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누군가 울고 있을 것 같은데 (3/183)

3. 누군가 울고 있을 것 같은데2021.05.08.

은비는 오빠 은엽이 사두었다는 오피스텔에 도착했다. 3년 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은비는 4년을 채우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K대 편입 심사에 통과하여 다시 한국 땅을 밟게 되었다. 독립하여 혼자 살고 싶다는 동생의 바람에 오빠는 흔쾌히 집을 얻어주었다. 다만 동생의 요청을 들어주지는 않았다. 대학교에서 가까운 오피스텔을 원했는데 은엽이 얻은 집은 학교와 그다지 가깝지 않았다. 그래도 집의 상태가 훌륭한 편이라 은비는 그럭저럭 만족했다. 짐을 정리하고 나니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이 눈에 보였다. 은비는 생필품들을 사러 집을 나섰다. 계단을 내려가 지하 주차장에 이른 은비는 뜻밖의 사건을 목격하게 되었다. 콰악! 끼이익! 급발진한 것처럼 돌진해온 차에 한 남자가 치여 쓰러졌다. 은비는 깜짝 놀라 기겁하며 발을 멈추었다. 너무 급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소리를 지를 틈도 없었다. 은비는 비상계단 벽 뒤에 숨어 입을 막고 숨을 죽였다. 운전석에서 까만 모자를 눌러 쓴 남자가 나왔다. 쓰러진 남자의 앞에 선 까만 모자가 무어라 중얼거렸다.

16551134734519.jpg“……들어본 적 있나?”

까만 모자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무어라 물어보는 느낌이었지만 쓰러진 남자가 대답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짧은 질문을 던진 까만 모자는 다시 차에 올랐다. 그리고 남자를 버려두고는 바로 떠나버렸다. 차가 사라진 후, 은비는 뒤늦게 숨을 몰아쉬었다. 고개를 빼꼼 내밀어 주차장을 살폈다. 쓰러진 남자 아래로 피가 흐르는 것이 보였다. 신고해야 해! 은비는 휴대폰을 꺼냈다. 하지만 휴대폰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머릿속이 새카매지며, 더럭 겁이 났다. 경찰서에 왔다 갔다 해야 하잖아. 괜히 휘말려서 나까지 위험해지면? 올해 변호사가 된 오빠는, 어떤 사건이든, 시끄러운 곳에는 끼지 말라고 말했었다.

16551134734524.jpg‘이미 죽었다면 괜히 끼어서 좋을 거 없어. 내가 아니라도 누군가 신고할 거야.’

나는 아무것도 못 본 거야. 은비는 허겁지겁 다시 계단을 올라 집으로 돌아갔다. 다행히 몇 분 후, 구급차 소리가 들려왔다. 은비는 구급차와 경찰차가 차례로 오피스텔에 들렀다가 떠나는 것을 집 안에서 창문 너머로 지켜보았다. 남자는 죽었을까? 살든 죽든, 부디 자신에게 귀찮은 일이 일어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저녁 무렵. 오빠 은엽에게서 전화가 왔다. 은비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16551134734524.jpg“여보세요.”

16551134734532.jpg[집은 둘러봤어?]

16551134734524.jpg“응. 집은 좋은데 학교에서 너무 멀어. 오빠는 왜 하필 이 오피스텔을 얻었어?”

16551134734532.jpg[정지헌이 거기 살거든.]

오빠가 건넨 대답에 야무지게 지었던 표정이 얼빠진 듯 풀렸다. 정지헌! 사춘기 소녀처럼 마음이 들뜨며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은비가 K대학교로 편입을 한 건 지헌이 다니는 대학교이기 때문이었다. 지헌은 이제 졸업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그래도 은비는 지헌과의 접점을 갖고 싶었다. 3년 전, 미국 유학의 기로에서 그녀를 가장 마지막까지 망설이게 한 건 지헌의 존재였다. 오빠의 친구, 지헌은 은비의 첫사랑이었다. 그리고 그 짝사랑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미국에서 몇 번의 연애를 했지만 역시 지헌에 대한 마음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돌아왔다. 침을 꼴깍 삼킨 은비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 물었다.

