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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아빠와 딸 (17/183)

17. 아빠와 딸2021.06.26.

다사다난했던 한 주가 지나고, 주말마저 쏜살같이 후딱 지나고, 월요일이 되었다. 오늘은 예나에게 특별한 날이다. 예나가 도빈의 집에 초대받은 날. 진서가 지난주에 청했던 일이 성사된 것이다. 진서는 기쁜 마음으로 초대했지만 사실 정오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상과 현실은 아무래도 다를 수밖에 없어서, 아이가 혹여 폐를 끼쳐서 진서와 도빈을 불편하게 할까 봐 걱정이 되었다. 사실 진서의 마음만 고맙게 받고 넘겼을 텐데, 예나가 먼저 도빈이네 집에 가고 싶다고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딸을 맡기게 되었다.

16551138911374.jpg“정말 도빈이네 집 가보고 싶어?”

16551138911379.jpg“응!”

16551138911374.jpg“왜 가보고 싶어?”

16551138911379.jpg“그냥. 궁금하니까.”

16551138911374.jpg“가서 말썽 피우면 안 돼. 알았지?”

16551138911379.jpg“응!”

16551138911374.jpg“오늘 하루만 노는 거야. 알았지?”

16551138911379.jpg“응!”

예나는 언제나처럼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럼에도 정오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하루 종일 옆에서 딸을 챙길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야근이 의무화된 회사가 조금은 야속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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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규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았다. 지난주 목요일, 상사이자 친구인 지헌에게 그렇게 독하게 쏘아붙이고 돌아섰을 때는 솔직히 회사를 그만두는 것도 각오했는데. 쑥쑥 커가는 아이들과, 아이들을 돌보느라 웃음이 줄어든 아내와, 20년 만기 대출금이 매시간 눈앞에 어른거렸다. 이렇게 또 월요일 아침이 밝아오니 또 회사에 가야 하는데. 가기는 싫고, 그만둘 수는 없고. 아내는 무슨 일로 그렇게 신이 나는지, 콧노래까지 부르며 멸치를 볶고 있었다. 심기 불편하지 않도록 깨금발로 조심스럽게 다가가 말했다.

16551138911413.jpg“여보 사랑해.”

1655113894607.jpg“왜. 또 용돈 떨어졌어?”

진서가 뚱하게 물었다. 멸치를 향해서는 그렇게 곱게 미소 짓던 아내가 자신을 향해서는 칼바람 같았다.

16551138911413.jpg“내가 이러면 꼭 용돈 때문인 줄 알더라.”

1655113894607.jpg“헛소리하지 말고 출근이나 해. 그리고 오늘 애들 올 때 어디 좀 나가 있어.”

16551138911413.jpg“애들이 오는데 내가 왜 나가 있어. 내가 아빤데.”

1655113894607.jpg“도빈이 친구랑 같이 온단 말이야. 여자친구라고.”

16551138911413.jpg“예나?”

1655113894607.jpg“그래. 여자애 초대하면 아빠는 조용히 나가 있는 거야. 노는 데 방해 안 되게.”

16551138911413.jpg“나도 예나 보고 싶은데.”

1655113894607.jpg“그래도 안 돼.”

16551138911413.jpg“너무해. 너무한다!”

회사도 집도, 편할 수 없는 인생. 의지할 곳이 없다. 그래도 지헌이는 앞에서 얼쩡거리면 술이라도 같이 마셔줄 텐데, 내가 그런 말을 해버렸으니……. 승규는 축 처진 어깨로 돌아섰다. 그런데 진서가 다시 불렀다.

1655113894607.jpg“여보.”

16551138911413.jpg“응?”

1655113894607.jpg“그냥 일찍 와.”

퀭했던 승규의 동태눈에서 다시 생기가 돋아났다. 아아 진서 씨, 역시 나는 당신뿐이야, 하며 사랑 고백을 하려는데.

1655113894607.jpg“와서 에어컨 청소 좀 하고 다시 나가. 예나 덥지 않게.”

