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통제 불능2021.07.14.
이정오와 정지헌이 광고주 접대를 위해 먼저 떠났다는 소식을 접한 은비는 부랴부랴 일을 정리하고 회식 장소를 찾았다. 주점의 널찍한 테이블엔 다섯 사람이 있었다. 광고주 둘, 담당 AE, 정지헌, 그리고 이정오. 정오의 목소리를 확인한 은비는 거칠게 인상을 구겼다.
‘어디 방울을 달았나, 왜 저렇게 딸랑거려?’
광고주를 상대로 우스갯소리를 쉴 새 없이 늘어놓는 이정오가 못마땅했다. 그걸 지켜보며 잠잠히 미소 짓고 있는 지헌은 말할 것도 없고.
“저희가 너무 늦었죠. 갑자기 일이 몰려서요.”
은비는 정오와 지헌 사이에 끼어들어 자리를 차지하며 광고주에게 인사했다. 이윽고 빈 자리가 하나씩 채워지고, 정오는 아무 말 없이 중심에서 멀어져 끄트머리에 자리 잡았다. 그제야 은비는 마음이 풀렸다. 회사에서 한 번 스친 적이 있는 광고주는 말이 많았다. 게다가 웬 재미없는 농담을 그렇게나 해대는지. 은비는 몇 번 웃어주다가 버티지 못하고 화장실로 피신했다.
‘얼른 나가야지.’
따분한 것을 싫어하는 지헌도 오래 자리를 지켰으니 답답할 것이 분명했다.
‘오빠를 불러볼까?’
오빠 채은엽이 오늘 근처에 볼일이 있다고 했던 걸 떠올렸다. 은엽과 지헌은 오랜 친구 사이였다. 아무 이유 없이 나가자고 하면 지헌이 거절할 수도 있겠지만, 은엽의 핑계를 대면 받아줄 것 같았다. 지헌이 친오빠의 친구라는 사실이 참 좋았다. 이 인연은 쉽게 끊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은비는 은엽에게 근처에서 지헌과 함께 만나자고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은엽은 눈치 빠르게, 지헌에게 자신이 연락을 해보겠다고 답신해주었다. 은비는 뿌듯한 표정으로 화장실에서 나왔다. 그런데, 지헌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이사님 어디 가셨어요?”
그 옆에 앉은 직원에게 물었다.
“아까 밖에 나가셨는데요.”
간담이 서늘해졌다. 얼마 전까지 귀에 거슬리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은비는 곧장 고개를 돌렸다. 이정오의 자리도 비어 있었다. 정지헌과 이정오가 없어졌다.
* 편의점 앞. 다가와 자신을 만지는 그녀의 손은 두 뺨이 아니라 심장을 주물러대는 것만 같았다. 두 뺨에 닿은 손끝이 뜨거웠다. 이정오가 많이 취했다. 그가 시작한 장난이었는데도 지헌은 더 이상 재미있지 않았다. 가슴이 답답했다. 그를 정말로 아버지의 영혼이라고 믿어버린 듯한, 그 절절한 눈빛이 안쓰럽기도 했다. 그 딱한 마음에 공감해주고도 싶었지만 몸이 거부하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로, 그 숭고한 감정으로 끌려가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이 거부하고 싶은 순간에도, 가까이 다가온 그녀가, 눈물로 얼룩져서는 제 감정을 펼쳐놓는 그녀가 소름 끼치도록 예뻐서 화가 났다. 성큼 다가와준 그녀를 껴안고 키스하고 싶단 충동이 이성을 밀어내고 있었다. 아버지란 존재…… 그녀의 그 애틋한 환영을 박살내버리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다. 지헌은 신속히 장난을 끝내야 했다.
“이정오 씨. 정신 차려.”
먼저 장난을 걸어놓고 정색하는 꼴이라니.
“아버지는 돌아가셨잖아.”
“…….”
“이런 식으로 꾀어내면 아무한테나 홀딱 넘어갈 건가?”
그의 지적에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손이 천천히 떨어졌다. 그녀는 너무 놀라 할 말도 잊은 것 같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나뭇가지에 홀로 남아 바람을 버티고 있는 잎새처럼 고통스럽게 흔들렸다.
“……뭐야, 당신.”
“뭐긴 뭐야. 이정오 씨 상사잖아.”
지헌은 조금 더 뻔뻔해져야 했다.
“당신 아버지가 아니라, 그냥 남자라고. 살아 있는 사람. 정지헌.”
“……지금 나한테 장난쳤어요?”
“그걸 믿어버리는 게 더 우스운 거 아닌가?”
자신이 난생처음으로 마음에 들어했던 여자에게 경악과 환멸의 감정을 안겨주게 되었다. 그럼에도 마음은 브레이크가 고장난 것처럼 아무렇게나 날뛰어댔다. 그녀에게서 아버지란 글자를 지워버리고 싶다는 비틀린 욕망은 가시질 않았다. 주먹을 꽉 쥐고서 버티던 그가 휙 돌아섰다.
