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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내 거야, 건들지 마 (24/183)

24. 내 거야, 건들지 마2021.07.21.

정오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자 성미란 팀장은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16551140971281.jpg“아니. 말 안 해도 돼. 사정이 있겠지.”

16551140971287.jpg“…….”

16551140971281.jpg“처음부터 좀 느껴졌어. 정지헌 이사님에 대해 얘기할 때마다 이 대리 표정이 조금 달라졌거든.”

지난 화요일. 회의가 끝난 후 미란은 화장실에서 은비와 시내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정오에 대한 이야기였다. 회사 생활을 십여 년 가까이하다 보면 별별 해괴한 소문을 다 듣게 된다. 그래서 미란도 화장실 뒷담화를 그다지 신경 쓰지는 않는 편이다. 다만 발화의 주인이 채은비 과장인 게 조금 마음에 걸렸다. 미란 역시 정오가 은비와 아는 사이인 줄은 몰랐다. 두 사람 모두 내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미란은 정오가 입사한 후 지금까지의 일들을 하나하나 떠올려보았다. 지헌을 처음 만난 날의 이정오는 확실히 이상했다. 정지헌 이사마저도 정오의 남다른 반응을 알아보고 다시 이사 집무실로 부르지 않았던가. 그 이후 엘리베이터 앞에서 손목을 잡힌 것도 이상했고, 정오가 지헌의 7년 전 사고를 물었던 것은 특히 이상했다. 그리고 어제, 정오가 광고주 접대를 위해 나섰을 때 정지헌 이사가 따라나섰던 것도. 두 사람 사이에 뭔가가 있는 것 같았다. 마치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금세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다만 자신이 그 사이를 물어봐도 되는지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아 말투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래도…… 정오가 정지헌 이사 때문에 회사 생활이 망가져버린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아 말을 꺼내게 되었다.

16551140971281.jpg“……그냥 걱정돼서 말이야. 이제 이사님은 곧 결혼할 거잖아. 게다가 같은 회사고.”

정오는 고개를 푹 숙였다. 절반의 긍정이었다. 미란은 자신이 괜한 얘기를 꺼낸 것 같아 미안해졌다.

16551140971281.jpg“……이사님한테 진지하게 얘기해볼 생각은 없어?”

16551140971287.jpg“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16551140971281.jpg“이정오 대리. 술 먹고 싶으면 얘기해. 이 대리 문제는 해결해주지 못해도 힘든 거 들어줄 수는 있으니까.”

정오는 눈시울을 붉혔다. 미란이 이것저것 캐묻지 않는 것, 그건 잘못된 거라고 질타하지 않는 것만으로 고마웠다. 아마도 미란은 이대로 아무 내색도 하지 않을 것이다.

16551140971281.jpg“그리고.”

16551140971287.jpg“네. 팀장님.”

16551140971281.jpg“퇴사는 안 된다. 알지?”

사실 미란의 용건은 이것이었다. 팀장에게 팀원 이탈은 치명적이다. 미란은 팀원을 열심히 지켜보겠노라 전의를 불태웠다. 정오도 미소 지으며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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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헌은 제작 1팀의 팀원들과 함께 조시내 대리의 지난밤 작업물을 확인하러 갔다. 조시내 대리는 바들바들 떨려오는 손으로 PC 휴지통에서 파일 하나를 꺼냈다.

16551141000586.jpg“이겁니까?”

16551141000591.jpg“네. 그런데 오늘 아침에 광고주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다시 작업하게 됐습니다.”

16551141000586.jpg“그럼 어제 작업한 분량은 쓸모가 없게 된 거네요.”

조시내 대리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폭풍 직전처럼 사무실 전체의 분위기가 싸해졌다. 다들 무표정인 지헌의 눈치를 보며 마른침만 삼켰다.

16551141000586.jpg“실망스럽네요. 그렇게 열심히 일했는데 결과물이 없다니.”

16551141000591.jpg“…….”

16551141000586.jpg“차라리 회식을 가시지.”

