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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그놈은 바로 너 (36/183)

36. 그놈은 바로 너2021.09.01.

가만히 정오를 응시하던 지헌은 버퍼링이 심한 구형 스마트폰처럼 뒤늦게 반응을 보였다.

16551144509918.jpg“……신제품 시음회.”

16551144509922.jpg“…….”

16551144509918.jpg“이 대리도 그것 때문에 온 거 아닙니까?”

잠들지 않은 채로 꿈을 꾸는 듯, 어쩌다 보니. 어쩌다 보니, 나도 모르게 이곳으로 흘러들어왔다는 얘길 할 수는 없었다. 이 여자한테 그렇게 맹한 남자로 보이고 싶진 않았다. 지헌은 낯선 동네에서 느낀 기시감을 애써 외면하고서 무감한 표정으로 그녀를 마주했다.

16551144509922.jpg“그렇긴 한데, 그런데 왜 여기 계시나요?”

정오가 ‘혹시’ 하는 기대감을 갖고 있단 걸 지헌은 알 길이 없었다.

16551144509918.jpg“가까운 거리라 중간에 내렸죠.”

16551144509922.jpg“……왜요? 왜 여기서?”

16551144509918.jpg“차 안이 갑갑해서 걸어가겠다고 했더니 기사가 이 앞에서 내려줬습니다.”

그의 무덤덤한 대답에 그녀의 눈빛이 먹먹하게 가라앉았다. 그녀가 기대하던 대답은 아니었기에.

16551144509918.jpg“이정오 대리는 여기 무슨 일입니까. 시음회장은 여기서 좀 멀 텐데.”

16551144509922.jpg“저는 이 근처 대학교를 다녔거든요. 옛날 생각이 나서 좀 걸었어요.”

그녀의 눈빛이 내내 슬퍼 보였다. 지헌은 그녀가 어제의 서러움을 그대로 끌어안고 있는 것이리라 판단했다. 나는 당신의 그 거짓말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고. 처음부터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고 말하고 싶었다.

16551144509918.jpg“저녁은요.”

16551144509922.jpg“네?”

16551144509918.jpg“식사했습니까?”

16551144509922.jpg“아뇨. 아직.”

16551144509918.jpg“같이 먹을까요? 나도 식사 전인데.”

16551144509922.jpg“시음회 가신다면서요.”

지헌이 멍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애초부터 목적은 이정오였기에, 그녀와 재회하자마자 시음회는 곧장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것이다. 정오는 그를 슬쩍 떨떠름하게 바라보다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시음회장의 정확한 위치는 정오도 알지 못했다. 지도를 보며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지도를 확인한 정오가 오른쪽 방향을 가리켰다.

16551144509922.jpg“이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이사님.”

정오가 안내하고 앞장섰으나 지헌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던 그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정오가 몇 걸음 걷다가 멈추었다.

16551144509922.jpg“안 오세요?”

16551144509918.jpg“잠시만. 일이 많아서 연락이 계속 오네요.”

지헌은 누군가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것 같았다. 정오는 양손 엄지손가락의 움직임이 이토록 빠른 사람을 처음 보았다. 그의 빠른 손놀림은 멀리서도 눈에 띌 정도였다. 엄지손가락 나이만 따로 측정한다면 이 남자를 10대로 추정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기다림은 길었다. 그는 아주 바쁜 모양이었다.

16551144509922.jpg“바쁘시면 저 먼저 갈까요?”

16551144509918.jpg“아뇨.”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을 때 정오의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그의 현란한 엄지가 임무를 완수한 직후였다. 정오의 휴대폰 화면에 성미란 팀장의 이름이 떴다.

16551144509922.jpg“네. 팀장님.”

16551144568288.jpg[이 대리, 시음회에 도착했어?]

16551144509922.jpg“지금 가고 있어요.”

16551144568288.jpg[그래. 잘됐다. 우리 조금 늦을 것 같은데 먼저 가 있지 말라고.]

16551144509922.jpg“네? 왜요?”

16551144568288.jpg[지난번에도 다원주류 광고주들 혼자 상대하느라 힘들었는데 또 그럴 수는 없잖아. 어디 가서 밥을 먹든가 차를 마시든가 아니면 집에 다녀오든가 그래. 우리는 한 시간 반쯤 걸려. 알았지?]

미란은 정말로 바쁜 일이 터진 듯 다급하게 말하고는 재빨리 끊었다. 정오는 통화가 끊어진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지헌이 다가왔다.

16551144509918.jpg“성미란 팀장입니까?”

16551144509922.jpg“네.”

16551144509918.jpg“뭐라던가요?”

16551144509922.jpg“일이 생겨서 팀원들이 늦어질 것 같다고 하네요.”

16551144509918.jpg“그리고?”

16551144509922.jpg“시음회에 먼저 들어가지 말라고.”

정지헌의 입술이 순간적으로 미세하게 길어진 느낌이 든 건 기분 탓일까?

16551144509918.jpg“그럼 밥 먹으러 가야겠네요. 가죠.”

