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포이즌 스네이크
던전은 평이했다.
S급 헌터가 둘이나 있으니 긴장감이 너무 떨어졌다.
주로 오크들과 오크 투사 정도가 무리 지어 나왔고, 세이렌의 여명의 장미가 빛을 뿜으면 어느새 오크들이 바닥에 모조리 누워 있었다.
미간에 구멍이 뚫린 오크들은 장미의 가시 모양 암기에 구멍이 뚫리고, 목 부위에서 엄청난 피를 쏟고 죽은 오크들은 장미의 잎 모양 암기에 베여 죽어 있었다.
확실히 S급 헌터 그것도 완숙의 경지에 오른 그 솜씨는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나도 던전에서 몬스터들을 상대해 보고 싶었지만, 언제 구하진이 도착해 태클을 걸지 몰랐기에 스피어와 세이렌이 앞장서 길을 열었다.
사실 스피어도 세이렌도 하영도 이 던전에 오게 된 정확한 목적을 모르는 데도 그저 나를 믿는다며 도와주고 있는 것이었다.
아직은 모호한 부분도 많고 정확하지 않은 정보로 혼선을 불러올 수도 있어서 잠시 숨기고 있지만 언젠가 진실에 가까워질 때쯤 말해 줄 것이다.
아주 사소한 사실까지도.
그렇게 서로에 대한 믿음을 담보로 믿음을 사는 팀.
그런 팀에 조금은 가까워져 가는 느낌이었기에 기분 좋게 던전 보스를 향해 나아갔다.
그렇게 한 시간쯤 달리다 보니 누가 봐도 보스가 기거하는 집처럼 보이는 건물이 보였다.
보스는 오크 전사쯤 되려나?
그런데 보스룸 바로 앞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꺾은 화살표.
문제는 그 왼쪽이 깎아 지른 절벽이었다는 것이었다.
보통의 던전은 보스를 해치우면 보스가 죽은 자리에 탈출 차원 문이 열리고 그 차원 문을 통해 10분 안에 던전을 빠져나가야 했다.
던전이 닫힐 때 던전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던전과 함께 소멸된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
그래서 왼쪽 절벽을 먼저 확인해 보아야 했다.
“그러니까, 럭키가 이곳에 들어온 목적이 이 아래에 있다는 거야?”
“그래.”
“그게 뭔데?”
“몰라.”
“아, 모르는구나. 그럼 확인하러 가 보자.”
스피어야. 믿어 주는 건 고마운데 생각은 좀 하고 살자.
하영과 세이렌은 절벽 위에서 대기하고 스피어가 나를 업고 내려가 보기로 했다.
정확히 화살표와 절벽이 직각이 되는 위치에 서서 나를 업은 스피어가 뛰어내렸다.
절벽 쪽을 보고 한참을 떨어지는데 동굴이 빠른 속도로 지나쳤다.
“저기!”
내가 외치기도 전에 스피어가 움직였다.
“대쉬!”
공중에서 공용 스킬인 대쉬를 사용해 벽 쪽으로 붙어 발을 딛고는 그대로 절벽을 타고 달려 올라가는 스피어.
밸런스, 반응 속도, 정확도 삼박자가 딱 맞아떨어지며 순식간에 절벽을 거슬러 올라가 한가운데 뚫려 있던 동굴 속으로 들어섰다.
동굴로 들어서자 의외로 넓은 실내 공간에 놀랐다.
그리고 한 가운데 쳐진 척 봐도 심상치 않은 결계와 그 가운데 놓인 낡은 상자.
딱 봐도 보통 상자가 아닌 것 같았다.
결계와 자물쇠로 보호하고 있는 무언가가 그만큼 대단한 물건이라는 것의 반증이었다.
아마도 결계와 자물쇠를 여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옥문보다 열기 어려울까?
“지옥의 문도 단번에 열 수 있는 잠금 해제(S)”
스킬을 발동하자 해제되는 결계.
