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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결혼 소문 (38/183)

38. 결혼 소문2021.09.08.

정오는 기침을 잠재우느라 지헌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지헌이 정오를 살피기 위해 다가섰으나 정오는 저지하듯 손을 펴 보이며 외쳤다.

16551144999375.jpg“워! 오지 마!”

16551144999382.jpg“…….”

16551144999375.jpg“건들지 마.”

마치 커다란 짐승과 대적하듯 으름장을 놓은 그녀는 그대로 먼저 뛰어가버렸다. 무턱대고 아무 방향으로 뛰어버려 시음회장과는 더욱 멀어졌다. 하지만 정오는 이대로 길을 돌아서 가는 것이 더 낫겠다고 생각했다. 채은비도 시음회장에 올 텐데, 괜히 오해를 사서 좋을 게 없었다. 한편으로는 계속 울컥했다. 내 아이의 아빠가 이토록 손버릇이 안 좋다니. 몇 초만 더 늦었어도 키스당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식사 도중에도 그가 몹쓸 행동을 했다. 멈칫하며 금세 손을 내렸지만 그는 분명히 그녀의 뺨을 건드렸었다. 마치 그녀의 뺨에 뭐가 묻은 것처럼 행동해서 그녀는 가만히 있었지만 그의 태도는 확실히 이상했다.

16551144999375.jpg‘역시 지난번 회의 때도 일부러 그런 거였어.’

보름 전 다원주류 제작회의 때를 떠올렸다. 그때 그녀의 옆에 앉은 지헌은 어쩐지 부산스러웠다. 그렇게 성가신 행동을 하다가 바닥으로 펜을 떨어뜨리고는 그걸 주우려고 엎드린 그녀의 손을 덮쳤었다. 그것 역시 이 남자의 계략이었던 것이다.

16551144999375.jpg‘이런 남자인 줄도 모르고 나는…….’

이 남자 덕분에 예나가 태어난 것은 천 번 만 번 고마워할 일이지만, 그에게 빠져 있었던 한때는 몹시 후회되었다. 이 남자의 진면모를 일찍 알았더라면 조금 덜 아팠을 텐데. 하지만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 과거는 바꿀 수 없다. 앞날을 조심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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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규는 몸이 달았다. 하루하루 시간이 흘러 6월 7일 월요일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데, 친구를 설득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자신이 지헌의 집무실에서 이정오 대리의 얘기를 꺼내는 바람에 채은비와도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고. 왠지 염치가 없어서 월요일의 일정에 대해 다시 물어볼 수가 없었다.

16551144999457.jpg‘정지헌이 남의 애들이랑 놀아주겠다고 이 집에 다시 올 녀석이 아닌데…….’

아이들도 부인도, 이미 지헌이 월요일에 이 집에 다시 찾아와 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으니 승규는 더 애가 탈 수밖에 없었다.

16551144999462.jpg“아이고고고고…….”

승규가 아이들과 눈짓으로 놀아주며 고민하고 있는 와중에 진서가 앓는 소리를 내며 침대에 기댔다.

16551144999462.jpg“오늘 도윤이가 낮잠을 안 잤어. 애랑 내내 씨름했더니 온몸이 쑤셔 죽겠다.”

승규는 부리나케 진서에게 다가가 진서의 어깨를 주물렀다. 진서가 몸을 비틀며 말했다. 아이들이 종이비행기를 따라 거실로 나갔을 때였다.

16551144999462.jpg“됐어. 가서 애들이나 봐.”

16551144999457.jpg“잘 노네 뭐.”

승규는 거실 쪽으로 대강 눈길을 주고는 다시 안마에 몰입했다. 지헌을 꼬시지 못했다고, 월요일엔 아마 오지 않을 거라고 부인한테라도 말해 놓아야 했다.

16551144999457.jpg“저기, 진서 씨…….”

드르르르. 그 와중에 승규의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그런데, 아니 이게 누구신가! 나의 사랑스런 친구 정지헌이 아닌가. 승규는 안마를 하던 손을 거두고 부리나케 전화를 받았다.

16551144999457.jpg“오! 친구! 무슨 일이야?”

