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네 남자2021.10.06.
불과 5분 전의 모든 대화가 인생의 파노라마처럼 정오의 머릿속을 훅훅 지나갔다. 그가 기둥 뒤에 서 있는 줄도 모르고 나는……. 미친 듯이 치명적인 척했던 자신의 행동이 이렇게나 미친 듯이 후회될 줄은 몰랐다. 게다가. 내 남자거든, 내 남자거든, 내 남자거든……. 흐아. 신이시여! 채은비의 허언을 그렇게나 흉봤으면서, 채은비와 똑같은 허언을 해버렸다. 이정오. 이 바보야. 이 남자가 네 거였던 적이 있었니? 7년 전 네가 사랑에 빠졌을 때도 이 남자는 네 남자가 아니었어. 이 남자는 그 말이 얼마나 어처구니없을까…….
“아주 말을 잘하던데.”
바짝 붙어선 지헌이 싸한 목소리로 놀렸다. 정오는 알뜰하게 먹은 전복돌솥밥을 토해버릴 것 같아서 제 입을 막았다. 신이시여. 제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간절한 가운데 정오는 제 안에 존재하는 신의 목소리를 들었다.
‘도망쳐!’
신은 이럴 때 유용하게 사용하라고 정오에게 튼튼한 다리를 주셨다. 정오는 지헌을 버려두고 회사가 보이는 쪽으로 내달렸다. 눈물이 핑 돌았다. 그에게 더 다가가야 하는데, 간신히 친구가 되었는데. 왜 이런 불상사가 생기는 걸까. 내가 허언이라니. 급하게 사무실로 뛰어간 정오는 미란의 팔을 붙잡고서 애원하듯 물었다.
“팀장님, 저 외근할 거 없을까요?”
“어, 글쎄? 왜? 밖에 나가고 싶어?”
“네! 나가게 해주세요, 제발!”
“어, 그래그래. AE가 소리텔레콤 미팅 간다는데 따라가 봐.”
“네! 감사합니다!”
정오는 부랴부랴 가방을 챙겨 사무실을 떠났다. 지헌을 피해 계단으로 내려간 정오는 1층 로비의 화장실에 숨어 있다가 AE의 호출을 받고서야 밖으로 나왔다.
* 이정오가 도망갔다. 날다람쥐처럼. 지헌은 서둘러 쫓아갔으나 도중에 전화가 걸려오는 바람에 발을 멈추었다. 통화를 마치고 급히 사무실로 가 이정오를 찾았지만 그녀는 이미 도망간 상태. 당장 돌아오라고도 하고 싶었지만 지헌은 꾹 참았다. 당장의 외근이 그녀에게도 도움되는 것이라 섣불리 제동을 걸 수는 없었다. 어차피 그녀는 돌아오게 돼 있다. 그는 그녀의 상사였고 언젠가 만날 수밖에 없는 운명인지라, 지헌은 잠시의 기다림을 즐겨보기로 했다. 점심시간이 끝날 즈음 누군가가 집무실 문을 노크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채은엽이었다.
“바빠? 옆 건물 회사에 왔다가 잠깐 들렀어.”
“그래. 잘 왔어. 앉아.”
지헌은 반갑게 친구를 맞았다. 채은비의 오빠 채은엽. 7년 전 지헌에게 사고가 났을 때 은비와 마찬가지로 은엽 또한 지헌의 회복에 힘써주었다. 그래서 지헌은 여전히 은엽에게 깍듯한 편이다. 은엽은 지헌을 대할 때 절친이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사용하지만, 지헌은 은엽이 승규처럼 편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자신의 건강에 관심을 가져주는, 적당히 좋은 친구.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친하게 지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친구였다. 채은비와 얽힌 일로 오빠 은엽에게도 의도치 않게 걱정을 끼친 셈이 되었으니 심각한 표정을 지어야 하는데, 자꾸 이정오 생각이 나서 웃음을 짓게 됐다.
“왜 자꾸 웃어?”
지헌이 웃음을 거듭 참는 꼴을 보고서 은엽이 물었다.
“그냥. 재밌는 일이 있어서.”
“무슨 일?”
“그냥 개인적인 일이야.”
은엽은 형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실은 조금 불쾌했다. 꽤 오랜 친구였고 많은 것들이 얽혀 있는데 여전히 지헌은 자신에게 그 옆자리를 내어주는 것을 꺼리는 것 같았다. 왠지 불안했다. 오래 바라왔던 것이 무언가 어그러지고 있는 느낌이랄까. 그 와중에 지헌이 물었다. 날씨를 묻는 것처럼 여상한 목소리였다.
“참, 은비한테 그 얘기 들었어?”
“무슨 얘기?”
“가짜 연애는 그만두기로 한 거.”
“…….”
