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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친구가 될 수 있을까? (41/183)

41. 친구가 될 수 있을까?2021.09.18.

회사에 도착한 정오는 계속 주변을 살폈다. 지헌을 발견하면 바로 도망가기 위해. 다행히 지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16551145859639.jpg‘바쁜 사람이니 주말에 여길 지키고 있을 순 없겠지. 월요일쯤이면 오늘 일은 다 잊어버리겠지 뭐.’

정오는 불안을 닫아걸고 회의실로 향했다. 회의실 테이블 위에 브랜드 커피숍의 커피가 여러 잔 있었다. 먼저 회의실에 들어온 박영광 차장이 말했다.

16551145859648.jpg“이 대리, 마시고 싶은 거 골라 마셔.”

16551145859639.jpg“차장님이 쏘시는 거예요?”

16551145859648.jpg“아니. 이사님이.”

정오는 시원하게 빼들었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놓칠 뻔했다. 영광이 커피 한 모금을 쭉 들이켜고는 말했다.

16551145859648.jpg“처음엔 좀 무서웠는데, 그래도 이사님이 직원들을 참 잘 챙기시는 것 같아.”

16551145859639.jpg“그래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

16551145859648.jpg“아니야. 지난번 시음회 때도 내게 직접 연락해서는 이 대리가 갑질 광고주한테 시달리지 않게 해달라고도 하셨는걸. 그래서 내가 이 대리 옆에 붙어 있게 된 거지.”

아. 의외의 사실을 알게 되니 얼음을 깨물어 삼킨 것처럼 머리가 찡했다. 옛날 집 앞에서 만난 것도 그렇고, 박영광 차장에게 그런 부탁을 한 것도 그렇고, 오늘 자신의 전화를 받아 일을 처리해준 것도 그렇고, 오늘의 커피도 그렇고. 왠지 지헌이 어디선가 계속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그 손바닥 안일 것만 같은 느낌이 사고를 장악했다. 정오는 들었던 아메리카노를 그대로 내려놓았다. 팀원들이 하나둘 도착하고, 경쟁 PT 제작 회의가 시작되었다. 어느새 경쟁 PT가 열흘 앞으로 다가왔다. 팀에는 제작팀에서 퇴출된 조시내 대리 대신 고은주 대리가 합류했다. 내 편이 늘어났다는 느낌에 정오는 든든했다. 오늘은 웬일로 채은비가 나오지 않아 회의가 수월했다. 은비와 함께 들어간 회의에서 의견을 내면 은근히 빈축을 살 때가 많았다. 내일이 되면 또 쫓아와서는 정오가 낸 의견들에 모두 딴지를 걸겠지만, 어쨌든 오늘은 편했다.

16551145859672.jpg“오늘은 얘기도 많이 나왔으니 이만 끝낼까? 다들 토요일 저녁은 토요일 저녁답게 보내고 내일 다시 모이는 걸로.”

16551145859675.jpg“네!”

미란의 말에 팀원들이 환호했다. 열심히 아이디어를 낸 정오도 뿌듯한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타이밍 좋게 스튜디오에서 수정 작업물을 보내왔다. 작업물만 확인하고 집에 가면 딱 좋게 가족들과 오붓한 저녁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정오가 자리에 앉으니 기훈이 말을 걸었다.

16551145859679.jpg“대리님, 안 들어가세요? 저 오늘 차 가지고 왔는데. 태워드릴게요.”

16551145859639.jpg“아니야. 나 작업물 하나 확인할 게 있어서. 먼저 들어가.”

16551145859679.jpg“네. 그럼 가보겠습니다.”

다른 이들도 하나둘 인사를 하고, 어느덧 정오 혼자 남았다. 현재 본부에 경쟁 PT는 정오네 팀 하나뿐이라 주변엔 사람이 없었다. 사무실에 혼자 앉아 있으니 스산한 느낌도 들었다.

16551145859639.jpg‘나도 빨리 하고 가야지.’

스크립트와 작업물을 대조해보면 되는 일이라 시간만 걸릴 뿐 어려운 건 전혀 없었다. 제작물 확인을 마친 정오도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저편에서 가만히 서 있는 지헌과 눈이 마주쳤다.

