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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랑한다는 말을 아껴두었다 (2/183)

2. 사랑한다는 말을 아껴두었다2021.05.05.

말해야 해. 말해야 하는데. 차마 그다음 말이 떨어지지 않아서 정오는 입술만 사리물었다.

16551134438152.jpg“할 말 있다며. 해.”

그녀가 망설이고 있으니 지헌이 재촉했다. 여전히 마음은 가라앉지 않은 눈빛이었다. 갖고 싶어 견딜 수가 없는, 남자의 욕망이 들끓는 눈빛. 그녀의 ‘할 말’을 다 듣고 난 후, 어김없이 제 욕심을 채우겠단 다짐이 확연히 느껴졌다. 목소리를 빼앗긴 인어공주처럼 몇 번을 뻐끔대다가 기어이 엉뚱한 소릴 내뱉었다.

1655113443816.jpg“……배고파.”

16551134438152.jpg“…….”

생뚱맞은 말이었으나 확실히 효과는 있었다. 눈앞의 그녀를 옭아맬 듯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 느슨해졌다. 밥 안 먹겠다며. 그새 마음이 변했어? 그것도 지금? 따지는 듯한 눈빛에 반발심이라도 생긴 듯 정오는 몇 마디를 더 얹었다.

1655113443816.jpg“배고프다고. 배고파. 배고파.”

16551134438152.jpg“……후우. 웬일로 밥을 거르나 했다.”

결국 그녀의 보챔에 지헌도 항복하고 몸을 일으켰다.

16551134438152.jpg“그래. 밥 먹자. 뭐 해줄까.”

지헌이 냉장고 문을 열며 물었다. 정오도 쪼르르 지헌 옆으로 가 냉장고 안을 살폈다. 지금은 그럭저럭 냄새를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김치전에 동치미 국물을 먹으면 딱 좋을 것 같았다.

1655113443816.jpg“김치전.”

16551134438152.jpg“그래. 앉아 있어.”

지헌이 주저 없이 팔을 걷어붙였다. 그녀의 집이었지만 꽤 자주 드나들어 살림살이가 훤했다. 아니, 원룸의 이 작은 주방은 지헌의 전용이나 다름없었다. 그에게 김치전은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음식이다. 뚝딱 반죽을 만들어낸 지헌이 기름 두른 프라이팬에 반죽을 한 국자 부었다. 차르르, 달아오른 기름에 반죽이 닿는 소리가 벌써 입맛을 돌게 했다. 속이 울렁거렸던 것이 거짓말처럼 정오도 허기가 졌다. 반죽의 아랫면이 고르게 익은 것을 확인한 지헌이 프라이팬 손잡이를 잡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손목의 스냅으로 휙 하고 반죽을 뒤집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노릇하게 익은 반죽의 아랫면이 위로 올라왔다.

1655113443816.jpg“와아. 몇 번 봐도 신기해.”

그의 마법 같은 기술에 정오가 찬탄했다. 그녀의 칭찬에 응답하듯, 그가 한 번 더 뒤집었다. 다시 탄성이 이어졌다. 애욕을 채우는 것보다 더 행복한 일상. 그렇다고 애욕이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두 사람은 작은 상에 마주 앉아 김치전에 동치미를 먹었다. 보기와 같이 맛도 좋은 음식이었다. 행복하게 입을 오물거리는 정오를 가만히 바라보던 지헌이 다시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

16551134438152.jpg“이제 좀 어때?”

1655113443816.jpg“응…… 괜찮아. 처음부터 괜찮았어.”

입맛이 돌자 정오는 마음을 바꿨다. 속이 울렁거리지 않아서인지 조금은 힘이 났다. 혼자서도 병원에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정확해지면 그때 얘기하자. 그래도 돼.

16551134438152.jpg“이제 가야겠다.”

식사를 마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지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1655113443816.jpg“벌써?”

16551134438152.jpg“응. 일이 있어.”

일이 있다던 말은 핑계가 아니었다. 만남이 짧으면 짧은 대로, 길면 긴 대로, 연인과 헤어지는 건 언제나 아쉬웠다. 하지만 그를 오래 붙잡을 수는 없다. 따라 일어난 정오는 그의 코트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가 쳐다보지 않는 사이에 몰래 코트 주머니에 귤을 넣었다. 그리고 그에게 건네려는데.

1655113443816.jpg“옷 여기. 고마웠…….”

16551134438152.jpg“이게 뭐야?”

