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 나의 공주님 (7/183)

7. 나의 공주님2021.05.22.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정오에게는 욕지기가 솟을 만큼 아픈 하루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끝이 행복할 수 있는 건 안락한 집과 생때같은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일찍 퇴근한 날은 국순의 식당으로 가 뒷정리를 돕는데, 오늘은 웬일로 국순도 일찍 식당 문을 닫았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정오에게, 강아지 같은 딸이 다다다다 뛰어왔다.

16551136106217.jpg“엄마아!”

16551136106223.jpg“예나 공주!”

예쁨과 귀여움으로 우주를 뿌시는 나의 공주님!

16551136106228.jpg

  쭉 빠졌던 정오의 기운이 딸과 함께 완전히 충전되었다. 정오는 달려온 예나를 거뜬히 안아 들었다.

16551136106233.jpg“야근 안 했네?”

국순이 손의 물기를 바지에 문질러 닦으며 거실로 나왔다.

16551136106223.jpg“응. 첫날이잖아.”

쪽쪽, 정오는 예나의 뺨에 뽀뽀를 해주며 국순에게 대답했다. 난 이대로 행복해. 이건 정지헌 당신이 망가뜨릴 수 없어. 언젠가는 지옥이었던 삶이 이제는 천국이 되었다. 사랑을 잃었다고 생각했을 때 더 큰 사랑이 찾아왔다. 딸 예나가 가르쳐준 사랑은 살아가는 힘이 되어주었다. 그래서 막연히 정지헌을 원망하고 미워할 수도 없다. 그저 이 천국이 망가지지 않길 바랄 뿐이다. 밤 9시 무렵. 정오는 자리를 펴고 예나와 나란히 누웠다. 어린이는 꿈나라에 들 시간이었다. 방의 불을 끄고 예나에게 팔베개를 해주었지만, 에너지 넘치는 일곱 살 어린이가 쉬이 잠이 들 리는 없었다. 예나는 정오에게 연거푸 장난을 걸며 까르르 웃다가 몇 번 잔소리를 들은 끝에 바로 누웠다. 눈을 깜빡이던 예나가 나지막이 엄마를 불렀다.

16551136106217.jpg“엄마, 나 오늘 학원에서 일곱 살 만났어.”

16551136106223.jpg“친구 생겼구나!”

16551136106217.jpg“아직 친구는 아니야. 걔는 바둑을 하나도 몰라.”

16551136106223.jpg“바둑을 몰라도 친구 할 수 있지. 예나가 가르쳐주면 되겠네. 언젠가 친구도 예나처럼 잘 할 수 있을 거야.”

16551136106217.jpg“걔는 바둑 배우기 싫다고 막 울었는데?”

16551136106223.jpg“그래도 언젠가 좋아할 수도 있지.”

딸에게 친구가 생겨 반가운 마음에 정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예나는 엄마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투로 입술을 실룩거렸다.

16551136106223.jpg“친구는 이름이 뭐야?”

16551136106217.jpg“박도빈.”

16551136106223.jpg“남자야?”

16551136106217.jpg“응.”

예나의 말소리가 한결 느려졌다.

16551136106217.jpg“걔네 엄마는 오늘도 찾아오고 어제도 찾아왔었어.”

16551136106223.jpg“…….”

16551136106217.jpg“내일도 올 거 같아.”

졸음이 오는 목소리를 가장하고 있었지만, 정오는 그 말에 담긴 속뜻을 눈치챌 수 있었다.

16551136106223.jpg“도빈이가 부러웠어?”

16551136106217.jpg“아니.”

16551136106223.jpg“…….”

16551136106217.jpg“……아주 쪼금 부러웠어.”

망설이다 보여준 딸의 진심에 정오는 심장이 따끔따끔했다. 나의 공주님. 사랑하고 아끼는 만큼 뭐든 해주고 싶은데, 몸은 하나라 해줄 수 있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아빠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그 생각에 이르러 괜스레 지헌을 떠올렸다.