16551145859639.jpg‘흐아, 망했다.’

그가 회사에 있었던 것이다. 지헌이 자신을 보는 눈빛에 정오는 바짝 긴장하게 되었다. 눈빛으로 매질을 당하는 느낌이랄까.

16551145922301.jpg“할 말 없어요?”

그가 다가오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결국 올 것이 왔다. 정오는 속으로 흠칫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가 놀리듯 말을 이었다.

16551145922301.jpg“비번이 특이하던데. 특히 기역, 시옷.”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시겠다며……. 아침 점심에 먹은 것들이 모두 얹히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얼굴색이 붉어져가고 있었지만 그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핀잔을 주었다.

16551145922301.jpg“그걸 또 송기훈 씨랑은 공유하려고 했고.”

정오는 시치미를 뚝 떼고서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16551145859639.jpg“기역 시옷은 ‘감사’라는 뜻입니다. 아시죠? 무의식중에도 이사님께 감사하는…….”

16551145922301.jpg“나한테 뭘 감사하는데.”

16551145859639.jpg“감사할 거 투성이죠. 언제나 감사합니다. 오늘 일 도와주신 것도 너무 감사드리고요.”

이어지는 정오의 궤변에 지헌은 유쾌하게 실소했다. 하여튼 재밌다니까. 지헌은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며 시간이 흐르길 기다렸다. 이정오가, 그가 옆에서 지키고 있으면 직원들의 능률이 떨어진다고 지적한 뒤로 회의에 참석하는 건 조심하게 되었다. 회의에 참석하지 않고 끝나는 시간만 보고받기로 했다. 회의가 끝난 후 바로 찾아왔다. 다들 회사를 떠나는데 정오는 일이 있는 듯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지켜보길 십여 분. 일에 열중해 있는 그녀를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왠지 기분이 좋았다. 일 자체를 귀찮아하고, 적당히 시늉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지헌에게는 은근한 자극이 오는 풍경이었다. 내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여자에게, 어째서 자꾸 그런 마음이 드는지 알 수 없었다. 지헌이 미소를 머금고서 물었다.

16551145922301.jpg“그렇게 감사하면 밥 한번 정도는 사야 하는 거 아닌가?”

16551145859639.jpg“네. 뭐든 맛있게 드시고 연락 주십쇼. 제가 결제하러 가겠습니다.”

16551145922301.jpg“누가 결제해달래요?”

어디로 튈지 모르고, 제 뜻대로 움직여주지도 않고, 도리어 자신을 손바닥 위에 놓고 쥐락펴락하는 것만 같은 여자지만, 바라보는 재미가 있다.

16551145922301.jpg“농담 그만하시고.”

16551145859639.jpg“…….”

16551145922301.jpg“나가죠. 맛있는 거 사줄게요.”

그녀가 무언가를 맛있게 먹는 모습을 다시 보고 싶었다. 짧은 통보 후 그가 먼저 움직였다. 정오는 그 자리에 얼떨떨하게 서서 지헌을 바라보았다. 책망을 할 줄 알았는데 저녁이라니. 음식으로 복수를 하겠다는 건가? 먹을 수 없는 걸 먹이려는 검은 속셈인가? 그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정오는 급히 쫓아가 말했다.

16551145859639.jpg“엄마랑 밥 먹기로 해서, 집에 일찍 가려고요. 죄송합니다.”

16551145922301.jpg“그럼 집에 데려다줄게요.”

집에? 집에를 데려다 주겠다고? 엄마도 있고 예나도 있는 집에? 어쩌다가 동네 놀이터에라도 다녀오는 예나를 만나면 큰일이었다.

16551145859639.jpg‘그래도 태워준다니 타고 가자. 집에서 조금 떨어진 데에서 내리면 될 거야.’

난감했지만 정오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떠올리며 바로 마음을 다잡았다. 그와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며 그에 대해 알아보는 일은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처져 있을 수는 없다. 당신을 알고 있어. 변하기 전의 당신, 그것도 나를 만났을 때의 단편적인 당신을 알고 있을 뿐이지만, 그 7년 전의 당신이 내게 힌트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내 행동에 이 사람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신중하게 계산해가면서 움직이면 돼. 그 밑이 물인지 얼음인지 알 수 없는 빙판길에 발을 내디딘 기분이었지만 정오는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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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551145922301.jpg“어머니와 둘이 삽니까?”

