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옐레나 발리예바
셀리온을 정리할 타이밍에 열린 출입문.
그리고 그 문으로 들어오는 이는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풍성한 검은 로브를 입고 있었다.
키는 제법 컸지만 전체적인 실루엣이 여성의 실루엣이었다.
그리고 축 늘어진 오른팔.
아니, 오른팔이 없었다.
왼손에 든 기괴하게 생긴 지팡이를 짚으며 걸어오는 정체불명의 그녀를 향해 셀리온이 다급히 외친다.
“옐레나! 얼른 도와줘! 뭐라도 좀 해봐!”
잘려나간 오른팔.
이름은 옐레나.
찬우의 뇌리에 스치는 장면이 하나 있었다.
“혹시 옐레나 발리예바?”
찬우의 말에 얼굴을 감고 있던 검은 천을 천천히 풀어냈다.
수잔과는 조금 다른 창백함을 가진 피부.
그리고 증오에 찬 눈빛.
“너희구나. 달링이 죽은 이후로 한 하루도 너희의 얼굴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하나가 비는데? 최운, 그 씹어 먹을 놈은 어디 있지?”
증오심이 그대로 묻어나는 그녀의 말에 일행은 이상을 찌푸렸다.
“우리 오빠는 왜 찾죠? 우리 오빠가 뭘 잘못했길래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당차게 나서는 유미.
그런 유미를 보는 옐레나의 표정이 묘하다.
기쁜 것도 같고 슬픈 것도 같은 표정으로 유미를 보며 말했다.
“오빠라…… 동생인가? 그렇군. 너를 죽이면 되겠어. 최운이 보는 앞에서 너를 죽이면 최운이 슬퍼하겠지? 내가 슬퍼한 만큼 그놈도 슬프겠지? 으흐흐흐흐.”
소름끼치는 웃음소리와 함께 복수의 광기를 보여주는 옐레나의 말에 유기성이 유미의 앞을 막아섰다.
“그때는 놓쳤지만, 이번엔 살아 돌아갈 생각은 꿈도 꾸지마라. 독사 새끼 깔따구!”
“흥! 누가 할 소리를. 오늘 이곳에 온 년놈들. 단 하나도 살아나가지 못할 거야. 모조리 죽여서 내 병사로 삼아주마.”
옐레나가 소리치며 왼손을 들어 올리자 그녀의 좌우로 소환되는 언데드들.
먼저 눈길을 끈 것은 스펙터 킹이 된 강사준이었다.
육신은 자폭하면서 뼈하나하나가 다 녹아 없어졌지만 이미 옐레나와 영혼 종속의 계약을 맺은 상태에서 죽은 강사준의 영혼으로 되살린 최상위 언데드 스펙터 킹이었다.
스펙터 킹은 옐레나를 호위하듯 뒤에서 그녀를 감싸 안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왼편에는 데스나이트가 된 구찬성을 필두로 세 구의 데스나이트가 추가 되었고 오른편에는 음침한 로브를 뒤집어 쓴 리치가 두 구 소환 되었다.
S급 그 이상의 전력을 내는 최상위급 언데드를 모두 6구나 소환했는데도 전혀 지쳐 보이지 않는 옐레나.
김노아의 지원도 받고 그 이상으로 절치부심(切齒腐心) 했을 것이다.
일단은 늘어서서 서로를 경계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들이 서있던 곳이 끝이 보이지 않는 광야로 바뀌었다.
갑자기 바뀐 환경에 옐레나는 익숙한 듯 했지만 드림팀의 멤버들은 다소 당황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눈앞의 적을 먼저 쓰리뜨리는 것.
옐레나의 등장으로 잠시 주춤했던 분위기.
이제 2차전 시작할 시간이 되었다.
* * *
“잠시만, 우리 둘째가 도착한 것 같아. 떼로 싸우기엔 바깥 공간이 협소하니까 공간 좀 바꿔주고 마저 이야기 하자.”
노트북을 열더니 엄청난 속도로 자판을 두드리는 김노아.