차분하게 읊조린 혼잣말 같은 조소에 시내는 얼굴을 들 수도 없었다.

16551141000586.jpg“어쨌든 알았습니다. 할 수 없죠. 클라이언트 마음을 잡는 건 어려운 일이니까요.”

지헌은 잠시 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듯 한 발 물러났다. 이 정도로 끝나서 다행이었다. 시내는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지헌이 팀을 떠나기 전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16551141000586.jpg“앞으로 조시내 대리는 매일 오후 6시에 업무 보고를 해주세요.”

16551141000591.jpg“……네?”

16551141000586.jpg“직접 찾아올 것 없이 제게 이메일로 전달해주시면 됩니다.”

이제 숨 좀 돌리나 했는데! 지헌이 떠난 후에도 오랫동안 1팀 팀원들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시내를 바라보았다. 은비를 도와주기 위해 한 일이었는데, 정지헌 이사에게 완전히 찍혀버렸다. 시내는 절절하게 은비의 소매를 붙잡았다.

16551141000591.jpg“과장님…… 저 어떡해요…….”

16551141033557.jpg“어휴. 나도 어제 위태롭긴 했어. 괜찮아. 괜찮아. 내가 오빠한테 잘 말해놓을게.”

은비는 시내를 잘 다독이고는 지헌의 집무실로 떠났다. 시내는 자리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자신이 일을 시켰단 사실을 고자질한 이정오를 용서할 수 없었다. 지헌이 집무실에 들어온 후, 은비가 따라 들어왔다.

16551141033557.jpg“오빠.”

지헌은 대답하지 않고 자리에 앉아 눈앞에 놓인 서류들을 넘겼다.

16551141033557.jpg“무슨 안 좋은 일 있었어?”

16551141000586.jpg“…….”

16551141033557.jpg“조시내 대리도 열심히 한다고 한 건데, 그런 일로 나무라면 직원들이 겁먹잖아.”

지헌에게서 재차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 은비는 질문을 바꾸었다.

16551141033557.jpg“어제는 왜 그렇게 연락이 안 됐어?”

16551141000586.jpg“…….”

16551141033557.jpg“어제 은엽 오빠도 와서 같이 만나려고 했는데. 우리 오빠랑은 연락했어?”

한참 만에 대답이 돌아왔다.

16551141000586.jpg“응.”

16551141033557.jpg“오빠가 뭐래?”

16551141000586.jpg“별말 없던데.”

지헌의 시큰둥한 반응에 은비는 마음이 상했다. 어제 은엽에게 타박을 받아 더욱 그랬다. 결혼. 명확한 목표를 향해 달려왔는데, 이제 그 고지가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정지헌 또한 당연하게 결혼을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어쩐지 초조했다. 입가에 경련이 일어 은비는 미소 짓기가 쉽지 않았다. 겨우겨우 입을 열어 목소리를 내었다.

16551141033557.jpg“어머니께서 결혼 얘기하셨어. 어떻게 하지?”

16551141000586.jpg“대충 알아서 할 수 있잖아.”

간신히 내놓은 용건이었는데, 그의 대답은 설렁설렁 서류를 넘기는 손가락만큼의 성의도 없어 보였다.

16551141033557.jpg“대충 어떻게?”

16551141000586.jpg“우리 어머니는 나보다 네가 더 잘 알지 않아?”

그의 무정한 태도에 인이 박인 게 아니다. 그저 은비는 참고 있는 것이었다. 언젠가 거머쥘 결혼을 위하여, 자존심을 꾹꾹 내려놓고 버티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결혼만은 날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16551141033557.jpg“그래. 어머니께는 내가 대충 말씀드린다고 쳐. 그럼 오빠는?”

16551141000586.jpg“…….”

16551141033557.jpg“오빠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

16551141000586.jpg“너한테 결혼까지 부탁할 만큼 뻔뻔하진 않지.”

16551141033557.jpg“……내가 원한다면? 내가 하자고 한다면?”