아아, 진서 씨……. 남편이 덥다덥다 할 때는 꿈쩍도 안 하더니, 아들내미 친구가 온다니까 에어컨을 틀어주겠다고? 서러운 아침이었다. * 월요일의 출근길은 참 괴롭지만 일단 출근하고 나면 하루는 쏜살같이 흘러간다. 월요일의 마법이 일어난 제작 2팀. 성미란 팀장과 박영광 차장이 편집실로 떠나서 주니어들만 남아 팀을 지키게 되었다. 저녁 시간이 되자 정오는 급 우울해졌다. 배고프다. 의리가 있으니 혼자 나가서 먹고 오겠단 말도 못 하겠고. 두 명의 그래픽디자이너는 매체 광고 최종본을 손보느라 무척 바빴다. 광고주가 오늘 밤 늦게라도 넘겨달라고 하여 최우선순위가 되었다. 정오는 주변의 눈치를 보다가 서랍에서 쿠키를 꺼내 입에 넣었다. 지난주에 지헌에게서 받은 쿠키였다. 음, 괜찮은 맛이야. 이 맛있는 걸 정지헌은 버리려고 했었지……. 쿠키가 하나밖에 없어서 천천히 씹어먹으며 음미하고 있는데, 옆에서 풉, 웃음소리가 들렸다.

16551138985086.jpg“그러고 보면 대리님 진짜 많이 드시는데 살이 안 찌네요.”

기훈이 말했다. 정오는 억울했다. 내가 뭘 그렇게 진짜 많이 먹냐……. 그래도 허허 웃으며 기훈의 말을 받아주었다.

16551138911374.jpg“그런 걸 연비가 안 좋다고 하지. 그래도 요즘엔 관리하는 편이야. 애를 낳…….”

아무 생각 없이 받아주려다 비밀까지 발설할 뻔했다. 정오는 급히 입술을 붙였다. 기훈이 고개까지 돌리고서 정오의 다음 말을 물었다.

16551138985086.jpg“네?”

16551138911374.jpg“기훈 씨 바쁘지? 저녁 먹을 시간 없으면 샌드위치라도 사다 줄까?”

16551138985086.jpg“오. 좋죠. 감사합니다.”

정오가 자연스럽게 수습하니 순진한 기훈은 잘 넘어갔다. 드디어 먹을 수 있다! 정오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은주에게도 물었다.

16551138911374.jpg“고 대리님은 뭐 드실래요?”

1655113901306.jpg“저는 약속 있어요. 두 시간 안에 일 끝내고 친구 만나러 갈 거예요.”

16551138911374.jpg“그럼 간단하게 요기할 것만 사 올게요.”

정오는 행복한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16551138911374.jpg‘갔다 오는 길에 도빈이네 집에도 전화해야지.’

예나가 도빈의 집에 잘 도착해서 잘 놀고 있을지, 별일은 없을지 궁금했다. 그렇게 사뿐사뿐 걸어 엘리베이터 앞에 선 정오의 고운 미소를 순식간에 앗아간 남자가 있었으니.

16551138911374.jpg“……안녕하세요. 이사님.”

오늘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가 했는데, 지헌과 마주치지 않아서 그런 거였다. 산뜻한 저녁 시간에 갑작스럽게 먹구름이 찾아온 기분이었다. 이사님께서는 아주 일찍 퇴근을 하시는군. 직원들은 야근을 하는데. 뭐. 야근하는 직원들 옆에 지켜 앉아 있는 것보단 나으니까. 정오의 인사에 지헌은 고개만 끄덕이고는 곧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엘리베이터에 단둘이라니.

16551139013078.jpg“안 타요?”

지헌이 내려가려는 엘리베이터를 붙잡고 서서 주춤하는 정오에게 물었다. 격렬하게 안 탄다고 말하고 싶은데 그러질 못했다. 정오는 쓰게 한숨을 쉬고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문이 닫히니 숨이 막혔다. 속으로는 빌고 또 빌었다. 제발 타라. 타라. 누구 한 사람 제발 타라. 타라. 타라. 그리고 8층에 이르러 기적처럼 문이 열렸다. 문밖의 사람을 확인한 정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정지헌의 16년 지기! 박승규 차장이었다. 두 사람이 얘기하는 걸 엿들으면 정지헌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좋은 기회였다. 그런데, 웬일인지 승규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길 망설이고 있었다.

16551138911374.jpg“차장님! 타세요! 타세요!”

