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두고 보자, 이정오2021.09.15.
정오는 울고 싶었다. 종잇장같이 얇아져서 집무실 문 아래 틈으로 탈출하고 싶었다.
“아니, 저는…….”
두 사람 얘기를 엿들으려고 일부러 숨어 있었던 게 아닌데. 자존심 때문에, 채은비에게 이런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랬던 건데, 솔직하게 말할 수도 없고…….
“이사님도 어제 저한테 실수할 뻔하셨으니까 이걸로 퉁 치고 넘어가면 안 될까요…….”
여기서 도망칠 수만 있다면 어제의 소동도 털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진짜 제가 이걸 엿듣고 싶어서 엿들은 건 아니고요…….”
“압니다.”
소파를 빙 돌아 다가온 지헌이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서 앉았다. 얼추 눈높이가 맞았다. 정오는 지헌과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은 입장이라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수요일과 같은 상황을 만들어보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지금이 더 나았겠네요.”
“…….”
“숨어 들으면 진실이 더 잘 보이니까.”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수치스러워 귀를 막으려던 정오는 두 손을 귀 옆에 갖다 대려다가 멈칫했다. 고개를 슬며시 들어 지헌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을 마주하고서 미소 짓고 있었다. 이 사람이 지금 뭐라고 한 거지?
“……저한테 사실을 알려주려고 그랬다고요?”
그가 끄덕였다.
“왜요? 왜?”
“그쪽이 잘못 알고 있는 게 신경 쓰여서.”
“…….”
“결혼할 사람 없습니다. 아직.”
심장아. 진정해. 설렘이 아니라 두려움일 것이다. 방금 전까지 다른 사람을 향해 냉기를 쏟아내며 독설을 서슴지 않았던 남자가 자신을 향해 상냥하게 미소 지어 보이니 어찔한 마음.
“네. 네. 알았고요…….”
정오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남자와 더는 단둘이 있을 수 없었다.
“저를 부르신 게 일 때문이 아니라 오해 때문이었다는 거죠? 그럼 전 이만 가 봐도 될까요? 오해 풀었으니까.”
조금씩 조금씩, 정오는 경계하듯 게걸음으로 그와 멀어지며 말했다. 결국 달칵,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자마자 지헌이 막을 틈도 없이 허둥지둥 집무실을 떠나는 그녀의 모습은 어젯밤 돈가스집 앞에서와 다를 게 없었다. 지헌은 열렸다 닫힌 문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어젯밤의 실수를 퉁 친 것까진 좋은데. 그 외에는 잘된 건지 애매해졌다. 정오에게 진실을 제대로 알려주고도 왠지, 오해를 풀지 못한 것만 같은 찜찜함이 남았다. 참 어렵다. 이정오.
‘웬일이야. 이게 다 웬일이야.’
정오는 지헌으로부터 줄행랑치며 속으로 계속 중얼댔다. 뒤늦게 상황을 이해했다. 채은비와 정지헌은 오랫동안 가짜 연인 관계였단 것. 채은비가 관계에 집착했다는 것. 그리고 결혼 계획도 채은비가 만들어낸 가짜라는 것. 자신이 많은 것을 오해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 채은비가 꾸민 일이라니!
“대리님, 어디 다녀오셨어요? 무슨 일 있으세요?”
정지헌 이사의 집무실에 갔다가 돌아왔을 뿐인데 100미터 달리기를 세 번 정도 마치고 온 사람처럼 가쁘게 숨을 내쉬는 정오를 보고서 기훈이 물었다.
“아니, 아니,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런데 왜 입을 가리세요? 혼자 뭐 드셨어요?”
“아니, 아니, 아니야. 안 먹었어.”
물론 쿠키는 두 개 먹었지만, 그것 때문에 입을 가린 게 아니었다. 입술이 제 의도와 달리 움직일 것 같아서. 표정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너무 놀라서 그럴 것이다. 너무 놀라서. 자리에 앉아 겨우겨우 호흡을 정리한 정오는 집무실에서 들었던 얘기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해 보았다.
‘그러니까, 두 사람이 사귀게 된 건, 아니, 사귀는 척하게 된 건 4년 전의 소문 때문이라는 거지?’
4년 전의 소문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두 사람의 연애는 가짜였다. 그 가짜 연애에 정지헌은 그다지 마음을 쓰지 않았기에 4년이 흘러온 것이고, 그 4년 동안 채은비는 정지헌의 어머니에게 공을 들였다. 정지헌의 어머니가 채은비를 좋아해서, 채은비는 지헌과 언젠가 결혼하게 될 거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정지헌은 여자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이해해도 되나?’
