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미안해요2021.09.22.
친구인 척. 허락된 것이 그것뿐이라면 얼마든지 그런 척해줄 수 있었다. 지헌은 거짓 관계에 대하여 그 어떤 거부감도 없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그렇게 살아왔으니. 상사와 부하직원의 사이에 그가 먼저 숨 막히게 밀어붙일 수는 없으니, 그녀가 제안한 관계라면 그 또한 환영이었다. 그에게 친구라는 명목은 수단일 뿐이었다. 지헌은 애정 어린 눈길로 정오를 바라보았다. 정오는 방금 전에 지헌이 입술을 갖다 댄 손등을 제 등 뒤로 감추고서 그를 노려보았다. 그마저도 지헌에게는 즐거움이었다.
“근데 내가 그쪽이랑 친구를 하면 젊어진 느낌이 들 만큼 우리 나이 차이가 많이 나던가?”
“그럼요. 한 살도 아니고 두 살도 아니고 세 살이나 차이 나는데.”
“내 나이도 아네요.”
지헌이 예리하게 짚어내니 자신을 마주하던 눈동자가 은근슬쩍 딴 곳으로 향했다가 돌아왔다.
“네. 팀장님이 알려주셨어요. ”
“가만 보면 그쪽 팀 팀장님도 저한테 참 관심이 많네요.”
“네. 저희 팀은 모두 이사님께 관심이 많습니다.”
“근데 친구 하자면서 이사님이라고 부를 겁니까?”
“그럼 어떻게 할까요?”
“그냥 이름을 불러도 되고.”
“…….”
“……오빠라고 해도 괜찮고.”
그가 은근히 바라는 듯 흘린 말에 정오는 입술을 말아 감추며 웃음을 삼켰다. 7년 전, 자신이 오빠라고 부를 때마다 미소를 지어 보이던 그 남자가 생각났다. 아, 감상에 빠지면 안 돼, 이정오. 너의 사명을 잊지 마! 정오는 대답 대신 꾸벅 인사했다. 자신의 동네에서 그와 함께 오래 서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럼, 그럼 이제, 가보겠습니다. 태워다주셔서 감사합니다.”
날름 인사한 그녀는 돌아서서 총총 뛰어갔다.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지헌은 쫓아가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았다. 잠시 후 그녀가 길을 꺾어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지헌의 입술 사이로 뜨거운 한숨이 빠져나왔다. 걸음마 한 걸음을 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승규에게는 연애 감정이 아니라고 했지만 어느새 그 비슷한 간질거림이 생겨났다. 여전히 식욕 같은 성욕이 그를 괴롭혔지만 그녀를 알아가는 시간이 막연히 싫지는 않았다. 조용히 입가에 미소를 그린 와중에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친구 승규였다.
“여보세요.”
[친구야, 어디야?]
승규의 목소리가 유난히 작게 들려왔다. 무언가를 조심스러워하는 기색이 내비쳤다.
“회사 출근했다가 이제 집에 가려고.”
[오. 그래? 내가 저녁 사줄까?]
“주말인데 가족이랑 시간 안 보내?”
[아니, 너한테 할 말도 있고.]
“무슨 할 말.”
[……월요일에 우리 집에 와줄 거지?]
아아. 얼마 전의 약속을 떠올린 지헌은 피식 웃었다. 며칠 전에도 승규가 찾아와 그 부탁을 했었는데 자신이 확답을 하지 않아 걱정했던 모양이었다.
“갈 테니까 걱정 마.”
지헌은 시원스럽게 수락했다.
[오, 정말? 정말?]
“그래.”
[허. 이게 웬일이냐. 너무너무 고맙다! 내가 앞으로 잘할게! 친구야. 나 진짜 너 좋아해.]
감복한 승규는 오버스럽게 사랑 고백까지 하며 고마움을 표했다. 지헌은 승규가 참 좋은 아빠라고 생각했다. 물론 좋은 친구이기도 하고. 정오는 빠르게 뛰어 집으로 달렸다. 심장이 쿵쾅댔다.
