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뭐든 할 수 있어요2021.07.10.
은비는 아주 흡족했다. 조시내 대리에게 이정오에 대해 하소연하니 일이 수월해졌다. 나 대신 이정오를 괴롭혀줄 수 있는 사람. 행동대장이 생겼다. 오늘도 시내는 먼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정오에게 아주 훌륭한 분부를 내렸다. 광고주 접대를 부탁한 것이다. 출장을 간 AE도 최대한 서둘러 돌아와도 7시가 넘을 것 같다고 했고, 제작팀 인력들은 모두 할 일이 많아 바빴다. 다들 8시 이후에 회사에서 우르르 떠나게 될 것이다. 그러니 한 시간 이상 이정오가 혼자 광고주를 상대해야겠지. 이정오가 진땀을 빼는 꼴을 구경하고 싶어 엉덩이가 들썩거리긴 했다. 은비는 한자리에 가만히 있지 못하고 느긋하게 사무실을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지헌의 비서 윤애라와 마주쳤다. 은비는 상냥하게 인사했다.
“애라 씨, 퇴근하나 봐요?”
“네. 과장님.”
“이사님도 퇴근하셨고요?”
“이사님은 제작팀이랑 광고주 만나러 간다고 하시던데요. 같이 안 가셨어요?”
곱게 지은 미소가 빠르게 지워졌다. 팀으로 달려간 은비는 바로 조시내 대리를 일으켜 세웠다.
“조시내 대리.”
“네. 과장님.”
은비의 성난 표정에 시내가 의아해진 얼굴로 일어났다.
“회식 준비하라고 이정오 대리 혼자 보냈어요?”
“아…… 네. 다른 팀원들은 다들 바빠서요.”
“그래도 혼자 보내면 어떻게 합니까. 카피라이터 혼자서 어떻게 광고주를 상대해요!”
* 누군가에게 걸음을 맞추어준 적이 없었다. 그의 옆에 섰던 여자들은 모두 그의 큰 보폭을 따라 거의 뛰다시피 종종걸음을 했다. 지헌은 처음으로 여자의 보폭에 제 걸음을 맞추었다. 여자의 몸이 젖지 않도록 신경 쓰느라 제 어깨가 젖어가는 것은 알지 못했다. 건너편 편의점까지 가는 길이 천 리는 되었으면 했다만, 두 사람의 걸음은 금세 건너편에 닿았다. 정오가 편의점 앞에서 물었다.
“감사합니다. 이사님 우산도 사 올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너랑 같이 쓸 거니까. 지헌은 속마음을 숨기고서 대답했다. 두 번 권하지는 않고 홀로 편의점에 들어간 정오는 잠시 후, 우산 두 개를 들고 나타났다.
“여기요. 이거 쓰세요. 이사님.”
지헌은 못마땅한 눈으로 우산을 내려다보았다. 정오가 우산을 두 개나 사 온 것도 마음에 안 드는데, 우산은 어린아이나 쓰고 다닐 법한 노란색이었다.
“환불 안 됩니까? 집에 우산이 엄청 많은데.”
정오는 슬쩍 떫은 표정을 지었다. 재벌이 말이야. 우산 하나 가지고 좀스럽게.
“그럼 오늘은 쓰고 가시고 나중에 저 주세요. 저희 집엔 우산이 없어서요.”
정오는 통보하듯 일러두고는 먼저 걸음을 옮겼다. 실랑이를 할 시간이 없었다. 얼른 장소를 구해야 했고 광고주에게 연락을 해서 회식 장소로 데려가야 했다. 회사를 나서기 전에 좌석 확인을 받은 순서대로 돌아보기로 했다. 기훈에게 추천받은 주점이 꽤 괜찮았다.
“더 둘러볼 것도 없이 여기로 하면 되겠네요.”
“네. 장소 잘못 골랐다고 누가 따지면 이사님이 고르셨다고 하겠습니다.”
정오의 익살에 지헌은 실소했다. 주점에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정오의 휴대폰이 울렸다. 광고주의 연락처가 화면에 떴다.
“네. 대리님. 지금 어디 계세요?”
정오가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광고주의 현재 위치를 야무지게 파악한 정오는 금방 전화를 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헌도 함께 일어났다. 정오는 지헌을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이사님은 나중에 합류하시는 게 어떨까요?”
“왜요.”
“생각해보십쇼. 실무진 대리랑 과장인데, 이사님이 직접 나와서 접대를 한다고 하면 부담스럽지 않겠습니까? 술이나 편하게 마실 수 있을까요?”
“그래도 혼자 상대하는 것보단 나을 텐데요.”
“하하. 괜찮습니다.”
정오는 가볍게 웃었다. 훗. 나를 뭘로 보고. 나는 이 땅의 강한 아줌마라 이겁니다. 무서운 게 없다고요. 광고주여 오라! 온몸의 회식 세포가 드릉드릉, 시동을 걸었다. * 정오의 고집으로 지헌은 회식 장소에서 나와야 했다. 다시 회사로 돌아갈까 하다가 지헌은 회식 장소 바로 옆의 카페에 자리 잡았다. 걱정을 놓을 수가 없어서 딱 30분만 카페에 앉아 있다가 바로 출동하기로 마음먹었다. 시간이 더디 흘러 하루 같은 30분이 지나고. 어느새 비도 그쳤다. 굳게 마음먹은 지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식 장소로 향하는데 저편에서 다원주류 담당 AE가 뛰어와 숨을 헐떡이며 인사했다.
