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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천사의 키스 (43/183)

43. 천사의 키스2021.09.25.

지헌을 떠나보낸 후 회의실로 돌아온 정오가 성미란 팀장에게 말했다.

16551146770257.jpg“다녀왔습니다. 회의 파토 났어요.”

16551146770263.jpg“이사님이 뭐라는데?”

16551146770257.jpg“오늘 일 있다고 내일 아침에 보자는데요.”

16551146770263.jpg“아, 잘됐다.”

정오의 예상과는 달리 미란은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16551146770263.jpg“AE가 리서치 결과를 대강 알려줬는데 우리가 놓친 부분이 있네. 그래서 좀 더 머리를 굴려야 할 것 같아. 내일 아침까지 잘해보자.”

보완해야 할 부분이 생긴 것이다. 휴우우. 정오도 한숨을 내쉬었다. 정지헌을 회사 밖으로 못 나가게 막았다면, 하마터면 양쪽으로 곤란해질 뻔했다. 안도하고 나서야 방금 전 집무실에서 있었던 일을 다시 떠올려보게 되었다.

16551146770319.jpg“어? 대리님, 어디 아프세요?”

기훈이 지나가다가 정오의 안색을 살피고서 말했다.

16551146770257.jpg“어? 아니. 왜?”

16551146770319.jpg“얼굴이 빨개서요. 열 있는 것 같은데.”

16551146770257.jpg“아니야. 회의실이 좀 덥네.”

정오는 대강 둘러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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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헌은 승규를 태우고서 승규네 집으로 출발했다.

16551146812616.jpg“아유. 내가 운전해야 하는데. 기사님 데리고 다니는 우리 이사님께서 직접 차까지 끌고 누추한 우리 집을 방문해주시고 내가 황송하다 황송해.”

친구가 3주 전의 약속을 지켜주어 기분이 좋은 승규는 가는 내내 지헌을 추켜주었다. 승규의 감언에도 지헌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사실은 긴장되었다. 아이들과 시간을 내어 놀아본 적이 없었다. 아이들과는 어떻게 대화를 나누어야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도망갈 수 있다면 회사로 도망가고 싶었다. 회사를 나오기 전에 정오가 보여주었던 표정도 눈에 선했다.

16551146812621.jpg“애들한테 대강 얼굴만 보여주고 나와도 되지?”

16551146812616.jpg“왜? 바빠?”

16551146812621.jpg“애들 보는 법을 몰라서 부담스럽네.”

16551146812616.jpg“에이. 애들 보는데 법이 어디 있냐.”

16551146812621.jpg“그래도 나는 너처럼 애들이랑 재미있게 놀아줄 수 없으니까.”

16551146812616.jpg“내가 뭘 재미있게 놀아줘. 그냥 옆에서 지켜보는 거지. 애들 눈높이 맞춰서 웃어주고. 몸도 좀 흔들어주고.”

16551146812621.jpg“몸을 흔든다고…….”

16551146812616.jpg“춤추고 노래하라는 게 아니라, 하여튼 애들이랑 있으면 몸을 많이 움직이게 되긴 해. 좋은 경험이 될 거야. 너도 언젠간 아빠가 될 테니까.”

지헌이 이마를 찡긋거리자 승규가 눈치를 보며 물었다.

16551146812616.jpg“왜?”

16551146812621.jpg“아니. 머리가 좀 아파서.”

16551146812616.jpg“…….”

16551146812621.jpg“지금은 괜찮아. 잠깐 그랬어.”

지헌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도로를 막힘없이 달린 차가 아파트 단지에 이르렀다. 이정오가 사는 동네와 멀지 않은 곳. 지헌은 또 한번 정오를 떠올리며 승규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16551146812616.jpg“아빠 왔다!”

승규가 현관문을 열며 외치자 생때같은 아이들이 달려왔다.

16551146841762.jpg“아빠아!”