16551134734524.jpg“지헌 오빠가 여기 산다고? 몇 호인지 알아?”

16551134734532.jpg[그런데 그게 문젠가 아니라, 오늘 사고가 났대.]

은엽의 목소리가 별안간 어두워졌다. 은비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16551134734524.jpg“뭐?”

16551134734532.jpg[지헌이가 오늘 거기 지하 주차장에서 뺑소니차에 치였다더라.]

은비는 하마터면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16551134734524.jpg“……뺑소니?”

16551134734532.jpg[응. 나도 병원에 아직 안 가봐서 잘 모르겠어.]

낮에 일어난 사고…… 설마 그게 지헌 오빠였던 거야?

16551134734524.jpg“오빠…… 병원이 어디야?”

은비는 떨려오는 목소리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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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원이 꺼져 있어 삐 소리 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되며…….] 정오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전화를 끊었다. 오늘 오후 3시에 그녀를 데리러 오겠다던 지헌은 나타나지 않았다. 전화를 해도 받지 않더니, 나중에는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메시지로 넘어갔다.

16551134769166.jpg‘오빠가 약속을 안 지킨 적은 없었는데.’

시간이 흘러 저녁때가 되니 불안해졌다.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사고라도 난 건 아닐까?

16551134769166.jpg‘아니면 오빠가 갑자기 마음을 바꿨다거나…….’

오만 가지 상상이 머리를 장악했다. 기다리는 시간이 점점 초조해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자신의 상황을 축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제는 모든 것이 두려워졌다. * 병원 수술실 앞. 장영미 여사는 두려움에 휩싸여 앉아 있었다. 아들이 뺑소니 사고를 당했다. 자신과 통화를 나눈 지 몇 분 지나지 않아 사고가 일어났다고 한다. 오늘, 집에 들르라는 엄마의 부탁도 마다한 아들이 오피스텔 주차장에서 발견됐다고 한다. 하나뿐인 아들, 자신의 목숨보다도 더 소중한 아들. 건강하게 장성해준 것이 너무나도 기특했던 아들이 생사를 헤매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온 장 여사는 아들의 상태를 확인한 후 울부짖었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대체 왜 내 아들에게 이런 일이. 탈진할 만큼 절규한 뒤 기운이 쑥 빠진 장 여사에게 사건을 맡은 형사가 다가왔다.

16551134734519.jpg“안녕하십니까. 용산경찰서에서 나왔습니다. 정지헌 씨 어머니 되시죠?”

장 여사는 표정 없이 형사를 바라보았다.

16551134734519.jpg“오늘 하필 건물 CCTV 오류로 자료가 남아 있는 게 없다고 합니다. 다행히 주차된 차량 중에 블랙박스 차량이 있어서 차량번호를 확보했습니다. 뺑소니 장면 일부가 찍혀서 용의자 신원도 확보한 상태입니다.”

16551134769181.jpg“꼭 잡아줘요…… 그놈 꼭 잡아줘요…….”

장 여사는 형사를 붙잡고서 호소했다. 대기업 세련그룹 대표의 부인 자리에 걸맞은 품격은 집어던진 지 오래였다. 지금 형사의 손을 붙들고 통곡하는 이는 보는 것만으로도 애처로운 여인이었다.

16551134734519.jpg“용의자는 김진구라는 사람인데, 혹시 들어보신 적 있으신지요.”

장 여사는 고개를 저었다. 다 마른 줄 알았던 눈물이 다시 흘렀다. 자신을 붙들고 울음을 터트린 장 여사 때문에 수술실 앞에 우두커니 서 있게 된 형사에게 한 여자가 다가왔다.