‘잘됐어. 잘됐어.’
그가 손등에 키스를 한 것이 좀 걸리긴 하지만. 어쨌든 그는 친구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그 어떤 의심의 눈초리도 없어 보였다. 그와 조금씩 가까워지자. 채은비를 자극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거의 집 앞에 이르러 정오의 걸음이 느려졌다. 지헌이 따라오지는 않았단 확신에 이른 정오는 천천히 호흡을 정리했다.
“어디 다녀오시나 봐요.”
“으악!”
그 사이에 누군가가 뒤에서 말을 걸었다. 그 소리에 놀라 뒤로 고꾸라질 뻔한 정오를 권배일 경사가 날렵하게 붙잡았다.
“경사님.”
“안녕하세요.”
정오는 배일의 도움을 받아 몸을 바로 세웠다. 괜히 쑥스러웠다.
“제가 깜짝 놀란 건요. 제가 딱히 나쁜 짓을 해서 그런 건 아니고요.”
“네. 압니다. 제가 놀라시게 했네요.”
“괜찮아요. 저는 회사 다녀오는데, 경사님도 어디 다녀오세요?”
“네. 저는 축구…….”
“아, 축구.”
“서에 축구 동호회가 있어서요.”
“경사님은 범인 잡으러 매일 뛰어다니실 텐데 어떻게 주말에 축구까지 하세요?”
“범인은 발로 찰 수가 없으니까요.”
아아. 저 고운 얼굴로 험악하게 인상을 쓰며 범인을 잡는다 생각하니 정오는 조금 웃음이 나왔다. 정오가 웃는 것을 보며 배일 또한 선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그 미소 아래로 정오는 더 웃을 수 없는 장면을 포착하고 말았다.
“어! 경사님! 모기! 모기!”
배일의 드러난 팔뚝 위에 웬 모기가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툭! 맹하게 웃어 보이던 배일이 뒤늦게 제 팔뚝을 쳤으나 모기는 날렵하게 내빼버렸다.
“아, 물렸네요.”
배일이 팔뚝을 내려다보며 느릿하게 말했다. 팔뚝의 피부가 한층 부어오른 것이 정오의 눈에도 보였다. 범인은 잡아도 모기는 못 잡는구나. 경찰을 하기엔 너무 어수룩한 인상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맹꽁이 같은 면이 있구나. 왠지 가려울 것 같은데…….
“경사님, 잠시만요.”
정오는 가방에서 투명테이프를 꺼냈다. 경쟁 PT 준비를 할 때 벽면에 A4용지를 붙이는 게 버릇이 되어 늘 가방에 가지고 다니는 테이프였다. 정오는 테이프를 작게 잘라 배일의 팔뚝에 붙여주었다.
“이렇게 하면 덜 간지러워요.”
“오. 생활의 지혜네요. 고맙습니다.”
배일이 신박한 팁이라는 듯 끄덕였다.
* 일요일 점심. 은비는 약속대로 장영미 여사를 만나러 나갔다. 가는 길 내내 은비는 불안하고 초조했다. 지헌이 먼저 장 여사에게 모든 사실을 밝혔을 것 같아 너무 두려웠다. 은비는 고급 레스토랑의 안내받은 자리에 앉아 떨리는 마음으로 장 여사를 기다렸다. 장 여사는 약속 시간보다 10분 늦게 나타났다.
“어머니!”
은비는 긴장한 마음을 애써 숨기고서 밝은 미소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은비야. 내가 늦었네. 차가 막혀서 말이야.”
“괜찮아요, 어머니.”
다른 기색 없이 반가워하는 장 여사의 표정에 은비도 한시름 놓은 얼굴이 되었다.
“은비 프랑스식 좋아하니? 내가 마음대로 예약 잡았는데 입맛에 맞으려나 모르겠네.”
“어머니, 저는 다 잘 먹어요. 어머님이 사주시는 건 더 잘 먹고요.”
“그래. 그래서 너무 이뻐.”