그녀의 물음에 그는 천천히 하던 일을 멈추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저 쳐다보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다시 입을 열지 못했다. 네가? 너 따위가? 그가 결코 내뱉은 적 없는 말이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머리에 박혀버린 느낌이었다. 경멸이 아닌 경멸과 웃음이 아닌 웃음이 그의 표정에 모두 들어 있었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듯한 오만하고 싸늘한 시선은 은비를 몸서리치게 했다. 빤히 바라보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16551141000586.jpg“그럼 헤어져야지.”

16551141033557.jpg“…….”

16551141000586.jpg“물론 사귄 적도 없었지만.”

표정 하나 바꾸는 일 없이 시선을 내린 그는 아무렇지 않게 다시 업무를 이어갔다.

16551141000586.jpg“역사가 없었으니 말 한마디면 끝나는 일 아니야? 어머니께 헤어졌다고 해.”

은비는 말은 하지 못하고 미련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지헌의 말대로 할 수 없었다. 이제는 말 한마디로 끝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지헌이 모르는 일이 많았다. 은비는 회사의 많은 이들에게 지헌과 자신의 사이를 퍼뜨렸고 그 안에는 95% 정도의 거짓말이 섞여 있었다. 결혼이 아니면 체면을 차릴 수도, 회사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도 없을 것이다. 가족들 모두에게 충격을 안겨줄 것이고.

16551141033557.jpg“오빠는 그 말이 그렇게 쉽게 나와?”

16551141000586.jpg“그걸 어려워하는 네가 더 이해 안 가는데.”

16551141033557.jpg“…….”

16551141000586.jpg“바쁜데 이만 가주겠어?”

늘 한결같이 감정 없는 목소리가 은비의 가슴을 옥죄었다. 여기서 더 괴롭혔다간 이렇게 집무실을 급습할 수 있는 자유조차 사라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은비는 이를 악물고서 집무실을 나왔다. 나오는 길에 승규를 만났다. 무슨 기분 좋은 일이 있는지 재수 없게 콧노래까지 부르며 나타난 승규를 떫은 표정으로 바라보던 은비가 픽 코웃음을 쳤다.

16551141033557.jpg“오빠 지금 바쁜데요.”

16551141120358.jpg“아, 그래요?”

지헌이 바쁘다고 경고했는데도 승규는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 은비의 이맛살이 우그러졌다.

16551141033557.jpg“들어가시게요?”

16551141120358.jpg“친구가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확인하려고요.”

16551141033557.jpg“허!”

은비는 다시 한번 코웃음을 치고는 딱딱 발소리를 내며 떠났다. 승규는 뚱하게 은비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승규와 은비는 7년 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사이가 좋지 않았다. 승규는 고등학교 동창인 은엽을 싫어했고 그 동생인 은비 또한 좋아하지 않았다. 은엽의 간교함이 싫었고 은비의 허세가 못마땅했다. 그저 자신의 잣대를 지헌에게 강요하지 않을 뿐이었다.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온 승규는 지헌의 살벌한 눈빛에 주춤했다. 또 채은비일 것이라고 속단하여 노려보았던 지헌의 눈빛이 친구를 확인하고는 가라앉았다.

16551141120358.jpg“채은비 씨 엄청 화났던데. 싸웠어?”

16551141000586.jpg“아니.”

16551141120358.jpg“하긴. 넌 싸우지도 않겠지.”

승규가 소파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16551141120358.jpg“유난히 깍듯하더라, 채은비 씨한텐.”

16551141000586.jpg“가볍게 대할 수는 없지.”

지헌은 턱을 괴고서 서류를 넘기며 대답했다. 은비에게는 깍듯할 수밖에 없었다. 은비는 7년 전, 지헌의 사고를 신고해주고 뺑소니범도 검거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지헌이 혼수상태일 때는 어머니 장영미 여사가 좌절하지 않도록 극진히 챙겼다고 한다. 그 인연으로 여태까지 어머니와 잘 지내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집안끼리도 알고 지내며, 친구 채은엽의 동생이니. 많은 것이 얽혀 있어 막연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런 사정을 승규도 알고 있었다.