16551134734524.jpg“형사님이시죠? 제가 오피스텔 뺑소니 사건 목격한 사람인데요.”

장 여사에게로 향해 있던 형사의 시선이 젊은 여자 쪽으로 향했다.

16551134734524.jpg“오피스텔에 오늘 입주했어요. 잠깐 주차장에 내려갔다가 뺑소니 목격했고요.”

여자의 목소리에 장 여사도 고개를 들었다. 어렴풋이 기억에 있는 얼굴이었다.

16551134734524.jpg“어머니, 저 은비예요. 채은비. 기억나세요?”

은비가 휘청거리는 장 여사를 부축하듯 단단히 붙잡고서 인사했다.

16551134769181.jpg“어어…… 은비야. 은비구나…….”

경황이 없는 장 여사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알고 지내는 법조인 집안의 아이. 아들 지헌의 친구, 은엽의 여동생 채은비였다.

16551134734524.jpg“어머니, 진정하시고 기운 내세요. 오빠 수술 잘될 거예요. 저는 경찰서에 가서 진술하고 올게요. 범인도 꼭 잡을 거예요.”

은비는 의젓하게 장 여사를 위로했다. 마치 은비가 어른, 장 여사가 아이가 된 것 같은 모습이었다.

16551134734524.jpg“경찰서 갔다가 다시 올게요. 수술 오래 걸릴 테니까 댁에 들어가세요. 수술 끝나면 제가 연락드릴게요.”

은비의 차분한 위로에 장 여사는 다시 한번 흐느꼈다. 은비야 고맙다 고마워, 하고 흐릿하게 웅얼거리며. 형사와 경찰서로 동행하며, 은비는 자신이 목격한 바를 최대한 자세하게 전했다.

16551134734524.jpg“아주 지독한 뺑소니였어요. 범인은 남자고, 검은 모자에 검은 옷을 입고 있었어요. 키는 한 180 정도 되는 것 같았고요, 목소리가 허스키했어요.”

16551134734519.jpg“범인이 목소리를 냈었나요?”

16551134734524.jpg“네. 쓰러진 피해자한테 뭐라고 물었는데…… ‘강도 뺑소니라고 들어본 적 있나?’ 대강 그런 말이었던 것 같아요.”

은비는 자신의 기억에 상상력을 덧붙였다.

16551134734524.jpg“얼굴을 보면 더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고요.”

목격담을 늘어놓는 사이에 두 사람은 경찰서에 닿았다. 경찰서에 들어서자마자 은비는 범인을 알아보았다. 마침 용의자도 자택에서 검거되어 경찰서에 당도한 것이다.

16551134734524.jpg“이 남자예요! 이 남자!”

은비는 용의자 김진구 앞에서 소리쳤다.

16551134734519.jpg“이 아가씨가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당신 나 알아? 나한테 왜 이래! 왜!”

손이 결박된 김진구가 몸을 비틀며 소리쳤다. 눈을 희번덕거리며, 세상 억울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은비는 확신할 수 있었다.

16551134734524.jpg“목소리도 딱 이 남자예요! 틀림없어요!”

은비는 결연한 표정으로 단단히 주먹을 쥐었다. 동경해온 오빠를 건드린 범인은 제게도 원수와 같았다. 한편으로는 정의로운 일을 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찼다. * 범인이 붙잡힌 후, 장 여사는 아들의 소지품들을 건네받았다. 휴대폰과 차 스마트키, 그리고 반지 케이스였다. 반지 케이스. 휴대폰 전원을 켠 후, 장 여사는 아들이 ‘정오’라는 사람과 데이트를 앞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데이트 때문에, 집에 오라는 엄마의 부탁도 거절한 거고. 그러느라 뺑소니 사고를 당한 것이고.

16551134769166.jpg- 오빠, 어디야?

16551134769166.jpg- 오빠, 오늘 3시에 만나기로 했잖아. 무슨 일 생겼어?

