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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제일 소중하고 좋은 기억 (37/183)

37. 제일 소중하고 좋은 기억2021.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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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움찔. 정오 또한 뒤늦게 반응을 보였다. 7년 전과 똑같이 웃어 보인 그에게 마음을 빼앗긴 탓이었다. 그녀가 불편한 기색을 보이자 지헌도 바로 손을 거두어들였다. 식당 내부가 더워졌다. 전남친 얘기를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더 얘기했다간 다른 말실수를 할 것만 같아 정오는 바로 화제를 돌렸다. 바로바로 오늘의 용건.

16551144796485.jpg“제 얘기해드렸으니까 이사님 얘기도 해주세요.”

16551144796489.jpg“…….”

16551144796485.jpg“교통사고 당하셨다면서요. 몇 년 전에.”

그녀가 조심스럽게 서두를 열었다. 지헌은 그녀가 자신의 사고를 알고 있다는 것에 살짝 놀란 눈빛으로 대답했다.

16551144796489.jpg“7년 전이요.”

16551144796485.jpg“많이 다치셨어요?”

16551144796489.jpg“많이 다치긴 했는데 이제 다 나았죠.”

16551144796485.jpg“기억을…… 잃으셨다면서요.”

친한 사이라도 쉽게 하기 힘든, 당돌한 질문. 그가 불쾌하게 여길 수도 있기에 정오는 긴장하며 지헌의 눈치를 살폈다. 지헌의 눈매가 가늘어지자 정오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의 눈길에는 조금의 웃음이 맺혀 있는 것 같았다. 질문하는 그녀를 흥미롭게 여기는 것 같기도 했다.

16551144796489.jpg“나에 대해 아는 게 많네?”

16551144796485.jpg“……뉴스, 뉴스 기사가 있던데요.”

그의 반문에 정오는 말을 더듬거렸다.

16551144796489.jpg“뉴스 기사에도 내 이름은 없을 텐데.”

16551144796485.jpg“…….”

16551144796489.jpg“궁금해서 일일이 찾아봤어요?”

16551144796485.jpg“아닌데요! 팀장님이 얘기해주신 건데요!”

아차…… 이건 비밀인데. 정오는 곧장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가 몰아붙이자 흥분한 나머지 꺼내서는 안 되는 말을 꺼내 버렸다. 그녀가 두 손을 모으고 불쌍한 목소리로 청했다. 여전히 고개는 들지 못한 채로.

16551144796485.jpg“……부디 팀장님 얘기는 못 들으신 걸로…….”

지헌은 그녀의 모든 것이 재미났다. 어쨌거나 교통사고는 자신의 일인데, 자신의 일을 가지고 그녀가 그토록 진지하게 관심을 갖고 물어오는 것이 신기했다. 또한 그가 역으로 추궁하자 순진하게도 금방 당황하는 게 우스웠다. 이러다가 또 건드릴라. 제대로 정신 차리지 않으면 또 좀 전과 같은 실수를 하게 될 것 같았다. 지헌은 테이블 아래에서 주먹을 꽉 쥐고는 그녀가 궁금해하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16551144796489.jpg“기억을 좀 잃었고, 성격이 좀 변했다고도 하고.”

16551144796485.jpg“……얼마나 기억이 안 나시는 거예요?”

16551144796489.jpg“스물넷에서 스물여섯까지의 기억이니 3년 정도인 것 같네요.”

16551144796485.jpg“…….”

16551144796489.jpg“그런 눈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쓸모없는 기억이었을 테니까.”

그녀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그는 고개를 살짝 돌렸다.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것은 환영이지만, 자신을 보며 안타까운 눈빛은 보이지 말았으면 했다. 그녀에게 동정받고 싶지는 않았다.

16551144796489.jpg“군대 기억이 거의 전부였을 거고, 그게 아니더라도 내 생활은 이정오 대리의 상상 이상으로 재미없어서 뭘 남길 필요가 없는 기억이었을 테니까.”

16551144796485.jpg“그건 모르잖아요.”

그녀의 연민을 지우고자 가볍게 수습한 이야기였는데, 그녀가 냉큼 반박했다. 그 표정이 자못 엄하고 진지해서 지헌은 입을 꾹 다물었다.

16551144796485.jpg“뭘 잊어버렸는지도 모르는데, 그게 필요 없는 기억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요.”

마치 따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의 주장이 그럴듯해서 지헌도 골몰하게 되었다. 한참 동안 아무 말 않던 그녀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16551144796485.jpg“기억해보려고 노력은 해보셨어요? 누구한테 꾼 돈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16551144796489.jpg“받을 돈이 있으면 그쪽에서 날 찾아왔겠죠.”

16551144796485.jpg“이사님이 꿔준 돈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16551144796489.jpg“그건 어쩔 수 없는 거고. 이제 와서 우길 수도 없으니까.”