한참을 두드리더니 엔터를 치고는 다시 나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내가 어디까지 얘기 했지?”
“나도 선택받았다고?”
“아, 아! 아! 그랬지? 좋아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할게. 내가 이 모든 사실을 너에게 알려주는 이유? 그건 바로 너도 선택받은 존재이기 때문이야. 나처럼.”
아까 했던 말을 처음 하는 것처럼 말하는 그 모습이 제법 우스꽝스러웠다.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가 뭐지?”
그렇게 물을 줄 알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내가 해커라는 히든 클래스로 전직하고 이곳에 들어와 가이아 시스템을 역으로 해킹했어. 그 과정에서 가이아 시스템 정보를 살짝 비트는 것도 할 수 있게 되었지. 그렇게 나는 나의 사도들을 모았어.”
“또, 길어질 것 같은데 요점만.”
“꼭 필요한 이야기라서 하는 거야. 재앙의 씨앗으로 낙점한 셀리온을 정령계에서 현상계로 빼돌리는 과정에서 재각성의 물약으로 포장을 했고, 그걸 철권의 막내아들이 먹었지. 그런데 셀리온을 막아서는 놈들이 있는 거야. 처음에는 왠 부나방들인가 했는데 웬 걸? 내가 조금 무리해서 패널티까지 없애버린 셀리온을 이겨버리는 기적이 일어난거지.”
기적이라기보다는 내가 아끼던 유니폼의 희생과 훌륭한 전술의 결과였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확인하기 위해서 로그를 살피고 영상을 수백 번은 돌려봤지. 그런데 그 짧은 전투에서 내가 분석할 수 없는 기믹들이 엄청나게 나온 거야. 그리고 그 모든 기믹들은 바로 너 최운에게로 향해있었어.”
갑자기 내 앞으로 얼굴을 들이민다.
“그래서 나는 너를 파보기로 결정했지. 네가 가이아 시스템의 선택을 받은 날부터. 그런데 파면 팔수록 이상해. 가이아 시스템으로 설명이 안 되는 상황이 너무 많아. 그래서 조금 더 깊이 들어가보려고 하다가 발견한 거야. 내가 발견했던 이 방주처럼 단단한 그 무언가를……”
드림메이커 시스템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놈은 드림메이커 시스템까지 파고드는데 성공했을까?
방주라고 부르는 이곳을 파악하고 들어왔던 것처럼?
“그래서 나는 그것을 파헤쳐보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지. 아주 조금의 틈도 없는 완벽한 방어력. 어쨌든 나는 그런 시도를 하며 느꼈어. 네가 가진 그 힘. 내 실력으로도 파악할 수 없는 그 미지의 힘이 나의 신(新)방주 프로젝트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이 되어줄 거란 걸.”
다행히 드림메이커 시스템의 실체는 모르는 것 같았다.
가이아 시스템을 조작하고 이 공간에 들어올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도 도무지 알 수 없는 드림메이커 시스템.
원래 대단한 줄 알았지만 알면 알수록 더 대단하다.
“어때 나랑 함께 하지 않을래?”
무슨 프러포즈도 아니고 그렇게 부담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면 함께 하고 싶다가고 하기 싫을 것 같았다.
“아니, 나는 너랑 함께 하지 않아.”
“푸하하하하!”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는 김노아.
“장난하지 마. 함께 하지 않는다고? 잘 생각해봐.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이해 받을 수 있는 서로에게 유일한 존재들이야. 사회에서의 인연? 그 딴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운명이 이어진 존재들이라고. 그런데 정말 함께 하지 않는다고?”
이놈은 이미 나를 자기와 같은 존재라고 믿어버린 것 같다.
완전히 똑같지는 않겠지만 인기 연예인의 사생팬이 본인이 그 연예인의 애인, 심하면 부부라는 망상에 빠지듯 나에 대해 혼자 판단하고 그렇게 믿어버린 것이다.
타악!
탁자를 내려치고 놈의 두 눈을 똑바로 마주보고 말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너랑 함께 하지 않아.”
그렇게 한동안 내 눈을 바라보고 있던 놈이 우물쭈물 하다가 입을 열었다.
