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사랑한다는 말2021.08.28.
정오의 눈물이 멎을 때까지 잠잠히 기다리던 배일은 결국 편의점에서 안줏거리를 더 사 왔다.
“고민이 많으신가 보네요. 장기미제사건 때문에.”
배일이 술잔에 술을 채우며 말했다. 겨우 눈물을 잠재운 정오가 푹 한숨을 쉬고서 입을 열었다.
“인어공주에 나오는 바다마녀가요. 사실은 현자일 수도 있어요.”
엉뚱한 화제에 배일이 눈을 깜빡였다. 시선이 멍해지니 그는 더욱 순둥순둥해 보였다.
“바다 마녀가 왜 인어공주의 목소리를 빼앗았는지 아세요? 인어공주가 한마디만 하면 바다가 그냥 피바다 되는 거거든요.”
그런 순둥이에게, 정오는 마녀와 같은 싸한 목소리를 연출하여 말했다.
“인어공주가, 나는 인어공주요, 아빠랑 언니들이랑 바다에서 살았소, 이렇게 얘기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우리는 1년 안에 아쿠아리움에서 인어가족을 볼 수 있는 거죠. 바다마녀가 바다세계의 안전을 지킨 거예요.”
냉혹한 현실을 설파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엄숙하고 진지했다. 나도 안전을 위해 함구할 수밖에 없다. 내가 끌어안고 있는 진실이 당신의 가족들과 내 가족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으므로. 배일의 표정이 골똘해졌다. 그녀의 엉뚱한 이야기를 그가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 같아 정오는 슬쩍 주의를 주었다.
“애들한테는 이 얘기 하지 마세요. 우리만 알고 있자고요.”
“아…… 네.”
배일은 그 이미지와 딱 어울리게 대답마저도 어수룩했다. 자신의 처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푸념을 늘어놓은 것은 꽤 효과가 있었다. 소주 한 병을 다 비우고 나니 마음이 조금 가뿐해졌다. 내일부터 또 훌훌 털고서 잘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정지헌과 마주치는 것이 두렵긴 하지만.
“경사님, 정말 감사했습니다. 역시 민중의 지팡이는 최고예요.”
정오가 두 손의 엄지를 치켜들며 말했다.
“아닙니다. 도움이 되었다니 저도 뿌듯하네요. 그럼 살펴 가십쇼.”
“넵! 경사님도 얼른 들어가세요!”
배일을 따라 정오도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그런데, 씩씩한 인사가 무색하게도 어색한 상황이 이어졌다. 하하. 하하. 계속 가는 방향이 같아서, 걸어가다가 마주 보면 어색하게 웃고, 또 마주 보면 어색하게 인사하고. 몇 분 더 가다가 정오가 말을 걸었다.
“저랑 가는 방향이 같네요.”
“그러게요. 저희 집은 저기 보이는 레몬세탁소 맞은편입니다.”
“어엇? 저기 6층 빌라예요?”
“네.”
“저는 그 옆 5층 빌라예요. 우리 이웃이었구나! 경찰관이 이웃이라니 정말 든든하네요!”
정오가 반가운 마음을 드러내자 배일도 결국 미소 지었다. 빙긋 웃어 보이니 사람이 더 미남이구나. 경찰서에서도 아주 인기가 많겠어. 정오도 배일의 얼굴을 뜯어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정오 님은 무슨 일 하십니까.”
“카피라이터예요.”
“오. 멋지네요.”
“아직 많은 부분에서 고전하고 있지만요.”
“그래도 대단하시죠. 아이도 혼자 키우시면서 일도 하시는데.”
“엄마 도움을 많이 받고 있어요. 아, 경사님은 결혼 안 하셨어요?”
“네. 혼자 삽니다.”
“혹시 애인 없으시면 제가 중매서도 될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지금은 혼자가 좋아서요.”
