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미친 정령 셀리온 (1)
“이제 우리를 어쩌실 거죠?”
당돌한 은비의 질문.
오히려 당황한 은유가 은비를 살짝 나무랐다.
“은비야, 우리를 구해 주신 분들에게 갑자기 무슨 말이니?”
하지만 은비는 더 큰 목소리로 은유를 몰아붙였다.
“오빠, 세상에 이유 없는 호의는 없어. 이미 호의를 입은 우리는 상대방이 호의에 대한 대가로 원하는 것을 주어야 진짜 자유를 얻을 수 있어. 지금 우리가 바랄 수 있는 것은 그 호의에 대한 대가가 생각보다 작기를 바라는 정도겠지.”
이제 고1의 나이에 하기에는 씁쓸한 말을 거침없이 내뱉는다.
은유도 세상의 혹독함을 겪은 탓에 별다른 말 없이 우리를 바라보았다.
자신들을 구해 준 사람조차 믿지 못하게 되어 버린 아이들.
새삼 오산에 대한 악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어쨌든 이렇게 불신으로 가득 찬 아이들에게 어설픈 위로나 믿어 달라는 말은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
차라리 그들이 바랄 수 있는 작은 대가 정도를 요구하는 것이 오히려 우리에 대한 경계심을 누그러뜨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너희를 구한 것에 원래 다른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야. 불타는 연구소를 발견했고, 그 연구소를 살피다가 너희를 발견한 거니까. 하지만 너희가 누군지 알고 나니 도움을 받을 수도 있겠다 싶네.”
도움이라는 말에 흠칫하는 아이들.
“우리는 드림팀이야. 멤버들은 여기 있는 인원들이 전부지. 우리는 오산을 무너뜨릴 거야. 그때, 너희가 연구소에서 겪었던 일을 증언해 줄 수 있겠어?”
내 말에 아이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누군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오산을 무너뜨리겠다고 말하는 비현실적인 상황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아서였다.
오산은 그들에게 증오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리고 국내에서 1위의 길드라는 것 정도는 아이들도 알고 있겠지.
그런 길드를 10명 정도 되는 인원으로 무너뜨리겠다고 하고 있으니….
어떻게 보면 오산의 몰락은 아이들도 바라는 것이었지만, 마치 별거 아니라는 듯이 이야기하는 사람의 말 한마디에 넘어가 협조를 약속할 정도의 바보는 아니었다.
“지금 당장 대답하지 않아도 좋아. 어차피 지금 우리는 오산 길드로 가는 터널 안이니까 오산 길드에 도착할 때까지 잘 생각해 봐. 오산 길드에 도착해서도 우리에게 협력할 마음이 안 생긴다면 아무 조건 없이 풀어 줄 테니 자유롭게 앉아서 고민해 봐.”
이 말을 끝으로 다소 혼란스러워하는 아이들을 두고 팀원들을 모았다.
“저 아이들 말고 다른 자료들은 없었어?”
“연구에 관한 자료 중 타지 않은 것과 타다 만 것들을 싹 챙겨 왔어. 타이우 아래 짐칸에 모두 실어 놨어.”
강한의 말에 가인이 물었다.
“혹시 실험 재료 같은 것들은 없던가요?”
“아, 창고 비슷한 곳도 발견해서 비싼 것 위주로 같이 챙겨왔으니 나중에 내려서 확인해 봐.”
실험 재료 중 비싼 것 위주로 챙겨 왔다는 말에 가인은 신이 난 듯 두 손을 모아 쥐고 상상 속에 빠져들었다.
“일단 우리는 이 길을 따라 오산 본사까지 갑니다. 물론 김창식이 아직 터널 안에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니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로 다소 천천히 이동할 거예요.”
내 의지를 느낀 타이우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이동했다.
팀원들에게는 너무 풀어지지 않는 선에서 각자 휴식을 취하라고 하고 나도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강한.
“저 아이들은 어떻게 할 거야?”
딴에는 조심스럽게 귓속말을 한 듯했지만, ‘음파의 지배자’ 특성을 가진 은비가 아닌 척하며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데 귓속말 따위는 비밀도 못 되었다.
혹시 강한이 귓속말로 실수라도 할까 봐 아예 다른 말도 못 꺼내게 큰소리로 대답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저 아이들의 판단에 맡길 거예요.”
큰소리로 대답하자 어쩔 줄 몰라 하는 강한과 깜짝 놀라 이쪽을 바라보는 은유, 그리고 모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은비.