“그쪽의 사정은 안타깝지만 조심해요. 이정오 씨처럼 맘 약한 사람들 코 베어 가는 세상이니까.”
됐다. 이만하면. 그녀에게도 현실의 사람들이 얼마나 악독한지를 일깨워주었으니 됐다. ‘충고’라는 핑곗거리가 있어 다행스러웠다.
“갑시다. 집에 데려다줄게요.”
천천히 발을 옮겼으나 뒤따라오는 발소리 같은 건 없었다. 두 걸음 만에 돌아본 지헌은 그의 반대 방향으로 성큼성큼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았다.
“이정…….”
그가 그녀의 이름 세 글자를 다 부르기도 전에 그녀는 택시를 잡아타고 떠나버렸다. * 은비는 부리나케 주점에서 나와 지헌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헌은 받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정오의 전화번호까지 알아내 정오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두 사람 모두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안내메시지만 돌아올 뿐이었다. 은비는 속이 탔다.
“채은비.”
은엽이 멀리서 다가오며 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주점 앞으로 오겠다는 답신 그대로, 친오빠가 도착했다.
“혼자 나왔어? 지헌이는 전화 안 받던데.”
아무것도 모르는 은엽이 은비에게 물었다.
“어…… 지헌 오빠가 없어져서.”
“뭐야. 확인도 제대로 안 하고 날 부른 거야?”
“아니, 내가 화장실에서 나오니까 없어진 거야.”
“너한테 말도 안 하고 없어졌다고?”
은엽이 이맛살을 구기며 추궁했다. 은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담배를 꺼내 문 은엽이 은비의 얼굴에 거친 한숨을 뿜어냈다.
“채은비. 그거 하날 못 해?”
“…….”
“몇 년이 되도록 정지헌 마음 하나 제대로 못 잡아? 그렇게 멍석을 깔아줬는데?”
은비가 지헌에게 목을 매게 된 데는 은엽의 영향도 컸다. 은엽은 은비와 지헌이 잘되길 바랐고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7년 전, 미국 유학 중인 은비에게 편입을 권유한 것도 은엽이었고 지헌이 사는 오피스텔의 방을 사들인 것도 은엽이었다. 은비가 지헌의 부모님에게 신경 쓰는 것 이상으로 은엽은 지헌과의 관계에 공을 들였다. 은엽은 이상과 목적이 분명한 사람이었다.
“아버지 내년에 총선 준비하실 거야. 그전에 넌 결혼해야지. 그래야 아버지 마음이 편하지.”
“…….”
“그거라도 잘해서 아버지한테 보탬이 되어야지. 안 그래?”
아무것도 잘하는 게 없는 너에게 이렇게나 내가 투자하고 있는데. 오빠의 언어, 그 뒷면의 면박이 은비의 속을 옥죄었다. 머리가 나빠서, 공부를 못 해서 집안에 어떤 보탬도 되지 않았던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 결혼. 그래서 은비 또한 더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결혼할 것이다. 정지헌과 꼭 결혼해야 한다. 은비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너한테 바라는 거 그거 하나잖아. 잘하자, 채은비. 응?”
거친 말들의 이후에 들려온 격려에 은비는 눈물을 머금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
‘나쁜 놈.’
가방도 챙기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온 정오는 일찍 잠든 예나의 옆에 누워 분을 삭였다. 어디서 훈계야. 알지도 못하면서. 나쁜 놈, 나쁜 놈. 하마터면 그에게 끔뻑 속아 넘어가서 있는 말, 없는 말이 다 튀어나올 뻔했다. 그가 재빨리 비웃지 않았다면 예나 얘기까지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렇지. 아빠가 돌아가셨다고 했는데, 아빠 흉내를 내? 그걸 놀림거리로 삼다니, 어떻게 그래. 인성이 어째 그 모양이야. 날이 갈수록 실망만 쌓여간다. 이런 남자에게 내 딸을 보여줘도 될까? 차라리 지금처럼 애 아빠는 없는 셈 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정오는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를 세듯 속으로 ‘나쁜 놈’을 천 번쯤 외치고서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정오는 천근만근인 몸을 겨우 일으켜 주방으로 나왔다. 어제 빗속을 뛰어다니고 술까지 잡다하게 마셨더니 숙취와 감기몸살이 함께 찾아온 것 같았다.
“술 많이 마셨어? 얼른 앉어.”
국순이 말했다. 맑은 황탯국 냄새가 그녀를 이끌었지만 정오는 숟가락을 들 힘이 없었다. 국순이 황탯국 한 숟가락을 떠서, 비실비실하는 정오의 입에 넣었다. 국순에게 정오는 서른 살짜리 아기였다. 정오는 아기 새처럼 한 숟갈을 넙죽 받아넘긴 후에야 제 손으로 숟가락을 들었다.
