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그녀를 알고 있는 사람들2021.10.09.
달그락달그락. 도윤까지 낮잠이 들어 조용한 집 안엔 그릇 위로 물줄기 부서지는 소리가 맑게 쌓여갔다. 그 사이사이로 진서의 한숨 소리도 섞여들었다. 어제, 병원에 도착한 후 의식을 찾은 진서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 몇 가지 검사를 하게 됐다. 가장 마지막엔 산부인과 응급실로 안내받았다. 그리고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셋째라니.”
그래서 내가 그렇게 우울했었구나. 우리의 몸은 얼마나 정직한가. 온몸에 힘이 없고 때로는 어지럽고 입맛도 없었던 며칠간의 이상증세는 임신으로 귀결되었다. 벌써 아기는 엄마 배 속에 콩알만 한 집을 짓고는 콩콩콩콩 심장 소리를 내고 있었다. 심장 소리를 듣고 난 후에도 진서는 믿어지지 않았다.
“셋째라니.”
아이들은 성큼성큼 자란다. 아이들이 자라는 속도를 엄마는 따라갈 수가 없다. 많이 뒤처진 엄마이지만 그래도 노력하고 있었다. 두 아이에게 아직 좋은 엄마가 되어주지 못했는데, 하나가 더 생긴다니. 내년에 도빈이는 초등학교를 가는데, 나는 배가 불러서 도빈이를 쫓아다니려나? 셋째가 입학식날 태어나면 어쩌지? 그날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래서 내가 쓰러졌었구나. 본능이란 게 이렇게 무서운 거구나.
“셋째라니…….”
설거지를 마치고 거실로 나온 승규는 진서의 넋두리에 슬며시 눈치를 보며 옆에 앉았다. 회사는 하루 쉬고 진서를 돌보게 되었지만 부인의 옆에서 승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우리한테 셋째가 생기다니.”
“…….”
“나만 힘든 건 아닐 거야. 그렇지? 자기도 힘들겠지.”
높낮이 없이 무덤덤하게 들려오는 진서의 목소리에 승규는 바짝 쫄았다.
“여보, 내가 잘못…….”
“잘못이라니. 애가 듣는다.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승규에게 지적하면서도 목소리엔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아이는 축복받아야지.”
“…….”
“우리 도빈이가 사춘기에 들어설 때 셋째는 도윤이만 하겠네.”
승규는 고개를 숙이고서 마른침을 삼켰다. 어째서 그렇게 됐는지는 알 수 없었다. 첫째도 사실은 속도위반이었고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던 승규는 진서에게 내내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셋째라니.
“여보, 내가 잘할게. 내가 육아휴직을 하든지 할게. 뭐든 할게. 너무 걱정하지 마.”
뭐든지 해줄 수만 있다면 대신 아이를 낳아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마음은 그러했지만 진서는 힘없이 웃어 보였다. 아이를 하나 낳을 때마다 인생이 변해가는 것 같았다. 이제 네 번째 인생에 접어든 기분이었다. * 그를 톡톡 때렸던 손이 붙들렸다. 정오의 두 손을 한 손으로 그러잡고 고개를 내린 지헌은 쉽게 키스할 수 있었다. 정오는 어째야 할지 몰라서 눈을 감아버렸다.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이 찔끔 밀려 나왔다. 순간 그녀의 눈가에 그의 입술이 닿는 것이 느껴져 정오는 움찔했다. 속눈썹을 핥듯이 입맞춤을 이어가던 입술이 아래로 내려왔다. 손등에 하던 키스와 다를 바 없었던 입맞춤이 거듭되어가며 진득하게 변했다. 어느덧 다시 그녀의 입술에 이르렀을 때 그는 주저 없이 그녀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다리에 힘이 풀려가는 그녀를 그가 단단히 붙잡았다. 그는 7년 전과 다를 바 없이 그대로였다. 아니, 더욱 저돌적이고 탐욕스러운 남자가 되었다. 손도, 눈빛도, 숨결도 모두 못된 남자였다. 굳이 체면을 차릴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듯한 거친 숨결이 그녀의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그녀가 그의 품 안에서 꼼지락거릴 때마다 숨결이 깊어졌다. 그녀의 안에 더 담을 수 없을 만큼 제 숨결을 꽉 눌러 채워 넣겠다는 듯. 기세 좋게 내 남자라고 말했지만, 오히려 그에게 심장까지 붙들린 것 같았다. 아직 이 남자를 다 모르니까 너무 좋아하면 안 된다고, 너무 빠져버리면 안 된다고. 눈앞이 아뜩해져가는 순간에도 속으로 수없이 되뇌었지만 그가 선사하는 감각이 너무나 벅차고 또 떨려서, 정오는 입술이 막힌 채 울상을 지었다. 걷잡을 수 없이 뛰어대는 심장이 자꾸 사고를 가로막았다. 정말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빨라. 브레이크 좀 밟고 오면 안 되는 거야? 나는 애가 있는 사람이야. 내 곁은 어린이 보호구역이라고! 서행하란 말이다. 하긴, 표지판을 숨기고서 경고를 하면 경고로 들리지도 않겠지. 그가 너무 빨라서 더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믿어보고 싶기도 했다. 지헌의 커다란 손이 뒷덜미를 움켜잡아 끌어당겼다. 밀어낸 만큼 밀려갔던 그와 같이 그녀 또한 순순하게 그에게 잡혀주었다. 두피를 누르는 그의 손끝이 내내 뜨거웠다.