그리고 바로 열리는 자물쇠.
자물쇠를 벗겨 내고 상자를 열어보니 안에 곱게 접혀 놓인 검은 색 머플러가 눈에 들어왔다.
‘전력 분석관의 눈’
* * *
[오크 대주술사 키르낙의 머플러(봉인) - 영웅]
검은 태양 부족 오크들의 대주술사 키르낙이 남긴 머플러. ‘절대 방어의 술’이 새겨져 있으며 봉인된 상태이다.
효과 : 마력 1단계 상승
효과 : 일정 수준의 공격을 무효화 하는 ‘절대 방어의 술’을 사용합니다. (쿨타임 : 7일)
효과 : 봉인
효과 : 봉인
* * *
‘심봤다!’
환상 속에서 구하진이 하고 있던 머플러가 분명했다.
철권의 마지막 일격을 소멸시켜 버린 것이 아마도 ‘절대 방어의 술’.
무려 영웅급의 장비였다.
게다가 봉인된 상태인 만큼 봉인을 푼다면 새로운 기능이 추가될 것이다.
머플러를 꺼내어 목에 두르자 마력이 상승하는 느낌과 함께 오른쪽 손목에서 열감이 느껴졌다.
화살표는 없어지고 손목 아래쪽으로 그어진 검은 사선 하나.
이건 무슨 뜻일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아크 리치가 팔목에 남기고 간 흔적이 미래시에 가까운 효과를 발휘하며 나에게 무언가를 찾아내기를 바라고 있다는 정도.
아크 리치가 왜 이것을 내게 주고 간 것인지.
스피어의 공격을 받아 내고 건넨 ‘곧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는 말은 무슨 의미인지.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다.
그때 스피어가 엄지를 내밀며 말했다.
“럭키, 잘 어울린다!”
이곳에 숨겨진 물건이 보통 물건이 아닐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음에도 탐욕이라고는 1도 느껴지지 않는 눈빛으로 따봉을 날리며 잘 어울린다고 말해 주는 스피어.
진짜 보물은 저런 친구지.
마주 웃어 주며 스피어의 등에 업히자 스피어는 그대로 동굴을 나와 절벽 위에서 기다리는 일행에게로 돌아갔다.
“어머? 운, 못 보던 머플러네요? 좋아 보인다. 이 정도면 트레저 헌터로 활동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축하해요.”
세이렌도 하영도 웃으며 순수하게 축하해 주었다.
이제 보스를 잡고 나가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우리가 오크들을 잡으며 왔던 방향이 소란스러웠다.
훤칠한 키에 다소 날카로운 인상의 청년을 필두로 흉흉한 기세를 뿌리며 몰려오는 일단의 무리.
“구하진….”
하영이 어금니를 깨물고 하나의 이름을 씹어 뱉었다.
앞장서 달려오던 청년은 내가 환상 속에서 보았던 구하진이 젊어진다면 딱 저렇겠다 싶은 모습이었다.
세이렌이 날카로운 말투로 쏘아붙였다.
“당신들은 누구죠? 공략 중인 던전에 무단으로 진입하는 것은 목숨을 보장받지 못할 일이라는 것을 모르나요?”
그러자 능글맞게 웃으며 대꾸하는 구하진.
“당연히 알고 있지요. 그리고 여러분이 우리 현무 길드가 공략하려던 던전을 가로챈 파렴치한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뭐라고! 이 애송이 놈이….”
발끈하는 스피어를 진정시켰다.
“이봐요. 당신의 말 책임질 수 있나요? 제가 이리 보여도 원탁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원탁의 기사는 명예를 더럽힌 자를 결단코 가만두지 않아요.”
여명의 장미를 만지작거리며 살벌한 미소를 짓는 세이렌.
“물론입니다. 우리 현무 길드에서 이 던전을 발견하고 공략하려 했지만 초기 발견한 지원팀의 역량 부족이라 여겨 공략팀을 새롭게 파견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온 것이고요.”