돈을 꾸었든 돈을 꿔주었든, 모두 그의 일인데 왜 그녀가 빚을 못 받은 얼굴이 된 건지 지헌은 그 이유를 알 길이 없었다. 어느새 시간이 재빨리 흘러 7시가 훌쩍 넘어버렸다.

16551144796489.jpg“이만 일어나죠. 지금 가면 얼추 시간이 맞을 것 같네요.”

지헌이 먼저 일어서며 말했다. 지헌의 뒷모습이 멀어지는 동안 정오는 제 가슴을 쿵 쳤다.

16551144796485.jpg‘저 사람은 기억을 되찾고자 하는 의지가 없어!’

어쨌든 그에 대한 정보를 조금은 얻었다. 그는 기억을 잃은 사실을 덤덤히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 별 게 없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의 기억을 찾아주려는 사람 역시 주위에 존재하지 않을 거라는 추측도 할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기억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것일지도. 정오는 그의 어머니를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정오는 그의 어머니가 자신을 끔찍하게 미워하고 있다는 걸 확실히 느꼈다.

16551144796485.jpg‘그 사고를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래서 더 일부러 기억을 지우려고 한 건가? 나를 다시 만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머릿속이 혼란스러웠지만 오늘의 대화로 추진력을 얻었다. 그의 어머니에 대해서 알아봐야 한다. 어떻게든 노력해보자. 정오는 의지를 불태우며 건물을 빠져나왔다. 여름이 다가오는 계절. 해가 저무니 한낮의 더운 바람이 조금은 선선해졌다. 건물 앞의 외벽을 장식하고 있던 장미가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정오의 발아래 꽃잎을 떨구었다. 정오는 무심코 허리를 굽혀 꽃잎을 집어 들었다. 생기가 느껴지는 붉은색 꽃잎은 예나의 통통한 입술 같았다. 아이와 함께 보냈던 늦가을의 어느 날이 떠올랐다. 정지헌 씨. 그날은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계절을 배운 날이었어.

16551144888763.jpg“엄마. 이거 가을이야. 가을 떠러져떠.”

  예나는 바닥에 떨어진 낙엽을 가리키며 가을이 떨어졌다고 말했어. 낙엽 한 장이 가을이란 계절이었어. 그 고운 순간을 그와 함께 나누지 못했다. 언젠가는, 계절을 잊고 핀 꽃들을 보며 울었는데. 그때는 그토록 지나지 않던 계절이, 아이가 발견한 낙엽 한 장에 팔랑 넘어가기도 한다. 그에게 언젠가 이 얘기를 모두 들려줄 수 있을까. 지헌이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정오는 일부러 미소를 지었다. 정지헌 씨, 당신이 스스로 기억해야 해. 내가 당신에게 닦달할 순 없어. 내가 추근대는 거라고 여기면 안 되니까. 하지만 당신이 다가온다면, 나도 그만큼은 가 볼게. 그러니 당신도 노력해줘. 부디 포기하지 말아줘. 힘내. 정지헌 씨. 지헌이 계산을 하고 나오는 동안 건물 벽을 마주한 채 서 있던 정오가 그의 발소리를 듣고 몸을 돌렸다. 무표정이었던 그녀가 몸을 돌리며 빙긋 웃어 보인 느낌이었다. 정제된 미소라는 걸 지헌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예쁘지 않은 건 아니었다.

16551144796485.jpg“이사님, 잘 먹었습니다.”

16551144796489.jpg“네. 저도.”

지헌은 고개를 까딱였다. 지헌에게는 꽤 만족스런 식사였다. 그녀가 어제 일로 상처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씩씩한 것 같아 다행스러웠고, 그녀가 자신의 일에 관심을 보인 것이 싫지 않았다. 정오가 휴대폰을 꺼내며 말했다.

16551144796485.jpg“시음회장 가는 길은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그리고 넌지시 오늘의 감상 하나를 더 보탰다.

16551144796485.jpg“그리고 이사님, 기억을 찾길 바랄게요.”

16551144796489.jpg“…….”

16551144796485.jpg“쓸모없었던 기억은 아닐 거예요. 아닐 거라고 믿어요.”

지헌의 눈이 커졌다. 생각지도 않았던 형태로 위로와 응원이 찾아왔다.

16551144796485.jpg“제일 소중하고 좋은 기억이라 아무도 못 찾을 깊숙한 곳에 넣어놓았을 수도 있잖아요. 타임캡슐처럼.”

16551144796489.jpg“…….”

16551144796485.jpg“너무 소중해서. 다치지 말라고.”