언젠가 죽음이 쉽게 느껴졌던 순간이 분명 있었는데. 지헌은 지금 이렇게 건강하게 살아 있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처음 가졌다. 유혹을 눈앞에 두고도 제정신으로 있어보겠다고 애쓰는 그녀의 으름장은 가슴속을 간지럽혔다. 그녀가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멈출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이정오라는 사람의 사랑스러움은 이미 한계치를 넘었다. 그녀의 앞에서 신사적으로 이성을 붙들고 있을 수는 없었다. 몸 안쪽이 뜨거워지는 본능을 더 이상 감출 수 없었다. 어쨌든 그녀는 매운 손을 휘두르면서도 자신의 구애를 받아주었다. 말랑말랑한 입술이, 그 안의 단 숨결이 아찔하도록 기분 좋았다.
“근데 나 아직 그쪽의 내 남자 아니지 않나?”
바짝 다가가 입술 앞에 숨결을 풀어놓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얼른 만들어. 당신 남자로.”
자신이 여태 놀리고 있다고 오해하는지, 그녀는 슬쩍 눈을 흘겼다. 그마저도 귀여워서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당신 거 해.”
나를 뭐 어떻게 줘야 할진 모르겠지만, 달라는 대로 다 줄 테니까. * 은엽은 지헌과 헤어진 후 동생 은비에게 연락했다. 동생과는 맥스기획 건물과 떨어져 은밀하게 만났다. 은엽은 동생을 만나자마자 가득 인상을 쓰고서 따져 물었다.
“너, 정지헌한테 어떻게 했어. 어떻게 했길래 정지헌이 오만정 다 떨어진 얼굴로 가짜 연애를 관두겠다고 하는 건데.”
은비의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지헌 오빠가 그래? 그랬어? 오만정 다 떨어진 얼굴이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은엽은 아랑곳없이 윽박질렀다. 동생의 성공적인 결혼. 사실 은엽은 동생이 서른 살이 되기 전에 그 목표를 달성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지헌의 벽은 의외로 까마득하게 높고도 단단했다. 다른 녀석에게 투자했다면 이미 결혼을 했을 동생. 어쩌다 보니 시간이 이렇게 흘렀다. 어느 순간부터는 은엽에게도 오기가 되어버렸다. 여기까지 왔으니, 무조건 동생을 정지헌과 결혼시켜야 했다. 뒤돌아볼 수 없었다. 은비가 어깨를 들썩이다가 눈물 한 방울과 함께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 애 때문이야.”
“그 애?”
“그 애가 회사에 온 다음에 오빠가 이상해졌어. 걔가 자꾸 지헌 오빠한테 꼬리를 쳐. 오빠한테 제 아빠를 닮았다고 거짓말했다가 전남친을 닮았다고 했다가…… 그렇게 꼬리를 친다고. 오빠를 자꾸 따라다니고, 어떻게든 붙어 있으려고 하고…….”
“정지헌이, 누가 꼬리 친다고 넘어갈 애야?”
“그러니까 이상하다는 거지!”
은비는 말로 안 되니 언성을 높였다. 그리고.
“오빠가 해.”
“…….”
“정지헌한테 집적거린 여자들은 다 오빠가 처리했잖아. 오빠 그런 거 잘하잖아. 응?”