그러나 승규는 어두워진 얼굴로 까딱 인사했다.

16551138911413.jpg“다음 거 타겠습니다. 먼저 가세요.”

이게 무슨 청천벽력이란 말인가. 왜 그러지? 둘이 싸웠나? 나이 서른셋 먹고 여태 싸움이란 걸 한단 말이야? 7년 전의 정지헌이라면 상상할 수 없었겠지만 지금의 정지헌은 왠지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놀랍긴 했다.

16551138911374.jpg“두 분 싸우셨어요?”

정오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질러버렸다.

16551138911374.jpg“어쩌다가요? 저 천사 같은 분이랑.”

정지헌 이사의 ‘7년 전 스캔들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뻔뻔해지자 마음먹은 뒤로 정오는 이전보다 말을 잘할 수 있게 됐다. 정오의 맹랑한 질문에도 지헌은 인상만 구길 뿐 대답이 없었다. 싸우셨구나. 나는 박승규 차장도 필요한데.

16551138911374.jpg“박승규 차장님이 뭘 잘못하실 분은 아닌 것 같은데…….”

지헌은 눈을 흘겼다. 당신 때문이다. 그녀의 일로 울컥한 마음에 못 할 소리를 했다고, 지헌은 차마 그 사실을 말할 수가 없었다. 지헌이 거듭 눈치를 주니 정오도 더는 그를 자극할 수가 없었다.

16551138911374.jpg“너무 주제넘은 참견이었네요. 제 아빠를 닮으셔서 자꾸 마음이 쓰이나 봐요. 죄송합니다.”

16551139013078.jpg“딸은 그런 건가?”

16551138911374.jpg“네?”

16551139013078.jpg“딸은 아빠가 그렇게 애틋한 겁니까?”

개떡같이 말했는데, 그가 이렇게 찰떡같이 받아들일 줄이야. 정오의 연극은 좀 더 길어질 전망이다.

16551138911374.jpg“……그렇죠.”

16551139013078.jpg“…….”

16551138911374.jpg“딸은 그렇게, 그렇게, 그렇게 아빠가 애틋합니다.”

지헌이 잠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와 딸의 애틋한 관계를 상상하는 건지, 승규와 자신의 감정싸움을 생각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정오는 다시 조심스레 당돌한 의견을 던졌다.

16551138911374.jpg“그건 그렇고, 화해하시는 게 어떨까요. 박승규 차장님은 이사님 되게 아끼시는데요.”

지헌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박승규 차장은 그녀에게도 꼭 필요한 사람이므로, 정오는 지헌이 친구와 잘 지내주었으면 했다.

16551138911374.jpg“직접 찾아가 보시고, 대화를 할 수 있도록 노력도 해보시고.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소중한 친구잖아요.”

하지만 진심 어린 조언이었다. 오래전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7년 전에, 내가 좀 더 끈질기게 당신을 찾았더라면,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당신에게 실망하지 않고 당신을 좀 더 믿었더라면.

16551138911374.jpg“매듭이 묶였다고 아끼는 리본을 가위로 끊어낼 수는 없잖아요.”

그랬다면, 우리는 지금과 다른 오늘을 살고 있지는 않았을까.

16551138911374.jpg“하나씩 하나씩 살살 풀어봐야 하지 않을까요?”

의견을 전하며 가슴이 욱신거렸다. * 아이들 저녁을 먹이고, 설거지를 하는 진서는 흡족함을 감추지 못했다. 광대뼈가 위로 바짝 올라갔다. 예나가 너무 예쁘고 야무지고, 예나가 있으니 아들도 밥을 잘 먹고 말도 잘 듣고. 매일매일 예나가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16551139070996.jpg“이것 봐. 젤리가 반짝반짝거려. 네 눈처럼.”

밥 다 먹고 먹으라고 젤리 한 봉지를 꺼내주었더니 아들 녀석은 이렇게 여자친구에게 구애를 하고 있다. 저런 표현은 어디서 배웠을까. 아들이 너무 대견했다. 나도 저런 때가 있었지.

1655113894607.jpg“아니 근데 이 아저씨는 에어컨 청소하라니까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야.”

그 와중에 남편 생각이 나서 그릇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설거지를 막 끝냈을 즈음 초인종이 울렸다.