16551134769166.jpg- 연락이 안 되네. 걱정된다. 메시지 보면 연락해.

16551134769166.jpg- 대체 무슨 일이야. 아무 일 없는 거지? 제발 문자라도 보내줘.

  ‘정오’에게서 온 수십 개의 문자메시지를 확인한 장 여사는 주먹을 쥐어 가슴을 쿵쿵 쳤다.

16551134901394.jpg“소개시켜드릴 친구가 있어요.”

  아들은 마지막 전화 통화에서 그런 말을 했었다. 아마도 이 ‘정오’라는 아이를 소개해주려던 것 같다. 대체 얼마나 좋아하길래 내 부탁도 거절하고 데이트를 가려고 했었니. 장 여사는 아들의 여자친구가 마냥 원망스러웠다. 사람을 시켜 ‘이정오’라는 아이에 대해 알아본 장 여사는 더욱 기가 막혔다. 이정오. H대 3학년. 23세. 미혼모의 딸. 애비도 없이 자란 아이. 집이 찢어지게 가난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엄마란 사람은 고등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여자였다.

16551134769181.jpg“이런 애 때문에, 내 아들이…….”

수술은 잘 끝났지만 지헌은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다. 아들의 의식이 돌아오지 않으니 이정오가 더욱 미웠다. 장 여사는 지헌의 휴대폰으로 정오에게 짧은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

16551134901402.jpg- 다시는 연락하지 마.

  연락이 끊어진 지 사흘 만에 지헌에게서 문자메시지가 왔다. 짧은 문자메시지의 내용은 정오를 당황케 했다. 그녀가 아는 정지헌은 이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정오는 곧장 지헌의 집을 찾았다. 지헌의 집에 자주 가진 않았지만, 한 달에 한두 번은 초대를 받았다. 지헌은 정오에게 도어록 비밀번호를 알려주기도 했다. 언제든 와서 자고 가도 된다고. 그랬던 사람이 대뜸, 문자로 이별을 통보한다고?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고? 정오는 메시지의 진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무언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헌의 집 앞에 도착하자마자 정오는 난관에 부딪혔다.

16551134769166.jpg‘1903호. 여기가 맞는데……?’

지헌의 집 1903호의 도어록은 정오의 기억과 달랐다.

16551134769166.jpg‘설마…….’

심장이 울렁거렸다. 벨을 눌렀지만 안에서는 응답이 없었다. 정오는 바르르 떨려오는 손끝으로 자신이 알고 있는 도어록 비밀번호를 눌렀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정오는 자신의 집 비밀번호, 자신의 생일, 지헌의 생일을 차례로 눌러보았다. 몇 번 번호를 틀리니 시끄럽게 경보음이 울렸다. 정오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을 때, 안쪽에서 문이 열렸다. 중년의 여인이 매서운 얼굴로 정오를 빤히 바라보았다. 정오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여인에게 물었다.

16551134769166.jpg“저, 여기, 정지헌 씨 집 아닌가요?”

16551134769181.jpg“이정오 학생?”

상대는 정오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16551134769181.jpg“나 지헌이 엄마예요. 들어와요.”

싸늘하게 내뱉은 말이 쇠사슬처럼 정오를 끌어당겼다. 정오는 붙들려가는 기분이 되어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갔다. 장 여사는 집 안으로 들어온 정오를 위아래로 훑었다.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쭈뼛쭈뼛 다가온 정오를 보며 장 여사는 헐겁게 한숨을 쉬었다. 편모가정에서 자란 아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인지 태생적 그늘이 보이는 것 같았다. 이런 아이를 내 아들의 곁에 둘 수는 없다.

16551134769181.jpg“남의 집 도어록을 계속 누르는 건 무슨 경우 없는 행동이지?”

16551134769166.jpg“예전에 지헌 오빠가 도어록 비밀번호를 알려줘서요.”