오빠에게 매달렸다. 4년 전, 정지헌에 대한 온갖 소문을 만든 사람이 오빠 은엽이란 걸 은비도 알고 있었다. 그 소문을 효과적으로 장영미 여사에게 전달하여 지헌을 꼼짝 못 하게 만든 바람에 지헌은 가짜 연애에 협조해주게 된 것이었다. 그 뒤로도 은엽은 지헌에게 들러붙을 조짐이 보이는 여자를 차단시키려 부단히 노력해왔다.
“유혹을 하든 가지고 놀든 뭐라도 좀 해보란 말이야!”
은비가 소리쳤다. 동생이 이토록 절박하게 말하는 건 처음 보았다. 은엽 또한 심각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 여자 이름이 뭔데.”
“이정오.”
“…….”
“제작 2팀 카피라이터 이정오 대리.”
이정오. 이름을 들은 은엽의 눈이 커졌다. 은엽은 그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 은비는 애가 탔다. 한시가 급했다. 마침 헤드헌터에게 연락이 왔다. 야근을 건너뛰고 일찍 퇴근한 은비는 헤드헌터를 만나러 갔다. 약속장소까지 꽤 거리가 있었다. 은비는 많이 움직여야 하는 수고를 기꺼이 감내했다.
“채은비 과장님.”
카페에 들어서자 헤드헌터가 손을 흔들었다. 그 옆에 정장을 입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녀의 타깃.
“과장님, 이쪽이 제가 말씀드린 AE님입니다. 남지애 차장님이에요.”
“안녕하세요. 맥스기획의 채은비라고 합니다.”
헤드헌터의 소개에 따라 AE에게 명랑하게 인사한 은비는 용건을 꾸며 말했다.
“다름이 아니라,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제 남자친구가 맥스기획의 본부장이거든요. 어쩌다가 같은 본부에서 일하게 됐는데 그게 여러모로 불편하더라고요. 저는 일하는 걸 좋아하는데 왠지 순수하게 제 능력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 같은 아쉬움도 있었고요. 그래서 이직을 생각하게 됐어요. 투에이치가 회사 분위기가 좋다고 하길래, 관심이 가서 알아보고 있는 중이에요.”
헤드헌터와 AE는 흐뭇해하며 회사에 대한 이모저모를 늘어놓았다. 모두 은비에게는 필요 없는 정보였지만 은비는 그들의 말에 대해 열심히 맞장구쳐주었다.
“오늘 들은 정보 정말 감사했어요.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조만간 다시 연락드릴게요.”
“네, 과장님. 저도 반가웠어요. 좋은 소식 들리길 기다릴게요.”
은비의 인사에 AE도 기분 좋게 화답했다. 그런 AE에게, 은비는 지나치듯이, 진짜 용건을 말했다.
“아, 이정오 대리라고, 차장님 회사 동료였죠?”
“오, 이정오 대리? 아! 맥스기획이 상아기획 인수했죠! 그럼 이정오 대리가 거기 있는 거예요? 맥스기획에?”
AE의 눈이 반가운 화제를 따라 빛났다. 은비도 속으로 환호했다.
“네. 제가 제작 1팀이고 이정오 대리가 2팀이에요.”
“잘 지내죠? 이정오 대리.”
“네. 잘 다니는 것 같아요.”
“정말 반짝반짝하는 인재죠.”
“그런 것 같더라고요.”
정오의 칭찬에 구역질이 날 것 같았지만 은비는 예의껏 미소 지었다.
“일 잘하지, 예쁘지, 똑똑하지. 이건 비밀인데, 간혹 이정오 대리한테 흑심 품는 광고주가 있었어요. 이정오 대리한테 애만 없었어도 청혼 엄청 받았을 텐데.”
“……애가 있다고요? 이정오 대리한테?”
“어? 모르셨어요? 아…… 이거 얘기하면 안 되는 건가?”
은비의 두 눈에 희열이 들어찼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는 거였다!
“괜찮아요. 말씀해보세요. 저 어디 가서 소문낼 데도 없어요.”
“엄청 귀여운 딸 하나 있잖아요. 애가 아마 지금 일곱 살일 텐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 몸에 전율이 왔다. 기쁨의 미소를 감출 수가 없었다. 애 엄마 주제에 감히 내 남자를 건드려?
‘이제 됐어, 이제!’
어떻게 이 사실을 폭로할까 생각하니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것이 판도라의 상자인 줄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