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내 남자2021.10.02.
“조시내 대리가 그러던가요? 나랑 이사님이 헤어졌다고? 그래서 지금, 사건 일으키고 팀에서 쫓겨난 사람 말을 믿는 거예요?”
고은주 대리의 공격에 얼굴이 터질 듯이 붉어진 은비가 먼저 회의실을 떠났다. 조시내 대리에게 가서 따질 것이 분명했다. 은주의 압승이 분명한데, 은주의 표정은 회의실을 나와서도 거의 변함이 없었다.
“감히 날 건드려?”
은주가 아주 고요하게 내뱉은 혼잣말에 정오는 묵묵히 눈치만 보았다.
“어깨 심심하지 말라고 머리를 얹어놨나.”
윽. 정말 신박하고 끔찍해……. 정오는 어깨에 머리를 얹는 상상을 하며 조심스럽게 제 머리를 붙잡았다. 내색하면 안 된단 생각에 웃음도 당황스러움도 아닌 헛숨을 뱉어내려다 쑥 들이마셨다. 순간 고은주 대리와 눈이 마주쳤다. 은주가 빤히 쳐다보며 따지듯이 물었다.
“왜요?”
“아니.”
“…….”
“고 대리, 욕은 안 하잖아요. 욕하는 것들은 다 천박하다며.”
“아주 가끔은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야 할 필요가 있잖아요?”
은주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꾸했다.
“이 대리님도 욕 한번 하시는 게 어때요? 사람을 웃으면서 멕이던데. 참 해맑은 지랄이던데요.”
풉.
“이 대리님, 웃지 마시고요. 이럴 때 욕 안 하면 속에 피멍 들어요.”
속에 피멍은커녕, 고은주 대리 덕분에 더욱 유쾌해졌다. 이제 곧 두 사람이 헤어졌단 소식이 퍼질 것이다. 그간 해온 말들이 있으니 채은비는 더욱 눈총을 많이 받겠지. 은비는 곧장 조시내 대리를 찾아갔다. 회의실을 나올 때는 화가 나서 씩씩댔지만 계단을 오르며 다시 생각하게 됐다. 지금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가를. 은비는 우수에 젖은 촉촉한 눈으로 도서 열람실의 문을 열었다. 사서 자리에 앉아 하염없이 휴대폰만 만지작거리는 조시내 대리가 보였다.
“조시내 대리.”
“어, 네. 과장님. 무슨 일이세요?”
시내는 경계의 눈빛으로 은비를 바라보았다. 지난주 금요일, 시내는 지헌에게 불려갔다. 그리고 그간 은비가 자신에게 해왔던 결혼 이야기들이 전부 허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지헌이 똑똑하게 밝힌 건 아니었지만 시내는 눈치챌 수 있었다. 아니, 지헌이 일부러 은비의 거짓말을 눈치채주길 바라며 우회적으로 말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지헌의 집무실을 나온 후부터 시내는 입이 근질거렸다. 자신이 알게 된 사실을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어 죽을 것 같았지만 아무도 자신을 상대해주지 않았다. 혼자가 된 시내를 찾아온 유일한 사람이 고은주 대리였다. 시내는 자신에게 인수인계를 받겠다고 찾아온 은주를 붙들고 이것저것 얘기했다. 자신이 들은 이야기에 더 재미나게 살을 붙여서. 언젠가 채은비가 자신에게 달려올 거란 사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시내는 기죽지 않았다. 채은비가 정지헌의 예비 신부가 아니라면 시내에게도 채은비는 쓸모없는 존재였다. 그래서 눈앞의 티끌을 바라보듯 무감하게 대했건만, 은비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시내의 안부를 물었다.
“잘 지냈어? 너무 그립다, 정말. 조 대리가 내 단짝이었는데. 팔 하나가 떨어져 나간 기분이야.”
시내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를 빠르게 감지한 은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지헌 오빠한테 무슨 얘기 들었어?”
“…….”
“그거 진짜 아니야. 지금 복잡한 문제가 생겨서 그래.”
은비는 진지한 눈빛으로 시내를 대했다. 시내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은 어느 정도 꿰뚫고 있었다.
“그 원흉은 따로 있어. 언젠가 우리 화장실에서 얘기한 적 있잖아. 그거 기억 안 나?”
“…….”
“나랑 조 대리의 감이 정확하게 맞았던 거지. 내 기분 알겠어?”
“……그럼 이정오 대리가 정 이사님을 빼앗았단 거예요?”
역시나 시내는 금세 반응을 보였다.
“……내가 언젠가 다 얘기할게. 아무튼 조 대리가 알고 있는 건 사실 아니야. 나도 정말 억울하고 기가 막히지만 이겨낼 거야.”
“…….”
“조 대리 지금 여기 있는 것도 다 이정오 때문이잖아. 우리 다 이겨내자. 힘내서 다 원상 복귀 시키자.”