16551144999382.jpg[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지헌의 목소리가 왠지 긴하게 들렸다.

16551144999457.jpg“그래. 뭐든 물어봐.”

16551144999382.jpg[혹시 회사에 내가 결혼한다는 소문이 났어?]

16551144999457.jpg“응? 그게 무슨 말이야?”

16551144999382.jpg[그런 소문이 있나 보던데? 나랑 채은비랑.]

승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실 승규도 세련그룹의 다른 계열사에 있다가 맥스기획으로 이직해온 지 1년이 되지 않았다. 인사팀이라 지헌보다는 많은 소문을 접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한계는 있었다.

16551144999457.jpg“둘이 사귄다는 말은 좀 들었지. 근데 결혼까지는 못 들었는데?”

16551144999382.jpg[알았다. 고마워.]

지헌은 급한 듯이 바로 전화를 끊었다. 승규는 끊긴 전화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 이 매정한 친구야. 자기 말만 날름하고 똑 끊어버리냐. 오늘따라 그의 무정함이 원망스러워지는 승규였다. 그때, 몇 분 동안 침대에 엎드려 앓는 소리를 내던 진서가 몸을 일으켜 승규에게 물었다.

16551144999462.jpg“여보. 뭔가 이상하지 않아?”

16551144999457.jpg“뭐가 이상해?”

16551144999462.jpg“너무 조용하잖아.”

진서의 의견에 승규도 숨소리를 죽여 보았다. 아이들이 탈출한 것처럼 집 안이 조용했다. 아이들은 시끄럽게 떠들고 놀 때가 차라리 안심이다. 조용할 때가 진짜 무서운 법. 승규와 진서는 후다닥 거실로 나갔다.

16551145061701.jpg“으아아아!”

거실 한구석에서 동생 도윤과 같이 꿀을 퍼먹고 있던 도빈이 모든 것을 팽개치고서 고함과 함께 줄행랑쳤다. 오빠가 도망가는 모양을 보고 도윤도 눈치껏 도망쳤다. 꿀단지가 쏟아지고. 아이들의 손발엔 끈적한 꿀이 묻어 있고. 아이들은 도망 다니며 온 바닥에 꿀칠을 하고.

16551144999457.jpg“야! 뛰지 마!”

승규가 소리쳤지만 소용없었다.

16551144999457.jpg“뛰지 말라고!”

16551145061701.jpg“아빠가 혼낼 거잖아!”

도빈이 도망가며 야무지게 따졌다.

16551144999457.jpg“잘못을 했으면 혼나야지! 아니, 뛰지 마, 이놈!”

그래도 아들은 아빠의 손에 금방 잡혔다.

16551144999457.jpg“이눔시키!”

승규는 도빈을 번쩍 들어다가 화장실로 데려가 손발을 씻기며 야단쳤다.

16551144999457.jpg“주방에 있는 거 꺼내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16551145061701.jpg“꿀 달라고 했는데 계속 안 줬잖아!”

16551144999457.jpg“그렇다고 그걸 몰래 꺼내 먹고 있어? 그러고서 그걸 밟고 돌아다녀? 어?”

진서가 도윤도 곧장 연행하여 화장실로 보냈다. 승규는 도윤까지 깔끔하게 씻겼다. 진서는 슬프게 한숨을 쉬고는 난리가 난 거실을 정리했다. 한 발씩 디딜 때마다 끈적이는 바닥을 확인하니 힘이 쭈욱 빠졌다. 요즘 들어 괜스레 우울감이 자꾸 찾아오는데. 이 집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다. 좋아하는 배우들의 꿀 떨어지는 눈빛은 그토록 좋아했는데, 왜 현실에서 꿀이 떨어지면 이토록 비극적일까. 내가 낳은 내 아들이 한 짓인데. 진서가 씻고 나온 도빈에게 말했다.

16551144999462.jpg“너. 월요일에 예나 초대 금지야.”

진서의 엄벌에 승규의 눈이 빛났다. 승규는 속으로 ‘옳지!’ 하고 외쳤다. 도빈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징계였다.

16551145061701.jpg“엄마아! 안 돼애!”