그가 뒤돌아서며 말했다. 시음회 장소와 반대 방향이었다. 정오는 문득 지헌의 방향으로 발을 돌렸다가 멈칫했다.

16551144509922.jpg‘따라가도 될까?’

어제의 일이 떠올라 가슴이 따끔따끔했다. 자신에게 진실을 추궁하던 채은비의 얼굴도 어른거렸다.

16551144509922.jpg‘채은비는 내가 저 남자한테 추근댄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같이 밥을 먹어도 되려나?’

자신이 의도한 일도 아닌데,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특별한 사명이 있었다. 정지헌에 대하여, 그리고 정지헌의 주변에 대하여 알아보아야 했다. 그에 대해 철저히 파악하여 예나 유괴미수사건의 범인과 7년 전 통화의 비밀을 알아내고 안전을 확보한 뒤에 예나와 지헌을 만나게 해주는 것. 그게 정오의 사명이었다. 이직하고 싶은 순간들이 많았지만 굳게 참아내며 열심히 일하는 첫 번째 이유도 그것이었다. 그가 너무 미워서 예나를 보여줄까 말까 이따금 갈등하긴 하지만, 그래도 일단 그의 주변을 살피는 일은 제대로 해야 했다. 그래. 좋은 기회일 수 있다. 어쩌면 더는 없는 기회일 수도 있다. 정오는 주먹을 불끈 쥐고는 지헌을 따라나섰다. 그나저나 정지헌, 변했구나. 옛날에는 이렇게까지 밥에 집착하지 않았는데. 나한테 자기 몫의 밥도 다 양보하던 사람이었는데. 정오는 재빨리 지헌의 옆으로 붙어 물었다.

16551144509922.jpg“근데 뭐 드시려고요?”

16551144509918.jpg“지금 검색해보고는 있는데, 특별히 드시고 싶은 게 있습니까?”

16551144509922.jpg“돈가스 좋아하세요? 근처에 돈가스 맛집이 있거든요.”

이왕이면 다홍치마. 오래전 그와 함께 갔던 돈가스집을 추천했다. 돈가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던 그가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떠올라서였다.

16551144509918.jpg“뭐든 괜찮습니다.”

지헌의 대답에 정오는 씩씩하게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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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가스집에 기운차게 입장했건만, 정오는 문을 열자마자 시무룩해지고 말았다. 인테리어가 싹 바뀐 것이다. 식당 내부는 7년 전의 그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은 듯했다.

1655114463002.jpg“어서 오세요.”

아르바이트생이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 예쁘게 인사하는 아르바이트생을 두고 뒤돌아설 수도 없고. 정오는 착잡한 마음을 안고 안으로 들어섰다.

16551144509922.jpg“이사님 앉으세요.”

지헌도 정오의 안내에 따라 자리를 잡아 앉았다. 정오는 의자에 앉자마자 메뉴판을 집었다. 그래도 메뉴는 안 바뀌었겠지 생각했는데, 이럴 수가.

16551144509922.jpg‘메뉴까지 달라졌어!’

가게 이름만 빼고 싹 다 뜯어고친 것이다. 정지헌이랑 똑같구나. 이 남자도 이름만 그대로에 모든 것이 바뀌었는데. 그녀는 허망하여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오를 살피던 지헌이 물었다.

16551144509918.jpg“무슨 문제 있습니까? 다른 데 갈까요?”

정오는 순간 망설였다. 그러나 눈동자를 굴리다가 해맑은 아르바이트생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두 사람이 주문하기만을 기다리며 눈을 빛내는 아르바이트생을 두고 떠날 수가 없었다.

16551144509922.jpg“아니에요…… 그냥 도전해보죠…….”

괜한 욕심을 부리다가 벌을 받은 느낌이었다. 별 기대를 하지 않아서인지 돈가스는 지헌의 생각보다 훨씬 더 맛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만족스러운 건 눈앞에서 야무지게 돈가스를 클리어하는 여자의 모습이었다. 여자가 먹는 걸 지켜보는 게 왜 이렇게 기분 좋은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입을 오물오물 움직일 때마다 제 입에 음식이 들어간 것처럼 만족스러웠다.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느낌이었다.

16551144509922.jpg“이사님 안 드세요? 입맛에 안 맞으세요?”

그녀를 지켜보느라 움직임이 느려졌을 뿐인데, 이를 이상하게 여긴 정오가 한마디 했다.

16551144509918.jpg“아닙니다. 맛있습니다.”

그녀가 얼추 먹은 것 같아 지헌은 오랫동안 준비했던 용건을 꺼냈다.

16551144509918.jpg“어제 채은비 과장이 했던 얘기는 신경 안 써도 됩니다. 나도 신경 안 쓰니까.”

포크를 들었던 그녀의 손이 그대로 내려갔다.

16551144509922.jpg“제 거짓말을 신경 안 쓰신다고요?”

16551144509918.jpg“사정이 있었으니 이해합니다.”

16551144509922.jpg“…….”