강한은 금세 딴청을 피우며 다른 자리로 가서 앉았고, 은비는 여전히 모호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은비의 생각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애써 무시하고 조금은 어긋난 계획을 다시 점검했다.
생각보다 빠르게 가게 된 서울.
빙의된 김창식이라는 변수도 너무 컸다.
도무지 어떻게 움직일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기억 속에서 아마도 ‘셀리온’일 확률이 높은 놈은 왜 광화문에 갔을까?
광화문에서 놈은 왜 각성자들을 기다리고 있었을까?
그때도 오산 본사에 먼저 들렀다 갔을까?
수많은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해져 갈 때쯤 타이우가 멈춰 서는 것이 느껴졌다.
“왜 그래? 타이우?”
“주인님~ 앞에 사람들이 엄청 죽어 있어요.”
타이우가 말하기도 전에 이미 창가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팀원들.
나만 너무 깊은 생각에 빠졌다가 그 광경을 보지 못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버스 운전석 쪽으로 가서 전면 차창을 통해 드러난 광경은 참혹 그 자체였다.
터널 바닥에 죽어 있는 시체들만도 수십은 되어 보였다.
그런데 그 많은 시체들이 사지가 멀쩡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어떤 시체는 다리가 어떤 시체는 팔이 잘려 나가거나 심지어 불타서 뼈까지 녹아 버린 시체도 있었다.
연구소의 신호를 받았든, 터널 입구 쪽의 신호를 받았든, 정체불명의 강적에 대한 소식을 듣고 이곳에서 방진을 펼쳐 김창식을 맞이했을 것이다.
오산이 작정하고 준비했다면 꽤나 위험한 함정들과 견고한 방어진을 구축했을 텐데 보아하니 크게 의미는 없었던 듯했다.
타이우가 슬슬 전진을 시작하자 시체들은 더 늘어났다.
공포와 경악으로 물든 표정의 시체들.
한참을 가다 보니 제법 많이 도망을 친 듯한 마지막 시체가 있었다.
완전히 겁에 질린 채 목 아래까지만 타서 죽은 시체는 바로 김창혁이었다.
나름 S급이라고 S급이라는 것에 엄청난 자부심을 갖고 있던 김창혁.
그런데 죽어 있는 얼굴에서는 그런 자부심 따위는 한 톨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마지막 표정에는 자존심 따위 찾아볼 수 없는 비굴함만 남아 있었다.
김창혁의 얼굴은 남겨 두고 몸 전체를 불태워 죽인 것을 볼 때, 당시에는 김창식의 의식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상태였을까?
아니면 김창식의 기억을 읽고 미친 정령 놈이 이런 장난을 친 것일 수도 있고….
김창혁의 시체를 마지막으로 오산의 본사로 이어진 통로에서 마주친 흔적은 없었다.
타이우를 타고 달려서 도착한 터널의 끝.
그곳은 입구보다 두꺼운 철문이 삼중으로 막고 있었지만, 녹아내린 쇳물이 되어 있었다.
“자, 이 위가 바로 오산의 본사입니다. 이제부터는 내려서 이동하겠습니다.”
스피어가 앞장서고 한 명씩 타이우에서 내렸다.
마지막까지 남은 은유, 은비 남매.
“두 사람은 어떻게 할 건지 결정했어?”
은유가 대답하려는데 은비가 한 템포 빠르게 나섰다.
“두 눈으로 보고 싶어요. 무너진 오산을….”
냉냉한 은비의 목소리에 은유가 흠칫한다.
“좋아. 그럼 일단 내려. 타이우가 전천후이긴 하지만 좁은 계단까지는 무리거든. 위에 올라가 넓은 곳이 나오면 그곳에서 다시 타이우를 불러 줄 테니.”
내 말에 담긴 뜻을 한참 생각하던 은유와 은비는 놀랐다는 듯 물었다.
“설마… 이 버스 소환물이에요?”
“이렇게 말도 하고 알아서 운전도 하는 버스 본 적은 있고?”
“와… 꼬마 버스 타유 실사판이라니….”
조금, 아주 조금은 이 나이대에 걸맞은 호기심이 남아 있는 것 같아 다행이다.
은유, 은비가 마지막으로 내리자 타이우를 소환 해제했다.
역소환되는 장면도 신기한 듯 쳐다보는 아이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드림팀의 대열을 짰다.
드림팀은 정해 준 대열대로 가운데 은유와 은비를 두고 위로 향하는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이제껏 항상 스피어가 앞장섰었는데, 만약을 대비해 진에게 앞장서 줄 것을 부탁했다.
진은 흔쾌히 앞장서서 걸었고 그 뒤를 현서, 나 순서로 올라갔다.
