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예쁜 애2021.09.29.
국순은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도빈의 집으로 갔다. 집앞에서 초인종을 누르니 낯선 남자가 나와 깍듯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애기아빠가 아니네요?”
“네. 두 사람이 같이 병원에 가서요.”
“아, 그렇지, 그렇지.”
국순이 손뼉을 짝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집 안에서 예나가 달려와 국순에게 안겼다.
“할머니이!”
예나는 지헌에게도 국순을 소개했다.
“아저씨, 우리 할머니예요.”
“안녕하십니까. 도빈이 아빠 친구 정지헌입니다. 잠깐 놀러 왔다가 아이들을 맡아보게 됐습니다. 죄송합니다.”
“아유, 아니에요. 도빈이 엄마는 어떻다던가요? 쓰러졌었다며. 괜찮대요?”
“네. 이제 괜찮아진 것 같습니다.”
“아유, 다행이네, 다행이야. 그런데 친구분은 애들을 많이 좋아하나 봐요. 이렇게 놀러도 오고.”
그런 건 아니고……. 지헌은 흘깃 눈동자를 움직여 예나의 눈치를 보다가 입을 닫았다. 아이의 할머니는 예나와 자신이 오늘 만나기로 약속했단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아이가 하지 않은 얘기를 굳이 할 필요는 없지만, 아이가 꽤 영악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긴. 애들은 다 그렇지 뭐. 나도 그랬으니까. 국순은 엄마 미소를 지으며 지헌을 바라보았다.
아유, 차암 잘생겼다. 나도 이런 사윗감을 얻고 싶었는데. 이제 사위 없이도 행복한 인생이라 아쉬울 건 없지만, 미남에게 자꾸 눈이 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오늘 정말 고마워요. 도빈이 엄마한테도 고맙다고 전해주고, 빨리 회복하시라고도 부탁해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저씨. 안녕히 계세요.”
“그래, 안…….”
“예나 안녕! 또 놀러와!”
지헌이 예나에게 인사하려는데 도빈이 달려오며 소리쳤다. 지헌의 인사는 파묻혀버렸다.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지헌은 국순에게만 따로 인사했다. 집으로 가는 길. 예나는 오늘 있었던 일을 국순에게 모두 얘기했다. 아저씨와 바둑을 두다가 도빈의 엄마가 쓰러져서 깜짝 놀랐지만 아저씨가 안아주어서 기분이 좋았다는 것이 골자였다.
“아저씨는 키가 엄청 커서 엄청 높이 올라가!”
“아저씨랑 노는 게 재밌었구나, 우리 강아지.”
“응. 그리고 바둑도 내가 이겼어! 근데 나는 알아. 아저씨가 져준 거야.”
이야기를 하면서 신이 났다가 처졌다가, 다양한 표정을 보여주는 예나가 귀여워 국순은 흐뭇하게 웃었다. 조금은 애잔한 구석이 있었다. 내 손녀딸도 아빠가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을 했다.
“어? 아저씨!”
집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예나가 언뜻 옆 건물로 눈길을 주었다가 소리쳤다. 국순도 예나가 향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경찰복 차림의 웬 훤칠하고 곱상한 남자가 옆 건물의 출입문 가까이에 서 있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남자의 하얀 얼굴은 더욱 희게 보였다. 또 다른 아저씨였다. 예나를 알아본 남자가 가까이 다가왔다.
“예나야, 누구…….”
“경찰 아저씨야. 나 길 잃어버렸을 때 바둑학원에 데려다준 경찰 아저씨.”
국순이 어리둥절해하는 사이에 예나가 야무지게 배일을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화양경찰서에 근무하는 권배일이라고 합니다.”
배일도 허리를 굽혀 깍듯하게 인사했다. 그제야 국순도 반갑게 웃어 보였다.
“아유. 그래요. 경찰 선생님!”
“예나 할머님이시죠. 예나 어머니께 말씀 들었습니다.”
“우리 딸도 알아요?”
“네. 근처에서 몇 번 뵌 적 있습니다. 여기가 저희 집이라서요.”
“아유. 그렇구나. 경찰 선생님이 가까이 사니까 아주 든든하네! 정말 반가워요.”
