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손님맞이2021.09.11.
금요일 아침. 정오가 가장 먼저 일어났다. 그녀의 품속에 파고들어 잠들었던 예나는 어느덧 이불을 벗어나 문가까지 가 있었다. 얼마나 신나는 꿈을 꾸길래 저기까지 갔을까. 정오는 딸의 꿈속을 들여다보고 싶단 생각을 하며 조용히 웃었다. 예나를 이불에 감싸 제 자리에 다시 눕혀놓고 방을 나선 정오는 주방으로 가 국순이 만들어놓은 꿀물을 마셨다. 어젯밤 시음회는 잘 끝났다. 레미레미 광고주가 조금 진상이었지만 그래도 박영광 차장과 안찬섭 팀장이 상대해주어 정오에게는 탈이 없었다. 시음회장에 간다며 밥까지 먹었던 정지헌은 행사가 끝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긴 건지. 아니면 선을 넘은 게 부끄러워서 오지 않은 건지. 그것도 아니면 그녀에게 한 대 맞은 게 아파서 못 오게 된 건지. 조금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정오는 마음을 닫아걸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은비의 통화를 엿듣게 된 것이다. 은비가 대놓고 들으라는 식으로 제 옆에서 웃으며 통화했으니 정오가 잘못한 건 없다. 정오는 은비가 어제 통화를 나눈 상대가 장 여사일 거라고 확신했다. 정지헌의 어머니, 장영미 여사. 채은비와 장 여사는 친한 것 같았다. 고부지간이 될 테니 친한 건 당연하겠지.
‘하지만 두 사람은 나에 대해서 공유하고 있지 않은 것 같았어.’
이 역시 당연할 것이다. 장 여사가 지헌의 옛 여자에 대해 예비 며느리에게 털어놓을 필요는 없다. 문제가 있으면 아마도 혼자 처리할 것이다. 아니면 지헌의 다른 가족들이 장 여사를 도왔을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장 여사님을 중심으로 생각해보는 게 좋겠지.’
7년 전의 그 잘못된 통화. 그 역시 장 여사의 조작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어쩌면 예나의 존재를 알고 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예나의 유괴 미수도 장 여사의 계략일 수도 있다. 정오가 지헌의 회사에 들어갔으니 지헌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겁을 준 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분이 그런 거라면, 왜 직접 나서지 않고 사람을 썼지? 직접 얘기하는 게 훨씬 확실할 텐데.’
그리고 정지헌과 채은비의 결혼이 다가오고 있는 거라면, 엄청 급한 거 아닌가? 우회적으로 겁을 주는 것보다 직접 말하는 게 훨씬 효과적일 텐데? 의아한 점이 많아서 추측을 확신으로 단정할 수는 없었다.
* 지헌은 오전 내내 집무실에 틀어박혀 계속 키보드를 두드렸다. 이틀 동안 머리가 멍하여 오후에 그룹 월례보고가 있단 사실을 까먹은 것이다. 정신이 하나도 없다. 진짜 이정오는 몇 번 만나지도 못하는데, 머릿속에선 이정오가 열두 명쯤 뛰어다니는 것 같았다. 이 와중에 일은 해야 하고. 그래도 두 시간 동안 집중한 덕에 보고서 몇 장을 괜찮게 채울 수 있었다. 지헌은 한숨을 길게 쉬며 마우스를 딸깍거렸다. 이제 본사에 다녀와야 한다. 월례보고고 뭐고 싹 다 취소해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저장하시겠습니까? 저장. 저장 안 함. 취소. 저장 안 함. 클릭.
“헉!”
지헌은 소스라치며 벌떡 일어났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취소 옆의 ‘저장 안 함’ 버튼을 눌러버렸다! 초딩도 안 하는 실수를! 내가! 지헌은 곧장 문서 프로그램을 다시 열어서 기록을 뒤졌다. 자동저장 기능 따위 설정해놓지 않은 무책임한 지난날이 후회되었다. 두 시간 동안의 고생이 헛수고가 되어버렸다……. 그 순간에도 역시 떠오르는 건 어제의 이정오.
“세 시간 동안 열심히 열심히 자료 만들었는데 저장 안 눌러서 다 날아갔으면. ……아니, 두 시간.”
야무지게 늘어놓던 저주의 단상들이 지헌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정오의 전남친을 향한 저주였는데. 어째서 내가! 지헌은 이를 갈며 다시 새문서를 열었다. 이번엔 5분에 한 번씩 자동저장되도록 설정을 변경했다. 점심 식사는 포기해야 했다. 똑똑. 자세를 고쳐잡고 모니터를 노려보았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네.”