대형 트럭도 실을 수 있는 엘리베이터가 옆에 있었지만, 비상시에는 비상구가 정답이다.
한참을 계단을 올라가자 바깥으로 이어지는 문이 나왔다.
진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나가자 보이는 공터.
연구에 쓰일 물품들과 생필품들을 실은 트럭들이 드나들 수 있게 적당히 넓은 공간이었다.
제법 비밀스럽게 천장까지 만들어 놓았다.
일단 타이우를 소환해 다시 탑승해 도로를 따라 건물 밖으로 나갔다.
출입문 따위 이미 날아가고 없는 입구로 나오니 보이는 광경은….
“불지옥이 따로 없네.”
화마가 집어삼킨 건물들이었다.
이미 다 타 버린 건물들부터 해서 아직도 사나운 불길에 집어삼켜진 채 불타고 있는 건물들도 있었다.
오산의 자랑이자 오만하게 우뚝 솟은 오산 길드 센터는 불타는 쇠꼬챙이 같은 모습으로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일행들은 모두 타이우에서 내려 비현실적인 모습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런 대형 화재, 심지어 오산이라는 국내 최고의 길드 사옥이 불타는데도 불을 끄려는 어떠한 시도도 없다는 것이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그때 걸려 온 전화.
류산산이었다.
“어디야?”
- 어디쯤 왔어?
“우리는 방금 오산에 도착했어.”
- 뭐? 빨리 나와! 지금 오산 본사가 있는 여의도를 중심으로 영등포구와 마포구에 대피령이 떨어졌어. 사유는 재앙급 몬스터의 출현. 정체는 아마도….
그 정체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다.
불타는 쇠꼬챙이 끝에서 불티 하나가 방금 이곳으로 날아들었거든.
유성처럼 날아와 굉음을 터트리며 땅에 착지한 놈은 김창식이었다.
[ 셀리온. ]
아니, 김창식이었던 셀리온이었다.
“오호! 이게 누구야? 고귀하신 바람의 정령왕의 후계이신 진 아닌가? 정령계가 아닌 현상계에서 만나니 더 반가운데?”
여기저기 녹아내리는 듯 흐물흐물한 얼굴과는 다르게 또렷하게 육성으로 말을 거는 놈.
‘전력분석관의 눈.’
* * *
[이름] 셀리온(김창식)
[직책] 불의 정령왕의 후계(폐)
[성격] 사나운, 즉흥적인, 광기 어린
[능력] 힘:S+ 민첩:S+ 체력:S+ 마력:S+
[특성] 불완전한 태초의 불(S), 광기(A), 파괴 욕구(A), 맞지 않는 옷(F)
[스킬] 불완전한 태초의 브레스(S), 불지옥(S), 폭염조(S), 블레이즈(A), 번아웃(A)
[평가] 위대한 격과 재능을 타고났지만 끝내 광기에 굴복했습니다. 광기에 젖은 재능과 불완전한 태초의 불이 만나 최악의 재앙이 될 가능성을 품게 되었습니다.
[근황]
현상계에서 얻은 몸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2. 육체의 원주인의 지식을 통해 불기운이 충만한 곳을 찾아보고 있습니다.
3. 진이 함께 다니는 인간들에게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 * *
확실히 미친 정령답게 미친 능력치.
그런데 눈에 띄는 특성 하나.
제법 큰 페널티를 부여하는 F급 특성이 놈에게 있었다.
* * *
[맞지 않는 옷(F)] (육체 붕괴도 : 14%)
맞지 않는 옷을 입으면 핏이 안 살죠. 큰 옷은 오버핏이라 우길 수라도 있지만 작은 옷은 억지로 입다가 찢어져 버릴 겁니다. 웬만하면 새로 하나 사세요.
효과 : 육체가 감당치 못할 힘에 밀려 시간당 1%씩 육체가 붕괴됩니다.
효과 : 육체 붕괴도만큼 모든 능력치가 감소합니다.
효과 : 육체 붕괴도가 50%를 넘을 시 붕괴는 가속화됩니다.
효과 : 육체 붕괴도가 80%를 넘어서면 즉시 폭발하여 파괴됩니다.
* * *
놈은 육체 붕괴도라는 시한폭탄을 가슴에 품고 여유로운 척 말하고 있지만 지금도 동공 지진을 일으키며 눈은 새로운 육체를 탐하고 있었다.
그러다 놈이 거짓말처럼 눈동자의 움직임을 멈춘 채 시선을 고정시키고 바라보는 사람.
현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