무리할 필요는 없어요. 우리끼리 공략해도 충분해요.”
“아, 세이렌. 괜찮아요. 그리고 고마워요. 걱정 끼쳐서 미안하고요.”
그리고 하영을 보았다.
정신을 잃은 채 본 환상에서 30대 구하진과 조금은 닮은 듯한 하영의 얼굴.
그런데 그 환상은 무엇이었을까?
김한철에게 구찬성이 죽고 구하진이 빌런들과 손을 잡고 김한철을 죽인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이렇게 생생하게 볼 수 있다니.
이것이 ‘미래시’라는 것인가?
고민을 해 보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문득 손목을 보는데 ‘갓김치’, ‘바람’, ‘위로’ 세 단어가 사라지고 새로운 표식이 생겨나 있었다.
이번엔 노란색 화살표?
누가 봐도 화살표 방향으로 가라는 모양새.
그리고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의 끝에는 환상 속에서 구하진이 두르고 있던 머플러가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괜찮아, 하영아. 자! 얼른 출발하자. S급 헌터가 둘인데 고작 B급 던전 클리어 타임 늦어지면 말 나온다고. 출발!”
일부러 하이 톤으로 외치며 앞장을 서자 일행은 마지못해 따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