나도 너와 같은 피해자다, 라고 말해주기. 두 사람의 처지는 공감대를 형성하기에 딱 좋았다. 은비는 절대 무너져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 오전 10시 5분 전. 회의 준비를 마치고, 정오는 지헌을 부르러 갔다. 지헌은 이미 복도에 나와 있었다. 정오를 발견한 지헌이 입술 끝을 슬쩍 늘였다. 정오는 내색하지 않고 그 옆으로 가 물었다.
“회의 가시는 거죠? 이사님.”
“그래야죠.”
나란히 서서 함께 몇 걸음 옮기는 동안 계속 입이 근질거렸다. 정오는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물었다.
“혹시 조시내 대리한테 말씀하셨어요? 은비가 거짓말한 거라고?”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오는 침묵의 긍정을 읽어냈다. 와아……. 참 대단하다, 대단해. 이 사람은 진실을, 채은비는 거짓을 위해서 계책을 꾸민다는 점이 다르겠지만, 왠지 사람 잘 이용해먹는 성향은 두 사람이 비슷한 것 같았다. 7년 전의 나는 이 남자의 진면모를 알지 못했던 거구나. 왠지 약이 올랐다. 그의 걸음 옆에 따라붙어 톡 쏘아붙였다.
“근데 그렇게 여유만만하셔도 되는 걸까요? 저는 이사님도 엄청 잘못했다고 생각하는데요.”
“무슨 잘못이죠?”
“가짜 연애라는 것부터가 잘못 아니에요?”
“그건 질투심인가?”
“아니거든요! 친구로서 조언하는 겁니다!”
어후, 말이 안 통한다. 정오는 지헌을 버려두고 먼저 회의실로 들어가 버렸다. 곧 1차 기획‧제작회의가 시작됐다. 기획안은 기획팀의 팀장이, 제작안은 성미란 팀장이 프레젠테이션했다. 반응은 좋았다. 기획팀에서도 다들 제작안에 대해 흡족해했다. 지헌 역시 제작안에 대해서는 큰 지적이 없이 보완해야 할 사항만 덧붙였다.
“인하우스 에이전시의 장점은 다른 계열사들로부터 협조를 받을 수 있다는 거죠. 계열사 혜택을 활용한 아이디어가 몇 개 포함됐으면 좋겠네요. 시간이 없으니까 내일까지 준비해주면 제가 검토해서 계열사에 협조 요청을 넣어보겠습니다.”
일하는 덴 별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그래도 쫌 하긴 하네. 정오는 구석에서 피식 웃었다. 그 순간 지헌과 멀리서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제작 프레젠테이션은 어느 분이 할 예정입니까?”
“일단은 제가 하려고 하는데, 타깃이 2030이라 고민하고는 있습니다.”
성미란 팀장이 대답했다.
“채은비 과장이 하는 건 어떨까요. 채은비 과장이 표정이 좋은데.”
기획팀 팀장이 은비를 추천했다. 은비가 표정 좋게 미소 지었다. 지헌은 은비 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고 미란에게 물었다.
“이정오 대리가 PT 준비를 열심히 했죠?”
“네. 이정오 대리는 항상 열심히 하죠.”
미란이 정오를 칭찬하자 지헌도 정오를 곁눈질로 슬쩍 바라보고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순발력도 좋은 편이고.”
정오는 지헌의 칭찬이 왠지 곱게 들리지 않았다. 빈정거리는 것 같았다. 그녀가 정지헌의 앞에서 보여준 순발력은, 정지헌을 까댄 것밖에 없었기에. 그런데도, 모두의 앞에서 그가 자신을 칭찬하니 가슴이 조금 두근거렸다.
“이정오 대리가 하는 걸로 하죠.”
잠시 후, 지헌이 결정을 내렸다. 정오는 조금 놀랐지만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지헌의 결정에 만족했지만, 충격을 받은 은비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회의가 끝난 후, 경쟁 PT 참여자들은 모두 다 함께 점심을 먹었다. 정오는 기획팀 AE, 그리고 성미란 팀장과 더 얘기를 나누었다. 정오는 소리텔레콤 관계자들을 만난 적이 없기에 그 분위기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소리텔레콤 임원진들의 성향과 PT 장소에서의 주의점에 대해 숙지해야 했다. 정지헌 이사가 사준 전복돌솥밥이 귀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만큼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근데 오늘따라 이 대리 많이 못 먹네. 긴장돼서 그래?”
“하하. 아뇨. 팀장님 말씀을 열심히 듣느라.”
“풉. 이 대리는 이래서 내가 안심한다니까. 어디 내다놔도 주눅 들지를 않아, 사람이.”
성미란 팀장이 다시 한번 칭찬했다. 하지만 미란은 바쁜 몸이라 내내 옆에 있어줄 수는 없었다.
“그럼 나는 이만 자리 피해줄 테니까 천천히 맛있게 먹고 와.”
미란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고, 다른 팀원들도 하나둘 식당을 나섰다. 마지막으로 기훈이 정오를 기다렸으나 결국 기훈도 광고주의 부름을 받고 회사로 달려가는 처지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정오가 식당 문을 나서는 순간, 그 옆에 누군가가 바짝 붙었다. 채은비였다.