고맙다는 인사는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테스트기가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책상 서랍에 고이 놓아두었다고 생각했는데, 네 개 중 하나를 제대로 숨기지 못한 것이다. 정오는 지헌의 손에 들린 테스트기를 낚아채 허겁지겁 책상 서랍에 넣었다. 하지만 아뿔싸. 그게 더 큰 실수였다. 지헌이 서랍을 다시 열었다. 그리고 자신이 발견한 것과 비슷한 테스트기 세 개를 더 찾아냈다. 병원에 다녀오고 나서 얘기하려고 했는데, 그가 먼저 발견하고 말았다. 그의 표정으로는 아무 감정도 읽을 수가 없었다. 매서워 보일 만큼 날렵한 눈빛이 그녀를 아찔하게 했다.

16551134438152.jpg“이게 뭐야?”

지헌은 다시 한번 물었다. 하지만 대답을 더 종용할 필요는 없었다. 네 개의 테스트기, 그리고 하얗게 질린 얼굴. 그녀의 반응은 무엇보다도 확실한 대답이었다. 지헌의 눈썹 사이가 딱딱하게 우그러졌다. 순간 휴대폰 진동이 울려댔다. 휴대폰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한 지헌이 짧게 한숨을 내뱉고는 다시 정오를 바라보았다. 한 걸음 다가서자 정오는 흠칫 반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가 더 가까이 걸음을 옮겨 그녀를 끌어안았다.

16551134438152.jpg“걱정하지 마. 일단 쉬어.”

1655113443816.jpg“…….”

16551134438152.jpg“내일 얘기하자. 알았지?”

토닥토닥. 등을 쓸어주며 건넨 나지막한 말이 이불처럼 어깨를 덮어주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초조한 마음을 어쩔 수가 없었다. 그가 떠나면 이불을 거두어야만 할 것 같은. 이별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정오에게서 외투를 건네받은 지헌은 곧장 떠났다. 나오지 말라는 말마저도 어쩐지 정오는 서운하게 들렸다. 그가 떠난 후, 역시나 온갖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혹시 그가 자신을 의심하는 건 아닐까?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그가 헤어지자고 하면 나는 어쩌지? 졸음이 밀려오는데도 잠들지를 못했다. 이미 해가 저문 하루가 너무도 길었다. 그에게 다시 연락이 온 건 밤 11시쯤이었다. 침대에서 웅크리고 있다가 진동 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난 정오는 지헌의 이름을 확인하고 바로 전화를 받았다.

1655113443816.jpg“여보세요.”

16551134438152.jpg[자고 있었어? 미안.]

1655113443816.jpg“흠. 아니야. 괜찮아.”

정오는 잠긴 목을 가다듬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입술은 금세 바짝 말라버렸다.

16551134438152.jpg[주머니에 귤 넣어놨더라.]

그는 귤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헤어지기 전, 정오는 지헌의 외투 주머니에 귤을 하나씩 넣어놓았다. 정오가 이따금 하는 장난이었다. 초콜릿을 넣어놓을 때도 있고 사탕을 넣어놓을 때도 있었다.

1655113443816.jpg“응. 가면서 먹으라고.”

16551134438152.jpg[잘 먹었어. 맛있더라.]

1655113443816.jpg“응…….”

늘 하는 시시콜콜한 대화였지만 기다리던 화제는 아니었기에 정오는 힘없이 대답했다. 그 시름 위에 다시금 지헌의 목소리가 덧입혀졌다.

16551134438152.jpg[정오야. 같이 병원 가자.]

1655113443816.jpg“……어?”

심장이 철렁했다. 왜 병원을 같이 가자고 하지? 가서 뭘 하려고.

16551134438152.jpg[가서 산모수첩 받아야지. 아니야?]

1655113443816.jpg“…….”

16551134438152.jpg[찾아보니 그렇던데. 확인하고 그런 걸 준다던데.]

긴장이 탁 풀리며 두 눈에 눈물이 맺혔다. 급하게 입을 막아 울컥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삼켰다. 나는 확실하게 피임을 했는데 어떻게 된 일이냐. 나 말고 딴 남자가 있었느냐. 아이가 생겼다면 포기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 그런 말들이 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에 잔뜩 겁을 먹고 있었던 것이다.

16551134438152.jpg[미안해.]

하지만 그는 나지막이 사과했다.

16551134438152.jpg[하고 싶은 게 많을 텐데, 내가 발목을 잡아서.]

1655113443816.jpg“오빠가 싫어할 줄 알았어.”

서럽게 내뱉은 하소연에 그가 어르듯 말했다.

16551134438152.jpg[어떻게 싫어할 수가 있어. 그저 너한테 미안할 뿐이지.]