기겁하며 바닥에 무릎을 꿇은 도빈이 진서를 향해 두 손을 모으고 청했다.

16551145061701.jpg“엄마아, 그것만은 제발!”

진서가 고개를 쓱 돌려버리니 도빈은 승규에게 매달렸다.

16551145061701.jpg“아빠아! 엄마가 예나 초대 안 해준대애. 아빠아. 아빠아.”

16551144999457.jpg“아빠는 모르겠다…….”

승규가 해결을 회피하자 도빈은 울음을 터트렸다. 승규는 이대로 묻어가고만 싶었다. 그러나.

16551144999462.jpg“예나 초대하고 싶으면 또 말썽 피우지 마. 알았어?”

아들의 눈물에 마음이 약해진 엄마는 선처를 베풀었다. 도빈이 눈물을 닦으며 ‘네!’라고 크게 대답했다. 승규의 어깨가 힘없이 내려갔다. * 정오는 질러갈 수 있는 길을 빙 돌아 시음회장에 닿았다. 열 받아 빠르게 걷다 보니 그리 늦지는 않았다. 대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없었던 건물의 1, 2층에 자리한 펍이었다. 입구에 서 있던 박영광 차장이 그녀를 반겼다.

16551145091217.jpg“이 대리, 왔어? 저녁은?”

16551144999375.jpg“먹었어요. 다른 사람들은요?”

16551145091217.jpg“곧 올 거야. 들어갈까?”

정오는 박영광 차장과 함께 술집 내부로 들어갔다. 넓은 홀에 캔맥주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시음회였지만 일종의 파티 같았다. 정오는 맥주를 마시기 전에 주위를 먼저 둘러보았다. 정지헌은 먼저 왔을까? 정오가 두리번거리니 박영광 차장이 눈짓으로 맥주탑 너머를 가리켰다. 제작 1팀 사람들이 빨간 넥타이를 맨 남자를 둘러싸고 있었다. 안찬섭 팀장은 왠지 곤혹스러운 표정이었다.

16551145091217.jpg“이 대리, 저 사람 보여? 한 손에 캔 두 개 들고 있는 사람.”

16551144999375.jpg“네. 빨간 넥타이 매신 분 말씀이시죠?”

16551145091217.jpg“조심해.”

16551144999375.jpg“…….”

16551145091217.jpg“아주 막, 레미레미한 분이야.”

16551144999375.jpg“레미레미?”

16551145091217.jpg“도를 지나쳐서 미친 분.”

16551144999375.jpg“아하하. 신박하네요. 레미레미.”

16551145091217.jpg“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니야. 진심이야. 조심해.”

점잖은 박영광 차장이 미친 분이라고 말하는 사람이라니. 얼마나 독한 사람인지 상상이 갈 것 같았다. 영광이 주의를 주었지만 레미레미 광고주와의 조우를 피할 수는 없었다. 광고주 옆에 지겨운 표정으로 서 있던 은비가 지나가는 정오를 불렀다.

16551145148607.jpg“이정오 대리.”

16551144999375.jpg“네.”

16551145148607.jpg“인사 안 해요? 우리 광고주님이잖아요.”

아, 우리 팀이 모두 오면 인사하려고 했는데. 정오는 어쩔 수 없이 레미레미 광고주 앞으로 가게 되었다. 다행히 박영광 차장이 따라왔다.

16551145148607.jpg“부장님, 우리 회사 제작 2팀 새로 온 카피라이터 이정오 대리예요. 저랑 동갑인데 아직 대리.”

16551145148627.jpg“아유, 그래요? 우리 채 과장님 승진할 동안 뭐 하셨나?”

은비의 떫은 소개에 레미레미 광고주가 빈정거리듯 물었다. 정오는 마음을 텅 비우고서 입술 끝만 들어 올려 미소 지었다.

16551144999375.jpg“안녕하세요. 맥스기획 카피라이터 이정오입니다.”

16551145148627.jpg“결혼은 했고?”

16551144999375.jpg“아뇨.”

16551145148627.jpg“음. 그럼 더 열심히 일해도 되겠네.”