16551136106223.jpg‘근데 내가 예나를 낳았단 사실을 모르나? 어떻게든 물어볼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헌을 떠올리기 무섭게 머릿속에 커다란 물음표가 생겨났다.

16551136106223.jpg‘내가 아이를 포기했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는 건가?’

어쨌든 그가 사실을 알게 된다고 하더라도, 이제 와서 딸을 데려가겠다느니 헛소리를 하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정오는 지헌을 생각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힘없이 주먹을 풀며 한탄했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몰래 키운 내 아이의 아빠를 회사에서 만나다니. 그것도 까마득한 상사로. 7년 만에 만난 그 남자는 여전히 수려한 용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인상은 많이 차가워졌지만.

16551136106223.jpg‘여자도 많았을까?’

당연하겠지. 그렇게 여자를 좋아하던 사람인데. 사귀기 전까지, 아니, 첫 키스 이전까지는 전혀 성욕이 없는 남자인가 싶을 만큼 금욕적인 모습이었는데. 이 자식, 본성은 아주 짐승이었다. 단둘뿐인 공간에서의 정지헌은 개방된 장소에서의 정지헌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집착이다 싶을 만큼 그녀를 괴롭혔고, 그것을 즐기는 것도 같았다. 주말을 함께 보내게 되면 그는 밤을 꼬박 새울 듯이 그녀를 원했다. 기어이 지친 그녀가 잠든 척을 해야 할 때도 있었다. 아니, 밤이든 낮이든 때가 중요하진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나 밝히던 사람인데. 여자도 손가락으로 다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았겠지.

16551136106223.jpg‘이 여자 저 여자 홀리고 다녔겠지.’

그리고 나 같은 건 금방 지워버렸겠지. 그의 시간은 그렇게나 유유히 흘러갔는데, 자신만 안절부절못했단 생각에 서러워졌다. 가슴 한편에는 여전히, 떠나지 못한 계절이 고여 있다.

16551136106223.jpg‘역시 회사는 그만두는 게 나을까?’

감정에 얽매이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도망가는 처지가 되고 싶지도 않았다. 시름이 깊은 밤이었다. * 다음 날 아침. 지헌은 본가를 찾았다. 실은 어제 방문하여 하룻밤 자고 부모님과 조찬을 함께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컨디션이 좋지 않아 아침에 들른 것이다. 하나 아침이라고 기분이 나아진 것도 아니었다. 어젯밤 괴상한 꿈을 꾸고 여태 그는 멍한 상태였다. 귀신에 홀린 것처럼.

165511361713.jpg“왜 그래. 어디가 불편해?”

식사 중에 지헌이 어깨를 거듭 주무르는 걸 눈여겨 본 장영미 여사가 물었다. 나이 서른셋 먹고 소파에서 자다가 떨어졌다고 할 수도 없고.

16551136171307.jpg“잠을 잘못 잤나 봐요.”

지헌은 대강 대답했다.

16551136171311.jpg“직원들 앞에서는 태도 조심해. 너무 불편한 모습을 보이면 오해할 수도 있는 거야.”

아버지 정재광이 때를 놓치지 않고 조언했다.

16551136171307.jpg“네.”

지헌이 짧게 대답했다. 부모님과의 식사가 편하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일 얘기밖에 하지 않는 무뚝뚝한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지헌에게 과한 관심을 갖는 사람이었다. 자칫 결혼 얘기라도 나왔다가 식사 자리가 길어질 것만 같아 지헌도 묵묵히 있었다.

16551136171311.jpg“새 직장은 어떠냐. 일은 할 만해?”

16551136171307.jpg“그럭저럭이요. 이제 사람들 얼굴 겨우 익혔어요.”

지헌이 아버지의 질문에 대강 대답하니 영미가 거들었다.

165511361713.jpg“여보. 지헌이 회사 옮긴 지 겨우 일주일 됐잖아요. 참, 그 회사에 은비도…….”

16551136171307.jpg“아버지, 근데 형은요?”