16551144509918.jpg“그 일로 괜히 이 대리가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지헌은 여태 누군가를 위로해본 적이 없었다. 하여 지금의 위로와 격려는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정오는 다른 이유로 울적해졌다.

16551144509922.jpg‘은비가 한 말을, 이 남자가 사과하는구나…….’

그의 자상한 위로가 은비를 대변하는 것처럼 여겨져 또다시 가슴이 먹먹해졌다.

16551144509922.jpg“괜찮습니다.”

정오는 애써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16551144509922.jpg“마음에 굳은살이 박이면 쉽게 상처 입지도 않아요. 바늘로 찔러도 이젠 바늘이 부러질걸요.”

16551144509918.jpg“…….”

16551144509922.jpg“저한테 아빠에 대해 얘기하는 건 조금도 상처가 안 돼요. 아빠는 제가 태어날 때부터 없었으니까.”

그에게 강한 사람으로 각인되길 원했다.

16551144509918.jpg“그럼 전남친은요?”

일부러 기운차게 대답했는데, 그가 대뜸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그리하여 그녀의 미소는 금세 사라졌다. 자기 얘기를 이토록 무심하게 묻는 남자라니.

16551144509922.jpg‘무시하자.’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정오는 고개를 숙이고서 음식을 입에 넣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16551144509918.jpg“전남친.”

16551144509922.jpg“…….”

16551144509918.jpg“그놈 잘 삽니까?”

16551144509922.jpg“……무슨 뜻이에요?”

16551144509918.jpg“잘 살아 숨 쉬고 있느냐고요.”

풉. 이번엔 그의 엉뚱한 질문에 웃음이 밀려나와버렸다.

16551144509922.jpg“왜 그런 걸 물어보세요?”

16551144509918.jpg“그냥 궁금하네요. 날 닮았다니까.”

널 닮은 게 아니라 그냥 너야. 네가 묻는 그놈이 바로 너라고, 정지헌! 모두 다 털어놓고 싶어서 입이 간지러웠다. 정오는 예나의 얼굴을 떠올리며 충동을 꾹 눌러 삼켰다.

16551144509922.jpg“그럼요. 엄청 잘 지낼 거예요. 지금도 엄청 맛있는 거 먹고 있을걸요.”

정오는 가볍게 말했지만 지헌은 진지했다.

16551144509918.jpg“못 살았으면 했는데 안타깝네요.”

푸우웁. 그의 표현에 정오는 입을 손으로 막았다. 자기 험담인 줄도 모르고 아무렇게나 말하는 이 남자가 우스웠다. 그래서 더 딱하기도 했다. 정오는 부처님 미소를 지으며 진심을 들려주었다.

16551144509922.jpg“아뇨. 잘 살았으면 좋겠어요. 진심으로.”

16551144509918.jpg“…….”

16551144509922.jpg“잘 살았으면 좋겠지만.”

16551144509918.jpg“…….”

16551144509922.jpg“밤에 엄청 배고파서 혼자 끓여 먹은 너굴라면에 다시마가 없었으면 좋겠고, 맛집에 한 시간 줄 섰는데 그 사람 앞에서 끊겼으면 좋겠고, 로또 1등 당첨됐다고 좋아했는데 알고 보니 번호를 밀려 쓴 거였으면 좋겠네요.”

이 모든 것이 그녀의 진심. 나를 잊은 당신이 적당히 잘 살고 조금은 허전했으면 좋겠어. 내 생각은 안 하더라도, 못 하더라도.

16551144509922.jpg“세 시간 동안 열심히 열심히 자료 만들었는데 저장 안 눌러서 다 날아갔으면.”

16551144509918.jpg“…….”

16551144509922.jpg“……아니, 두 시간.”

진지하게 말했으나 회사원의 입장에서 세 시간은 너무 과한 것 같아 살짝 저주의 수위를 낮추어주었다. 순간 그의 눈꼬리가 슬쩍 아래로 휘어졌다. 7년 전과 똑같은 모양으로 웃는 그를 발견한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지헌은 웃음을 참기 힘들어 입술에 힘을 주었다. 진지한 얘기를 이토록 유쾌하고 깜찍하게 하는 여자가 있을 줄은 몰랐다. 그 순간 팔 하나가 쭉 뻗어 움직였다. 그녀를 향해 거침없이 나아간 커다란 손이 그녀의 말랑거리는 뺨을 쓸었다. 피부의 결을 확인하듯 천천히 손이 움직이는 동안에도 그는 자신이 무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누군가의 손이 제 오른손을 끌어당겨 그녀의 뺨 위에 갖다 대 놓은 것처럼. 아니, 무의식의 무언가가 그의 손과 마음을 조종하는 것처럼. 그녀를 만져보고 싶어 안달 나 있다가 결국엔 이성의 끈을 끊어먹은 것처럼 주변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토록 쉽게 마음을 빼앗길 수도 있는 거였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듯 속수무책일 수도 있는 거였다. 그녀의 앞에서는. 하지만 어쨌든 할 말은 없었다. 자신의 잘못을 알고도 손을 곧장 거두지 못한 건 그의 욕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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