들었던 대로 정리하고 나니 다시 가슴이 콩닥거렸다. 왜 그런지 알 수 없었다. 더이상 정지헌이라는 남자한테 설렘 같은 건 없을 텐데. 없어야 하는데. 그와 예나를 만나게 해줄 그날이 성큼 다가온 느낌이라 그럴 것이다. 그래서일 것이다……. 정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채은비의 자리를 살폈다. 제작 1팀 사람들은 모두 자리에 있었지만 채은비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정오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서 여전히 그대로인 불안을 떠올려보았다. 정지헌과 채은비, 두 사람의 관계를 제대로 알았다고 해서 내 아이의 안전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어머니, 장영미 여사에 대해선 여전히 알 수 없다. 7년 전의 통화는 분명히 그의 어머니와 관련돼 있을 것이고,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얼마나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상 함부로 행동할 수는 없다. 장 여사가 채은비를 마음에 들어해서 정지헌도 채은비와의 가짜 연애에 대해 어머니께 솔직히 털어놓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건 정지헌이 어머니를 중요하게 생각한단 뜻이겠지.
‘누군들 엄마가 중요하지 않겠어.’
언젠가 그의 어머니 장영미 여사와 맞설 수도 있겠단 예감이 들었다. * 토요일 낮. 정오는 경쟁 PT 준비 때문에 오늘도 출근해야 하는 처지였다. 출근 준비를 하는 정오를 빤히 쳐다보던 예나가 말했다.
“엄마, 도빈이는 엄마랑 아빠랑 도윤이랑 캠핑 간대.”
정오는 무릎을 굽혀 예나와 눈을 맞추고서 물었다.
“우리 예나도 캠핑 가고 싶어?”
“아니. 그냥 얘기한 거야. 엄마는 바쁘잖아.”
아이는 좀 더 아이다워도 되는데. 본심을 숨기는 조숙함이 때로는 안쓰럽다.
“바빠도 갈 수 있지. 여름은 너무 더우니까 가을에 가자.”
정오의 약속에 예나의 얼굴이 밝아졌다.
“엄마, 그럼 나 도빈이한테 얘기해도 돼?”
“그래. 해.”
“전화해줘.”
한시도 참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정오는 어쩔 수 없이 도빈의 엄마 진서에게 전화를 걸게 되었다.
[네. 예나 어머니!]
진서가 살가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도빈 어머니, 안녕하셨어요? 예나가 도빈이한테 할 얘기가 있다고 해서 연락드렸어요.”
[아, 그래요? 네, 도빈이 바꿔드릴게요.]
정오는 예나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휴대폰을 귀에 댄 예나가 반갑게 외쳤다.
“여보세요. 박도빈!”
[예나야. 미안해.]
그런데 도빈은 예나의 용건을 듣기도 전에 대뜸 사과를 해왔다.
“응? 왜?”
[사실 있잖아…… 우리 아빠는 못 나눠준대. 엄마가 그럼 안 된대.]
며칠 동안 도빈을 끙끙 앓게 했던 사연. 진서는 다시 얘기할 필요는 없을 거라고 했지만 도빈에게는 중차대한 문제였던 것이다. 수화기 저편에서 진서가 ‘박도빈!’ 하고 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얘기를 하는가 싶어 눈을 깜빡이던 예나가 지난 화요일쯤의 대화를 떠올리곤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아, 괜찮아.”
“너 화 안 났어?”
“응. 원래 안 될 줄 알았어. 근데 있잖아! 나도 캠핑 간다! 가을에!”
“정말? 너도 내 아빠가 네 아빠 되면 우리 결혼 못 하는 거 알고 있었어?”
“응?”
서로 제 용건만 말하고자 하면서도 열심히 대화를 이어가는 아이들. 하지만 결혼 얘기까지 나오자 휴대폰의 바통은 진서에게로 급히 넘어갔다.
[예나야, 안녕! 안녕! 도빈이가 참 별 소릴 다 한다. 엄마 옆에 계시니?]
“네. 잠깐만요.”
예나는 바로 정오에게 휴대폰을 양보했다.
“여보세요.”
[예나 어머니, 호호…… 우리 도빈이가 부족한 점이 많아요. 예나랑 친구 하게 해주셔서 감사해요.]
어색함을 무마하려는 진서의 웃음 뒤에는 늘 하던 감사 인사가 이어졌다.
“아니에요. 저야말로 늘 감사드리죠.”
[그럼 월요일에 뵐게요. 예나한테도 월요일에 보자고 전해주세요.]
진서는 깍듯하게 인사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통화를 마친 후, 정오가 예나에게 물었다.
“도빈이가 뭘 미안하다고 한 거야?”
“도빈이가 나한테 아빠 나눠주겠다고 했거든. 근데 안 된대.”
“아빠를 나눠주겠다고 했다고?”
아이들의 대화에 뒤늦게 놀란 정오의 가슴이 따끔거렸다.
“내가 달라고 한 거 아니야.”
예나가 뾰로통하게 대꾸했다. 어쩌다가 그런 얘기까지 나왔을까. 그 얘기를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아이의 마음은 어땠을까 생각하니 마냥 웃을 수는 없었다. 먹먹한 마음으로 다시 준비를 이어가는데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스튜디오에서 라디오 광고 작업물을 보내왔다. 분명히 5안까지 작업을 마쳤는데 하나가 빠져 있었다. PD에게 물어보았으나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정오는 급하게 다시 이메일을 보내야 할 처지가 되었다. 이메일을 보내려면 회사 컴퓨터를 써야 하는데.
