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좋아 보여요2021.10.13.
지헌의 집무실을 나온 뒤에도 정오의 가슴은 내내 두근거렸다. 빠르게 피가 도는 느낌에 어지러울 정도였다. 그의 비서가 다음 스케줄을 짚어주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여태 집무실에 붙들려 있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정오는 오금이 저렸다.
‘아니, 7년 동안 어떻게 살았길래 그렇게…….’
……야하냐. 바라보는 눈빛만으로도 숨이 턱 막히는데, 그 눈길과 손길로 집요하게 구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몰래 들었던 지헌과 은비의 대화에서, 은비는 지헌이 여자가 없다고 했었다. 사귀는 여자는 없고, 놀기만 많이 놀았던 건가? 많은 여자들에게 두루두루 집적거려가며 문란하게? 왠지 그랬을 것 같기도 했다. 그게 아니라면 그 여우짓을 도무지 설명할 수가 없다. 여우짓뿐 아니라 많은 게 변한 것 같았다. 아니, 그걸 변했다고 해야 하나? 갖고 있던 능력치의 레벨이 훌쩍 높아져 다른 사람처럼 여겨지는 느낌. 더 힘세고, 더 저돌적이고, 더 집요하고, 더 야하고. 어쨌든 정지헌은 많이 달라졌다. 그 가운데 7년 전과 겹쳐지는 모습들이 얼핏 나타나 그녀를 깜짝깜짝 놀라게 했고. 변한 것은 변해서, 변하지 않은 건 변하지 않아서 정오는 그에게 붙들린 것처럼 움직이질 못했다. 이전에도 한번 그랬듯이 스스로에게도 다시 놀랐다. 사실 정오는 한때 그를 너무나도 원망했기에, 정지헌에 대한 기억을 일부러 지우려고 노력했었다. 노력한 만큼 그녀 또한 꽤 많은 부분을 잊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지울 수 없는 것들이 몸에 새겨져 있었다. 은퇴한 발레리나가 수십 년 후에도 여전히 같은 음악에 같은 안무를 그려내는 것처럼, 그녀 또한 그의 행동에 같은 반응을 보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지헌 지금 되게 기분 좋겠구나. 내가 자기 것처럼 움직여주어서.’
그것이 조금 분했다. 의도치 않게 그에게 만족감을 주었을 테니. 어쨌든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으니 벌어진 일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고, 정오는 이제 다시 앞으로를 생각해야 했다. 머리를 굴려야 했다. 장영미 여사는 날 싫어해. 그건 분명해. 이미 예나의 존재를 알고 있는 거라면, 내가 정지헌에게 다가간 것이 그녀의 심기를 건드릴 수도 있다. 어쩌면 예나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다. 하지만, 예나의 존재를 몰랐었고, 이제야 알게 되는 거라면? 예나만 빼앗고 나는 접근하지 않길 바랄 수도 있다.
‘일단 변호사를 만나자.’
만에 하나, 예나를 빼앗길 경우를 대비해서 긴하게 움직여야 한다. 앞으로 일어날 여러 가지 일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려보는데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헉!’
정오는 휴대폰에 떠오른 문자메시지를 확인한 즉시 곧장 화면을 꺼버렸다.
- 회사로 돌아올게요. 같이 퇴근하죠. 바래다줄게요.
도무지 이 남자는 조심성이란 게 없구나! 일단 지헌에게 주의를 주는 것이 급선무인 듯했다.
- 아뇨! 집엔 혼자 갈 거예요! 그리고 회사 있을 때는 절대! 개인 연락하지 맙시다! 회사에서 티 내지도 말고요!!!!!!