몸은 가까웠지만 마음은 멀리 있다고 생각했다. 감정 표현이 인색한 남자라 서운할 때도 더러 있었다. 그랬던 그가, 이처럼 상냥하게 말해주니 거친 풍파를 만나 헤매던 마음이 따뜻한 집 안으로 인도받은 느낌이었다. 아직 많이 무섭지만 그래도 다행이야. 이 남자가 좋은 사람이라서.

16551134438152.jpg[내일 시간 있지? 내일 만나서 얘기하자. 병원도 같이 가고.]

1655113443816.jpg“응.”

16551134438152.jpg[세 시 괜찮아?]

1655113443816.jpg“응. 괜찮아.”

16551134438152.jpg[그래. 그때 보자.]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은 정오는 그가 눈앞에 보이는 듯이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코를 훌쩍이는 소리를 들은 건지, 그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16551134438152.jpg[혼자 많이 겁먹었겠네.]

이번에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야. 오빠와 함께라면 이제 무섭지 않아.

16551134438152.jpg[오늘은 아무 걱정 하지 말고 편하게 자. 알았어?]

1655113443816.jpg“응. 알겠어.”

마지막에는 배시시 웃을 수 있게 되었다. 처음으로, 아기에 대해 생각했다. 생각지 못했던 일이지만. 아기가 내게 찾아왔다면 축복으로 받아들일게. 감사하게 생각할게. 나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오빠가 있으니. 마지막 인사를 하고 끊으려는데, 그가 그녀를 다시 불렀다.

16551134438152.jpg[정오야.]

둥글게 들려오는 자신의 이름. 밤바람을 타고 퍼져가는 산자락 물소리처럼 청명하고도 나긋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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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오야. 제법 추워진 날씨에, 옷을 한 겹 더 입혀주는 것만 같은, 한낮의 햇살처럼 따스한 이름. 그 어떤 밤도 환하게 밝히는 이름.

1655113443816.jpg[응?]

그 맑은 이름을 둥글게 감싸듯 그녀가 대답했다.

16551134438152.jpg“아니야. 잘 자.”

사랑해, 라고 말하려다가 아껴두었다. 내일을 위해서. 전화를 끊은 지헌은 깊게 심호흡했다. 침착하게 다독이고 싶었는데, 마음이 다 전해졌을까? 피임을 하지 않은 적은 없다. 그러니 실수가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모호하게 마음에 걸리는 일이 딱 한 번 있었다. 그녀가 더 신경쓸까 봐 굳이 말하진 못했는데, 외려 그녀에게 더 큰 혼란을 준 것 같다. 그 역시 깜짝 놀랐지만 금방 마음을 정리했다. 누군가에게는 아주 힘든 여정일 수도 있는 생명의 잉태. 어머니도 자신을 낳고 또 동생을 낳고 싶어 병원을 오래 다니다가 포기하셨다고 한다. 그러니 아이는 축복이었다. 정오 또한 모든 과정에서 축복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굳어지니, 별문제 없는 건강한 임신이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었다. 정오를 닮은 어여쁜 아이의 얼굴을 그려보기도 했다. 그렇다면, 함께 손을 잡고 병원에 가는 순간엔, 부부여야 한다. 혼인신고가 조금 늦어지더라도, 결혼식이 늦어지더라도, 마음만은 부부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자신을 온전히 의지할 수 있길 바랐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지헌은 주얼리숍에 들러 청혼 반지를 샀다. 그녀의 손에 꼭 맞게 주문할 수는 없었지만 매장 직원은 이후에 함께 찾아오면 다시 사이즈를 조정해준다고 했다. 내일. 그래. 내일. 내일의 이벤트를 떠올리니 입술이 바짝 말라왔다. 그녀가 청혼을 거절할 수도 있다. 그녀는 아직 대학교 3학년이었다. 얼른 취직해서 어머니의 부담을 덜어주고 싶다고 했다. 광고회사에 들어가서 한국 최고의 카피라이터가 되고 싶다고 했다. 꿈이 확실하고, 하고 싶은 것이 많은 여자였다. 지헌은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의 걸림돌이 되었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렸다. 하지만, 함께 방법을 찾아보자.

16551134438152.jpg‘우리는 잘할 수 있을 거야. 정오야.’