배일이 깔끔하게 거절했다. 하긴 나 말고도 이런 제안 하는 사람들이 넘쳐날 텐데. 정오는 그저 경찰관 이웃을 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그럭저럭 괜찮은 밤이었다.
* 다음 날. 아침 일찍 출근했다가 외부 미팅을 다녀온 지헌은 오후 늦게야 회사로 복귀했다. 외근을 가기 전에 정리해야 할 것들이 많아 오전에는 정오를 발견하고도 알은체하지 못했다. 다녀와서 조용히 얘기해볼 기회를 마련해보려고 했는데, 그녀는 자리에 없었다.
“이정오 대리 어디 갔습니까.”
정오의 옆에 앉은 기훈에게 물었다.
“오늘 라디오 광고 녹음이 있어서 스튜디오에 갔습니다.”
“돌아오면 집무실에 들르라고 해줘요.”
“이사님, 오늘 다원주류 신제품 시음회가 있어서요. 조금 이따가 다들 거기로 이동합니다. 이 대리님도 녹음 끝나고 바로 그쪽으로 올 거고요.”
기훈의 말에 지헌의 입술 사이로 힘없는 한숨이 빠져나갔다. 어제까지만 해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정오의 날벼락 같은 고백을 들은 후로 머릿속이 백지가 되었다. 이게 대체 무슨 기분인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그녀의 아버지를 닮은 게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 그것까진 좋다. 거짓말도 이해할 수 있었다. 어쨌든 아버지를 닮았단 프레임을 갖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전남친을 닮았다고? 그게 사실이라고? 언젠가 그녀의 앞에서 돌아가신 아버지인 척을 했을 때, 그녀가 했던 말은 ‘아빠’가 아니라 ‘오빠’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내가 대체 얼마나 닮았다는 거지? 술에 취해서 순간적으로 착각할 만큼 많이?’
아니, 술에 취해서 아예 사고회로 자체가 고장났던 건가? 뭐가 됐든 씁쓸했다. 누군가를 닮았다는 말은 그리 유쾌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러면서도, 그런 연결고리라도 없다면…… 그녀와 단절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초조했다. 한편으로는 그 전남친이라는 놈에게 화가 났다. 대체 어떤 몹쓸 짓을 하고 떠났기에 여자가 지금까지 그토록 눈물바람이냐고.
‘설마…… 그놈이 세상을 떠난 건 아니겠지.’
그녀의 눈물을 떠올리니 그런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헤어진 전남친에 대해 어떻게 물어봐야 하나. 얼마나 물어봐야 상대가 불쾌하지 않은 거지?
‘살다 살다 이런 고민까지 하게 되는구나.’
이정오 때문에. 내가. 이 모든 것을 착잡하게 여기면서도 지헌은 시음식을 위해 서둘러 업무를 처리했다. 그리고 늦지 않게 차에 올랐다. 기사를 대동하여 이동하는 와중에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확인해보니 어머니, 장영미 여사였다. 첫 전화는 무시했다. 하지만 두 번째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다. 지헌은 한숨을 푹 쉬고는 전화를 받았다.
“네. 어머니.”
[아들, 바빠?]
“네. 광고주 행사가 있어서 이동하고 있어요.”
어머니의 다정한 음성에 그 또한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표정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
[밥은 잘 챙겨 먹고? 어디 아픈 덴 없지?]
“네. 건강하죠. 어머니는요?”
[어휴, 위가 안 좋아서 조금 고생이야. 스트레스를 조금만 받아도 소화가 안 돼서.]
“검진은 다녀오셨어요? 약 꾸준히 드시고요.”
[그래. 고마워. 너는 별일 없지?]
“늘 똑같죠, 뭐.”
[어제 집에 은비가 왔었어. 아무 일 없이 차 한잔 마시고 돌아가긴 했는데, 조금 걱정이 되더라고. 너희 요즘 무슨 문제 있는 거 아니지?]