귀찮은 얘기가 나올 조짐이 느껴지자 지헌은 급히 재광에게 말을 걸었다.

16551136171311.jpg“갑자기 출장이 잡혔대.”

16551136171307.jpg“형도 같이 식사하면 좋았을 텐데. 많이 바쁜가 보네요.”

영미는 못마땅한 표정이었으나 지헌은 괘념치 않았다. 천연스럽게 위기를 넘긴 지헌이 영미와 눈이 마주치자 정제된 미소를 지었다. 별일 없이 식사가 끝나고. 출근하기 전에 방에 들른 지헌은 어렸을 적 읽던 책들을 살폈다. 본가에 오면 항상 기분이 묘했다. 아주 어릴 적의 기억은 꽤 선명한데 7년 전, 스물여섯 살 때의 기억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이 와닿는 장소였다. 그때의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무슨 생각을 했을까. 기억이 나질 않으니 더 집착하게 되는 면도 있었다. 펼쳤던 책을 다시 자리에 꽂았을 때 방문이 열리고 영미가 들어왔다. 아들을 발견하자 단번에 얼굴이 환하게 핀 영미가 다가와 물었다.

165511361713.jpg“오늘은 아침에 시간 좀 있어?”

16551136171307.jpg“이제 출근해야죠.”

아들과 오랜만에 데이트를 해볼까 생각했던 영미는 아쉬워졌다. 지헌이 그런 영미를 불렀다.

16551136171307.jpg“어머니.”

165511361713.jpg“응?”

16551136171307.jpg“제가 기억을 잃은 그 3년 동안요.”

지헌이 운을 떼자 영미의 눈가에 서늘한 그늘이 졌다. 아들이 기억을 잃은 3년. 영미가 가장 싫어하는 주제였다.

16551136171307.jpg“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165511361713.jpg“군대에 다녀오고…… 그 외에는 똑같았지 뭐.”

별것 아닌 듯 가벼운 대답에 지헌이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말했다.

16551136171307.jpg“역시 군대인가?”

영미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손을 위로 들어 올려 아들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165511361713.jpg“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는 건 거기 얽매이지 말란 뜻일 거야.”

16551136171307.jpg“그래도 뭔가 일이 하나는 있었을 것 같은데.”

165511361713.jpg“…….”

16551136171307.jpg“뭘 잊은 거 같은데 그게 뭔지 모르겠어요.”

165511361713.jpg“너 그건 기억하니? 옛날에는 이 자리에 붉은 반점이 있었어.”

아침 식사 때 아들이 그랬던 것처럼, 엄마 역시 버거운 주제를 피해 화제를 돌렸다. 아들의 이마에는 오랫동안 붉은색의 불꽃 모양 모반, 연어반이 있었다. 보통 세 살 이전에 없어진다던데 아들의 연어반은 꽤 오래 갔다. 아마 중1 무렵에 사라진 것 같다.

16551136171307.jpg“알죠. 그것 때문에 앞머리로 이마를 덮고 다녔는데.”

지헌이 별 시답잖은 얘기라는 듯 대답했다. 영미는 연어반이 사라진 자리를 더듬으며 추억에 잠긴 듯 말을 이었다.

165511361713.jpg“네 표정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까지 확인할 수 있었지. 여길 보면.”

16551136171307.jpg“…….”

165511361713.jpg“그땐 그랬는데 말이야.”

지헌에게는 떠름한 기억이었다. 표정을 숨겨도 마음이 읽힌다는 건 당사자에겐 좋은 일이 아니었다. 기분이 안 좋을 때는 연어반이 붉게 도드라져서 싫었다. 그런 속내를 다 알지 못하는 영미가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조잡한 사연들을 갈무리했다.

165511361713.jpg“7년 전 일에는 너무 마음 쓰지 마.”

지금은 남아 있는 마음이랄 게 없는데. 마치 그때 마음을 다 소비한 것처럼. 여전히 지헌은 속내를 숨기고서 살아간다.

