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내 아이의 아빠가 알고 보니2021.05.26.
이정오에게 채은비는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는 기억이다. 정오와 은비는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1학기 때의 정오는 같은 반 친구들과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은비는 꽤 인기가 많았다. 항상 친구들에 둘러싸여 있었고 그 주변에서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은비의 모든 것은 언제나 화젯거리였다. 입는 옷, 가방, 신발, 갖고 다니는 화장품, 필기구까지, 명품이 아닌 것이 없었고 관심을 보이는 친구가 있으면 간혹 선물로 주기도 했다. 은비의 곁에 있는 친구들은 다들 은비가 쓰던 것을 하나씩은 갖고 있었다. 오며 가며 은비네가 법조인 집안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게다가 은비의 어머니는 자모 회장이었기에 선생님들도 은비에게 곧잘 부모님의 안부를 묻곤 했다. 여러모로 빛나는 친구였다. 그렇다고 정오가 은비를 부러워한 건 아니었다. 정오는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감사할 줄 아는 학생이었다. 어쨌든 두 사람은 원만하게 지냈다. 1학년 1학기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아니, 어쩌면 정오가 기억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었을 수도 있겠단 생각은 든다. 하지만 그 문제가 학교생활을 위협하지는 않았다. 1학년 2학기 중간고사가 막 끝났을 무렵, 은비가 정오에게 살갑게 말을 걸었다.
“정오야, 이거 가질래? 나 한 번도 안 쓴 거야.”
은비가 내민 건 립글로스였다. 편자 두 개를 겹쳐 놓은 모양의 브랜드 로고가 립글로스의 가격을 짐작하게 했다. 정오의 신발과 가방을 합친 것보다도 비쌀 터였다. 한번 만져나 볼까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정오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냐. 괜찮아.”
“하나 가지고 있으면 좋을 거야.”
“아니. 난 화장 안 해서. 정말 괜찮아.”
은비가 왜 이런 선물을 권하는지 정오는 알 길이 없었다. 이유 없는 선물이라 더욱 부담스러웠다. 정오가 거듭 거절했지만 은비는 한 번 더 권했다.
“넌 얼굴도 예뻐서 화장하면 더 예쁠 텐데. 그리고 이거, 명품이야.”
“난 정말 필요 없어, 은비야.”
아무도 없는 교실. 정적을 채우는 조용한 목소리가 정색하는 것처럼 보일까 하는 마음에 정오는 조심스럽게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마음 써줘서 고마워. 미안.”
그 정중한 거절이 은비의 심기를 건드렸을까. 은비의 입술이 슬며시 비틀어진 것 같았다. 그때의 대화를 끝으로 은비는 단 한 번도 정오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이후, 정오는 반 친구들의 눈길이 예전과 다름을 느꼈다. 은근한 따돌림이라고 해야 할까? 만나면 밝게 인사하던 친구들이 언젠가부터 웃어주지 않았고 정오가 지나가면 대화를 뚝 멈추는 일도 잦아졌다. 은비와 가까운 친구들은 대놓고 정오를 무시하기도 했다. 급식을 먹으러 갈 때도 정오는 혼자였다. 혼자인 게 크게 서럽진 않았다. 점심, 저녁 시간은 정오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맛있는 음식과 더불어 정오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급식소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정오의 엄마, 이국순 여사. 국순은 그해 여름부터 정오의 학교로 출퇴근하게 되었다. 국순이 다니던 회사에서 정오네 학교의 급식을 맡게 된 것이다. 국순에게도 점심, 저녁 시간은 하루 중 가장 뿌듯한 시간이었으리라. 정오는 급식소에서 일하시는 엄마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예쁜 딸이었다. 국순은 딸에게 피해가 갈까 봐 모른 척하려 했으나 정오는 굳이 이 사실을 감추진 않았다.
“잘 먹겠습니다.”
엄마. 잘 먹겠단 인사 이후 나지막이 발음한 ‘엄마’라는 말에 국순의 입꼬리가 길게 올라갔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애틋했다. 그래서 쉽게 불행해질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덜컥 사건이 터졌다. 점심시간. 정오가 막 급식소에 도착했을 때, 누군가의 고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오도 시끄러운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함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채은비였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 선 사람이 바로 정오의 엄마, 국순이었다.
“아주머니, 국그릇에 손을 집어넣으면 어떻게 해요, 불결하게.”
국순이 은비의 국을 퍼 전해주다가 실수를 한 모양이었다. 국순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은비의 국그릇을 다시 가져가려고 했다.
“학생 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아아앗!”
그때 은비가 더 호들갑스럽게 식판을 내던지며 옆으로 쓰러졌다. 챙강. 와르르. 쓰러진 은비의 교복은 물론이고 식판을 떨어뜨리며 음식이 사방으로 튀어 배식대가 엉망이 되었다.