승규는 딸 도윤을 번쩍 들어 안고 도빈을 쓰다듬었다. 몇 걸음 떨어져 예나의 모습도 보였다. 깜찍한 빨간 옷을 입은 예나는 꼬마 산타처럼 보였다.

16551146812616.jpg“예나도 왔구나.”

1655114684177.jpg“안녕하세요.”

예나가 승규에게 인사했다. 지헌도 예나에게 눈길을 주었다. 못 본 사이에 예쁜 얼굴은 더 예뻐진 것 같았다. 승규가 지헌의 팔을 끌며 아이들에게 말했다.

16551146812616.jpg“아가들, 삼촌한테도 인사해야지.”

16551146841779.jpg“삼촌 안녕하세요오!”

도빈이 악쓰듯 장난스럽게 인사했다. 예나도 눈을 반짝거리며 인사했다.

1655114684177.jpg“안녕하세요.”

16551146812621.jpg“그래. 안녕.”

지헌은 어색한 미소와 함께 예나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진서도 주방에서 나와 지헌을 반겼다. 진서는 오늘따라 유난히 낯빛이 하얬다.

16551146869758.jpg“지헌 씨 또 뵙네요.”

16551146812621.jpg“네. 실례하겠습니다.”

16551146869758.jpg“실례는 저희가 실례죠. 바쁘실 텐데 또 오시라고 해서. 저녁 안 드셨죠? 조금만 기다리세요.”

진서는 급히 얼굴만 비추고는 다시 주방으로 달려갔다. 아이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벅찰 텐데 누군가를 대접해야 한단 의무감에 진서가 바쁘게 움직였을 생각을 하니 지헌은 괜스레 미안했다. 예나가 멍하니 서 있는 지헌의 옷을 잡아당겼다. 지헌이 고개를 내렸다. 예나가 고개를 바짝 들고는 똘망똘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1655114684177.jpg“기다렸어요.”

아이의 기다렸다는 말에 지헌은 놀랐다. 아이들에게 3주는 꽤 오랜 시간인데 그 긴 시간을 꼽아보는 마음은 어떤 걸까. 이 아이와 함께 한 건 고작 3주 전의 몇 분에 불과한데. 나와의 몇 분이 아이에게 정말 그런 가치가 있었던 건가? 어쨌든 기억해주어 고마웠다. 지헌은 예나가 바지를 잡아당기는 대로 끌려갔다. 거실 테이블 위에 이미 바둑판이 준비돼 있었다. 예나는 흑돌의 앞에 앉아서 눈을 깜빡였다. 제 앞에 앉으라는 뜻이었다. 자신을 기다린 용건은 분명했다. 오래전의 바둑 대국을 다시 하자는 거였다. 지헌이 자리에 앉자 아이는 흑돌과 백돌 돌통을 열어 하나씩 바둑판 위에 올렸다. 지헌은 아이가 무엇을 하는지 가만히 지켜보았다. 바둑판 위에 하나씩 펼쳐진 수들을 확인한 지헌의 눈이 커졌다. 바로 3주전의 대국이 그대로 복기되고 있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며 머리가 저렸다.

16551146812621.jpg“그걸 다 기억하고 있었어?”

아이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바둑판 위를 훑는 눈길이 제법 신중했다. 지헌은 아이가 바둑 기사가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1655114684177.jpg“여기부터요. 여기부터 하면 돼요.”

3주 전의 대국을 모두 복기해낸 예나가 지헌에게 말했다. 지헌의 차례였다. 지헌이 돌을 올리니 아이는 그 자리를 예상했다는 듯 빙긋 웃으며 그 옆에 수를 두었다. 몇 수가 오가자 지헌은 꽤 골똘해졌다. 아이는 이 대국을 복기하며 계속 공부를 했던 걸까? 어쩌면 자신이 질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아이는 3주 전에 비해 엄청나게 발전했다.