16551134769181.jpg“비밀번호가 바뀌었으니 하는 말이지. 한 번 눌러봐서 아니다 싶으면 포기해야 하는 거 아닌가?”

16551134769166.jpg“죄송합니다. 오빠가 연락이 안 돼서, 혹시 무슨 일 생긴 건 아닌지 해서요.”

보기보다 맹랑한 아이였다. 점잖은 말로는 떨어지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 여사는 좀 더 강경하게 정오를 타박했다.

16551134769181.jpg“우리 지헌이를 얼마나 괴롭힌 거지?”

16551134769166.jpg“…….”

16551134769181.jpg“학생이 얼마나 지겹게 굴었으면 우리 지헌이가 나를 보냈나 싶은데.”

유리 파편처럼 날카로운 말들에 정오의 눈에는 유리막 같은 눈물이 생겨났다. 장 여사는 두고 볼 수가 없어 고개를 돌려버렸다.

16551134769181.jpg“알아들었으면 다시는 찾아오지 말아요. 지헌인 학생 같은 애들 상대할 만큼 한가하지가 않아.”

16551134769166.jpg“어머니, 잠깐만요.”

정오가 애원하듯이 장 여사를 붙잡았다.

16551134769166.jpg“오빠랑 한 번만 통화하게 해주시면 안 될까요?”

16551134769181.jpg“얻다 대고 어머니야.”

장 여사는 정오의 팔을 세차게 뿌리쳤다. 내 아들은 지금 생사를 헤매고 있어. 네가 아무리 통화하게 해달라고 애원해도 할 수 없는 상태라고. 이 모든 것이 이정오 때문인 것 같아 치가 떨렸다.

16551134769181.jpg“좋게 얘기할 때 나가요. 우리 지헌이 더 괴롭히지 말고.”

장 여사는 더없이 사납게 말했다. 정오의 눈물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 지헌이 사고를 당한 지 어느덧 보름이 흘렀다. 지헌은 여전히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은비는 매일같이 병실에 찾아왔다.

16551134734524.jpg“어머니, 좀 쉬셨어요?”

병실을 지키는 장 여사에게, 은비는 밝게 인사했다.

16551134769181.jpg“은비 왔구나.”

장 여사의 힘 없는 인사에 은비는 이내 걱정스러운 눈빛이 되었다.

16551134734524.jpg“이러다가 어머니도 쓰러지시겠어요. 영양주사라도 맞으셔야 할 것 같아서 아는 의사 선생님께 부탁드렸어요.”

16551134769181.jpg“난 괜찮아.”

16551134734524.jpg“그래도 주사 맞으세요. 오늘은 오빠가 깨어날 것 같아요. 오빠 깨어나면 어머니를 제일 먼저 찾을 텐데 밝은 얼굴 보여주셔야죠.”

은비는 장 여사를 병실 밖으로 이끌었다. 장 여사는 못 이기는 척 은비의 권유에 따라 예약된 입원실로 향했다. 장 여사를 내보낸 후, 지헌은 은비의 차지가 되었다. 은비는 잠자는 숲속의 왕자님처럼 곤히 잠들어 있는 지헌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눈을 감고 있어도 수려한 외모는 그대로다. 어쩌면 당신은 3년 동안 하나도 변하질 않았는지. 아니, 그동안 더 멋있어진 것 같기도 하고. 도둑 뽀뽀 한 번만 해볼까? 어차피 모를 텐데. 지헌의 미모에 홀린 은비의 입술이 점점 지헌과 가까워졌다. 입술이 닿기 1초 전.

16551134999794.jpg“흠흠.”

병실 문이 열리며 남자가 들어왔다. 은비는 곧장 지헌에게서 떨어져 자리에 고쳐 앉았다. 지헌의 친구, 박승규였다. 지헌의 고등학교, 대학교 동창이자 군대 선임이었다는 친구.

16551134999794.jpg“오늘도 계시네요.”