은비라는 이름에 인상이 세게 구겨졌다. 회사에서는 그 난리를 쳐 놓고 어머니께 달려갔다니. 하지만 지금 은비와의 사이에 대해 어머니께 얘기할 수는 없었다. 어머니의 건강을 신경 쓰느라 말 한마디 제대로 할 수 없는 처지가 답답했다.
“……아니지?”
“네. 조만간 말씀드릴게요.”
영미와 은비도 가깝게 지낸 세월이 꽤 길어 정리하는 데 오래 걸릴 것이다. 지헌은 언젠가 영미를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아들이 그렇게 얘기하면 괜히 불안하더라.]
“…….”
[엄마 아빠 너무 힘들게 하지 마. 지헌아, 엄마 마음 알지? 다 널 사랑하니까 그러는 거야. 알지?]
“그럼요.”
[정말 아는 거 맞아?]
“당연하죠. 저도 어머니를…….”
[…….]
“사랑하니까요.”
전화를 빨리 끊기 위해 진심이 담기지 않은 고백을 뱉어냈다. 오그라드는 사랑 고백 덕분에 통화는 그나마 금방 마칠 수 있었다. 지헌은 휴대폰 전원을 꺼버렸다. 3년 치의 기억은 가위로 뚝 잘라낸 것처럼 사라진 반면 아주 오래전의 기억은 되살아난 것들이 꽤 있었다. 아홉 살 때였나. 친해지고 싶은 친구가 있었다. 쾌활하고 똑똑하고 재주도 많은 친구였다. 학교에서 함께 바둑영재 수업을 들었는데 어머니가 그 친구와 친하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수업을 그만 듣게 하셨다.
“아빠가 없다더라. 그런 애랑 어울리면 나쁜 물 들어.”
아빠가 없는 아이가 가진 나쁜 물을 지헌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몇 번은 어머니께 따졌다. 하지만 결과를 바꿀 수는 없었다.
“너희 엄마가 우리 엄마한테 전화했었어. 너랑 제발 놀지 말랬대.”
어느 날 친구는 그렇게 말했다. 지헌이 오기를 부리니 장영미 여사는 친구의 어머니에게 직접 전화를 한 것이다. 그때 처음으로 엄마를 미워하게 되었다. 영미는 그런 지헌에게 언젠가는 다 이해하게 될 거라는 듯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엄마 미워하면 안 돼. 다 널 사랑해서 그러는 거야.”
그토록 사랑은 이용의 수단이었다. 모든 간섭과 단절의 순간에는 사랑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었다. 사랑한다는. 그 빌어먹을 사랑한다는 말. 그래서 지헌은 자신이 가진 욕망에 사랑이라는 말을 붙이고 싶지 않았다. 사랑한다는 말을 미워하게 되니 그 어떤 것도 사랑할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소중한 것도 없었다.
“넌 소중한 게 없잖아. 널 지나쳐 간 모든 사람들이 하찮지, 너한텐.”
친구 승규의 따끔한 지적은 완전한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런 건가? 7년 전의 기억이, 사계절이 세 번이나 반복되는 동안의 기억이 뭉텅이로 사라져도 내가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건 소중한 게 없어서였을까? 텅 빈 과거를 떠올리니 속이 쓰렸다. 어느덧 차는 행당동의 작은 도로에 접어들었다. 대학가 근처의 독특한 펍이라고 들었는데 운전기사도 길이 낯선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문득 차창 밖으로 시선을 준 지헌은 갑자기 머리가 저린 듯하여 차를 세웠다.
“여기서 세워주시죠.”
“아직 조금 더 가야 합니다. 이사님.”
“이제 걷겠습니다. 머리가 아파서요.”