모니터를 노려보던 시선 그대로 문 쪽으로 옮겨갔다. 문이 열리고 관리본부의 조시내 대리가 들어왔다. 지헌의 표정을 확인한 시내가 흠칫 쫄았다. 아, 조시내 대리를 불렀었지. 조시내 대리에게 점심시간 전에 집무실로 찾아오라고 연락했었단 사실을 기억해냈다. 지헌은 더딘 반응을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아요. 조시내 대리.”
지헌이 자리를 권하자 조시내 대리는 겁먹은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시내의 맞은편에 앉은 지헌이 물었다.
“근무환경은 어떻습니까.”
편한 것 빼고는 아무것도 없다, 나를 변방으로 내쫓아놓고 근무환경을 왜 묻느냐 따지고 싶었지만 시내는 얌전하게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오늘은 조시내 대리한테 개인적으로 물어볼 게 있어서 불렀는데.”
지헌은 지체 없이 용건을 말했다.
“혹시 회사에 내가 결혼한다는 소문이 났습니까?”
“저, 저는 소문 안 냈는데요!”
지헌의 질문에 시내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표정에서부터 억울함이 드러났다.
“아니, 조 대리를 추궁하는 게 아니고, 그냥 물어보는 겁니다. 알고 싶은 게 있어서.”
지헌은 시내를 달래듯 나긋하게 말했다. 시내가 눈치를 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소문이 났다기보다는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인데요. 채은비 과장님이랑 올해 안에 결혼하신다는…….”
“그럼 채은비 과장이 얘기한 거겠네요. 조 대리는 어떤 식으로 알고 있죠?”
지헌이 짧게 끄덕이고는 다시 물었다. 목소리는 점잖으나 눈빛은 날카로웠다.
“나에 대해 들은 사적인 얘기, 생각나는 대로 말해줬으면 좋겠네요. 뭐라도.”
* 오후 늦게, 정오는 지헌의 집무실을 찾았다. 지헌의 비서가 정오에게 연락했다. 지헌이 찾으니 예전 다원주류 1차 보고 자료를 들고 집무실로 오라고. 정오는 그가 직접 지시하지 않고 비서를 시킨 것이 의아했다. 게다가 막상 집무실에 가 보니 지헌은 자리에 없었다. 정오는 집무실에서 나오며 물었다.
“저기, 이사님 안 계시는데요. 지금 오라고 하신 거 맞나요?”
“네. 조금 기다려달라고 하십니다. 본사에 갔다가 지금 오시는 길이에요.”
“그럼 이따가 다시 올게요.”
“거의 다 오셨다니까 안에서 기다리세요.”
비서의 권고가 확고하여 정오는 다시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일하는 사람 불러다가 대체 뭐 하자는 거야. 정오는 애꿎은 소파를 발로 뻥뻥 차며 지헌을 기다렸다. *
[내가 혹시 너희 무슨 문제 있는 거 아니냐고 지헌이한테 넌지시 물어봤는데, 조만간 얘기하겠다고 하더라. 목소리를 쫙 깔면서 말이야.]
“아…… 오빠가 그런 말을 했나요? 조만간 말씀드리겠대요?”
[그래. 그래서 내가 엄마 아빠 너무 힘들게 하지 말라고 했지. 그러니까 또 알았다고 하더라.]
은비는 어젯밤 장 여사와의 통화를 떠올렸다. 지헌이 제 어머니께 하려는 말이 뭘까. 장 여사에게는 ‘결혼 얘기 말씀드리려나 봐요’ 하고 얼버무렸지만 자꾸 불안한 마음이 생겼다. 그제 이정오의 과거를 까발린 후부터 은비는 지헌에게 말을 붙이지 못했다. 지헌도 다신 안 볼 것처럼 집무실에서 내쫓고는 한 번도 은비를 찾지 않았다. 은비는 너무 불안해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 와중에 본사 회의를 마치고 회사로 돌아온 지헌이 은비를 불렀다.
“채은비 과장. 잠깐만 볼까요.”
맥스기획에 부임해온 지 한 달 만에 드디어 공개적으로 은비를 부른 것이다. 꽤 상냥한 목소리였다.
“네!”
은비는 홍조가 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울컥 울음이 함께 나올 것 같았다. 그제는 다신 안 볼 것처럼 집무실에서 내쫓더니.
‘그럼 그렇지. 어머님이 날 그토록 예뻐하시는데, 당신도 날 함부로 할 수 없지.’
역시 장 여사를 찾아가 마음을 털어놓길 잘한 것 같았다. 퇴근 후 고생스런 몸을 이끌고 당신 어머니를 찾아간 나를, 당신도 고맙게 여길 수밖에 없지. 모든 게 잘 해결된 것 같아 흡족했다. 은비는 지헌를 졸래졸래 따라갔다. 지헌의 걸음이 하도 빨라 은비는 몇 번을 뛰어야 했다.