정오는 한숨과 함께 전송 버튼을 눌렀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느낌이었다. 앞으로를 생각하니 가슴이 뛰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 집무실에서의 밀회가 무색하게도, 그녀와 헤어지니 금방 또 보고 싶어졌다. 지헌은 외근 내내 정오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워낙 딴청을 많이 하고 살았던 인생이라 일에는 무리가 없었다. 승규의 말대로 언제나 일은 80%만 공을 들이면 차질이 없었다. 에너지를 조금만 소비하고도 수월하게 해낼 수 있었다. 그 외의 무료했던 시간이 갑자기 꽉 채워진 느낌.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마음이 깨어난 기분이었다. 그 생소한 기분은 일에도 활력을 주었다.
“이사님 무슨 좋은 일 있으신가 봐요? 왠지 얼굴이 밝아 보이네요.”
클라이언트인 세련그룹 계열사의 임원이 지헌에게 친근하게 안부를 물어왔다. 평소 같았으면 ‘아닙니다’ 하고 대강 대답했을 테지만 지헌은 기분 좋게 화답해주었다.
“그래 보이십니까.”
“네. 많이 좋아 보여요.”
“감사합니다. 직원들이 일을 잘해줘서 요즘 계속 기분이 좋습니다.”
지헌은 사적인 영역에 대해서는 입도 벙긋하지 않고 직원들 이야기로 공을 돌렸다. 이동하는 길에 정오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니 정오는 느낌표가 열 개나 들어간 당부의 답신을 보냈다. 그녀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리는 듯 귀여운 메시지였다. 회사에서 티 내지 말라는 당부에는 지헌 또한 수긍했다. 채은비와의 문제가 얽혀 있기에, 그리고 채은비는 이정오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고 착각하기에 섣불리 마음을 드러낼 수 없었다. 잠시 정오와의 일을 떠올리는 동안 임원이 다시 말을 걸었다.
“아, 언젠가 안찬섭 팀장님이 저한테 무언가 제안을 했었는데 그때 한번 알아보겠다고 하고선 잊었네요. 무척 수긍이 가는 의견이었는데. 혹시 지금이라도 물어볼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까? 바로 물어보겠습니다.”
지헌은 바로 휴대폰을 들어 제작 1팀 팀장에게 전화했다. 그러나 안찬섭 팀장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지헌은 다른 팀원들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제작 1팀 내선번호로 전화를 걸었다가 멈칫하며 끊었다. 가까운 팀이니 정오에게 물어봐도 될 것 같았다.
- 지금 안찬섭 팀장님 자리에 없습니까? 연락이 안 돼서 그러는데.
문자메시지를 보내니 바로 답신이 왔다.
- 없습니다. 만나면 바로 연락 드리라고 할까요?
- 네. 부탁합니다. 그럼 지금 제작 1팀 자리에 아무도 없나요?
격식을 갖춰 오고 가는 문자메시지에도 지헌은 미소를 그리게 됐다. 눈앞의 임원과의 대화보다는 이쪽이 더 재미나서 계속 답신을 받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욕심이 물음표에 담겼다. 그런데.
- 전부 다 ㅇ벗습니다.
요상한 세 어절의 문자에 지헌은 눈을 깜빡였다. 잠시 후 정오에게서 새 문자메시지가 연달아 도착했다.
- 없습니다 없습니다 없어요!!!!
- 전부 다 없다고요!!!!!
흡. 참기 어려운 웃음이 입술의 다물어진 틈 사이에 걸렸다. 문자메시지를 보기만 하는데도 시끄러웠다. 왠지 그녀의 외침이 들리는 것 같았다. 정신없이 일 처리를 하다가 답신에 오타를 낸 거였다. 그 실수가 너무나 부끄러워 급하게 정정 문자를 보냈을 테고.
“재미있는 일이 정말 많으신가 봅니다.”
임원이 지헌의 표정을 보며 다시 말을 붙였다.
“직원이 문자메시지로 오타를 냈는데 너무 웃기네요.”
“아, 직원의 오타에 웃으신 거였어요?”
“죄송합니다.”