“헉헉헉. 이사님도 오셨습니까.”
“카피라이터 혼자 광고주 두 명을 응대하고 있다고 해서요.”
“네. 곧 다른 제작팀원들도 도착할 것 같습니다.”
지헌과 AE는 근심 어린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주점 문을 열고 들어서니 희미하게 정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넓은 자리에 광고주 두 명과 정오가 마주 앉아 아주 재밌게들 노닥거리고 있었다.
“차 문을 세게 닫으면 안 되는 이유가 뭔 줄 아세요?”
“정답! 차 문은 네 개니까!”
광고주의 시답지 않은 질문에 정오는 열의 있게 외쳤다. 광고주가 손뼉까지 치며 웃어댔다.
“이 대리님, 여기 막차 시간이 언제죠?”
“아, 최 대리님은 분당에 사신다고 하셨죠. 제가 막차시간 알아볼게요.”
“그럼 다음 문제. 바람도 귀엽게 부는 지역은?”
“정답 분당! 바람이 분당~”
광고주에게 가벼운 질문을 던져가며, 하찮은 질문에 순발력 있게 받아치며, 정오는 의외로 시간을 잘 요리해가고 있었다. 지헌과 AE도 자리로 가까이 다가가자 정오는 활짝 핀 얼굴로 광고주에게 지헌을 소개했다.
“우리 AE님 오셨네요. 그리고 이분은 우리 본부 정지헌 이사님입니다.”
“안녕하세요. 정지헌입니다.”
“헉. 처음 뵙습니다. 이사님…….”
지헌의 인사에 여자 과장이 얼굴을 붉히며 인사했다.
“곧 제작팀원들도 다들 온다고 합니다. 팀원들이 두 분께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이정오 대리님이 작업 진행 방향에 대해 공유해주시고 아이디어 팁도 많이 주셔서 이미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사님.”
정오의 얼굴이 발긋해졌다. 그녀의 동그란 이마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겉으로는 활기차게 웃고 있지만 꽤나 진땀을 뺀 모양이었다. 주류회사 직원을 상대로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니 지헌은 더 일찍 오지 못한 게 후회되었다. 잠시 후, 제작팀원들도 합류했다. 약속한 시간보다 30분이나 일찍 나타났다. 은비는 뭐가 그리도 마음에 안 드는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사람이 많아지니 정오도 슬쩍 옆으로 빠질 수 있게 되었다. 잠시 후, 자리를 옮긴 정오가 가슴을 손으로 쓸어내리다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정오를 주시하고 있던 지헌도 조용히 일어나 뒤를 따랐다. 밖으로 나간 정오는 곧장 편의점으로 향했다. 숙취음료를 집어 들어 계산하려고 하는데 뒤에서 불쑥 손 하나가 나타났다. 지헌이었다.
“내가 살게요.”
“아, 그럼 이거요.”
정오는 가장 비싼 음료수를 집어 들었다. 지헌은 둘 다 계산했다.
“감사합니다.”
정오는 지헌에게 꾸벅 인사하고 음료를 벌컥벌컥 마셨다.
“괜찮아요?”
“네. 그럼요.”
겉으로는 꽤 멀쩡해 보였기에, 지헌도 마음을 놓고 정오에게 물었다.
“광고주 반응은 어떻습니까. 어떤 아이디어를 제일 마음에 들어하던가요.”
그녀를 오래 붙잡아두고 싶어서 일 얘기로 서두를 열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의 양 볼이 부풀어 올랐다 가라앉았다를 반복했다. 마치 마신 것들을 다 게워낼 것처럼. 귀여운 표정이었지만 위태로웠다.
“많이 마셨어요?”
“술맛에 대한 의견이 필요하다고 해서 주는 대로 마셔봤어요.”
정오가 해탈의 눈빛으로 대답했다.
“주는 대로 다 마셨다고요? 소주 맥주 할 거 없이?”
“이사님이 30분 뒤에는 올 것 같고, AE도 곧 올 테고, 그러니 30분만 버티면 되잖아요.”
“참 융통성도 없네.”
정오의 대답에 지헌은 더럭 화가 났다. 그녀가 너무 무리를 한 것 같았다. 적당히 몸을 사렸으면 좋았을 텐데.
“이건 못 하겠다, 여기까지가 딱 한계다, 그 정도는 스스로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
“광고주는 모든 아이디어가 마음에 든대요. 근데 딱히 꽂히는 건 없는 것 같기도 했어요.”
그가 핀잔을 주니 엉뚱하게도 정오는 좀 전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내놓았다.
“어쩌면 콘셉트가 조금 바뀔지도 모르겠어요. 이사님.”
취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지 지나치게 또박또박 들려오는 목소리가 지헌의 주름졌던 미간을 반듯하게 폈다.