“지헌 오빠가 왜 너한테 관심을 보이는지 알아?”
“…….”
“너라서 그래. 이정오. 너라서.”
배불리 먹은 점심이 얹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정오는 금방 체념했다. 그래. 채은비야. 몰릴 대로 몰린 네가 어딘가에 한풀이를 하고 싶은 거라면 기꺼이 상대해줄게. 내게 그 한마디를 하고 싶어 식당 앞에서 날 기다린 네 맘은 어떤 거겠니. 정오는 한 자리에 그대로 서서 은비의 말을 들어주었다.
“오빠는 태생이 재벌이라 타고난 동정심 같은 게 있어. 꾀죄죄한 어린애들 그냥 못 지나치고, 누군가 굶고 있다고 하면 서슴없이 돈도 퍼주고.”
“…….”
“내가 너였다면, 편모가정 출신에 가진 거 없이 동정심을 일으키는 너였다면 오빠는 기꺼이 그 껍데기에 관심을 보일 거라는 거지.”
정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으니 은비는 신이 난 듯 더욱 거세게 나아갔다.
“혹시 너, 더 불쌍해 보이려고 노력했니? 그게 너의 유일한 경쟁력이니까?”
“…….”
“그래도 말이야. 아무리 못 배웠어도 넘볼 게 따로 있지, 어떻게 친구 남자를 넘봐.”
“친구 남자?”
정오가 눈썹을 휘며 짧게 물었다. 은비가 내뱉은 말을 정정했다.
“아. 우리 사이에 친구는 좀 그렇지. 아무튼 남의 남자, 남의 거 건드리는 버릇 안 좋아, 정오야.”
정오는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려 조용히 웃었다.
“그래. 조언 고마워. 네 얘기 듣고 보니 그러네. 내가 이정오라서 그렇겠네. 그런데 어쩌니?”
이제 반격의 시간. 정오는 그저 당하고만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이 상황이 너에게만 유리한 게 아니야. 나도 내 마음대로 실컷 말할 수 있지. 채은비야.
“그런 관심조차 받지 못한 너는 참 애가 닳겠다. 너는 영원히 이정오가 될 수 없으니 말이야.”
정오의 일격에 은비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남의 남자? 남의 거?”
“…….”
“어떻게 그 사람이 네 거라는 거지? 한 번도 네 거였던 적은 없을 텐데?”
이제 정오의 확신에 찬 물음에 은비의 두 눈에는 분노의 눈물막이 보였다. 정오는 한 가지를 깨달았다.
‘두 사람은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었구나!’
깨닫고 나니 은비의 행동이 더욱 이해되지 않았다.
“너야말로 희망 없는 사람한테 목매는 거 병이야, 은비야. 넌 영원히 정지헌 씨 못 가져.”
“…….”
“내 남자거든.”
뭐, 내 아이의 아빠라는 소리야. 정지헌 씨, 미안합니다. 나도 당신을 물건 다루듯 말하고 싶지 않은데요. 얘 말하는 게 싸가지 없잖아요. 그러니 잠깐 실례 좀. 정오는 마음속으로 지헌에게 깍듯하게 양해를 구하고서 은비를 향해 싱긋 웃었다. 너무 악질이었나 생각했다. 하지만 지난주 수요일, 지헌의 집무실에서 당했던 기억을 떠올리니 이 정도는 별것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정오의 언사에 은비의 얼굴이 파르르 경련했다. 체면 때문에 먼저 머리채를 잡을 수가 없어 분해 어쩔 줄 모르는 듯했다. 저러다 손톱이 부러지겠다 싶을 만큼 주먹을 꽉 쥐고서 정오를 바라보던 은비는 회사 쪽으로 성큼성큼 발을 옮겼다. 하나도 안 미안하네요. 정오는 그 모습을 오래 바라보다가 작게 혼잣말했다.
“흥. 쥐방울만 한 게.”
“풉. 그러게.”
어……? 정오는 뒤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라 홱 뒤를 돌아보았다. 온몸의 피가 싹 빠져나가는 소름 끼치는 기분이었다. 아니, 네가 왜 거기서 나와……. 건물의 바로 옆, 있는지도 몰랐던 필로티주차장의 기둥 뒤에서 사람이 나왔다. 기둥 뒤에 공간이 있는 걸 몰랐다. 정오는 어디 걸린 것도 없이 나자빠질 뻔했다. 그녀의 약점을 잡았다고 생각하는 걸까. 지헌은 웃음을 참기가 괴롭다는 표정으로 아주 만족스럽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오는 생각했다. 나는 아마 향후 20년 동안은 오늘을 떠올리며 이불킥을 할 거라고. 아니, 향후 20년이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내가 정확히 무슨 말을 했더라?
“내 남자거든.”
은비에게 으름장을 놓듯이 내뱉은 미친 말이 정오의 머리에 다시 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