아유, 차암 잘생겼다. 훤칠한 인물을 하루에 둘이나 만난 국순의 표정이 환하게 펴졌다. 배일은 국순이 정오와 비슷한 반응을 보인단 생각에 몰래 웃었다. * 내일이면 출근을 해야 한단 사실이 은비를 옥죄었다. 하루는 병가를 냈으나 더 연장할 수는 없었다. 은비는 이정오가 너무 증오스러웠다.
‘이정오만 오빠한테서 떨어뜨려 놓으면 될 것 같은데.’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은비는 정오의 약점을 파헤쳐보기로 했다.
‘이정오의 예전 회사 동료들한테 캐물으면 뭔가 나오지 않을까?’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은 없으니 단 하나는 약점이 나올 것이다. 광고회사니 사고를 쳤을 수도 있고 돈 문제가 있을 수도 있고 남자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다만 정오의 이전 회사에는 은비가 아는 사람이 없었다. 골몰하던 은비는 언젠가 헤드헌터에게 명함을 받은 일을 떠올렸다.
[네. 이동은입니다.]
“헤드헌터님이시죠? 안녕하세요! 맥스기획 카피라이터 채은비라고 합니다. 저 기억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역시 헤드헌터는 반갑게 인사했다. 한시도 지체할 수 없었던 은비는 곧장 용건을 말했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투에이치 커뮤니케이션즈에 관심이 있어서요. 혹시 그 회사 직원분을 만날 수 있을까요?”
마치 이직에 관심 있는 것처럼 몇 마디 더 던지니 헤드헌터는 바로 정보를 풀어주었다.
[오래전부터 친하게 지내는 AE님이 거기 계세요. 한번 다 같이 만날까요?]
“네! 되도록 빨리요!”
* 정오는 오늘의 회의 결과를 정리했다. 경쟁 PT 기획 방향 변경에 따른 추가 야근. 어쨌든 차근차근 수정작업이 이루어졌다. 마지막 마무리는 정오와 미란이 하기로 하고 다른 이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팀장님, 팀장님도 못 쉬셨죠? 제가 다 하고 메일로 보내드릴 테니 먼저 들어가세요.”
“아니야. 그래도 보고 가야지.”
“내일 또 밤새울 일 있으시다면서요. 들어가세요.”
미란이 너무 피곤해 보여서, 정오는 미란까지 먼저 보내고 마무리를 도맡게 되었다. 주말 근무에 이어진 야근이라 몸이 고되었지만 그래도 할 만했다. 아무래도 채은비가 없으니 의견을 내기가 비교적 수월해서 그런 것 같았다.
“으아어아. 다 했드아아아.”
자정이 다 되어갈 즈음, 정오는 느른하게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고생했네요.”
“으어어어엄마얏!”
그리고 가까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뒤로 넘어갈 뻔했다. 의자에 앉은 채로. 지헌이 흔들리는 의자를 붙잡았다. 이번엔 정말로 그녀를 붙들어준 것뿐이었는데 자라 보고 놀란 가슴은 진정하질 못했다. 그의 손이 다가오자 정오는 또 그가 기분대로 덮치려는 줄 알고 호들갑스럽게 손을 휘저었다.
“아아니, 이사님이 왜 여기 계세요?”
제대로 중심을 잡고 일어난 정오가 물었다. 심장은 여전히 중심을 잡지 못한 것처럼 흔들렸다.
“여태 일하나 해서 와봤죠.”
“지금 이 시간에요? 아니, 오늘 일 있으시다면서요.”
“끝내고 돌아온 겁니다. 누구 때문에.”
“누구 때문에요?”