“마음은 달라져요. 계속 바뀔 수밖에 없어요. 어떤 상황을 맞게 되느냐에 따라서 계속 선택을 해야 하니까.”
“…….”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 있었어요.”
이윽고 이야기는 뜬금없이 로맨스 소설의 첫머리 같은 사담으로 튀었다. 확정적인 표현을 쓰기엔 모호한지 그녀는 바로 말을 바꿨다.
“……서로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닐 수도 있어요. 여자의 임신 사실을 알자마자 남자는 떠났어요. 그래서 여자는 아이를 혼자 키웠죠.”
대체 이런 얘기를 꺼낸 의중이 뭘까. 그저 취해서? 지헌은 조용히 한숨을 쉬며 팔짱을 꼈다. 그래. 들어나 보자, 하며.
“그런데 이 남자가 몇 년 뒤에 여자 앞에 나타난 거죠.”
이런 시시껄렁한 이야기에 휩쓸리고 싶진 않은데, 이야기를 내어놓는 그녀의 목소리와 눈빛이 하도 진지하여 그는 잠잠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대체 왜 이제야 나타났을까. 아이를 빼앗아가려고? 여자에겐 세상의 전부가 된 그 아이를?”
물음표가 박힌 그녀의 질문에는 골똘해지기까지 했다. 지헌이 무언가 말을 해보려 입을 열었으나 그녀가 먼저 대답을 내놓았다.
“그렇다면 막아야겠죠?”
“…….”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여자는 뭐든 할 거예요. 안 그런가요?”
“…….”
“뭐든 할 수 있어요. 한계 같은 것도 없고요.”
맑은 유리막이 도톰하게 그녀의 눈동자를 덮고 있었다. 왠지 의지가 박혀 있는 눈빛이 뜨거워 그 유리막도 녹아내릴 것 같았다. 그의 심장도 화상을 입은 듯이 뜨겁게 욱신거렸다. 술은 몇 잔 마시지도 않았는데, 누군가 바늘로 찔러대는 것처럼 머리까지 지끈거렸다. 그 와중에도 이 여자가 갖고 싶어 견딜 수가 없는 마음. 이 여자의 무엇이 이토록 열망하게 하는 걸까. 몇 마디로 정의하기가 힘든 여자였다. 그녀는 또 제 말만 툭 던져놓고는 확 돌아서 버린다. 지헌은 혼자서만 휩쓸려가는 것이 왠지 억울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돌아보게 하고 싶었다. 어떻게 해야 너를 돌아보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너를 붙잡아둘 수 있을까. 그녀를 돌아보게 할 수만 있다면 지헌 또한 뭐든, 무슨 짓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정오야.”
지헌은 그녀의 아버지를 상상하며 부드럽고 친근한 목소리로 이름을 불러보았다. 멈칫. 반응은 빨랐다. 걸음을 멈춘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직전에 맑은 유리막이었던 눈물은 이미 녹아 바닥으로 떨어진 후였다. 그저 ‘정오야’ 하고 불렀을 뿐인데, 그녀는 숨 쉬는 것도 잊은 듯했다. 힘없이 벌어진 그녀의 입술이 바르르 흔들리고 있었다. 지헌 또한 놀랐다. 그녀가 술이 불러들인 아버지의 환영이라도 발견한 걸까. 아니면 정말 자신을 아빠라고 착각한 걸까, 착각하고 싶은 걸까. 무언가를 의심하면서도 믿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눈빛이었다. 그녀를 움직이게 했다는 희열에,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그녀의 표정을 확인했다는 흥분이 더해져 심장이 아플 정도로 흉골을 때려댔다. 조금만 더. 그녀의 마음을 더 들여다보고 싶다는 욕심에, 충동적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내가 보여?”
“…….”
“나 알아보겠어?”
그의 물음에 그녀는 탄식 같은 야트막한 숨을 토해냈다. 한 걸음씩 거리가 좁혀졌다. 스스로 그에게 바짝 다가온 그녀가 힘겹게 입술을 떼었다.
“……오빠…….”
울먹거리며 흘러나온 말은 정확하지 않았다. 진상을 알지 못하는 그에게는 ‘아빠’라고 들릴 만한 소리였다. 그녀가 반응을 보였으니 뿌듯해야 하는데, 마음 한구석에 돌덩어리가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녀에게 아빠란 눈물의 존재다. 뒤늦게, 건드려서는 안 되는 것을 건드렸단 생각이 들었다. 얼른 수습하려고 손을 뻗었으나. 천천히 올라온 그녀의 두 손이 더 먼저 그의 뺨을 건드렸다. 지헌의 눈이 커졌다. 일주일 전 휴게실에서, 자신을 앞에 두고 굵은 눈물을 뚝 떨어뜨리던 그때처럼, 빨려들어갈 듯 일렁거리는 눈빛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고서.
“……돌아온 거야?”
그녀가 물었다. 울음 때문에 목소리가 뭉그러졌다. 기억이 돌아왔냐고. 이제는 나를 알아보겠느냐고. 그 애틋한 사정을 결코 알지 못하는데도. 속수무책으로 끌려가는 건, 또다시 지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