장 여사의 칭찬에 은비는 기분이 좋아졌다. 이윽고 코스요리가 하나씩 입장했다. 은비는 지헌에게서는 한 번도 받지 못한 대접을 받는 느낌에 마음이 찡했다.
“일은 힘든 거 없고?”
식사 중간에 장 여사가 물었다. 은비가 한숨을 얕게 내쉬고는 대답했다.
“일은 괜찮은데 사람 문제가 있어요.”
“사람 문제?”
“약간 트러블이 있는 친구가 있어서요.”
“은비도 트러블 같은 게 있어?”
장 여사는 그런 은비가 귀엽다는 듯 웃어 보였다.
“사실 제 고등학교 동창이 이번에 이직해서 카피라이터로 들어왔거든요. 근데 저를 많이 싫어해요.”
“아니 왜? 우리 이쁜 은비를.”
“그 친구는 대리인데 저는 과장이라서 그런가? 잘 모르겠어요.”
은비는 힘 빠진 표정으로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고등학교 때, 그 친구 집안 사정이 안 좋았어요. 저는 그 친구가 안됐어서 많이 챙겨주려고 했었는데, 그때의 열등감 그런 기억이 남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저런. 그때의 고마움이 다 열등감이 돼버렸구나! 하긴 너는 과장인데 그 애는 대리라니, 얼마나 네가 부럽겠어.”
“그리고 사실 그 친구가 미혼모 가정이거든요. 편부나 편모 가정은 숨기려고 해도 표가 나기 마련이더라고요. 정말 어쩔 수가 없어요. 문제가 생겨도 그게 잘못됐다는 걸 알려줄 만한 제대로 된 어른이 없어서 그런 것 같아요.”
“그래. 나도 우리 지헌이한테 어렸을 때부터 편부, 편모 가정은 조심하라고 일러뒀었어. 아유, 역시 은비랑은 말이 잘 통한다!”
장 여사가 맞장구를 쳐 주니 은비는 뿌듯했다. 사실 장 여사가 편모 가정을 싫어한단 사실을 오빠 은엽에게 들어 잘 알고 있었다. 은비는 속으로 의지를 불태웠다. 정지헌과 헤어지지 않을 것이다. 내 자리를 이정오가 빼앗아가는 건 더더욱 용납할 수 없다. * 다음 날. 내내 회의를 하다 보니 어느덧 저녁때가 되었다. 정오는 벽면에 붙였던 종이들을 모두 떼어냈다. 주말 내내 모습을 보이지 않던 채은비는 오늘 돌연 월차까지 냈다. 책임을 미루는 것 같아 씁쓸했지만 덕분에 경쟁 PT 준비는 착착 잘되어가는 듯하여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오늘은 제작 방향을 확정하기로 했다. 방향이 확정되면 이를 토대로 광고 시안을 만드는 작업이 진행된다.
“7시에 회의 시작하자. 누가 이사님한테 가서 7시에 회의 시작한다고 말씀드려줘요.”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래. 미란의 지시에 다들 고개를 숙였다.
“제가 다녀올게요.”
하는 수 없이 정오가 나섰다. 지헌에게는 월요일다운 바쁜 하루였다. 맥스기획의 임원 회의에 참석했다가 두 차례의 외부 미팅을 다녀와 결재 서류더미를 해치우고 나니 저녁때가 되었다. 자리를 정리한 지헌은 일어나 슈트 재킷을 걸쳤다. 10분 뒤 승규와 주차장에서 만나기로 했다. 아이들을 만나러 가는 날이었다. 일이 아니고 개인적으로, ‘아이들’을 위해 시간을 내는 건 난생처음이었다. 집무실을 나서려는 순간 문밖에서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오늘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했던 이정오였다. 일정에 따라 움직이는 와중에도 마음이 반가워 그의 눈이 빛났다. 그녀는 아주 업무적인 목소리였다.
“이사님, 회의 준비됐습니다. 7시에 시간 괜찮으시죠?”
그제는 친구가 되어주겠다고 하고서. 어쨌든 그는 이사의 본분을 잊지 않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무슨 회의요?”