1655113894607.jpg“누구지? 올 사람이 없는데…….”

진서는 현관 비디오폰 화면을 들여다보고서 화들짝 놀랐다. 문밖에 남편의 까마득한 상사이자 남편의 고등학교 대학교 동창이자 남편의 군대 후임, 정지헌이 서 있는 게 아닌가.

1655113894607.jpg“어머, 어머, 어머, 웬일이야. 이걸 어쩌지? 어쩌지?”

진서는 발을 동동 구르다가 현관문을 열었다.

1655113894607.jpg“어머, 지헌 씨, 안녕하세요!”

언젠가 편하게 부르라고 하여 이름을 부르고는 있지만 남편의 까마득한 상사라 몸과 마음이 깍듯할 수밖에 없었다.

16551139013078.jpg“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1655113894607.jpg“그러게요. 호호호. 오랜만이네요. 들어오세요.”

16551139013078.jpg“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지헌이 현관에 들어서며 가지고 온 큼직한 바구니를 진서에게 건넸다.

16551139013078.jpg“과일 좀 샀습니다.”

1655113894607.jpg“어머, 호호호…… 뭐 이런 걸 다. 감사해요. 잘 먹을게요. ……그런데 무슨 일로…….”

16551139013078.jpg“승규 만나러 왔는데, 집에 있습니까? 일찍 퇴근했는데.”

아들 여자친구가 온다고 나가 있으라고 했더니, 남편은 삐친 모양인데.

1655113894607.jpg“아직 안 왔는데. 근처에 있을 거예요. 연락해볼게요.”

16551139013078.jpg“네. 감사합니다.”

1655113894607.jpg“얼른 안으로 들어오세요.”

지헌이 머뭇거리다가 집 안으로 들어섰다. 도윤이 아장아장 달려왔다. 도빈도 방에서 나와 참견했다.

16551139070996.jpg“엄마, 누구 왔어?”

1655113894607.jpg“도빈아, 인사해. 아빠 친구 지헌 삼촌 오셨어. 도빈이도 알지?”

16551139070996.jpg“안녕하세요.”

16551139013078.jpg“그래. 안녕.”

지헌은 도빈의 인사를 받아주고는 그 어깨너머로 목을 길게 뺐다. 승규의 아이는 두 명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지금 보니 남자아이와 여자아이 둘, 이렇게 세 명이었다. 지헌이 의아하게 여기고 있을 때 도빈이 먼저 설명했다.

16551139070996.jpg“저도 친구 오셨어요.”

1655113894607.jpg“도빈아, 그럴 때는 저도 친구 왔어요, 하고 말해야지.”

16551139070996.jpg“저도 친구 왔어요.”

진서가 제 설명을 보탰다.

1655113894607.jpg“집에 아들 친구가 와서요.”

16551139013078.jpg“아, 여자친구.”

1655113894607.jpg“도빈이 아빠가 얘기하던가요?”

16551139013078.jpg“네. 한번 얘기한 적 있습니다.”

아들내미가 푹 빠져 있다고 했던가? 첫눈에 반했다고 했던가? 생각해보니 승규와의 갈등은 그 말부터였다. 승규의 표현이 그다지 잘못된 것도 아닌데 괜히 날을 세우면서, 해서는 안 되는 말까지 하게 된 것이다. 여자아이가 동그란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았다. 아이는 언뜻 보아서도 무척 귀엽고 어여뻤다. 아니, 지헌은 조금 더 오래 쳐다보게 됐다. 몇 발짝 떨어져 서 있는 아이가 안구의 안쪽을 콕콕 찌르는 것 같아 지헌은 눈을 세게 감았다 떴다. 자신을 응시하다가 어깨를 움츠리는 그 작은 여자아이를 지헌은 오래도록 가만히 서서 쳐다보았다. 낯선 사람을 보고서 겁을 집어먹은 아이가 뻣뻣하게 고개를 돌렸다. 아이에게 의도치 않은 감정을 안겨준 것 같아 지헌은 조용히 발을 뒤로 뺐다. 그럼에도 그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희고 예쁜 얼굴이 누군가를 떠오르게 했다.

16551139013078.jpg‘애들은 다 예쁘지.’

그것을 알고 있는데도 왠지 눈이 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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