구하진 저놈도 확실히 보통 놈은 아니었다.
살벌한 세이렌의 표정은 마치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이 제 할 말을 해 댔다.
믿는 구석이 있는 거겠지.
“그런데 도착해 보니 일반인의 안전을 위해 배치해 둔 우리 지원팀의 팀장을 협박 및 회유해 던전에 진입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더 굳어지는 세이렌의 표정.
사실과 조금 다르지만 그 정도는 현무의 힘으로 날조 가능하다는 것일까?
“그래서 협박과 회유에 굴복한 팀장은 직위를 해제하고 징계부로 넘겼습니다. 그리고 부팀장에게 정확한 정황 청취한 결과 명백한 소드 앤 매직 길드의 던전 가로채기였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오석 삼촌을….”
하영을 이제야 발견했다는 듯 일견하고는 제 할 말만 하는 구하진.
“그래서 국제 헌터 협회에 이를 제보하고 소드 앤 매직 길드에 정식으로 항의하기로 결정하고 진행시킨 후 여러분들이 더 큰 잘못을 저지르기 전에 저지하기 위해 급히 던전에 들어온 것입니다.”
아주 청산유수다.
모르는 사람이 저놈 말만 들으면 우리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잘못한 줄 알겠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뭐지?”
내가 입을 열자 거만한 표정으로 대꾸한다.
“당신은 누구지?”
“나? 네놈이 나온 아카데미 교수.”
이죽이며 대답하자 이번엔 놈의 거만한 표정이 일그러진다.
역시 싸가지 없는 놈에게는 나도 어쩔 수 없는 싸가지인가 보다.
‘전력 분석관의 눈’
* * *
[이름] 구하진
[직책] 현무 길드 공략 1팀장
[성격] 거만한, 강약약강, 탐욕적인
[능력] 힘:A- 민첩:B- 체력:A- 마력:B0
[특성] 양민학살(A), 안하무인(B), 꼭두각시(F)
[스킬] 현무검(A), 강탈(B), 통증 감소(B), 체력 강화(C), 힘 숙련(D)
[평가] 뛰어난 재능을 가졌으나 재능에 취해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습니다. 앞으로의 성장 가능성도 낮습니다.
[근황]
1. 이번 사건으로 눈엣가시 같던 권오석을 쳐낼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2. S급 헌터가 노리는 던전의 보상을 독차지할 생각에 기분이 좋습니다.
3. 급이 맞지 않는 놈이 대화에 끼어들어 황당합니다.
* * *
피지컬만 본다면 간신히 A급 기준에 턱걸이한 수준.
그나마도 재능에 취해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다.
구찬성의 현무검은 제대로 이어받았지만, 현무 길드를 온전히 이어받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였다.
그런데 급이 맞지 않다라….
역시 이놈에게 예의를 차리는 것은 포기해야겠다.
“이제 갓 졸업한 놈이 교수를 보고 인사도 안 하냐?”
사실 요즘 세상에 예전 같은 사제지간의 정이나 예의를 이야기하면 꼰대 같아 보일 수 있지만 알게 뭔가?
이놈 화나게만 할 수 있으면 된 거지.
“당신. 언제 봤….”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상식적으로 대응하려는 구하진.
그럼 안 돼.
“왜? 급도 안 되는 놈이 대화에 껴들어서 기분 나쁘냐?”
본심을 들키니 당황과 분노의 감정이 섞여 올라오는 모양이다.
점점 일그러지며 붉어지는 구하진의 얼굴.
“나는 그저….”
“그러는 너는 쟤네랑 급은 맞고?”
스피어와 세이렌을 눈짓하며 구하진을 도발했다.
“아니 지금 그….”
“아서라. 꼬마야. 적어도 니 애비 정도는 와야 쟤네랑 급이 맞지. 어디서 헌터증 잉크도 안 마른 놈이 제보니 항의니 같잖은 협박질이야?”
아, 짜릿해.