레미레미 광고주는 캔에 든 맥주를 투명컵에 가득 따라 정오에게 건넸다. 정오가 잔을 비우는 걸 확인하겠다는 심산이었다. 원샷이 어렵지는 않지만.

16551145148627.jpg“이거 마시면 나랑 사귀는 겁니다~”

잔을 든 순간 그가 건넨 말에 정오는 멍해져버렸다. 마시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박영광 차장이 끼어들었다.

16551145091217.jpg“하하하. 부장님 결혼하셨지 않습니까.”

16551145148627.jpg“에이 박 차장. 부인 따로, 애인 따로. 그거 모르나? 이렇게 아름다운 여성분이 앞에 있는데 어떻게 부인 생각을 해.”

흐으으으. 정오는 속으로 이가 갈렸지만 쓰게 웃고는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16551145148607.jpg“어머, 이 대리 금방 마시네요? 부장님이 좋은가 보다!”

은비가 박수 치며 환호했다. 은비의 말에 레미레미 광고주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박영광 차장이 정오가 들고 있던 잔을 빼앗아 전부 비웠다.

16551145091217.jpg“저도 마셨으니까 부장님 저랑 사귀셔야겠네요. 후후.”

16551145148627.jpg“에헤이, 왜 이래요. 남자는 관심 없다고.”

레미레미 광고주의 목소리가 커진 사이에 박 차장이 정오에게 휘휘 손짓했다. 얼른 도망가라고. 정오는 눈치껏 자리에서 물러나 근처의 화장실로 향했다. 볼일을 본 뒤 손을 씻고 있을 때 은비가 들어왔다. 정오의 옆 세면대에 선 은비가 거울을 보며 말했다.

16551145148607.jpg“부장님이랑 잘 어울리더라.”

16551144999375.jpg“그런 말 불쾌해. 내가 아니라 누구한테도 그런 말은 하지 마.”

16551145148607.jpg“왜? 유부남이라 괜찮지 않아? 너 남의 남자 뺏기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은비의 말에 억울하단 생각이 들면서도, 한 시간 전에 일어난 일 때문에 정오는 곧장 쏘아붙이지 못했다. 다행스럽게도 은비의 휴대폰이 길게 울려 실속 없는 대화가 더 이어지진 않았다. 은비는 어? 하고 놀라다가 전화를 받았다.

16551145148607.jpg“네. 어머니. 저녁 드셨어요?”

한 톤 높아진 깍듯한 목소리로 은비가 인사했다. 밖을 나서려던 정오는 순간적으로 움직임을 멈추었다. 채은비가 깍듯하게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 왠지 정지헌의 어머니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심장이 벌렁거렸다.

16551145148607.jpg“저는 일하러 왔어요. 제가 맡은 회사 중에 주류 회사가 있거든요. 오늘 신제품 시음회가 있어서요.”

정오는 가방을 열어 화장품을 꺼냈다.

16551145148607.jpg“저 술 못하는 거 아시잖아요. 그래도 일이니까 시음만 해보고 일찍 들어가려고요. 지헌 오빠는 일찍 퇴근했는데 안 보이네요. 시음회 오느라 일찍 퇴근한 줄 알았는데.”

정오가 화장 고치는 시늉을 하는 동안 대화가 계속 이어졌다.

16551145148607.jpg“오빠랑 통화하셨어요? 언제요?”

은비는 지헌의 어머니와 꽤 잘 지내는 모양이었다. 당연한 일이겠지.

16551145148607.jpg“아…… 오빠가 그런 말을 했나요? 조만간 말씀드리겠대요?”

그런데, 정오에게 자랑을 하려는 것처럼 드높았던 목소리가 돌연 어둡게 작아졌다. 물론 그 음색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16551145148607.jpg“결혼 얘기 말씀드리려나 봐요. 저한테도 살짝 얘기한 적 있었거든요.”

은비는 정오를 향해 입술을 길게 늘이며 통화를 이어나갔다. 결혼. 다 알고 있는 일인데도 정오는 가슴속 어딘가에 사포 한 장이 숨어 있는 것처럼 안이 쓰라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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