“너는 알고 있었어? 은비가 나랑 결혼할 거라고 말하고 다녔단 거.”
찡긋, 은엽의 눈 아래 경련이 일었다. 지헌은 은근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 눈빛은 소름 끼칠 만큼 날카로웠다. 진실을 추궁하는 눈이었다.
“그냥 결혼하는 게 어때?”
은엽이 긴장한 마음을 애써 숨기고서 지헌에게 권했다.
“어쨌든 가까운 여자도 없지 않아? 내 동생이라 그런 게 아니라 은비가 정말 착하고 이해심도…….”
“진짜 짝을 만나야지, 은비도.”
은엽의 말허리를 싹둑 잘라내며, 지헌이 말했다. 은비를 생각하는 척하지만 전적으로 선을 긋는 태도였다. * 아주 유익한 외근을 하고 회사로 복귀한 정오는 가방을 자리에 올려놓자마자 기훈으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들었다.
“이 대리님, 정 이사님이 오라네요.”
“미친!”
정오는 자신도 모르게 버럭 소리치고 말았다. 팀원들은 정오의 심각한 속도 모르고 픽픽 웃었다. 퇴사하리라. 이직하리라. 모든 것을 끝내리라. 정오는 인터넷 검색으로 사직서 양식을 찾아 프린트했다. 프린트한 종이에 무어라 휘갈기는 정오를 보고 박영광 차장이 물었다.
“뭐해?”
“사직서를 가슴에 품고 가야 든든할 것 같아서요.”
고은주 대리도 정오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또 뭘 잘못하신 거예요, 대리님?”
사직서를 두 번 접어 주머니에 넣은 정오가 은주를 보며 씨익 웃었다.
“고은주 대리님, 내가 진짜 좋아하는 거 알죠.”
“……갑시다.”
정오의 절절한 눈빛이 통한 건지, 웬일로 은주가 단번에 동행을 승낙했다. 기훈도 의자를 밀며 다가왔다.
“저도 같이 갈까요?”
“오. 그럼 고맙지.”
“근데 용건도 없이 다 같이 움직이면 이사님이 괘씸하게 보지 않을까요? 안 좋아할 거 같은데?”
“괜찮아. 나도 그가 좋지 않아. 그리고 마침 보고해야 할 것도 있어. 괜찮아.”
기훈의 물음에 은주가 시니컬하게 답했다. 삼총사는 또다시 함께 지헌의 집무실로 가게 되었다. 좌 은주, 우 기훈을 장착한 정오는 용맹하게 지헌의 앞에 섰다. 지헌의 어처구니없는 표정에도 정오는 씩씩하게 맞섰다.
“이사님, 부르셔서 왔습니다.”
“옆에 있는 두 사람까지 부른 건 아닌데.”
“네. 고은주 대리도 보고 드릴 게 있다고 해서 함께 왔습니다. 송기훈 씨도 같이 말씀 들을 거고요.”
정오의 뻔뻔한 대답에 싸늘한 표정을 지은 지헌이 은주에게 물었다.
“보고할 건 뭐죠?”
“다원주류 신상품 패키지 시안입니다.”
고은주 대리가 대답하며 등뒤로 들고 있던 문서를 내밀었다. 지헌이 문서를 대강 넘겨보고는 건조하게 말했다.
“이렇게 하면 되겠네요. 그럼 끝?”
“네.”
아, 아니, 고은주 대리……. 은주의 뒤끝없는 대답에 정오는 이마가 서늘해졌다. 공기는 뜨거웠다. 누군가의 강렬한 눈빛이 느껴졌다. 왠지 자신을 계속 노려보는 것만 같은 지헌의 눈빛에 정오는 마른침을 삼켰다. 뒤통수를 때려볼까. 그럼 오늘의 기억도 사라지지 않을까?
“내 남자거든.”
그 다섯 음절만 그의 기억에서 지워버려도 어떻게 버텨볼 만하겠는데. 그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힘써야 하는 처지에, 그의 또 다른 기억은 지우고자 한다니 실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이사님, 저한테 하실 말씀은 무엇인지…….”
정오는 말꼬리를 길게 늘이며 물었다.
“소리텔레콤에 다녀왔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제작 방향과 일치하던가요?”
그가 심상하게 물었다.
“네. 소리텔레콤 대표님이 스토리텔링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계획대로 잘 준비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톡, 톡. 그가 짧은 대답과 함께 테이블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온몸의 털들이 바짝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코끝에 열기가 몰렸다. 그의 손끝. 목소리. 눈빛. 그 어느 것도 직접적인 위협이 아니었는데 정오는 온몸이 마비된 것처럼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이 사람, 화났구나. 채은비의 거짓말 때문에 고생한 남자를 내가 또 허언의 세계로 끌어들였구나.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정오는 저항을 해볼 의욕을 잃었다.