16551146841779.jpg“예나야, 네가 지는 거야, 이기는 거야?”

1655114684177.jpg“아직 잘 몰라.”

눈동자만 멍하니 굴려가며 지켜보던 도빈의 물음에 예나가 야무지게 대답했다.

16551146841779.jpg“우와! 삼촌 지면 어떡해요?”

도빈이 진지하게 물어왔다. 별것 아닌 질문이었는데 놀리는 것처럼 들렸다. 묘한 오기가 발동했다. 내가 이런 대국에 지려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닌데. 지헌은 인정사정없이 몇 수를 두었다. 지헌이 공격적으로 나오자 예나도 움찔했다. 마지막 두 수는 아이의 머리로 생각지 못한 것이었던 듯했다. 예나가 고개를 깊이 숙여 바둑판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동안 지헌은 가슴속이 간지러웠다. 그때. 털썩.

16551146812616.jpg“도빈이 엄마! 여보!”

주방에서 무언가 넘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승규의 외침이 이어졌다. 지헌도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16551146812616.jpg“여보!”

진서가 쓰러져 있었다. 얼굴이 어쩐지 창백해보인다 싶었는데, 주방일을 하다가 의식을 잃은 것이다.

16551146841779.jpg“엄마!”

도빈도 깜짝 놀라 소리쳤다. 지헌이 엄마에게 달려가려는 도빈을 급히 붙잡았다. 승규가 진서를 눕혀서 맥박과 동공을 확인했다. 입술은 파랗게 질려 있었지만 호흡은 괜찮았다.

16551146812621.jpg“구급차 부를게.”

승규가 진서의 상태를 확인하는 동안 지헌은 119 구급차를 불렀다. 승규의 얼굴도 진서처럼 창백해져가고 있었다. 다행히 구급대원들이 일찍 도착했다. 승규는 의식을 잃은 진서와 함께 떠나며 지헌에게 말했다.

16551146812616.jpg“지헌아, 정말 미안해. 애들 좀 잠깐 부탁한다.”

16551146812621.jpg“걱정 말고 얼른 가.”

지헌은 별일 아니길 빌며 승규를 떠나보냈다. 승규와 진서가 떠나자마자 어린 도윤은 울음을 터뜨렸다.

16551146898926.jpg“엄마아, 엄마아…….”

아직은 엄마 아빠와 떨어지는 게 힘든 나이였다. 구슬프게 엄마를 부르는 목소리에 지헌은 도윤을 안아 들었다.

16551146898926.jpg“엄마아아…….”

아이를 안고서 계속 토닥였지만 울음은 그치지 않았다. 지헌에게도 너무 충격적인 상황이었으나 의연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아이들이 더 무서워할 것이 뻔했다. 도윤이 울음을 그쳐갈 때쯤엔 도빈이 울먹거렸다.

16551146841779.jpg“우리 엄마 어떡해요? 엄마 죽어요?”

16551146812621.jpg“아니야. 아니야. 괜찮아.”

16551146841779.jpg“그럼 왜 그래요?”

16551146812621.jpg“병원 가서 금방 나아서 올 거야.”

16551146841779.jpg“못 오면 어떡해요?”

16551146812621.jpg“올 거야. 걱정하지 마.”

16551146841779.jpg“으어어엉…….”

예나에게 구애의 말을 할 때는 그토록 의젓해 보이던 아이가, 엄마의 실신에 무너졌다. 다행히 안아든 도윤이 울다 지쳐 잠든 무렵이었다. 지헌은 도윤을 내려놓고서 도빈을 안아들었다.

16551146841779.jpg“우리 엄마 죽으면 어떡해요?”

16551146812621.jpg“안 죽어. 걱정하지 마.”

16551146841779.jpg“삼촌이 어떻게 알아요?”

16551146812621.jpg“삼촌은 다 알아.”

간신히 도빈까지 다독여 울음을 그치게 했다.