마치 빈정거리는 것만 같은 승규의 인사에 은비는 미소로 화답했다.

16551134734524.jpg“네. 오빠가 걱정돼서요.”

친절한 대답에도 승규는 떨떠름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16551134734524.jpg“승규 씨는 무슨 일로 오셨어요?”

16551134999794.jpg“무슨 일로 왔겠습니까. 친구 보러 왔지.”

은비의 물음에 승규가 불퉁스럽게 대답했다. 무턱대고 자신을 싫어하니, 은비도 잘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설사 그가 지헌의 친구라도. 승규는 은비와 지헌 단둘만 남겨두기 걱정된다는 듯 지헌의 앞에 바짝 와 앉았다. 가뜩이나 고요한 공간에 답답한 적막이 가득 찼다.

16551134999794.jpg“참, 좀 이상한 게 있는데.”

적막 속에서 지겨움을 느끼고 있는 은비에게 웬일로 승규가 말을 건넸다.

16551134999794.jpg“지헌이 사고는 오후 1시에 일어났고, 신고가 접수된 건 1시 20분이더라고요. 신고한 사람은 남자고.”

16551134734524.jpg“…….”

16551134999794.jpg“그쪽이 사고를 목격했다고 하지 않았나요? 왜 바로 신고를 안 했죠?”

뜻밖의 질문에 은비는 당황했다.

16551134734524.jpg“……휴대폰 배터리가 없었어요. 전원 켜자마자 신고했는데 이미 다른 사람이 먼저 신고를 했더라고요.”

승규가 떨떠름하게 끄덕였다. 승규의 반응에 은비는 기분이 상했다. 찔리는 구석이 있어서, 제 발이 저려서 더 그랬다.

16551134734524.jpg“근데 왜 그런 걸 물어보세요?”

16551134999794.jpg“아니 뭐…… 헉! 지헌아!”

대답을 얼버무린 승규가 돌연 지헌의 이름을 불렀다. 은비도 지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16551134734524.jpg“오빠!”

16551134999794.jpg“지헌아, 정지헌!”

드디어 지헌이 눈을 떴다. 아무 말 없이 눈만 깜빡이며 눈동자를 굴리던 지헌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듯 표정으로 용을 썼다. 승규는 전동침대의 상체를 올려 지헌이 몸을 일으키도록 도와주었다.

16551134999794.jpg“괜찮아? 나 보여?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어?”

지헌의 자리를 잡아준 승규가 지헌에게 물었다. 승규를 오랫동안 쳐다보던 지헌이 입을 열었다.

16551134901394.jpg“누구……”

언뜻 알 듯한 얼굴이었지만 이름은 떠오르지 않았다.

16551134999794.jpg“……나를 몰라?”

16551134901394.jpg“…….”

16551134999794.jpg“박승규! 우리 고등학교 대학교 동창이잖아! 그리고 내가 네 군대 선임이고. 너 제대하고 나서 우리 친하게 지냈잖아. 기억 안 나?”

16551134901394.jpg“군대?”

지헌은 핏기가 마른 입술로 더듬더듬 물었다. 아직 훈련소 입소까지 몇 달 더 남아 있다고 생각했는데 대뜸 군대 선임이라니.

16551134901394.jpg“군대를 다녀왔다고? 내가?”

그의 반문에 승규와 은비 두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 이들이 이렇게나 모호한 표정인지, 지헌은 알 길이 없었다. 순간 끔찍한 두통이 밀려왔다. 끄윽. 지헌은 인상을 구기며 거친 신음을 내뱉었다.

16551134999794.jpg“지헌아!”

16551134734524.jpg“오빠!”

제 앞에 있는 이들의 목소리가 멀게 들렸다. 바늘이 뇌를 찌르는 듯했다. 무언가 아주 중요한 걸 잊은 것 같은데. 누군가가 울고 있을 것 같은데. 가슴이 저릿하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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