“무슨 일이야!”
영양사가 달려왔다. 은비의 친구가 은비를 일으키며 사납게 소리쳤다.
“이 아줌마가 은비 국그릇에 손가락 집어넣어서 컴플레인했더니 밀쳤어요.”
“아니 학생, 그건 오해야.”
“사과하세요.”
억울해진 국순이 항변하고자 했으나 은비가 국순의 음성을 짓눌렀다. 급식소 안이 싸해졌다.
“어른이 그러시면 안 되는 거잖아요. 어른이면 어른답게 사과하세요.”
점잖고도 야무진 은비의 요구에 정오는 주먹을 꽉 쥐고는 그 앞으로 쫓아갔다. 이를 알아본 국순이 곧장 머리를 숙였다.
“미안해요.”
그리고 모두가 보지 못하도록 손을 휘휘 저었다. 이쪽으로 오지 마. 정오에게 보내는 수신호였다. 정오는 국순에게 더 가까이 가지 못하고 자리에 우뚝 서서 엄마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래로 늘어뜨린 손이 바르르 떨려왔다. 은비 역시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사과하셨으면 책임지세요.”
그런 모습으로, 상처받은 표정으로 내뱉은 야무진 말에 급식소는 다시 한번 냉기가 흘렀다.
“어떻게 책임지실 거예요?”
은비의 추궁에 국순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당장 엄마의 손을 잡고서 급식소를 떠나고 싶었지만, 정오 역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꽉 쥔 손의 손마디가 하얗게 질려갔다. 그 사건으로 국순은 온갖 추궁을 받게 되었다. 은비와의 일에 더하여 작업 전에 손을 씻지 않는다는 누명, 식기와 조리기구를 비위생적으로 관리한다는 누명, 그 외의 근무태만 누명이 얹혀 국순은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게 되었다. 딸에게 화살이 돌아가지 않게 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러나 국순이 회사를 그만둔 후에도 정오는 엄마에 대한 여러 낭설들과 싸워야 했다.
“쟤네 엄마가 우리 학교 급식소에서 일했었다며? 반찬을 일부러 맛없게 만들어서 애들이 많이 남기게 한 다음에 집에 다 싸들고 갔다더라. 쟤 먹이려고.”
“뭐야. 급식 거지네?”
사실이 아니었다. 국순이 영양사에게 자신이 잘하는 요리의 비법을 알려준 후 남은 음식을 집에 싸 가지고 온 것. 그게 다였다. 그 모든 정황을 알고 있는 사람은 채은비뿐이었다. 참다못한 정오가 은비에게 물어보았다.
“은비야, 혹시 나에 대해 이상한 소문 내는 거 아니지?”
“그게 무슨 소리야? 이상한 소문이라니.”
“엄마 회사에서 감사 나왔을 때, 너는 감사관들이 엄마한테 하는 말 다 들었잖아.”
“무, 무슨 말을 들었다고 그래. 왜 생사람을 잡니?”
은비가 소리를 높이니 아이들이 쫓아왔다.
“은비야,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은비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쫓아온 친구의 어깨에 픽 기댔다. 친구가 은비를 붙잡아주며 정오를 노려보았다. 은비는 떨리는 목소리로 정오에게 말했다.
“너희 어머니께서 일을 그만두신 걸 나 때문으로 만들고 싶겠지만, 그러면 안 돼.”
“이정오. 가해자가 피해자한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은비를 감싸 안은 친구가 바락 소리쳤다. 정오는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말을 보탰다가는 더욱 몰릴 것이 뻔했다. 두 눈을 질끈 감고 돌아섰다. 그저 이를 악물고 버텨야 했다. 자신이 무너진다면 엄마의 가슴에는 더 큰 못이 박힐 것이기에. 그렇게 정오의 고등학교 생활엔 꼬리표가 붙어버렸다. 그 꼬리표는 정오의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그 뒤를 따라다녔다.
***
“1년 차? 대체 뭐 하다가?”
“…….”
“난 과장이거든.”
이 물음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대학교를 휴학하고 아이를 낳았다. 복학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동기들이 다들 취업하여 한 직급 올라갔을 때쯤 신입사원으로 회사 생활을 시작했다. 나름의 사정이 있었지만 그 사연을 은비에게 굳이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 과장님이구나.”
정오가 끄덕이니 못마땅하다는 듯 은비의 미간에 슬쩍 주름이 졌다.
“응. 그러니까 회사에선 존댓말로 해줘. 너도 그 정도는 알지?”
정오는 씁쓸한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그럼 또 보자. 자주 보겠다, 우리.”
은비는 굳이 정오의 대답을 기다리지는 않고 돌아섰다. 탕비실을 떠나는 은비의 발걸음이 들어올 때보다 더 가벼워 보였다. 정오는 제 신세를 한탄했다.