“오빠, 무슨 일이야?”
은비는 미소를 머금고 물었다. 지헌은 은비의 물음에 대꾸하지 않고 그저 집무실을 향해 움직일 뿐이었다. 금세 집무실에 도착한 두 사람. 달칵, 문이 열렸다가 닫히고. 은비와 함께 집무실에 들어온 지헌이 고개를 천천히 돌려 주위를 살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할 필요가 있다는 듯. 그러고 보니 부속실에도 비서가 없었다. 은비의 심장이 콩닥거렸다. 방금 전 잠깐만 보자고 상냥하게 말을 걸어왔던 남자는 이제 보이지 않았다. 무표정에, 시선만은 날카로운 본래의 정지헌. 아니, 조금 더 매서운 얼굴의 정지헌이었다. 은비는 다시 겁을 먹었다.
“왜 내 귀에 나랑 네가 결혼을 한다는 말이 들리지?”
지헌의 질문에 애써 지었던 미소가 툭 하고 풀렸다.
“네 입으로 얘기해봐.”
“…….”
“내가 너한테 결혼하자고 한 적이 있었어?”
위협적인 추궁이 말문을 막았다. 우리는 결국 결혼하게 될 테니까! 다들 그걸 원하니까! 자신있게 말해야 하는데 누군가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목소리를 내는 것이 힘겨웠다.
“그래도, 우리는, 언젠가…….”
“사실만.”
“…….”
“사실만 말해, 채은비.”
“…….”
“내가 너한테 결혼하자고 했어?”
모든 책임을 그녀에게 미루듯이 몰아세우는 지헌의 태도에 은비는 주먹을 말아쥐었다.
“……언젠가 할 거였잖아.”
“내가 왜?”
“…….”
“크게 착각하는 것 같은데, 나는 너랑 뭘 어떻게 하고 싶은 게 아무것도 없어.”
“…….”
“끔찍하네. 내가 이 회사에 부임해오지 않았다면 너는 그 허풍을 더 신나게 떠벌리고 다녔겠지.”
“오빠 어차피 여자도 없잖아.”
일부러 모욕을 주려는 듯한 그의 언사에 울컥한 은비가 쏘아붙였다.
“여자도 없는데 누구랑 결혼하든 뭐 어때? 사귄 적 없든 아무것도 없든 난 결혼할 수 있고 결혼생활 충분히 유지할 수 있어. 오빠한테도 이보다 편한 게 어딨어?”
막혔던 활로가 터지니 한을 풀어내듯 말이 쏟아졌다.
“오빠 기억 안 나? 7년 전! 내가 오빠 뺑소니사고 신고 안 했으면 오빤 죽었어. 오빠가 죽으면 어머님은 또 어떻게 되셨을 것 같아? 그게 우리가 결혼해야 하는 이유야! 오빠는, 오빠 가족들은 나한테 평생 고마워해야 한다고.”
내가 오빠를 어떻게 살렸는지 평생 가슴에 새기고 살아야지!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오빤데, 오히려 나만 잘했어. 나만 노력했어. 어머님한테도 내가 얼마나 잘했나 생각해봐. 오빠가 어버이날, 어머니 생신 제대로 챙긴 적 있어? 다 내가 제대로 챙겼어. 매주 안부 연락했고 때 되면 찾아뵙고 인사드리고 같이 쇼핑해드리고, 선물 사드리고.”
내가 이 관계를 유지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오빠는 뼈에 새겨야지. 오빠가 사랑하는 오빠의 어머니께 내가 그토록 잘했는데, 오빠는 내게 고마워하기만 해야지.
“어머니 안목도 높아서 선물 고르는 것도 얼마나 까다로운지 알아? 그 고생을 오빠가 알아?”
“그러니까 왜 그런 고생을 해. 내가 부탁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어?”
베푸는 호의를 잘도 받았으면서, 이제 와 입을 싹 닦겠단 지헌의 심사에 은비는 눈물이 핑 돌았다.
“네가 좋아서 한 일을 가지고 왜 내 핑계를 대지? 난 너한테 바란 게 아무것도 없었는데.”
“사귀기로 한 거잖아! 그게 약속이라고! 사귀기로 했으면 그렇게 노력하는 거라고! 그래서 난 이만큼 노력했는데!”
“채은비.”
눈물을 머금고 소리치는 그녀를 앞에 두고도 지헌의 눈빛은 변함이 없었다.
“사귀기로 한 건 4년 전의 소문을 무마하려던 것뿐이었어. 너도 그렇게 얘기했었잖아. 기억나지?”