지헌은 간신히 웃음을 눌러 참고서 척추를 세워 단정하게 앉았다. 임원은 보기 좋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아닙니다. 다른 임원들은 직원이 문자메시지에 오타를 내면 더러 야단을 치던데. 역시 정 이사님은 다르네요. 이사님 본부 직원들이 너무 부럽습니다.”
이정오 덕분에 의외의 평가를 받게 되었다. * 정오는 제 실수를 떠올리며 자리에서 허공으로 몇 번 발길질했다. 내내 넋 나간 사람처럼 있다가 지헌에게 보내는 문자메시지에 오타까지 내고 말았다. 야무지고 똑똑하고 빈틈없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자꾸 지헌에게 그 빈틈을 보이고 마는 자신이 한심했다. 이러다가 예나의 존재까지 먼저 들켜버리는 게 아닐까 걱정스럽기도 했다. 오늘 야근에도 채은비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침에는 그토록 열심히 할 것처럼 나서더니 저녁때가 되니 다시 몸이 아프다며 떠났다. 그럴 만도 했다.
‘내가 그렇게 몰아붙였으니 기분도 상했겠지.’
그렇다고 사과를 하거나 말을 주워 담을 생각은 없지만, 은비의 처지가 딱하다는 생각도 조금 들었다.
“이 대리님, 오늘 낮에 이사님께서 말씀하신 계열사 협력 제안 아이디어요. 이렇게 몇 개 생각했는데 대리님 의견은 어떠세요?”
기획팀의 사원이 정오에게 두툼한 문서를 내밀었다. 정오는 문서를 모두 살펴보고서 의견을 주었다.
“다 너무 좋은데요! 아이디어가 반짝반짝하네요. 일단 있는 대로 다 이사님 보여드리는 게 좋지 않을까 해요. 직접 제안해보신다고 했으니까 이사님이 현실적으로 판단하실 것 같아요.”
“아, 감사합니다. 혹시 이거 보여드리면 저도 이사님 옆에서 야근하게 되려나요?”
“하고 싶으세요?”
“아뇨. 전혀.”
사원 AE는 볼살이 떨리도록 고개를 마구 저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복도 저편에서 지헌의 모습이 보였다. 이 밤에 외근을 끝내고 돌아온 것이다. 정오의 표정도 경직되었다. 조금씩 조금씩 걸음을 옮겨서 도망가볼까 했는데, 지헌은 정오의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서 주변의 직원들에게 말했다.
“오늘은 더 늦게까지 있지 말고 이만 들어가죠. 이미 늦었는데.”
저녁 8시. 적어도 10시까지는 야근을 할 거라 생각했던 직원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사의 지시엔 팀장도 어쩔 수가 없었다. 미란이 모두에게 말했다.
“오늘은 이만 정리하고 들어갑시다.”
미란의 음성에 팀원들은 각자 씩씩하게 대답하고서 자리를 정리했다. 정오는 회의실로 건너가 그간 어지른 것들을 치웠다. 지헌이 그런 정오를 쫓아 회의실까지 찾아왔다.
“카피라이터가 말이야. 문자는 제대로 쳐야 하는 거 아니에요?”
노트북PC를 정리하던 정오의 손이 멈췄다. 회사에서 절대 티 내지 말라고 했더니 집무실에서처럼 바짝 다가오지도 않고 딱 거리를 두고 능글맞게 놀리는 모양새가 참 얄미웠다.
“아니면, 문자는 제대로 작성했는데 내가 눈치 없이 못 알아듣는 건가?”
뚱하게 흘겨보니 지헌이 다가와 정오의 노트북을 가져갔다.
“회사에서만 티 안 내면 되죠?”
“…….”
“얼른 갑시다. 바래다줄게요.”
다른 이의 노트북PC까지 한 번에 챙긴 지헌이 먼저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정오는 한숨을 쉬었다. 분명히 문자로 집에는 혼자 갈 거라고 일러두었는데 이 남자는 일부러 그러는 건지 까맣게 잊은 듯했다. 정오는 급히 지헌을 쫓아갔다. 지헌이 빨리 따라오라는 듯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하지만 정오는 더 쫓아갈 수가 없었다. 정면에서 채은비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어디에 숨어 있다가 이 밤에 다시 나타났는지. 퇴근할 때는 다 죽어가는 표정이더니, 두 시간 만에 완전히 회복한 얼굴로 나타난 채은비가 모두에게 말했다.