16551146812621.jpg“이제 뚝. 여자친구 앞에서 울면 어떡해. 그럼 안 되지?”

도빈이 콧구멍 밖으로 삐져나온 콧물을 들이마시며 꾸역꾸역 고개를 끄덕였다. 도빈까지 내려놓고 나니 어깨가 뻐근했다. 어깨를 움직여 근육을 풀어주는 지헌에게 다른 난관이 찾아왔다. 예나가 요정같은 얼굴로 눈을 삼박거리며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나는요? 나는요? 나는 안 안아줘요? 나는요? 나는요? 나는요? 물음표 오라가 아이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

16551146812621.jpg“어…….”

등줄기로 식은땀이 주륵 흘렀다. 다리를 굽혀 아이와 눈높이를 맞춘 지헌이 나긋하게 말했다.

16551146812621.jpg“……미안, 너는 안아줄 수 없는데.”

아이의 커다란 눈이 투명한 막으로 감싸이기 시작했다. 입술도 삐죽삐죽 앞으로 나오고 있었다. 안 돼. 이 아이만은 울릴 수 없는데. 당황한 지헌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16551146812621.jpg“……알았어. 안아줄 테니까 하나만 약속하자.”

안아준다는 말에 삐죽 튀어나왔던 통통한 입술이 금방 쏙 들어갔다.

16551146812621.jpg“나중에 엄마한테 가서 아저씨 나쁜 사람이라고 얘기하면 안 돼. 알았지?”

예나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잘생긴 아저씨가 아주 조심스럽게 팔을 내밀었다. 그의 굳건한 팔에 엉덩이가 걸쳐지자 몸이 위로 번쩍 들렸다. 예나는 중심을 잡기 위한 본능으로 지헌의 목을 끌어안았다. 와아아……. 할머니가 프라이팬에 볶아주는 팝콘처럼 심장이 콩콩콩콩 튀는 듯했다. 누군가에게 안겨서 이렇게 높이 올라가 본 적이 없었다. 엄마와는 다른 높이, 그리고 엄마와는 다른 단단한 포근함이었다. 세상의 모든 무서운 것들을 다 막아내 줄 것 같은 안전한 포근함. 아저씨가 안아줬으니 이제 울면 안 되는데.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우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서가 아닌, 안아주기 위해서 안아주는. 아이를 번쩍 들어올렸을 때 아이가 제 목을 끌어안자 지헌은 왠지 가슴이 울렁거렸다. 어떤 연고도 없는 자신을 마냥 의지해주는 아이. 아이가 주는 생경함은 묘했다. 한 번도 결혼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이런 아이가 아빠라고 불러준다면 결혼도 할 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역시 남의 아이는 조심스러워 움직일 수 없었다. 게다가 왠지 아이의 몸이 뜨거운 것 같기도 했다. 걱정스러워진 지헌의 손은 자연스레 예나의 이마로 향했다.

16551146812621.jpg“어디 아파?”

1655114684177.jpg“아니요.”

16551146812621.jpg“열이 좀 있는데?”

1655114684177.jpg“하나도 안 아픈데요.”

지헌이 자신을 내려놓을까 염려하는 듯 아이는 지헌의 옷자락을 꼭 붙들었다. 이마를 짚어보느라 아이의 앞머리를 들추었다가 손을 내리려던 지헌은 아이의 이마 한가운데에 자리한 붉은 반점을 알아보았다. 아이의 얼굴이 하얀 편이라 반점은 더욱 도드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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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어반.

16551146812621.jpg“너도 이런 게 있네.”

1655114684177.jpg“아저씨도 있어요?”

예나가 지헌의 이마로 손을 뻗으며 물었다.

16551146812621.jpg“지금은 없어졌는데 예전엔 있었어.”

천사의 키스라고도 불리는 연어반. 정말로 천사가 아이에게 키스를 해준 자국인 것만 같아 지헌은 계속 예나를 쳐다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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