그의 미소가 왠지 의미심장했다. 낮에 집무실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가 유혹하듯이 몇 번이고 사과의 말을 했었다. 부드럽게 힘을 쓰는 방식은 7년 전과 비슷했다. 그런 행동에 자꾸 묘한 기대를 하게 되는 자신이 미련스러워질 만큼. 승규와 진서가 병원에서 돌아온 후, 지헌은 바로 다시 회사를 찾았다. 이정오가 보고 싶었다. 오늘 만난 아이가 이 여자를 닮아서. 이 여자의 어렸을 적 모습도 왠지 그랬을 것 같아서. 그래서 아이에게도 너그러워졌다. 아빠가 없다는 그 아이가 묘하게도 이정오와 겹쳐 보였다. 은비에게서 이정오의 고등학생 시절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잠깐 느꼈던 그 감정이 다시 떠오르며 심장을 뜨끈하게 만들기도 했다. 애틋함.
“예쁜 애를 보니까.”
또 예쁜 애가 생각나서.
“네?”
정오가 잘 못 들었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다시 말해줄 기회는 없었다. 마찬가지로 기획안 수정작업에 매진하고 있던 기획팀 팀장이 지헌을 발견하고 부리나케 달려왔다.
“이사님, 오늘 일 있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남아 계셨습니까.”
“일 끝내고 왔습니다. 말씀하실 게 있나요?”
“지금 봐주셨으면 하는 문제가 하나 있어서요.”
지헌은 정오와 기획팀 팀장을 번갈아 보다가 팀장과 함께 떠났다. 떠나는 발걸음에 어쩐지 미련이 들러붙어 있는 것 같아 정오는 기분이 이상했다. 왠지 설탕 한 스푼이 들어간 것 같은 오늘의 눈빛이 정오의 마음을 오래 괴롭힐 것 같았다. * 자정에 퇴근한 정오는 아침에야 진서가 쓰러졌었단 소식을 들었다.
“마침 애기 아빠 친구가 놀러 와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애들 주르르 데리고 병원에 가기도 힘들고.”
국순은 정오에게 어제의 이야기를 하며 진서가 안됐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이따가 도빈이네 연락해봐야겠네. 몸은 좀 어떤지.”
정오도 진서가 걱정스러웠다.
“그나저나 예나가 도빈이 아빠 친구를 엄청 좋아하더라. 아저씨, 아저씨 하면서 엄청 얘기하더라고.”
“예나가 좋아해?”
“그도 그럴 게 인물이 엄청 좋더라고. 그런 걸 보면 손녀딸이 날 닮았지.”
“어휴. 하여튼 우리 엄마, 속물.”
“넌 남자 인물 안 보는 것처럼 말한다?”
“난 외모 안 봐. 저언혀.”
“그짓말 하지 마, 이것아. 네 딸이 저렇게 이쁜데.”
“엄마. 내 딸의 미모는 내가 만들어준 거지.”
아침의 농담 소리에 예나가 부스스 일어났다. 예나는 일어나자마자 정오를 찾으며 칭얼댔다.
“엄마아, 어제 왜 늦게 왔어어…….”
“어어어어. 우리 애기, 일어났어?”
정오는 국순과의 대화를 중단하고 예나에게 달려갔다. * 부지런히 채비를 하고 일찍 출근한 정오는 바로 회의 준비를 시작했다. 정오는 같은 팀 고은주 대리, 그리고 기획팀 AE와 회의실에서 업데이트된 정보들을 정리했다. 기획팀에서 준비한 자료가 제작 시안과 상충하는 경우 다시 손을 봐야 했다. 은비도 드디어 출근했다. 토요일부터 월요일까지 코빼기도 비추지 않기에 지헌에게서 입은 마음의 상처가 크리라 짐작했는데, 역시나 그사이에 살이 조금 빠진 것 같기도 했다. 은비가 회의실에 들어오니 기획팀 AE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채 과장님, 괜찮으세요? 아프시다고 들었는데.”
“아니에요. PT가 너무 걱정되기도 하고요. 어휴, 이놈의 책임감.”
그 모습이 아니꼬운 고은주 대리는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정오는 그런 은주가 우스워 조용히 웃었다. 이를 알아본 은비가 정오를 슬쩍 쏘아보다가 AE에게 조심스럽게 다시 말을 붙였다.
“그런데, 저도 의견 좀 내도 될까요?”
“그럼요, 그럼요.”
이미 다 된 기획서에 얼마나 코를 빠뜨리려고 그러나 싶어 정오는 한숨을 먼저 쉬었다.