‘정지헌에 이어 채은비라니.’
과거의 악연 두 사람을 같은 회사에서 만났다. 그것도 자주 마주칠 만한 사이로. 지헌은 같은 본부의 본부장, 은비는 바로 옆 팀이었다. 한 놈을 피해 도망가도 다른 한 놈이 있으니 진퇴양난이었다. 이게 바로 회사라는 이름의 지옥인가.
‘내가 빨리 이 회사를 그만둬야 하는데. 이직해야 하는데.’
시름 가득한 표정으로 차를 타갖고 돌아와 자리에 앉았을 때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인사팀에서 온 문자 메시지였다.
- 이정오 대리님, 인사팀에 오셔서 연봉 계약서에 사인해주세요.
회사는 그만두더라도 연봉은 확인해야지. 궁금하니까. 이직 조건에 연봉 내용도 포함되어 있어 연봉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회사가 달라진 터라 계약 사항에 변화가 있을지 궁금했다. 정오는 바로 인사팀으로 내려갔다. 인사팀 문 앞에서 남자 직원이 정오를 맞았다. 선한 인상을 가진 남자였다.
“안녕하세요. 이정오 대리님. 인사팀 박승규라고 합니다.”
“네. 안녕하세요.”
“들으셨을지 모르겠는데 연봉이 약간 달라졌습니다.”
“달라졌다뇨?”
정오는 눈 끝을 세우고서 표독스럽게 물었다. 이직 회사가 달라진 것도 억울한데, 연봉마저 깎였다면 더는 회사에 있을 수 없었다. 기존의 협상 금액에서 단 10만 원도 양보할 수 없었다.
“상향 조정됐어요. 기존 계약조건에 올해 연봉 인상분까지 반영됐습니다.”
“아.”
“괜찮으세요?”
“네. 괜찮고 말고요. 여기 사인하면 되나요?”
연봉을 확인한 정오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기존 협상 금액보다 300만 원이 상향 조정되었다. 주머니가 풍족해지면 마음도 넉넉해진다.
‘이 회사, 다닐 만하겠는데? 위치도 괜찮고.’
300만 원에 마음이 물러지는 정오였다.
“그리고 인적 사항도 작성 부탁드립니다.”
정오가 사인을 한 후 승규는 다른 문서 한 장을 더 내밀었다. 인사팀에서 관리하는 인적사항 서류였다. 인적사항에는 집 주소, 연락처, 출신 학교, 혼인 여부 등을 기록하게 되어 있었다. 가족관계에 대해서는 따로 표기란이 없었다. 의외였다.
“그런데요, 여기…….”
“네. 무슨 문제라도?”
“아, 아니에요.”
정오는 누락사항에 대해 물어볼까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굳이 가족관계를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정지헌이 아직 예나에 대해 알지 못한다면, 그냥 그대로 두고 싶었다. 어쩌면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제 집무실로 따로 불러서 하려던 말도 그런 당부가 아닐까 생각했다. 소동 일으키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당부. 원만하게 직장생활을 해나가기 위해선 조용히 지내는 게 좋을 것이다. 정오는 망설임 없이 서류를 작성해나갔다. 혼인 여부는 ‘미혼’에 체크했다. 결혼을 한 적이 없으니 아무것도 속인 게 없는 것이다. * 여기저기 인사를 하다 보니 오전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점심시간이 다가올 때쯤 미란이 긴하게 정오를 불렀다.
“이정오 대리.”
“네.”
“잠깐만.”
나지막이 정오를 부른 미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정오의 어깨를 감싸고는 더 구석진 곳으로 데려갔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러시는 걸까. 혹시 정지헌이 내 과거를 말했나? 아니면 내가 미혼모라는 걸 알게 됐나? 그것도 아니면 채은비가 나에 대해 이상한 말을 했나? 정오는 짚이는 구석이 많아 아무 말 하지 못하고 마른침만 삼켰다. 그런데.
“혹시 짜장면 좋아해?”
응?
“짜장면 말이야. 짜장면.”
의외의 질문이었다. 짜장면. 한 번도 싫어한 적이 없었던 음식.
“네. 좋아하죠.”
“잘됐다.”
진중하고도 심각해 보였던 미란의 표정이 밝아졌다. 미란은 휴대폰 화면을 비추어 보였다. 화면에는 인근의 지도가 떠 있었다.
“여기가 짜장면 맛집이거든. 우리 팀원들이 다 좋아하는 중국집인데 이 대리도 좋아하게 될 거야. 근데 11시 50분에 자리를 맡아놓지 않으면 40분을 기다려야 해.”
“…….”
“11시 40분에 몰래 나가서 자리를 맡아. 다섯 명 자리.”