16551141120358.jpg“그래도 정리해야지. 진짜로 사귀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16551141000586.jpg“없어.”

승규의 조언에 지헌은 망설임 없이 부정했다.

16551141120358.jpg“그래. 지금 당장 사귀고 싶은 건 아니지만, 우산은 같이 쓰고 싶은 거 아니야?”

16551141000586.jpg“…….”

16551141120358.jpg“아니지. 우산이 아니라 외투지. 외투를 쓰고 다니셨지.”

16551141000586.jpg“…….”

16551141120358.jpg“어제 다 봤다, 정지헌. 아주 대놓고 영화를 찍으셔놓고.”

승규가 거듭 놀리자 지헌도 꽤 골똘해졌다.

16551141120358.jpg“부정하고 싶어? 그게 다 연애 감정이다.”

그럼에도 연애 감정이라는 낯간지러운 말을 수용하는 건 어려웠다. 지헌이 느끼는 감정은 제법 명확했다. 이정오라는 여자의 외모에 대한 반응. 그건 그녀가 여자고, 자신이 남자라서 생길 수밖에 없는 감정이었다. 식욕 같은 성욕. 그건 연애 감정 같은 게 아니라고 못 박아주려는데 승규가 먼저 놀리듯 추궁했다.

16551141120358.jpg“비 맞는 게 걱정은 되지만 좋아하는 건 아니라고?”

16551141000586.jpg“그래.”

16551141120358.jpg“옆에 있고 싶기는 하지만 좋아하는 건 아니라고?”

16551141000586.jpg“그래.”

16551141120358.jpg“아픈 게 신경 쓰이지만 좋아하는 건 아니지.”

16551141000586.jpg“…….”

16551141120358.jpg“내가 사준 옷을, 남자 카디건을 이정오 대리가 입고 있던데, 그래도 넌 그런 감정은 아니지.”

16551141000586.jpg“……그게 네가 준 거였나?”

16551141120358.jpg“무정한 자식.”

쉽게 정의할 수 없는 감정, 쉽게 정의할 수 없는 사람인데 명료한 이유를 갖다 붙여버리니 기분이 이상했다.

16551141000586.jpg“……그냥 외모가 딱 취향이야.”

16551141120358.jpg“…….”

16551141000586.jpg“이런 적 없었어. 33년 동안 한 번도. 그래서 성가신 거고.”

16551141120358.jpg“그래, 그래, 그래, 그래. 그걸 순정이라고 한단다.”

무정한 친구에게 순정이 생겼다. 승규의 입술은 어느새 한계치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길어졌다. 지헌은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겨우 열흘 전에 처음 봤을 뿐인데 순정일 리가 있나.

16551141120358.jpg“어쨌든 잘해봐. 난 안 도와줘.”

16551141000586.jpg“누가 도와달래?”

16551141120358.jpg“그래도 언젠가 나한테 아쉬운 소리를 하게 될 거다.”

호언장담한 승규는 집무실 안을 양반걸음으로 어슬렁어슬렁 걷다가 구석진 곳에서 우뚝 멈추었다. 노란 우산 하나가 벽에 기대어 있었다.

16551141120358.jpg“우산이 이게 뭐냐.”

어젯밤 정오와 헤어진 후, 사무실로 잠깐 돌아온 지헌이 두고 간 것이었다.

16551141120358.jpg“넌 이런 거 필요 없을 거 같은데? 내가 가져갈까? 우리 딸 갖다주게.”

16551141000586.jpg“아니.”

16551141120358.jpg“…….”

16551141000586.jpg“내 거야, 건들지 마.”