“그럼 다음에 또 부르죠.”
그가 점잖게 말하며 고은주 대리에게서 받았던 문서를 돌려주었다. 정오는 삼총사와 함께,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무겁게 옮겼다. 그리고, 그 마지막 한 걸음에서. 달칵. 등 뒤에서 문이 닫힌 순간 기훈이 뒤돌았다. 집무실 밖으로 나온 사람은 기훈과 은주뿐이었다.
“어? 이 대리님 안 나왔는데요.”
“급하게 할 얘기가 있나 보지 뭐.”
“우리가 지켜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할 만큼 했어. 가자.”
은주는 복도를 향해 앞서 걸었다. 문이 안쪽에서 조용히 잠겼다. ……잠겼다. 그 정적 속에는 숨 막히는 긴장감만 가득 찼다. 자의로 집무실 안에 남은 정오는 출입문과 지헌의 몸 사이에 갇혀버렸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이사님, 제가 그런 말을 했던 건요…….”
“내가 누구 남자죠?”
그러나 그녀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그가 끼어들었다. 역시나 그는 그 구절을 가장 먼저 지적했다. 너무 미안해서 더는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기 거라고 했으면 책임을 져야지.”
정오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내 거 아니야. 정지헌은 정지헌 거지…….
“무슨 용기가 나서 그런 말을 했죠?”
지헌은 아무 말이나 툭 던져놓고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그간 그녀의 버릇을 몇 개 알게 됐다. 말을 잃게 되면 머리를 굴린다.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리는 듯 눈동자가 좌우로 움직이는 순간이 있다. 그 틈을 장악하고 싶었다. 나만 생각하도록. 지헌은 재빨리 고개를 내려 그녀의 입술을 깊게 빨았다가 놓았다. 묻지 않았다. 자신을 누구의 것으로 만든 건 그녀였다. 나는 네 것이니 나한테 따질 수는 없을 거라고, 그렇게 말하면 그만이었다. 네 남자잖아. 나는. 짧은 입맞춤 후에 바라본 그녀는 조금 더 멍한 얼굴이 되었다. 천하의 기회주의자 정지헌이 이 순간을 놓칠 리 없다. 다시 고개를 내렸다. 톡. 그러나, 언젠가 돈가스집 앞에서 그랬던 대로 입술엔 맴매가 날아들었다. 정오는 무언가 틀어진 것을 곧장 파악했다. 친구부터 시작하고자 했던 그녀의 계획은 바스러졌다. 어쩌면 그가 손등에 키스를 했던 그날 눈치챘어야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7년 전과 다른 모습들을 너무 많이 보여줘서 경계한 나머지 그 쉬운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이 사람이 자신을, 여전히 여자로 여기고 있다는 걸. 채은비에게는 보여준 적 없었던 남자의 모습으로 제게 다가오고 있었다는 걸. 얼떨떨하여 눈물이 맺혔다. 하지만 그래도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톡. 말보다 몸이 빨랐던 그의 입술을 한 대 더 때려주고는 무작정 밀어냈다. 미는 대로 뒤로 마냥 밀려가는 그는 정말 제 것 같았다. 너무 쉬워서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나만이라도 정신을 차리고 싶은데.
“당신이 잘못한 게 맞아요.”
그녀는 독하게 눈에 힘을 주고서 진지하게 따졌다.
“아무리 상황이 급했어도 그래선 안 되는 거였죠. 가짜 애인은 되고 가짜 결혼 약속은 안 되는, 그런 게 아니라고요. 둘 다 나쁜 거예요, 둘 다.”
처음부터 당신이 잘못했어. 그래선 안 되는 거였지. 당신의 결정은 은비에게 희망고문이었을 테니까. 소파 끄트머리까지 밀려간 그가 소파 등에 몸을 기댔다. 그가 몸을 기울이니 그녀와 눈높이가 딱 맞았다. 그녀는 그토록 진지한데, 정면으로 바라보는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세상을 다 포용할 것 같은 상냥한 미소가 그녀의 심장으로 파고들었다. 자꾸 마음이 약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당황스러워서 말을 버벅거리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채은비 일이 해결될 때까지 자숙해야 하는 거라고.”
“알았어요.”
“또, 또! 그러면 안 된다고요. 아무렇지도 않게 알았다고 하고 거짓말하고, 그게 탄로 나면 또 그걸 즐기고.”
그녀가 씩씩거리는데도 그는 참으로 즐거운 눈빛이었다.
“알았어요.”
“허. 참. 지금도 웃을 때가 아니잖아. 뭘 알았는데.”
“알지.”
“…….”
“이정오 씨 말이 짧아진 거.”
대답과 함께 그가 다시 입술을 맞춰왔다. 눈꺼풀을 내리고서 집요하게 그녀의 입술을 찾는 그의 집념은 7년 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