지헌은 차에서 내렸다. 여름이 다가오는 계절. 어느새 해가 길어져 6시가 넘었는데도 한낮 같았다. 시음회에 너무 일찍 도착하는 것도 모양이 빠지니 천천히 걸어가는 건 좋은 선택이었다. 지헌은 위치를 알아보려 휴대폰을 꺼냈다. 휴대폰 전원을 다시 켜는 동안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데, 한편으로는 왠지 익숙한 느낌이 있었다. 행당동에 아는 사람이 사는 것도 아닌데. 왠지 마음이 끌리는 대로, 기분대로 걸음을 옮기게 되었다. 한 걸음씩 뗄 때마다 시음회가 멀어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왠지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정처 없이 걷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상한 곳에 와 있었다. 오래된 빌라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대학가 원룸촌이었다.
‘내가 왜 여기 있지?’
그저 주변의 풍경을 둘러만 보는데도 눈이 시큰거리고 심장이 울렁거렸다. 나는 대체 무엇을 잃은 걸까. * 정오는 오후 내내 외부에 있었다. 성미란 팀장이 정오를 잘 챙겼다. 어제 정오에게 무언가 큰일이 있었다는 걸 눈치챈 미란은 정오와 지헌이 마주치지 않도록, 정오와 은비가 마주치지 않도록 계속 신경 써 주었다. 덕분에 오늘은 녹음실에서 성우의 꿀 떨어지는 목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저녁때는 다원주류 신제품 시음회가 있다. 녹음이 생각보다 일찍 끝나서, 정오는 미란의 지시에 따라 회사로 돌아가지 않고 바로 시음회장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시음회장은 정오가 졸업한 대학교와 가까웠다. 버스를 타고 가는 길이 익숙하여 괜스레 설렜다. 꽤 시간이 많아 학교에 들러 캠퍼스를 거닐었다. 정오가 캠퍼스를 누빈 건 대학교 3학년 때가 마지막이었다. 그 이후로 길게 휴학을 했고, 복학을 해서는 사이버 강의만 찾아 들었다. 대학교 3학년 끝 무렵은 정오에게 너무나도 호된 겨울이었다. 서서히 달라져가는 몸. 그 어떤 연락도 없는 남자. 집 안에서 웅크리고 있다가 어느 날 집 밖으로 나와 정처 없이 걸었다. 이상기온으로 매체에서 떠들어대던 때였다. 분명 겨울이 다가오는데, 계절을 잊고 나무에 꽃봉오리가 앉아 있었다. 잠시의 따뜻함에 마음이 흔들려 잘못 피어난 꽃을 보며, 정오는 펑펑 울었다. 바보처럼 사랑을 믿었다고. 사랑한다고 말한 적도 없었던 사랑을 믿었다고. 그때는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는데 7년이란 세월은 정말 놀랍지.
‘이제 그 과거가 아무렇지도 않으니 말이야, 정지헌 씨.’
캠퍼스를 벗어나 계속 걷다 보니 오래전에 살던 그 집이 나왔다. 주변에 새로 건물을 올린 집들이 몇 채 있었지만 정오가 살던 원룸 건물은 그대로였다. 그 집을 보니 새삼 반가웠다. 추억할 것 없는 추억을 그리며. 7년 전을 떠올려 보며 지그시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누군가의 발소리가 심장에 부딪히듯 뻐근하게 울렸다. 갑자기 그 시절의 입덧이 되살아나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정오는 가슴에 손을 올리고는 진원지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 정오의 두 눈이 커졌다. 그가 있었다. 이 계절, 이 순간의 일렁이는 노을처럼 눈이 붉어진 남자가 그녀만큼이나 놀란 표정으로 묵묵히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사님이 왜…….”
당신이 왜, 어째서 여기에……. 그녀의 눈막이 투명하게 부풀어 오르며 그가 서 있는 풍경을 담았다. 심장이 갑자기 아프도록 뛰어대서 마치 살려달라 외치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먹먹하여 입이 더 이상 떨어지지 않았다. 고인의 기일을 찾은 사람들처럼 다시 만났다. 당신을 잃어버린 나와, 나를 잊어버린 당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