실시간으로 바뀌는 놈의 표정을 보니 이러다가 말 끊어 먹는 재미에 중독될 지경이다.
“어려운 시국에 던전 클리어 좀 돕겠다고 나왔다가 이게 무슨 꼴이람?”
구하진을 향한 도발의 시선을 유지한 채 스피어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스피어. 여긴 안 되겠다. 지들이 다 해 먹겠다는데 별수 있나? 분위기 파악 못 하고 밥그릇 싸움이나 걸어오는 거 보니 현무 수준도 딱 알만하다. 돌아가자.”
그리곤 미련 없이 출구를 향해 걸어갔다.
스피어와 세이렌, 하영도 내 뒤를 따랐다.
“멈춰!”
그래, 금수저로 태어나 여기저기서 떠받들어지며 살아온 놈들은 자기 말 끊어먹는 건 못 참지.
멈추란 말을 무시하고 계속 발걸음을 옮기는데 별다른 말이 들려오지 않는다.
이렇게 보내 준다고?
“잠시만 멈춰 주십시오. 저희도 그냥 보내드리고 싶지만, 이미 이곳까지 오시면서 제법 사냥도 하셨고 혹시나 아이템을 획득하셨을 수도 있으니 이후 분쟁을 피하기 위해 소지품을 확인해 볼 수 있겠습니까?”
구하진이 아닌 다른 목소리가 들려온다.
뒤를 돌아보니 구하진의 옆에 바짝 붙어 기분 나쁜 미소를 짓고 있는 녀석이 있었다.
‘전력 분석관의 눈’
* * *
[이름] 한명우 (한우진)
[직책] 포이즌 스네이크 참모 (현무 길드 공략 1팀 참모)
[성격] 잔인한, 간교한, 이기적인
[능력] 힘:A- 민첩:A0 체력:B+ 마력:A-
[특성] 모략가(A), 가스라이팅(B), 개미지옥(B), 언변술사(B)
[스킬] 현혹(A), 폭탄 심기(B), 통증 감소(B), 마력 강화(C)
[평가] 한계치까지 성장했습니다.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성장 가능성이 없습니다.
[근황]
1. 던전 범람이 낙동강을 넘을 수 있게 물밑 작업 중입니다.
2. 구하진을 이용해 소드 앤 매직의 랭커들을 영남 지역 던전 공략 일선에서 물러나게 하려고 합니다.
3. 아카데미 교수가 일부러 구하진을 도발하는 이유를 궁금해합니다.
* * *
포이즌 스네이크 강사준.
대한민국의 세 번째 S급 각성자.
하지만 재앙의 탑이 생기고 얼마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각성자들을 통제하고 연구하려는 정부에 원치 않는 실험을 당하고 자유를 억압당했다.
그러던 중 정부가 고삐로 쥐고 있던 유일한 가족인 홀로 사시던 할머니가 방치되다시피 한 달동네에서 던전 생성에 휘말려 돌아가셨다.
이에 분노한 강사준은 연구시설을 초토화시키고 탈출해 자신과 같이 억울한 억압을 당한 각성자들을 모았다.
그렇게 탄생한 빌런 집단인 포이즌 스네이크.
그 이름을 여기서 보게 되다니….
게다가 근황을 보면 포이즌 스네이크는 영남 지역의 낙동강 저지선에 구멍을 뚫기 위해 물밑 작업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스피어와 세이렌의 등장은 그들에게 그리 달갑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던전에 입장할 때 보았던 환상에 의하면 구하진과 포이즌 스네이크는 협력 관계에 있는 듯했는데 지금 구하진 옆에 딱 달라붙어 있는 저놈이 가교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인가?
아무튼 거만하고 탐욕적이고 안하무인인 구하진을 도발해 선을 살짝 넘으면 스피어가 참교육을 시전하고 유유히 이곳을 떠나려 했는데 저놈 때문에 물거품이 되었다.
그러면 책임을 져야지? 빌런 놈아?
“싫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