지헌의 정색에 승규는 코를 벌름거렸다. 이 자식, 여자에 관심이 생기더니 물욕까지 생겼네. 어쨌든 인간적인 욕심이란 좋은 징후였다. 승규는 킥킥 웃고는 집무실을 떠났다. * 금요일 저녁. 야근에서 해방된 팀원들이 하나둘 자리를 떠났다. 이번 주말은 자유를 보장받았다. 이제 전쟁 같은 경쟁 PT를 치르는 동안 평화로운 주말은 없을 터였다. 그러니 이번 주말은 제대로 쉬어야지. 예나랑도 많이 놀아주고. 업무를 끝낸 정오는 주말을 어떻게 보낼까 생각하며 가방을 챙겼다. 벗어둔 카디건에 마지막으로 손이 갔다. 오전에, 근육통이 심했을 때 지헌에게 넙죽 받아버렸는데 약을 먹고서 정신이 들고 나니 후회되었다. 몸과 마음이 약해진 틈을 차 제 어깨에 옷을 걸쳐준 지헌이 밉기도 했다.

16551140971287.jpg‘그래도 세탁은 해서 돌려줘야지.’

정오는 카디건을 가방에 넣었다. 사무실을 나서서 중앙 복도로 가는 와중에 또 지헌을 만났다. 그 역시 지금 퇴근을 하는 모양이었다. 그와 마주하니 다시 열이 오르는 느낌이었다.

16551140971287.jpg‘쫄지 말자.’

정오는 씩씩하게 발을 디뎠다. 물론 감기 기운이 남아 마음만큼 몸이 씩씩하지는 못했다. 오지 않는 엘리베이터. 그 앞에 나란히 선 두 사람. 그가 눈꺼풀을 내려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정오는 고집스럽게 정면을 응시하고는 말했다.

16551140971287.jpg“카디건은 세탁해서 돌려드릴게요.”

16551141000586.jpg“그냥 줘요.”

그가 농구공도 한 손으로 너끈히 들어 올릴 것 같은 커다란 손을 펴 보였다.

16551141000586.jpg“친구가 사준 소중한 거라서 세탁은 직접 맡겨야 하니까.”

16551140971287.jpg“네.”

그렇게 소중한 걸 왜 빌려줬냐? 그의 속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정오는 군말 없이 가방에서 카디건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16551140971287.jpg“잘 입었습니다. 감사합니다.”

16551141246507.jpg“대리님!”

카디건을 건넨 후에 사무실 쪽에서 기훈이 정오를 부르며 헐레벌떡 달려왔다.

16551141246507.jpg“이사님, 퇴근하십니까.”

정오와 지헌이 나란히 서 있는 것을 보고 깍듯하게 허리 굽혀 인사한 기훈이 다시 정오에게 말을 건넸다.

16551141246507.jpg“대리님. 저 오늘 차 가져왔는데. 제가 태워드릴까요?”

16551140971287.jpg“금요일 저녁인데 약속 없어?”

16551141246507.jpg“화양동이라서요. 같이 가실래요?”

16551140971287.jpg“그럼 그럴까?”

정오는 기훈의 호의를 기분 좋게 받아들였다. 기훈은 회사에서 가장 편한 동료였다. 그런데 지헌이 기훈을 불렀다.

16551141000586.jpg“송기훈 씨. 지금 사무실에 전화 울리는 것 같은데 아무도 안 받네요.”

정말로 어디선가 전화벨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16551141246507.jpg“어? 대리님, 잠시만요.”

기훈이 사무실로 뛰어갔다. 다시 엘리베이터 앞엔 두 사람만 남았다. 지헌이 손에 들고 있던 카디건을 다시 정오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16551141000586.jpg“그냥 입고 가요.”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정오가 막아낼 틈이 없었다. 정오가 당황하여 굳어 있는 사이에 사무실에서 뛰어나온 기훈이 말했다.

16551141246507.jpg“대리님, 먼저 가셔야겠는데요. 급하게 메일 보낼 게 생겨서요.”

16551140971287.jpg“으응. 알겠어. 수고해.”

16551141246507.jpg“네.”

기훈이 떠난 후 그가 말을 이었다.

16551141000586.jpg“친구가 사준 소중한 거니까 월요일에 꼭 돌려줘요.”

16551140971287.jpg“…….”

16551141000586.jpg“주말에 줘도 좋고.”

농담인가? 진심인가? 입가에 그린 미소가 왠지 사악해 보였다. 정오는 그가 주말에도 나오라고 할까 봐 아무 말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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