“오늘 경쟁 PT 제작 방향 결정한다고 하셨잖아요.”
아아…….
“혹시 이사님 지금 퇴근하세요?”
지헌이 눈을 지그시 감고는 조용히 한숨을 토해냈다. 지난주에 제작팀에게 했던 얘기가 뒤늦게 생각난 것이다. 아침에 기획팀장에게 보고 받을 때, 관련 리서치 자료가 내일 도착한다고 하여 제작 회의도 당연히 미뤄졌을 것이라고 속단한 탓도 있었다.
“내일 아침으로 미루죠.”
지헌의 결정에 정오는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이사님께서 오늘 일정 없으시다고 들어서 오늘로 맞춘 건데요.”
“갑자기 일이 생겨서요. 내일 아침에 하죠. 기획 쪽도 리서치 자료 준비 안 됐다고 하니 그거랑 같이 내일 확인하겠습니다.”
지헌의 대답에 정오의 눈초리가 날렵해졌다. 옳거니, 요놈 잘 걸렸다. 예나의 생일에 나머지공부 같은 야근을 한 적 있었던 정오는 지금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정오는 턱을 높이 들고서 따졌다.
“결정이 늦어지면 다른 일정들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어서요. 이사님.”
자기도 할 일이 있으면서 어디 도망을 가려고 들어. 너도 당해봐.
“무슨 일인데요, 이사님?”
“개인적인 일.”
“개인적인 무슨 일이요?”
“…….”
“일 끝나고 가셨으면 합니다. 이사님이 꼭 필요한 일이잖아요.”
정오는 심통 가득한 표정으로 통통하게 입술을 오므리고는 쏘아댔다. 정오의 의도를 눈치챈 지헌의 눈이 가늘어졌다.
“복수하는 겁니까?”
“아뇨.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자는 거죠.”
“그때는 내가 미안하다고 했잖아요.”
“솔직히 빈말이었잖아요.”
정오가 지적하자 지헌은 꼼짝하지 못했다. 그는 다른 이의 감정에 잘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감정의 출구뿐 아니라 입구 어딘가도 꽉 막혀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이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공감 능력이 떨어집니다. 내가.”
“…….”
“이것도 7년 전 사고 탓인데, 어쨌든 내가 누군가를 이해해보려고 노력한 적도 없으니 내 탓이겠죠.”
회의에 들어가자고 앙탈을 부리는 것만 같은 그녀의 고집이 귀여웠지만 그는 이번에도 그녀의 청을 들어줄 수 없었다. 3주 전의 그 작은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다음, 다음, 다음 주 월요일에 꼭 다시 만나자고 했던 꼬마 아이. 그 아이를 울리고 싶지 않았다. 그 아이가 당신을 닮지만 않았어도 이렇게까지 신경이 쓰이진 않았을 거야. 그러니 봐주시길. 반걸음 다가간 그가 정중하게 말했다.
“미안합니다. 그땐 정말 미안했습니다.”
반 발짝.
“미안해요.”
또 반 발짝.
“미안해요.”
“…….”
“미안해.”
정오는 어깨를 움츠렸다. 심장이 포르르 떨려왔다.
“미안.”
다가오는 만큼 짧아지는 사과의 말. 정말 친구에게 말하는 듯한 다정한 음색이 가장 마지막엔 얼굴 앞에서 속눈썹을 간질이듯 들려왔다. 어쩔 수 없이 떨려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과를 하는 건지 유혹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눈길이었다. 그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싱긋 웃었다.
“됐어요?”
아니 이 남자가! 홀린 듯 멍해졌다가 퍼뜩 정신이 든 그녀가 당황하여 눈을 크게 뜨자, 허락을 받았다고 확신한 그가 한 발짝 물러나며 인사했다.
“내일 봅시다.”
문이 열리고, 그가 먼저 떠났다. 정지헌, 이 자식! 상사의 교태에 농락을 당한 것만 같았다.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단 사실이 너무나도 분한 정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