“어머, 지금 퇴근하시려고요? 저는 약 먹고 기운이 돌아와서 다시 왔어요. 아무래도 계속 참여를 못 했던 게 너무 걸려서요.”
“에이, 그래도 쉬지 이 밤에 왜 왔어. 다들 퇴근하기로 했으니 채 과장도 얼른 가서 쉬어.”
미란이 그런 은비에게 자상하게 말했다.
“그래야겠네요. 내일부터는 다시 열심히 할게요. 죄송해요. 팀장님.”
은비가 상큼하게 인사했다. 쟤는 숟가락 얹기도 참 잘하고 운도 참 좋다 생각하며 정오는 자리로 돌아왔다. 지헌도 그런 은비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제작 2팀 자리에 들고 온 노트북들을 올려놓았다.
“이정오 대리, 엄마가 일찍 퇴근하니 딸도 좋아하겠어요.”
그런데, 대뜸 은비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정오를 불렀다. 정오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딸이라고?”
안찬섭 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얼굴을 보이며 물었다. 모두의 이목이 은비와 정오에게 쏠렸다. 은비는 아랑곳없이 말을 이었다.
“이정오 대리 이전 회사 동료 중에 제 친구가 있거든요. 그 친구한테 들었어요. 일곱 살짜리 예쁜 아이가 있다던데.”
정오는 지헌을 바라보았다. 지헌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발이 바닥에 딱 붙어 있었다. 표정엔 그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것이 정오는 왠지 더 무서웠다. 한 번의 기회가 있었다. 그가 집에 바래다주던 날, 그는 어머니와 둘이 사느냐고 물었고 그녀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때 딸이 있다고 밝힐 것을. 물론 그 얘기를 먼저 했더라면 그가 지금처럼 저돌적으로 다가오진 않았겠지만, 적어도 거짓말쟁이가 되지는 않았을 텐데.
“팀장님, 이번 경쟁 PT 잘될 것 같아요. 엄마와 딸에 대한 스토리텔링이잖아요. 누구보다 이정오 대리가 엄마의 마음을 잘 이해할 테니까.”
은비의 낭랑한 말 한마디 한마디가 폐부를 찌르는 듯했다. 정오는 은비가 왜 두 시간 동안 자리를 비웠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의 과거를, 약점을 파헤치기 위해 정오의 전 직장 동료를 만났을 것이다. 전 직장에서도 정오의 가족관계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사람은 몇 없으니 아마도 자극적인 내용으로 편집된 대강의 이야기만 들었겠지. 돌아온 이유도 뻔했다. 이 사실을 빨리 밝히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했을 것이다. 은비는 아주 기분 좋게 떠들어댔다.
“난 이정오 대리 너무 예뻐서 미혼인지 알았지 뭐예요. 자그마치 일곱 살이나 먹은 딸이 있을 줄이야.”
표정이 서늘해진 지헌의 옆모습이 정오의 시야에 담겼다. 잠시 멈추었던 그가 서서히 걸음을 옮겼다. 신뢰가 깨졌구나. 멀어지는 만큼 왠지 마음도 흐릿해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지금 당장은 그럴 수밖에 없다. 거짓말에 대한 과보는 그녀가 모두 감내해야 한다.
“미혼 맞아요. 아이는 있지만 결혼은 안 했으니까.”
정오는 덤덤한 표정으로 사실을 털어놓았다.
“싱글맘이죠.”
세상이 무너지는 아픔을 겪었던 과거는 살아가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된다. 정오는 함부로 절망하지 않는다. 채은비, 넌 언젠가 오늘을 후회하게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