“일단, ‘보고싶다’라는 메인 카피는 너무 뻔하지 않나 생각하는데 기획팀 의견은 어떤가요?”
은비의 의견은 역시나 카피에 대한 반발이었다. 그래도, 제작 방향을 확정 짓는 날에 제작팀 팀장도 아니고 기획팀 AE에게 제작물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다니. 기획팀의 입김을 빌려 카피에 간섭하겠단 건가. 그건 도리가 아니지 않니. 채은비야. 그리고 그 카피 내가 쓴 거 아니야. 고은주 대리의 제안이었다고. 잘못 짚었어. 정오는 씁쓸했지만 고은주 대리도 아무 말 하지 않기에 그냥 잠자코 있었다. 어차피 은비의 의견이 받아들여질 리는 없었다.
“이런 배움 없고 고민 없는 카피는 좀 그렇지 않나 했어요. 제가 컨디션만 좋았어도 더 좋은 아이디어를 냈을 텐데, 그 점은 저도 죄송하고요. 그리고 주인공을 엄마와 딸로 잡은 것도 좀 아쉬웠어요. 어차피 1차 타깃은 2030이니 엄마와 딸보다는 장거리 연애 중인 커플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해요.”
이번엔 정오가 곧장 반박에 나섰다.
“장거리 커플에 대해서도 당연히 고민했죠. 하지만 장거리 커플에 대한 배경을 설명하기에 광고 15초가 짧다는 생각을 했어요. 엄마와 딸로 하면 소비자에게 곧장 와닿을 수 있죠. 짧은 시간에 수용하기에는 커플의 장거리 연애보다는 엄마의 사랑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판단이에요.”
은비가 떫게 대꾸했다.
“글쎄요. 저는 이 광고를 상상해봐도 별로 와닿지 않는데요?”
“상상력이 없으신가…….”
듣다 못 한 은주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댔다. 지금까지 열심히 회의한 결과를 그간 참석하지도 않았던 채은비가 뒤집어버리려 하자 은주 역시 짜증이 난 것이다. 혼잣말이었지만 주변이 조용했기에 은비는 고은주 대리의 목소리를 듣고 말았다. 이에 가만히 있을 채은비가 아니었다.
“고은주 대리. 고 대리는 조시내 대리 대타로 참여하게 됐으니 조시내 대리가 하던 일을 맡아야 하지 않을까요? 이번 주 트렌드 이슈는 정리했나요?”
은주는 대답 대신 팔짱을 꼈다.
“과장님, 과장님 오늘 회의 들어오실 거예요?”
“네. 그럼요. 왜 그런 걸 물어요?”
“아뇨. 혹시나 과장님 마음 불편하실까 봐 걱정돼서요.”
걱정이라곤 눈곱만큼도 하지 않는 얼굴로 그런 말을 하니 은비는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정지헌 이사님이랑 헤어졌다면서요. 조시내 대리한테 인수인계받으면서 그 소식도 들었거든요.”
피도 눈물도 없는 은주는 자신이 갖고 있던 정보를 주저없이 꺼내놓았다. 존엄하신 공주마마께서 자존심에 상처를 입으면 불로 변한다는 사실을 아직 채은비는 잘 모르는 것이었다.
“마음 참 아프시겠어요. 그토록 고대하던 결혼도 못 하게 돼서.”
새로운 정보를 접한 기획팀 AE의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채은비의 얼굴이 빨갛다 못해 검붉게 변했다. 정오는 조시내 대리가 누구한테 그 사실을 들었을까 생각했다.
‘혹시 정지헌?’
지난주 금요일이었나? 조시내 대리가 지헌의 집무실 쪽으로 걸어가는 걸 본 적 있었다. 정오가 지헌에게 결혼 얘기를 하며 따졌던 다음 날이었다.
‘허.’
조금 소름이 돋았다. 채은비에게 일주일의 말미를 주었지만, 그는 애초부터 조용히 기다려줄 생각이 없었던 거였다.
‘조금 무서운 사람이네.’
은비의 처지가 안타깝긴 하지만 자신은 끼어들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게. 채은비야. 나나 건드리지 왜 고은주 대리를 건드려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