네 꿈을 망치지 않을게. 지켜줄게.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될게. 평생 스스로 음식을 만들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오를 만나 인생이 달라졌다. 어린애처럼, 맛있는 음식에 마음이 물러지는 그녀가 사랑스러워 몇 가지 요리를 익혔다. 그녀가 자신의 요리를 맛있게 먹어주니 더 사랑받고 싶어서 더 시도해보게 되고, TV의 요리하는 남자가 멋있다고 하니 질투심이 생겨 더 노력하게 되고, 결국 요리는 완전히 지헌 담당이 되었다. 그녀로 인해 삶이 달라지는 것이 신기했는데, 어느새 그녀 없이는 살 수 없게 되었다. 어쩌면 결혼은 그가 오랫동안 바라왔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헌은 정오가 주머니에 넣어준 귤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나는 먹고, 하나는 왠지 아까워 집에까지 가져왔다.

16551134438152.jpg‘움켜쥐고 있어도 더욱 세게 쥐고 싶은 마음. 알아?’

지헌은 아기의 주먹만 한 귤을 꼭 쥐고는 미소 지었다. 언젠가, 오늘 우리의 고민이 애틋한 추억이 되길 바라며. * 다음 날. 지헌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정오에게 연락했다.

16551134438152.jpg- 수업 중이지? 수업 잘 듣고 점심 꼭 먹어. 이따 보자. 데리러 갈게.

  정오. 낮 12시에 그녀에게 연락하는 것은 그의 오랜 습관이었다.

1655113443816.jpg- 응. 이타봐!

  급한 와중에 부랴부랴 찍힌 답문은 오타를 남겼다. 그녀의 문자에 지헌은 픽 웃었다. 귀여워 죽겠다. 그녀와 오래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을 여유는 없었다. 그녀는 수업에 집중해야 하고 그는 프러포즈 준비를 해야 했다. 반지는 준비됐고, 꽃집에 들러 주문한 꽃을 찾아야 했다. 차 트렁크에 꽃을 가득 실을 거라 트렁크도 깔끔하게 비워야 했다. 옷도 멋지게 입어야 하고. 슈트를 고르고 있을 때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어머니였다. 지헌은 한숨을 푸욱 쉬고 전화를 받았다.

16551134438152.jpg“여보세요.”

16551134596901.jpg[바쁘니?]

16551134438152.jpg“네. 좀.”

지헌의 짧은 대답에 수화기 저편에서 어머니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16551134596901.jpg[어제는 어떻게 얼굴만 비추고 가니? 엄마랑 얘기할 새도 없이.]

어제, 정오의 집에서 바삐 나섰던 건 집안일 때문이었다. 어머니 장영미 여사를 에스코트하여 자선행사에 참석해야 했던 것이다. 1년에 한 번 정도는 다정한 아들 노릇을 해야 한다. 어머니의 기분을 잘 맞춰주지 않으면 1년 내내 시달릴 위험이 있었다. 하지만 어제는 지헌 또한 마음이 분주하여 어머니를 제대로 에스코트하지 못했다. 인사치레로 얼굴만 보이고는 행사장을 빠져나왔다.

16551134438152.jpg“죄송해요. 바쁜 일이 있었어요.”

16551134596901.jpg[오늘은 괜찮아? 네 아버지 오늘 일찍 오신다는데, 와서 아버지랑 바둑도 한판 두고 저녁도 먹고 그래.]

16551134438152.jpg“아…… 오늘은 좀 바쁜데.”

16551134596901.jpg[오늘도 바빠? 뭐가 그렇게 바쁜데.]

16551134438152.jpg“나중에 말씀드릴게요.”

16551134596901.jpg[지금은 못 할 얘기야?]

16551134438152.jpg“별일 없으세요? 몸은 괜찮으시고요?”

지헌은 정오에 대해 시시콜콜 말할 수 없어 화제를 돌렸다.

16551134596901.jpg[나는 별일 없는데, 그제 네 형이 테러를 당했다더라. 누가 차에 달걀을 던졌대.]

달걀이 수류탄이라도 된 듯 어머니의 목소리는 호들갑스러웠다.

16551134438152.jpg“형이 당한 게 아니라 형 차가 당했네요.”

16551134596901.jpg[어쨌든 끔찍하잖아. 엄마가 얼마나 불안한지 아니?]

16551134438152.jpg“형이야 그룹 대표님 되실 몸이고. 형이나 더 조심하라고 해요.”

16551134596901.jpg[걔가 내 말을 듣겠어? 솔직히, 지태까지 신경 쓸 여력이 어디 있니? 내 친아들 챙길 새도 없는데.]

정지태, 세련식품의 전략기획 담당 이사. 지헌의 이복형이다. 언젠가 아버지를 이어 그룹의 대표가 될 인재. 형 덕에 지헌은 비교적 아버지의 간섭에서 벗어나 생활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기지만 지헌에게 형은 고마운 사람이었다.

16551134438152.jpg“제 걱정은 마시고 쉬세요. 조만간 들를게요. 소개시켜드릴 친구가 있어요.”

