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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잘 어울리네 (23/183)

23. 잘 어울리네2021.07.17.

꿈이 욕망을 부추긴다. 하지만 지헌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어제는 그래도 꽤 기운차던 여자였는데 오늘은 왠지 맥이 빠진 듯했다. 제대로 중심을 잡은 정오가 지헌에게서 벗어났다. 피하는 반응마저도 더디었기에, 지헌이 물었다.

16551140662197.jpg“어디 아픕니까?”

16551140662203.jpg“괜찮습니다.”

16551140662197.jpg“술병 났어요?”

16551140662203.jpg“감기거든요.”

그의 질문에 발끈한 정오는 대답을 툭 던지고는 먼저 사무실로 들어가 버렸다. 흥. 병 주고 약 주냐? 어제는 그렇게 싸가지 없이 훈계하더니 오늘은 또 왜 안부를 묻고 그러냐. 왠지 그가 로비에서부터 자신을 기다렸던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에게 안긴 것도 난처했다. 가까이 닿아 있던 그 찰나에 전해진 그의 심장 소리도 당황스러웠다. 쿵쿵쿵쿵쿵쿵. 가슴은 철갑 같은데, 그 소리가 다 웬 말이냐고……. 기관차가 지나가는 줄 알았네.

16551140662245.jpg“대리님 오셨어요.”

지난 일을 되새겨볼 여유도 없이 기훈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16551140662203.jpg“응. 기훈 씨 안녕.”

기훈이 자리에서 일어나 정오에게 가방과 우산을 건넸다. 어제 정오의 부탁으로 기훈이 주점에서 챙겨둔 것이다.

16551140662245.jpg“어제 진짜 고생하셨죠. 얼마나 힘드셨으면 가방까지 내팽개치시고.”

16551140662203.jpg“후우. 정말 고마워.”

어젯밤의 일이 다시 떠올라 인사를 하기 전에 한숨부터 나왔다. 하루 일과가 시작되었다. 정오의 몸은 회복의 기미가 없었다. 선선한 에어컨 바람도 힘들 정도였다. 이런 날, 외투 하나 챙기지 못하고 나온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런 그녀가 안돼 보였는지 기훈이 가지고 있던 숙취해소음료를 정오의 자리에 내려놓았다. 기훈은 정오가 숙취 때문에 힘들어한다고 여긴 것이다.

16551140662203.jpg“고마워. 기훈 씨.”

정오는 힘겹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음료를 먹지는 못했다. 음료의 미지근한 기운마저도 차게 느껴졌다. 정오는 몸을 잔뜩 움츠리고는 업무를 이어갔다. 드르르르. 그 와중에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정오는 힘겹게 손을 움직여 휴대폰을 들었다.

16551140662197.jpg- 잠깐 집무실에서 봅시다.

  정지헌 이사님. 어제 저장해놓은 이름이 눈동자를 괴롭혔다. 아니 전화로 해도 될걸, 왜 문자메시지로 보내느냐고. 사람 기분 이상해지게. 정오는 휴대폰을 잠잠히 노려보았다.

16551140662203.jpg‘대체 또 왜 집무실로 부르는 거야.’

가뜩이나 몸도 무거운데.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부터 그가 좀 이상하긴 했다. 그전에, 어젯밤에는 꽤나 잘못하기도 했고.

16551140662203.jpg‘사과하려는 게 아닐까?’

작은 기대를 갖게 되었다. 그래 뭐, 어젯밤의 일에 대해 사과한다면 받아주리라. 정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집무실로 갔다. 똑똑.

16551140662197.jpg“네.”

집무실에서 지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손잡이를 잡기 전에 안쪽에서 문이 열렸다. 지헌이 문을 활짝 열어 그 안으로 정오를 안내했다. 몸은 아프지만 열 기운을 발산하고 싶지 않았다. 정오는 최대한 냉랭하게 반응했다.

16551140662203.jpg“부르셔서 왔습니다.”

16551140662197.jpg“어제는 잘 들어갔습니까?”

16551140662203.jpg“네.”

16551140662197.jpg“약 가져가요.”

16551140662203.jpg“네?”

16551140662197.jpg“감기라면서.”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지헌을 올려다보았던 눈길이 아래로 이동했다. 그가 가리킨 테이블 위에 약이 한 보따리 놓여 있었다. 약장수가 되셨나? 뭔 약이 이렇게 많아? 하지만 정오는 거절했다. 정오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었으므로.

16551140662203.jpg“괜찮습니다.”

16551140662197.jpg“가져가요. 이정오 대리 먹으라고 일부러 산 거니까.”

16551140662203.jpg“왜요?”

16551140662197.jpg“…….”

16551140662203.jpg“왜 그런 수고를 하십니까.”

몸이 피곤하여 잘 뜨이지 않는 눈을 독하게 뜨고서 그를 바라보았다. 몇 걸음 옮겨 테이블 위의 약 보따리를 집어 든 지헌이 다가왔다.

16551140662197.jpg“약 먹고, 앓지 말고.”

사과를 기대하고 왔는데 당근.