‘기훈 씨는 출근했으려나?’
정오는 바로 기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기훈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기훈이 종종 휴대폰을 무음으로 해놓는 경우가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정오는 기훈의 회사 자리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한참 만에 통화대기음이 꺼지고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기훈 씨. 출근했어? 미안한데 내 자리 컴퓨터 켜서 자료 하나만 전송해줄 수 있을까? 스튜디오 쪽에 메일 좀 바로 보내주라. 비번은…….”
[이정오 대리?]
헉! ‘네’ 하는 짧은 대답만 듣고서 같은 팀 송기훈 사원인 줄 알고 부탁을 했는데 알고 보니 정지헌이었다. 난리 났구나. * 주말 출근은 오랜만이었다. 제작팀은 어제 늦게까지 야근을 했으니 오후에나 출근할 것이다. 버릇처럼 제작 2팀 이정오의 자리를 확인해본 지헌은 집무실로 이동하려다가 멈칫했다. 제작 2팀에서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정오의 옆자리, 송기훈 사원 자리였다. 주변에 당겨 받는 이가 없어 지헌이 전화를 받게 되었다.
“네.”
[기훈 씨. 출근했어? 미안한데 내 자리 컴퓨터 켜서 자료 하나만 전송해줄 수 있을까?]
다름 아닌 이정오 대리였다. 짧게 대답을 했더니 마음이 급한 정오는 목소리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부탁을 늘어놓았다.
[스튜디오 쪽에 메일 좀 바로 보내주라. 비번은…….]
“이정오 대리?”
지헌의 물음에 ‘헉’ 하고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도 지헌은 가슴이 간지러웠다. 웃음을 집어넣고서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뭐가 잘못됐어요?”
[네. 스튜디오에서 작업물을 하나 누락해서요. 급히 제가 보냈던 메일을 재전송해야 하는데…….]
바로 기훈의 자리 전화를 끊은 지헌은 제 휴대폰으로 정오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아까와는 달리 정오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이정오 대리 자리로 왔습니다. 내가 할 테니 비번 불러줘요.”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닙니다. 제가 빨리 가서 하겠습니다. 한 시간 안에 도착합니다.]
정오는 기겁하며 마다했다.
“급하다면서.”
[아닙니다. 아닙니다. 제가 하면 돼요.]
“나도 메일 보낼 줄 아니까 나한테 얘기해요. 괜찮습니다.”
[아니, 아니, 아니…… 비번은 개인정보라 알려드릴 수가 없어서요!]
맥스기획 규정상 개인정보라고 할 수는 없다. 직원에게 갑작스런 문제가 생겨서 지급된 PC를 켜지 못하는 경우 회사에서 재량껏 PC의 정보를 꺼낼 수 있도록 조치하고 있기도 하다. 이와 같은 이유로 회사에서는 직원들에게도 사적으로 사용하는 비밀번호와 동일하게 설정하지 않도록 권고하는데, 그녀가 이를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송기훈 씨한테는 말해주려던 거 아닙니까?”
지헌은 슬쩍 빈정이 상했다. 조시내 대리도 빠졌으니 송기훈을 옆 팀으로 보내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하며, 깊이 한숨을 쉬고서 그녀를 설득했다.
“나도 이렇게 되어서 유감입니다. 비번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낼 테니 말해줘요.”
그녀 또한 길게 한숨을 쉬더니, 어쩔 수 없다는 투로 영어 자음을 하나씩 읊어주었다.
“……더블유, 제이, 디, 디, 엘, 티, 케이, 알, 티……입니다.”
PC 전원을 켠 지헌은 그녀가 말하는 대로 자판을 쳤다. wjddltkrt. 곧 컴퓨터 바탕화면이 떠올랐다. 지헌은 곧장 메일함을 열었다.
“열렸네요. 이메일은 뭘 보내면 됩니까.”
[오디 스튜디오에 발송했던 메일을 재전송해주시면 됩니다.]
“보냈습니다.”
아주 간단한 업무였다. 전송 완료한 지헌이 뿌듯하게 미소 지었다. 저쪽에서도 인사가 들려왔다.
[넵. 감사합니다!]
그러나, 그게 끝. 뚝 끊어진 전화를 보며 지헌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도 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여자. 나는 왜 이런 여자에게 이토록 집착하나.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지만 그녀에게 집중하게 되는 자신이 싫지 않았다. 피식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난 지헌은 컴퓨터 전원을 끄려다가 멈칫했다. 아무래도 뭔가 이상한데. 이 찜찜한 기분은 뭐지? 다시 자리에 앉은 지헌은 컴퓨터 메모판을 열어 정오가 발음했던 영어 자음들을 한글키로 눌러보았다. wjddltkrt. 그리고 화면을 확인한 지헌의 입술 사이로 맥빠진 헛웃음이 터져나왔다.
“허.”
- 정이사ㄱㅅ. 두고 보자, 이정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