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서 지헌이 물었다. 정오는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16551145859639.jpg“네.”

거짓말을 할 때는 어쩔 수 없이 가슴이 뛰었다.

16551145922301.jpg“어머니랑 같이 사는 거 불편하지 않습니까?”

16551145859639.jpg“아뇨. 저는 엄마랑 소울메이트거든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동자가 잠시 자신을 향했다가 정면을 주시했다.

16551145859639.jpg“이사님은요?”

16551145922301.jpg“뭐가요?”

16551145859639.jpg“어머니랑 안 친하세요?”

이번엔 그녀가 질문을 던졌다.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정오의 입술이 바짝 말랐다.

16551145922301.jpg“떨어져 산 지 꽤 돼서.”

16551145859639.jpg“그래서 어머니가 불편하세요?”

16551145922301.jpg“혼자 있는 게 편하니까요.”

16551145859639.jpg“안 좋아하는 건 아니고요?”

그녀는 진지한데, 그는 픽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내었다. 물음이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정오는 눈치 빠르게 질문을 바꿨다.

16551145859639.jpg“그래도 많이 좋아하시죠?”

16551145922301.jpg“존경하죠. 여러모로.”

정오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천륜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것부터가 쓸데없는 일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그의 어머니 사이에 조금이라도 틈이 있다면 이를 비집고 들어가 보겠다는 마음 자체가 옳지 못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진실에 닿지? 이 남자에게 내가 다시 다가갈 수 있을까? 그 외모가 아니었다면 다른 사람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을 만큼 모든 것이 변한 남자. 내가 이 남자의 마음에 다시 들어갈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이에 지헌의 차는 동네에 도착했다.

16551145922301.jpg“여기서 어느 쪽으로?”

지헌이 편의점 앞 골목에 들어서며 물었다.

16551145859639.jpg“앗, 여기서 세워주세요!”

정오가 급하게 외쳤다. 지헌이 차를 세우자 정오는 부리나케 차에서 내렸다.

16551145859639.jpg“잠시만요. 얼른 다녀올게요.”

재빨리 편의점으로 들어간 정오는 몇 가지 아이템을 집어 들었다. 7년 전, 그의 차에 놓아둔 적 있던 보릿물과 껌. 그리고 언젠가 그의 주머니에 넣어둔 적 있던 사탕. 정오는 얼른 계산을 마치고 편의점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차에서 내린 지헌이 그녀가 떠난 방향으로 멀뚱하니 서 있다가 그녀를 발견하고는 다가왔다. 정오는 다가온 지헌에게 편의점에서 사 온 것들을 건넸다.

16551145859639.jpg“목마르면 드시라고 물, 졸음 올 때 씹으시라고 껌과 사탕을 준비했습니다. 태워다 주셔서 감사해요.”

나에 대해 기억해줘. 그리고 오늘은 이만 돌아가줘. 두 가지 뜻을 담아 건네준 선물에 지헌이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그 표정은 왠지 기억을 떠올려 보려는 노력처럼 보이기도 해서 정오는 두근거렸다. 그와 가까워져야 한다. 직장 상사와 부하직원 이상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너무 노골적으로 보일 수는 없다. 나를 다 드러내지 않으면서 그에 대해 캐낼 수 있을까?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예나의 존재까지도 들키지 않고?

16551145859639.jpg‘친구가 될 수 있을까?’

서서히 신뢰를 쌓아서, 언젠가 진실을 말해야 하는데. 그의 어머니와 대적할 만한 힘을 가져야 하는데. 내가 당신의 어머니를 만난 적이 있다고, 7년 전에 나는 당신인 척하는 누군가와 통화를 했었다고. 모든 사실을 밝히고 그를 믿게 해야 할 텐데. 할 수 있을까? 내게 그런 힘이 있을까? 앞날을 생각하니 두려웠다. 하지만 그래도 한 발을 떼어야 한다.