165511361713.jpg“그래도 뭔가 어려운 일이 생기면 엄마한테 얘기하고. 알았지?”

16551136171307.jpg“네.”

165511361713.jpg“사랑해, 아들. 엄마는 너뿐이야.”

어머니의 포옹에 헐겁게 반응한 지헌은 곧장 인사하고서 본가를 떠났다. 착한 아들로서의 연극무대에서 벗어난 지헌의 눈은 금세 온기를 지웠다. 꽉 막혀 있던 숨을 토해낸 지헌은 거칠게 가속페달을 밟았다. 밝은 아침이건만 머릿속은 맑지 않았다. 그을음이 끼어 빠지지 않는 느낌이었다. 7년 전의 일을 끄집어내어 그런 것인지 어젯밤 꿈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 같은 시각, 맥스기획 탕비실. 정오는 퀭한 눈으로 커피를 내렸다. 회사를 계속 다녀야 하나 그만둬야 하나 생각하느라 새벽녘에야 잠이 들었다. 겨우 내린 결론은 일단은 다녀야 한다는 거였다. 일단은 열심히 다녀야 한다. 그것이 최선이었다. 자식을 위해 평생을 희생하신 엄마와, 쑥쑥 커가는 딸이 있는 한 무너져서는 안 된다. 정지헌은 임원이니 자주 마주치지 않겠지. 잘 피해 다니면 몇 달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다시 이직 준비를 하자. 방향을 정하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커피를 타가지고 돌아서는 발걸음도 꽤 가벼웠다. 그러나 그 기분은 오래 가지 않았다. 정오는 자리에 우뚝 서버렸다. 어제의 정지헌에 이어 오늘 또 한 명의 빌런이 나타났다. 상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정오를 반겼다.

16551136267967.jpg“어머, 이게 누구야? 너 이정오 맞지? 나 누군지 기억하겠어?”

물론 기억 못 할 리가 없지. 단지 기억하기 싫을 뿐이다. 내 학창 시절, 가장 많은 눈물을 안겨주었던 그 친구가, 왜 여기에…….

16551136267967.jpg“나 채은비야. 모르겠어?”

16551136106223.jpg“……어, 알지. ……채은비.”

16551136267967.jpg“정말 반갑다. 정오야! 그동안 잘 지냈어?”

우리는 그런 사이가 아닌데. 저쪽에서 너무 반갑게 말을 건네니 정오는 더욱 당황스러웠다.

16551136106223.jpg“어, 뭐, 그럭저럭. ……너 이 회사에 다녔어?”

16551136267967.jpg“응. 나 카피라이터.”

하나 마나 한 정오의 질문에 은비가 웃으며 답했다. 그래도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도 어언 10년이 되었고, 회사에서 일로 만난 사이니 과거를 들추는 건 의미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채은비는 잊었을지도 모르는 지난 일에 얽매여 있을 수는 없었다. 이제 쿨하게 잘 지내볼까? 어차피 길게 있지도 않을 회사. 마음에 새로운 다짐을 불어넣고 반갑게 입술을 떼려 할 때, 은비가 먼저 말을 건넸다.

16551136267967.jpg“그러고 보니 우리 옆 팀에 들어왔다던 대리가 너였구나? 제작 2팀?”

은비의 입술이 동그랗게 오므라졌다. 정오에 대해 무척이나 궁금하다는 듯이.

16551136106223.jpg“응.”

16551136267967.jpg“대리 몇 년 차?”

16551136106223.jpg“1년 차야.”

16551136267967.jpg“1년 차? 대체 뭐 하다가?”

왠지 느낌이 싸하다 싶은 순간, 둥글게 오므리고 있던 은비의 입술이 길게 펴졌다. 한쪽이 상대적으로 더 긴, 비틀린 미소였다. 하찮은 아랫것을 상대하는 귀부인의 표정이었으나 두 눈에선 언뜻 희열이 스쳤다.

16551136267967.jpg“난 과장이거든.”

16551136326202.pn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