“너…… 진심이구나.”
“그래, 진심이야.”
“하하…… 하하하……. 으하하하하하하!”
내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만 웃는 놈을 보니 영화 속 전형적인 사이코패스의 웃음을 닮았다.
“아하하하하! 크크크크…… 아이고 배야. 너 진짜 재밌다. 크큭. 그래, 이유가 뭐야? 설마 밖에 있는 저 모지리들 때문이야. 자신들은 한낱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도 알지 못하는 모지리들?”
이놈의 말을 계속 듣고 있자니 이제는 어이가 없는 것을 넘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눈빛에서 그런 감정이 드러난 걸까?
“날!”
놈이 발작하듯 소리친다.
“동정하듯 쳐다보지 마……! 너와 나는 저것들과 달라. 저 쓰다버릴 도구에 불과한 놈들에 대한 긍휼한 마음이 너의 눈을 멀게 했다면, 내가 그 잘못된 필터를 벗겨주지. 저놈들이 얼마나 무능하고 무력하고 쓸모없는 존재들인지 잘 봐.”
놈이 키보드를 두드리니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던 공간의 한쪽 벽이 커다란 스크린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영상이 플레이 되었다.
넓고 황량한 광야.
한쪽에서 열심히 싸우고 있는 셀리온.
내가 세운 작전명 ‘더위사냥’이 잘 먹혔는지 스피어와 수지 그리고 찬우가 착실하게 놈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재앙이 되라고 불러놨더니 애물단지구만. 저놈은 그냥 폐기 처분해야겠어.”
셀리온이 단 3명. 아니 더위사냥 물약을 던지고 있는 가인까지 4명에게 막혀 패배 직전에 있는데도 그렇게 초조한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못마땅한 듯 혀를 차며 폐기처분하겠다고 하는 김노아.
그 사이에 셀리온의 왼팔이 수잔의 냉검기에 잘려나갔다.
그런데도 여유 있는 모습.
숨겨진 카드가 있나?
아니면 둘째라고 불린 적이 혼자서 우리 팀을 압도할 정도로 강하다고 믿는 것인가?
화면이 돌아가고 둘째라고 예상되는 적을 비춰주는 화면.
“옐레나 발리예바!”
“오, 기억하네? 맞아. 그녀지. 더러운 세상 모두를 죽여 버리겠다는 복수심을 가득차 딱 이용하기 좋은 말. 그녀에게 동기부여를 해준 게 너니까 잘 알거야. 그치?”
그녀는 구찬성의 데스나이트를 비롯해 여섯 기의 강력한 언데드들과 함께 서있었다.
그런데 이걸로 이 놈이 이렇게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는다고?
그 때 화면 속 옐레나가 소리쳤다.
“이곳이 너희의 무덤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의 전사로 새롭게 태어나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저기, 언니. 겨우 시체 여섯 구 가지고 되겠어요?”
당돌한 내 동생 유미.
원래 저런 아이가 아니었는데…….
“설마 이게 다라고 생각해? 아까는 공간이 좁아서 인간형들만 소환한 거야. 이제 이 넓은 광야에서 나의 전력을 보여주지. 나와라!”
- 크아아아아앙!
엄청난 포효와 함께 땅에서 솟아난 뼈만 앙상하게 남은 앞발.
그런데 그 앞발의 크기만 1.5톤 트럭만 했다.
지축을 흔들며 땅에서 기어 나오는 거대한 존재.
본 드래곤.
판타지 세상 속 지상 최강의 생명체라는 드래곤을 죽이고 그 드래곤의 뼈로 만들어내는 최강의 언데드.
그 뒤로 본 드레이크, 본 와이번, 본 사이클롭스 둥…….
하나하나가 무시할 수 없는 강함을 지닌 언데드 몬스터 군단이 몸을 일으켰다.
“좀 많네…… 요.”
소환을 마무리한 옐레나.
스팩터 킹이 된 강사준의 품에 안겨 하늘로 날아올랐다.
“절망 속에 죽어가라. 공격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