16551145859639.jpg“이사님, 제가 사실 상담을 잘하는 편입니다.”

조심스럽게 그를 향해 한 발 내디뎠다.

16551145859639.jpg“이사님한테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들어드릴 수 있다고요. 예를 들어 누군가와 마찰이 있을 때, 일이 힘들 때, 그냥 왠지 누군가랑 얘기하고 싶을 때.”

16551145922301.jpg“…….”

16551145859639.jpg“친구가 돼줄 수 있어요.”

너무 노골적으로 보이지 않게……. 주문을 외듯 간절한 바람으로 접근했지만 그의 눈빛은 그 안을 꿰뚫어 보는 것처럼 날카로웠다. 불쾌하게 여기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정오는 움찔하며 말을 보탰다.

16551145859639.jpg“제가 부하직원에 이사님보다 어려서 친구란 말이 조금 불편하실 수도 있겠지만 젊은 사람과 친구를 하면 좋은 겁니다. 이사님도 젊어진 느낌 충분히 드실 거예요. ”

16551145922301.jpg“…….”

16551145859639.jpg“이성친구 그런 게 아니라, 쓴소리, 거친 소리 그런 거. 조언 같은 거 해주는 친구는 해드릴 수 있다고요.”

말과 말 사이의 공백이 위태로웠다. 한참 뒤에 그가 입을 열었다.

16551145922301.jpg“거친 소리.”

16551145859639.jpg“…….”

16551145922301.jpg“좋네.”

그가 비뚜름하게 입술 끝을 올리며 말했다.

16551145922301.jpg“친구.”

16551145859639.jpg“…….”

16551145922301.jpg“하죠. 뭐. 친구.”

뚝뚝 끊어 내뱉는 말들 속에 불건전한 뜻은 아무것도 없었는데 왠지 그의 발음은 외설적으로 들렸다. 정오는 그 이질감을 애써 외면하고서 담대하게 끄덕였다.

16551145859639.jpg“네. 친구.”

어쩌면 지금 나는 호랑이굴로 들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기왕 호랑이굴에 들어가는 거라면 완전무장하고 가서 호랑이를 잡아야지.

16551145859639.jpg“일단 저랑 친구 된 건 비밀로 해요. 은비가 자꾸 오해하는 게 너무 걸려서요.”

이 남자는 과연 이 약속을 지킬까? 거기서부터 시험해볼 것이다. 정오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지헌은 그녀의 결연한 표정이 재미났다. 자신이 노골적으로 다가가려 하니 친구라고 선을 긋는 그녀의 맹랑함에도, 덕분에 웃을 수 있었다. 자신의 앞에서 매번 화가 난 듯 얼어 있던 여자가, 눈물까지 보일 만큼 긴장하고 있던 여자가, 어느새 이렇게 다가와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제 덩치의 두 배쯤은 되는 자신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꾹꾹 눌러대는 것 같았다. 지헌은 제 앞으로 뻗은 그녀의 손을 단단히 잡았다. 그게 설사 함정일지라도 기꺼이 걸어들어가겠다는 표정으로. 손바닥으로 그의 뜨거운 체온이 전달되었다. 그저 악수를 하겠단 거였는데. 난 호랑이를 잡을 건데, 왜 벌써 잡혀들어간 기분이 들지? 마주 잡고 흔들 줄 알았던 그가 돌연 그녀의 손을 위로 들어올리자 정오의 눈이 커졌다. 새로운 관계에 대한 낙인처럼 그의 입술이 그녀의 손등 위에 찍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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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 흐억! 그녀의 얼굴이 급하게 붉어졌다. 정오는 손을 재빨리 빼며 호통쳤다.

16551145859639.jpg“이건 친구끼리 하는 게 아니죠! 몰라요? 친구 없으세요?”

16551145922301.jpg“아. 없어서 몰랐네.”

지헌은 음흉한 속내를 감추고서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16551145922301.jpg“난 상관없어요, 뭐든.”

만족스러웠다. 명목이야 상관없어. 친구든 뭐든. 네 옆을 차지할 수 있다면. 지헌은 원래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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