16551140662197.jpg“회복해서 제대로 일하시라고.”

지배인이 피지배인에게 먹이는 채찍 같은 당근이었다. 병 주고 약을 주는 거냐. 어제는 그렇게 놀려놓고서, 오늘은 약 보따리를 안겨주는 이 남자의 변덕이 너무 미웠다. 그럼에도 따지지 못하는 마음이, 자신의 기력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내가 힘만 더 있었어도 발을 콱! 턱을 확! 속으로만 이를 부들부들 갈며 쳐다보고 있는데 그 역시 뭐가 못마땅한지 눈을 찡긋거리고는 제자리로 가 거뭇거뭇한 무언가를 들고서 돌아왔다.

16551140662197.jpg“아픈 사람이 좀 든든하게 입지.”

그의 카디건이 그녀의 어깨 위에 걸쳐졌다. 당황한 그녀가 뿌리치려 했으나 그는 재빠르게 카디건의 앞단추 하나를 꿰어버렸다. 품이 큰 카디건을 걸치니 담요를 뒤집어쓴 것 같았다.

16551140662203.jpg“……괜찮습니다.”

16551140662197.jpg“그러게요. 괜찮네요.”

고요한 목소리가 동화책을 읽는 것처럼 나긋했다. 그는 계속 장난을 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무안했고, 한편으로는 먹먹했다. 7년 전이 떠올랐다. 우리의 마지막 날. 내가 임신테스트기를 확인하고서 당신을 만나러 갔던 그날. 당신이 외투를 벗어 내게 입혔던 그날. 나는 몇 번이고 돌이켜보았던 그날을 당신은 생각조차 하지 못하겠지.

16551140662203.jpg“……저도 스타일이 있는 사람이에요.”

16551140662197.jpg“잘 어울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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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옷을 걸친 그녀의 모습이 만족스러운 듯 그가 입술을 슬쩍 늘여서 웃었다. 7년 전의 그날처럼.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정오의 표정에 지헌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16551140662197.jpg“나는 입은 적 없는 옷이니까, 내가 줬다고 하지 말고 입어요.”

16551140662203.jpg“차라리 조퇴를 시켜주시죠.”

16551140662197.jpg“그럼 그렇게 하든가.”

16551140662203.jpg“…….”

16551140662197.jpg“바래다줘요?”

무턱대고 억지를 부렸는데 그가 흔쾌히 허락하며 바래다주겠다고까지 하니 정오는 더욱 난감했다. 어제 얘기는 한마디도 안 하면서, 사과도 안 하면서, 엉뚱한 것만 잘도 챙기고 있어.

16551140662203.jpg“……아닙니다. 일할게요.”

16551140662197.jpg“…….”

16551140662203.jpg“약은 하나만 가져가겠습니다.”

정오는 지헌이 안겨준 약 보따리를 내려놓고서 그중 눈에 익숙한 약상자 하나만 챙겼다. 꾸벅. 지헌은 정오가 고개를 까딱여 인사하고는 도망치듯 떠나는 걸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약국에서 처방전 없이 구입할 수 있는 약을 몽땅 사버려서 약사의 눈치도 봤는데. 하나만 더 가져가지. 그래도 카디건은 잠자코 걸쳤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누군가의 감기가 이토록 신경 쓰인 건 처음이었다. * 점심시간이 되었다. 지헌이 준 약을 먹고 난 후 정오도 점점 기운이 돌아왔다. 씩씩하게 뛰어다니지는 못하겠지만 열은 어느 정도 떨어진 것 같았다. 점심시간엔 쉬어야지. 사무실 밖으로 나가지 말고 엎드려서 조금 자야겠다. 정오는 키보드 위에서 고단했던 손가락을 주무르며 한숨을 쉬었다. 그때 성미란 팀장이 가까이로 다가와 정오를 불렀다.

16551140779525.jpg“이정오 대리, 밥 먹을 수 있겠어?”

16551140662203.jpg“팀장님, 저 오늘은 사무실에 있을게요.”

16551140779525.jpg“속 안 좋아서 그러지? 죽은 먹을 수 있겠어?”

16551140662203.jpg“먹을 수 있긴 할 텐데…….”

16551140779525.jpg“나도 죽 먹으려고 배달시켰는데. 같이 먹자.”

16551140662203.jpg“저는 괜찮은데.”

16551140779525.jpg“이 대리 것까지 두 개 시켰어. 회의실로 와.”

몸은 아직 잘 움직이지 않았지만 미란이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는데 사양할 수는 없었다. 그래. 죽을 먹으면 기운이 더 나겠지. 정오는 미란을 따라나섰다. 미란이 고른 메뉴는 ‘특특전복죽’. 일반 전복죽 세 배 분량의 전복이 들어 있는 메뉴였다. 남겨선 안 되는 귀한 음식. 정오는 고마운 마음으로 숟가락을 들었다. 목 넘김이 편하고 맛도 고소해서 부지런히 입을 움직이게 됐다. 몸은 무거워도 식욕이 줄지 않는 건 참 다행스런 일이었다. 어쩌면 약을 먹고 기운이 조금 돌아와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지헌에게 조금은 고마워하게 되었다.