흥분한 은비를 타이르듯 지헌의 목소리가 고요해졌다. 4년 전, 지헌이 유난히도 소문에 시달리던 때가 있었다. 누가 자꾸 그런 소문을 내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느 날은 어머니가 집에 들이닥쳐서는 아들 소문 때문에 못 살겠다며 한탄을 했다. 그 와중에, 소문의 마지막 희생양이 되었던 게 채은비였다. 은비는 소문이 나자마자 찾아와 어머니처럼 한탄했고, 돌아갈 때쯤에는 진짜 연애를 만들어버리자고 제안했다. 지헌은 무심하게 받아들였다. 그 이후로 거짓말처럼 소문이 사라졌고 그 또한 사람들에게 시달리지 않게 되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잠깐의 거짓말로 끝날 줄 알았는데, 오랫동안 채은비는 그 연극을 붙들고 있었다. 그 사실을 지헌은 너무 늦게 알았다. 맥스기획에 부임해오지 않았다면, 영원히 몰랐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정말로 등 떠밀려 결혼을 하게 될 수도 있겠지.
“그 이후엔 네가 정리했어야 했어. 헛소문을 만들 게 아니라.”
“…….”
“이제 그만해. 일주일 안에 정리해. 지금까지의 네 허세, 네 허언, 다 눈감아줄 테니까.”
그의 요구에 은비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오빠 나한테 이러면 안 돼. 내가 오빠한테 어떻게 했는데.”
“7년 전 신고는 고맙게 생각해. 지금이라도 사례금을 준비할 테니까 받아.”
“…….”
“널 존중해서 네가 날 찼다고 하든, 내가 널 찼다고 하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까, 바로 정리해.”
결국 은비의 시뻘게진 두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 떨어졌다. 그럼에도 지헌은 흔들림 없이 차분한 태도를 유지했다.
“회사 사람들한테 거짓말한 게 민망하면 이직도 괜찮을 거야.”
“……후회할 거야, 오빠.”
“그래. 그럴 테니까. 이제 그만 후회 좀 하게 해줘.”
말과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으나 그 말투만은 더없이 나긋하게. 그는 그렇게 닫혀 있던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이만 가.”
“…….”
“손님맞이 해야 해. 나가.”
은비는 주먹을 꽉 쥐고서 지헌을 노려보다가 마지못해 떠났다. 어떤 손님인지는 모르겠으나 손님에게 이런 꼴을 보일 수는 없으니까. 은비가 떠나자마자 집무실의 문이 굳건히 닫혔다.
‘미쳐버리겠네!’
정오는 두 손으로 입을 막고서 소파 뒤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10분 전 집무실에 도착했다. 집무실엔 아무도 없고, 비서한테 말했더니 들어가 있으라고 하고. 집무실 소파에 털썩 앉아 멍하니 눈앞으로 시선을 내렸다. 테이블 위에 쿠키가 있었다. 마치 그녀 먹으라고 갖다놓은 것처럼. 너무 심심해서 쿠키를 뜯었다. 맛있어서 조금 마음이 풀렸다. 왜 난 음식 앞에서 이렇게 마음이 물러질까.
‘심심한데 하나만 더 먹을까?’
출출하던 차에 맛있는 쿠키는 좋은 간식이었다. 그때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웬만하면 그냥 가만히 있었을 텐데.
“오빠, 무슨 일이야?”
채은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와 같은 상황이었다. 집무실에서 채은비, 정지헌과 마주하는 상황. 난 쿠키까지 훔쳐먹고 있는데! 왠지 이 모습을, 정지헌의 옆에 붙어 있는 채은비에게는 들키고 싶지 않았다. 발을 동동 구르던 정오는 쿠키를 한입에 욱여넣고는 재빨리 소파 뒤로 몸을 숨겼다. 잠시 후 문이 열렸다 닫히고 실랑이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정오는 생각지도 않게 두 사람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이럴 줄은 몰랐다. 이런 상황이 벌어질 줄은. 생라이브로, 두 사람의 역사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도중에라도 몸을 일으켜 집무실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두 사람의 대화가 하도 심각하여 정오는 숨을 죽이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두 사람의 언쟁이 이어지는 내내 가슴에 날치 한 마리가 사는 것처럼 심장이 펄떡펄떡거렸다.
“……후회할 거야, 오빠.”
지헌의 기세를 꺾지 못한 은비는 그 말을 끝으로 집무실을 떠났다. 지헌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이제 어쩌지? 어떻게 빠져나가지?’
쿠키 먹다가 집무실에 갇힌 제 처지가 막막하여 죽을상이 되었다. 그렇게 탈출 방법을 찾느라 고심하고 있는데.
“손님.”
지헌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주 가까이서. 정오는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이럴 수가.
“다 들었으면 이만 일어나지?”
지헌이 소파 뒤로 몸을 숙여 보이며, 자신을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이제 제대로 알았습니까?”
그 미소가 믿음직스럽게도, 사악하게도 보여서 정오는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