“술을 얼마나 마신 거야.”
“그냥 뭐 적당히.”
“네가 적당히도 마셨겠다.”
“엄마, 조용히 좀. 예나 듣겠네.”
“딸한테 부끄러운 건 있고? 으이구.”
국순이 한쪽 입술을 비뚜름히 들어 올리며 타박했다.
“팍팍 좀 퍼먹어! 그래서 어디 해장이 되겠어?”
“아니, 숙취가 아니라 감기몸살이에요.”
“오뉴월에 무슨 놈의 감기.”
“어제 비 왔잖아. 조금 맞았더니 좀 그러네.”
“으이구. 잘하는 짓이다!”
“…….”
“그렇게 얻어먹는 걸 좋아하더니 기어이 감기까지 얻어먹고 와? 으이구.”
엄마의 잔소리를 맞받아칠 힘도 없었다. 그 기운 없는 모습에 국순의 목소리는 금세 나직해졌다.
“회사 하루 쉬고 좀 누워 있어.”
“이직한 지 얼마나 됐다고 병가를 내.”
“그럼 그래서 회사를 나가겠다고?”
“내일이면 주말인데 뭐.”
“으이구!”
국순은 속이 터진다는 듯 크게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오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는 황탯국을 꾸역꾸역 먹었다. 엄마의 사랑이 담긴 황탯국 덕분에 울렁거렸던 속은 많이 가라앉았다. 속이 진정되니 맑은 국물 위로 어젯밤의 일이 와락 떠올랐다. 정지헌이 날 속였지. 그 나쁜 놈이. 기억이 살아나니 분노도 덩달아 울컥 올라왔다. 하나 잠시 후 그녀는 히끅, 딸꾹질을 하고 말았다.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 있었어요.”
맙소사……. 그런 실수를 했구나. 내가. 정지헌이 한계 어쩌구 하며 핀잔을 주는 통에 발끈한 그녀가 그런 헛소리를 하고 말았다. 애 엄마에게 한계 따윈 없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제 사연을 3인칭으로 다 풀어버린 것이다! 미쳤지, 내가! 아침이 되어, 곳곳에 들어찬 빛이 어둠을 씻어내도 절대 씻기지 않는 과거. 이 과거를 이끌고 오늘도 출근을 해야 한다니. 너무 끔찍했다. 정오는 속으로 포효했다. 아! 회사 가기 싫다! * 일찍 출근한 지헌은 사내를 빠르게 훑었다. 아직 정오가 출근하지 않았단 사실을 확인한 그는 바로 1층으로 내려갔다. 한참 지키고 서 있으니 정오의 모습이 보였다. 어느새 지헌은 그녀를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다가오는 그를 확인한 정오가 멈칫 자리에 섰다가 시선을 피하고는 바삐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걸음걸이도, 표정도 왠지 위태로웠다.
‘어제 과음해서 힘든가?’
추측할 수 있는 건 그 정도였다. 그녀를 뒤쫓아가 엘리베이터에 탑승했으나 가까이 갈 수는 없었다. 엘리베이터엔 사람이 가득했고 정오는 그 맨 끝에 갇혀 있었다. 지헌 역시 꼼짝할 수 없었다. 그렇게 엘리베이터는 9층에 서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그녀와 잠깐은 얘기할 수 있겠다, 하는 마음으로 먼저 내려서 그녀를 기다리는데, 그녀는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사람들 틈 사이로 손 하나가 까딱 존재를 알렸다. 그녀는 뒤편에서 굼뜨게 꼼지락거리고 있었던 거였다. 어쩐지 평소보다 맥을 못 추는 것 같기도 했다. 사람들 또한 협조해주지 않아 지헌은 정오의 손을 힘있게 잡아 엘리베이터 밖으로 끌어내야 했다.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 움직임이었다. 매번 그랬다. 이정오와 마주하면 지헌은 매번 최면이라도 걸린 것처럼 계획 이상의 돌발행동을 하게 되었다. ‘꺅’ 하고 작은 비명이 전달된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험악하게 닫혔다. 꺅. 포옥.
그가 성급하게 끌어낸 이정오는 어느새 제 품 안에 있었다. 작고 연약하고 어딘가는 말랑한…… 뜨거운 몸이 그를 지지대 삼아 바르작거렸다. 쿵쿵쿵쿵쿵쿵. 그의 심장 또한 통제를 벗어난 느낌이었다. 알 수 없는 감정이 먹물 번지듯 몸을 물들여갔다. 생소한 설렘이었는데, 왠지 무언가가 흐릿하게 그리워지는 감정…….
‘그때 그 꿈 때문에?’
그의 몸에 기댄 채로 고개를 든 그녀가 붉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뜨겁게 일그러진 이 얼굴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또한 어딘가가 욱신거렸다. 닿아 있는 모든 곳이 뜨거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