그것이 미란의 용건이었다. 직장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 점심식사 자리 사수.
“원래 송기훈 씨 시켜야 하는데 이 대리한테 부탁하는 이유는, 새 얼굴이 찾아오면 사장님이 서비스를 더 주기 때문이야.”
“…….”
“다른 사람한테 얘기하지 마. 우리만 먹어야 해.”
왠지 이 팀, 굉장히 사랑스러울 것 같다! 정녕 이 회사를 그만둘 수 있을까? 이직을 다짐했던 정오의 각오가 순간 흐려졌다.
“네. 알겠습니다.”
정오는 전투를 앞둔 장군처럼 용맹하게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10분 뒤. 11시 40분. 정오는 임무를 위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웬일인지 엘리베이터가 한자리에 서 있어 정오는 초조하게 발을 굴렀다. 그때 엘리베이터 근처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들키면 안 되니까 숨어 있자. 맡은 임무에 진심인 정오는 커다란 화분 옆으로 몸을 숨겼다. 한 무리의 꼬마 아이들이 엘리베이터 앞으로 다가왔다. 모두 예나의 또래. 예닐곱 살쯤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 꼬마들의 인솔자와 정지헌. 점심 임무를 향해서만 움직이던 정오의 심장이 자그마하게 콩닥거렸다. 생각해보니 인근 보육원의 어린이들이 회사에서 강의를 듣는다는 공지를 본 것 같았다. 이런 행사에 지헌이 직접 나설 줄은 몰랐다. 의외였다. 아이들을 바라보는 지헌의 눈빛은 퍽 다정해 보이기도 했다.
‘이봐요. 정지헌 씨. 당신한테도 예쁜 딸이 있다고.’
외치고 싶어지는 순간이었다.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아이들에게도 유익한 시간이 된 것 같아요.”
“저도 반가웠습니다. 좋은 경험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인솔자의 인사에 지헌이 정중하게 화답했다.
“그리고 이거.”
인솔자가 들고 있던 선물을 내밀었다. 묵직한 종이가방이었다.
“약소하지만, 쿠키를 구웠어요. 우리 아이들이 어제 하루 종일 만든 거예요. 제일 예쁜 모양으로만 고르고 골라서 포장했고요. 파티시에님이랑 같이 만들었으니 맛도 좋을 거예요. 직원분들이랑 같이 드세요.”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안에 아이들이 쓴 카드도 있어요.”
“네. 고맙습니다.”
선물을 건네받은 지헌은 다시 예의를 갖추어 인사했다. 아이들과 인솔자는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떠났다. 정오는 화분 뒤에 붙박인 처지가 되어 지헌이 먼저 떠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지헌은 바로 자리를 뜨지는 않았다. 별안간 쓰레기통 앞으로 다가간 지헌은 인솔자에게서 받은 것을 종이가방째로 쓰레기통에 떨구었다. 헉!
“안 돼!”
정오가 화분 뒤에서 급히 튀어나오며 지헌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나 이미 커다란 쓰레기통이 종이가방을 삼킨 뒤였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선물을 버렸던 지헌 또한 당황스러운 듯 움찔했다. 정오의 입술 사이로 말끝이 흐릿한 원망이 흘러나왔다.
“어떻게 그걸 버려.”
아이들이 직접 만들었다는데, 어제 하루 종일 만들었다는데, 제일 예쁜 모양만 골라 넣었다는데, 안에 카드도 있다는데. 당신 혼자 먹으라고 준 것도 아니고 직원들이랑 먹으라는데. 그걸 어떻게 버릴 수가 있어? 응? 그 옛날의 정지헌은 정오가 주머니에 몰래 넣어놓은 귤 하나도 소중히 여기던 사람이었다. 아니, 그것도 연극이었어? 당신은 그런 사람이었어? 한때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내 아이의 아빠가. 알고 보니 겉만 번지르르한 고물 같은 남자였다. 눈을 부릅뜨고서 그와 맞섰다. 마음 같아서는 머리를 한 대 때려주고 싶은데. 그러나 그 돌격의 시간은 다시 가로막히고 말았다. 그녀를 응시하며 흔들리던 눈빛이 날렵하게 변했다. 그녀에게 붙잡힌 제 손을 비틀어 빼내는 것 또한 지헌에겐 쉬운 일이었다. 그의 손이 아래로 미끄러지며 내려오는 동안 정오의 손을 감싸듯 쓸었다. 첨예한 대립과 어울리지 않게 그 움직임이 부드러웠다. 제 뜨끈한 체온을 나눠주려는 사람처럼. 그 체온에 혼란스러워졌을 때는 이미 그에게 손목이 붙들린 상태였다. 정오는 제 손을 감싸 쥔 커다란 손이 당황스러웠다. 턱 막힌 목소리가 나왔다.
“이게 무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