16551134596901.jpg[뭐? 누구?]

16551134438152.jpg“다시 연락드릴게요.”

지헌은 어머니가 호기심을 잔뜩 가질 화젯거리를 던지고는 바삐 전화를 끊었다. 프러포즈에 성공하면 부모님께도 말씀드려야 한다. 어머니께서 잠깐은 아쉬워하겠지만 금세 그녀를 좋아하실 거라 확신한다. 아버지의 비서였던 어머니는 결혼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니 그녀의 처지를 이해해주실 것이다. 거울에 제 모습을 비춰 본 지헌은 반지 케이스를 주머니에 넣고 집을 나섰다. 오늘이 완벽한 하루가 되었으면. 몇 시간 뒤를 상상하니 긴장되면서도 잔뜩 설렜다. 정오야. 우리 아이는 정말 예쁠 거야. 아직 확인하지도 못한 새 생명이 묘한 마음을 품게 했다. 해주고 싶은 것들이 잔뜩 생겨났다. 언젠가 태어날 아가에게. 밤사이 내린 눈을 가장 처음 밟게 해줄게. 별이 떠오르는 것을 보게 해줄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줄게. 손잡아줄게. 지켜줄게. 눈을 맞추고 사랑한다고 말할게. 생전 처음 품어보는 감정에 벌써 손가락이 생긴 듯, 가슴속이 계속 간지러웠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간 지헌은 주차해놓은 차 쪽으로 발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걸음이 묵직하면서도 가벼웠다. 약속 시간은 오후 3시. 여유가 많은데도 왜 자꾸 걸음이 빨라지는지 모를 일이다. 그런데 별안간 주차돼 있던 차 한 대가 그의 걸음을 막아섰다. 차가 전조등을 밝게 켠 것이다. 눈이 부신 지헌이 얼굴께로 손을 올리며 빛을 막아내는 사이에, 차가 그를 향해 돌진했다. 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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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몸을 급하게 옆으로 뺐지만 피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광마처럼 질주한 차는 그대로 지헌을 들이받았다. 콰악! 끼이익! 벼락과 같은 일격에 의해 범퍼를 타고 올라간 지헌의 몸은 차의 앞유리를 들이받고 곧장 나가떨어졌다. 찰나에 벌어진 일이었다. 눈앞에서 번쩍 섬광이 튀다가 순식간에 세상이 흐릿해졌다. 제 몸에서 흐른 뜨거운 액체가 바닥을 적셔가는 것이 느껴졌다. 안 돼. 정오야. 너한테 가야 하는데. 의지와는 달리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몸이 갈가리 찢어지는 듯한 격통이 밀려왔다. 의식이 흐릿해져 가는 와중에 차 문이 열리는 소리, 그리고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다. 저벅저벅. 발소리가 그의 앞에서 멈추었다. 지헌은 고개를 들 수도 없었다. 살려줘. 제발 살려줘. 마음속으로는 수십 번을 외쳐댔지만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그런데, 사고를 낸 작자는 지헌을 구할 생각도 하지 않고 이상한 질문을 했다.

16551134658286.jpg“……이라는 이름, 들어본 적 있나?”

뭐라고? 청력까지 잃은 듯 남자의 목소리도 흐릿했다. 하나 마나 한 질문 하나를 던진 남자는 지헌을 버려두고는 다시 차에 올랐다. 차가 떠나는 소리와 함께 이승의 숨 또한 희박해졌다. 죽음의 사자가 찾아온 것처럼 몸이 추웠다. 안간힘을 써 몸을 꿈틀 움직였다. 반지 케이스의 끄트머리가 손끝에 걸리는 느낌이 났다. 앞으로의 많은 날들, 더 많이 사랑해주려고 했던 어여쁜 연인이 생각났다. 코스모스처럼 가지런히 흔들리는 긴 머리. 뽀얀 얼굴. 웃을 때는 반달이 되는 커다란 눈망울. 너는 참 잘 웃는 사람인데.

16551134438152.jpg‘정오야.’

그녀가 많이 울 것 같아 가슴 또한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잘해주고 싶었는데. 더, 더, 잘해주고 싶었는데.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고 싶었는데. 나 때문에 네가 아이를 포기하게 될까? 그래. 혼자 키우긴 힘들 테니까. 그래도 이해해. 사랑해. 정오야. 나는 왜 그 말을 아꼈을까. 왜 더 표현하지 못했지? 검은 안개가 자욱한 삶의 끝에서, 지헌은 처절하게 흐느꼈다. 미안해. 정오야.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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