16551140779525.jpg“집에서 회사 다니기는 어때?”

16551140662203.jpg“예전 회사보다 가까워서 훨씬 편해요.”

16551140779525.jpg“어제는 정말 미안하게 됐어. 너무 정신이 없어서 이 대리가 그렇게 힘들게 술 마셨다는 소식도 늦게 들었네.”

16551140662203.jpg“아니에요. 그래도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죠.”

16551140779525.jpg“고생했어. 조퇴는 안 해도 되겠어?”

16551140662203.jpg“네. 그럼요.”

16551140779525.jpg“그래. 오늘은 일찍 퇴근하자.”

본부도 본부장도 마음에 안 들지만 팀원들만은 참 잘 만났다. 특히 성미란 팀장은 크게 의지가 되었다. 매번 정오의 의견을 지지해 주는 것도 고마웠다. 다만, 오늘의 미란은 표정이 조금 무거웠다. 무언가 정오에게 할 얘기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정오가 그릇을 다 비워갈 때쯤 미란이 조심스럽게 정오의 이름을 불렀다.

16551140779525.jpg“근데 이정오 대리.”

16551140662203.jpg“네. 팀장님.”

16551140779525.jpg“내가 이런 걸 물어봐도 될지 모르겠는데…… 걱정돼서 말이야…….”

16551140662203.jpg“네. 말씀하세요.”

16551140779525.jpg“저기, 이 대리…….”

16551140662203.jpg“…….”

16551140779525.jpg“정지헌 이사님하고는 무슨 관계야?”

미란이 어떤 질문을 하든 성의껏 대답해주리라 마음먹었던 정오의 입술이 굳었다.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이었다.

16551140779525.jpg“두 사람 원래부터 아는 사이였어?”

16551140662203.jpg“…….”

16551140779525.jpg“아니면 혹시 7년 전에? 이사님이 기억을 잃었다던 그때 만났던 건가?”

미란은 생각보다 많은 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 어제 제작 1팀도 다들 술을 마신 터라 오늘 점심 메뉴는 해장국이 되었다. 거하게 해장을 하고 돌아온 제작 1팀은 1층 로비에서 지헌을 만났다. 제작 1팀 팀장 안찬섭이 가장 먼저 인사했다.

16551140835672.jpg“이사님, 점심 드셨습니까.”

16551140662197.jpg“네.”

시내가 알은척하라며 부추기는 듯 은비를 툭툭 쳤다. 정지헌의 옆자리는 당연히 채은비니까, 그 옆에 서야 한다고. 은비는 조금 어깨를 움츠리며 그 곁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웬일인지 지헌의 표정이 싸늘했다. 평소보다 조금 더. 지헌이 찬섭에게 말을 걸었다.

16551140662197.jpg“어제 일 말인데요.”

16551140835672.jpg“네? 무슨…….”

16551140662197.jpg“1팀에서 2팀 직원에게 접대를 미뤘습니까?”

지헌의 질문에 1팀의 팀원들은 다들 서로를 쳐다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조시내 대리 혼자서만 얼굴이 새빨개졌다. 은비는 지헌에게 더 다가갈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16551140835672.jpg“우리 조시내 대리가 너무 바빠서 2팀 이정오 대리한테 맡긴 것 같습니다. 물론 다른 팀원들이 일을 끝낼 때까지 잠깐만…….”

16551140662197.jpg“단골 광고주 접대를 입사한 지 일주일 남짓 된 직원한테 맡겼다고요.”

16551140835672.jpg“…….”

16551140662197.jpg“팀장님께서 지시하셨습니까?”

정중한 질문이었으나 어쩐지 소름 끼쳤다. 왠지 다 알면서 물어보는 느낌. 지헌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에 시내는 온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1층 로비 전체에 찬물을 끼얹은 듯 사방이 고요해졌다.

16551140835672.jpg“아니, 저는…….”

찬섭이 어물거리자 시내가 부리나케 나섰다.

16551140835672.jpg“이사님, 제가 부탁했습니다. 팀장님께서는 뒤늦게 아셨고요. 하지만 너무 바빠서 정말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이정오 대리만 놀고 있길래요.”

16551140662197.jpg“네. 이해합니다. 바빴으니까. 앞으로 그런 일이 더는 없으면 되는 거죠.”

16551140835672.jpg“네. 조심하겠습니다.”

그나마 지헌이 금방 이해해주어서 다행이었다. 시내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16551140662197.jpg“그럼 어제의 결과를 볼까요?”

시내가 창백해진 얼굴을 천천히 들어 올려 지헌을 바라보았다. 어제의 작업 분량은 오늘 아침에 반려됐는데…….

16551140835672.jpg“……네?”

16551140662197.jpg“그렇게 바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의 결과물. 어제 조시내 대리가 작업한 것들 좀 같이 확인해보죠.”

전직원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던 그 잘생긴 얼굴이 오싹하도록 무시무시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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