그녀의 목소리가 밤바람을 타고 흘러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눈이 뜨거워지는 느낌이었다. 이따금 생각했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냉혈한 취급받는 자신에게 그런 게 있을 리 없겠지만, 그래도, 어쩌면. 내게도 소중한 게 하나쯤은 있지 않았을까, 하고. 어머니는, 중요하지 않은 기억이라 잊어버린 거라고, 지나간 것에 얽매이지 말라고 하셨지만, 그래도, 그래도 어쩌면. 어쩌면. 딱 하나 정도는. 그저 상상만 해보았을 뿐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는 이야기였다. 그 비밀 같은 이야기를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이정오에게서. 성큼 발이 움직였다. 그녀가 코를 박을 듯이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시음회장의 방향을 가늠해보는 순간이었다. 갈피를 잡은 그녀의 발이 옆으로 움직였다.

16551144796485.jpg“이사님 이쪽으로…….”

쿵. 그녀가 한 발 내디뎌 착지한 곳은 그의 품안이었다. 그는 제 가슴에 쿵 하고 머리를 부딪혀 온 그녀를 붙잡았다. 저도 모르게 움직인 손이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제가 그녀를 붙잡고 있는데도 그녀가 자신을 끌어당기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확고한 방향으로 고개를 내렸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이렇게 되고야 말 거란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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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오는 휴대폰 화면을 보며 길찾기에 몰입을 하다가 그의 가슴에 머리를 박았다. 그에게 주제넘은 격려를 건네어 부끄러운 마음에 고개를 깊이 숙인 탓이었다. 그가 그녀를 붙잡아주어서 휘청거렸던 몸은 금세 바로 섰지만……. 그가 돌연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그녀가 자신을 보길 원한다는 듯 그녀의 고개를 고정시킨 그의 손에서 억센 의지가 느껴졌다. 아니아니 이 아저씨야. 내가 너한테 안기려고 온 게 아니라……. 그녀 또한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인지했지만 왠지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쿵쿵쿵쿵…… 심장만이 제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었다. 말도 안 돼……. 7년이나 지난 일인데. 여전히 그의 손길을 기억하고 있는 자신에게 놀랐다. 여전히 똑같은 방식으로 자신을 어루만지는 그에게 더욱 놀랐다. 여기서 몸을 비틀면 그가 더 흥분할 거란 사실 또한 몸이 기억해냈다. 어쩌면 이 남자는 하나도, 조금도 변하질 않았지? 7년 전과 똑같았다. 변함없는 이 민첩함. 부드럽게 유혹하면서도 정작 뿌리치기엔 너무나도 억센 손길. 손끝으로 턱을 간질이던 그 버릇까지.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를 전부 야하게 해석하던, 아니, 그렇고 그런 짓을 하고 싶어 일부러 모든 상황을 야하게 만들어버리는 것만 같았던 그 7년 전 정염의 눈길로 그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에 징, 하고 전율이 왔다. 그가 고개를 내리자 아찔한 열기가 훅 밀려들었다. 순간, 그녀는 옴팡지게 손바닥을 들이밀었다. 철썩! 그의 얼굴에 안정적으로 안착한 정오의 손바닥이 그를 야무지게 밀어냈다. 정지헌 네 이놈! 퍼뜩 정신이 들며 화가 훅 올라왔다. 정오는 이에 그치지 않고 밀려난 그를 다시 한번 밀었다. 그가 뒤로 밀려가 계단에 주저앉으며 으윽, 얕은 신음 소리를 냈다. 정오는 씩씩댔다.

16551144796485.jpg“뭐 하는 거예요, 지금!”

입술이 닿지 않았으니 그가 발뺌을 하면 그만이다. 처음 경험하는 사람이라면, 어쩌면 휘청거리는 자신을 부축하려다 그가 도리어 중심을 잃은 것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난 알아. 난 알아. 난 알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남자의 본색을, 버릇을, 그 민첩함을. 정오는 눈을 부릅뜨고서 따졌다.

16551144796485.jpg“잘못했어요, 안 했어요.”

말귀를 못 알아들을 놈 같아서 예나에게 하는 말투가 그대로 나왔다.

16551144796485.jpg“대답해. 잘못했어. 안 했어.”

그가 생사람 잡는다며 잡아뗄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그렇지는 았았다. 그저 그녀에게 맞은 턱과 입술을 감싸고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16551144796485.jpg“이사님 인생을 위해서 한마디 합니다.”

16551144796489.jpg“…….”

16551144796485.jpg“어디서도 누구한테도 함부로 그러시면 안 돼요. 결혼할 사람도 있는 남자가! 어? 어? 컥!”

컥, 켁, 켁, 콜록, 콜록. 흥분하여 삿대질을 하며 호통을 치다가 탁한 공기를 한가득 삼켰다. 공기가 기도를 긁어 정오는 더 따지지 못하고 허리를 굽히고서 콜록댔다. 동시에 지헌의 눈썹이 휘어졌다.

16551144796489.jpg“……누가 결혼을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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