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내 것이 될 수 없는 남자2021.10.16.
정오의 목소리에 지헌의 발이 멈췄다. 정오가 싱글맘이라는 사실을 고백하자 은비의 표정은 돌연 어두워졌다.
“아…… 미혼모셨어요? 죄송해요. 그것까지는 몰랐어요…….”
그 사과조차 계산된 행동이겠지.
“괜찮습니다. 죄송해하실 것 없어요. 저는 흉이라고 생각 안 하니까요. 과장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딸이 예쁘기도 하고요.”
“역시 이 대리님은 쿨하시네요. 용기 있으시고. 저라면 그런 결정은 못 했을 텐데. 어쨌든, 아이가 예뻐서 참 좋으시겠어요. 정말 대단하세요.”
딱하게 여기는 듯한 은비의 애잔한 미소에 정오는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사무실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자리에서 일어나 정오를 주시하고 있던 제작 1팀의 팀원들은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고은주 대리는 불쾌한 듯이 인상을 찌푸리며 은비를 흘겨보았다. 기훈은 잠시 멍해졌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정오를 보았다. 정오는 지헌을 바라보았다. 아무 감정도 드러나지 않는 표정은 다시 끝을 짐작케 했다. 이 사태를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빠르게 파악한 성미란 팀장이 지헌을 쫓아갔다.
“이사님, PT 관련해서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잠깐 시간 괜찮으세요?”
“가죠.”
미란의 면담 요청에 지헌은 선뜻 앞장섰다. 발소리가 멀어져가는데도 정오는 그의 걸음마다 가슴에 못이 박히는 것 같았다.
“대리님, 집에 가실 거죠? 태워다 드릴게요. 가요.”
잠시 후 기훈이 든든하게 말을 건넸다.
“어, 그래. 고마워.”
기훈은 정오의 가방까지 대신 들어주었다. 지헌은 성미란 팀장과 함께 집무실로 갔다. 미란은 어떤 용건인지 확인하지도 않고 지헌이 마냥 걸음을 옮기는 것이 의아했다. 게다가 발목에 쇠구슬을 달아놓은 것처럼,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것처럼 지헌의 걸음은 이상하게 느릿하고 무거웠다. 그 느린 발걸음으로 묵묵하게 집무실 문을 연 지헌이 안으로 미란을 안내했다. 자신은 집무실 문을 붙잡고 선 채로.
“이사님, 다름이 아니라 이번 PT에서 채은비 과장은…….”
“잠깐만 기다리시죠. 잠깐만.”
미란이 얘기를 꺼내려는데, 지헌이 닫으려던 문을 다시 열며 말했다. 막을 틈도 없이 지헌은 미란만 남겨두고 집무실 밖으로 떠났다. 집무실로 향할 때와 달리 걸음이 빨라졌다. 성큼성큼 걸어 제작 2팀 사무실 가까이 당도한 지헌은 정오의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 9층 출입문이 열리자 엘리베이터 앞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대리님 괜찮으세요?”
“당연하지.”
걱정스러워하는 기훈의 목소리와 비교적 담담한 정오의 목소리였다.
“그럼 다행이에요. 어후, 화나.”
“기훈 씨가 왜 열을 내.”
“채은비 과장님 진짜 못됐잖아요. 그렇게까진 안 봤는데.”
“…….”
“후우. 그게 이렇게 밝혀지게 될 줄은 몰랐어요. 지켜드리고 싶었는데.”
“난 괜찮아, 정말로. 걱정해줘서 고마워.”
“같이 주차장으로 내려갈까요, 아니면 1층에서 기다리실래요?”
“같이 내려가자.”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지헌의 두 주먹에 꽈악 힘이 들어갔다. 사무실은 다시 조용해지고. 이정오에게 한 방 제대로 먹였단 사실에 희열에 가득 찬 은비는 자리에 가 앉았다. 어차피 PT 준비 회의는 끝난 것 같으니 바로 집으로 가도 괜찮겠지만, 은비는 지헌과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자신이 듣고 온 것을 지헌에게 더 상세하게 얘기하고 싶었다. 그리고, 충격과 상처를 받은 지헌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
“뭘 제대로 모르면 가만히라도 있지.”
고은주 대리가 자리에서 짐을 챙기며 웅얼댔다. 혼잣말이었지만 누군가 들으라고 하는 말이었다. 자신을 겨냥한 말이라는 걸 은비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제작 2팀은 어떻게 저리도 하나같이 바보 같을까? 침몰하는 배인 줄도 모르고 탑승하는 머저리들 같으니라고. 은비는 화낼 가치도 없는 말이라고 여기며 자리에 앉아 일을 정리하는 시늉을 했다. 잠시 후, 미란의 모습이 보였다. 지헌과의 면담이 끝난 모양이었다. 이윽고 은비의 자리 내선전화벨이 울렸다.
“네. 채은비입니다.”
[채은비 과장, 잠깐만 볼까요.]
지헌의 목소리였다.
“네. 알겠습니다. 이사님.”
명랑하게 대답하고서 전화를 끊은 은비는 콧노래까지 조용히 흥얼거리며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로 가는 복도 끝자락에 지헌의 모습이 보였다. 굳이 집무실까지 갈 필요가 없다는 듯. 왠지 불안한 느낌에 은비의 발이 멈추었다. 그만큼 지헌이 다가왔다.
“소리텔레콤 경쟁 PT는 이제 할 필요 없어. 넌 제외하기로 했어.”
“어…… 왜?”
“필요가 없으니 그렇겠지. 그렇게 알고 본업에 충실하면 돼.”
성미란 팀장의 면담 내용이 그것이었나 보다. 자존심은 조금 상했지만 은비는 금방 수긍했다. 제작 2팀이 메인이 되는 경쟁 PT는 은비 또한 별로 내키지 않았다.
“알겠어. 용건은 그것뿐이야?”
“내가 네 거야?”
은비의 질문에 지헌도 물음을 던졌다. 그 물음이 가히 공격적이라 은비는 굳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응?”
“이정오 대리한테 그렇게 말했잖아. 내가 네 거야?”
지헌은 다시 정확히 짚어주었다. 엿들으려면 얼마든지 엿들을 수 있는, 회사 복도. 은비는 누군가가 지헌의 목소리를 들을까 조마조마한데 지헌은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또다시 눈물이 솟았다.
“이정오가 그래?”
“직접 들었어. 식당 앞에서.”
나만 그랬던 게 아니잖아! 이정오도 내 남자니 뭐니 하는 개소리를 했다고! 그걸 다 듣고도, 나만 몰아붙이는 거야? 좀 전에 이정오한테는 그렇게 웃어주고서?
“본인이 한 거짓말 다 정리하라고 했더니 더 이상한 말을 퍼뜨리고 다니네.”
“…….”
“더 이상 내 명예에 흠집 내면 나도 법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어.”
그의 매정한 말에 은비의 손이 덜덜 떨려왔다. 게다가, 법조인 집안 출신인 나한테 법을 운운하다니. 은비는 눈물을 머금고 물었다.
“그런데 오빠, 나한테 고마운 건 없어?”
따지는 듯한 은비의 질문에 지헌은 고개를 기울이고서 팔짱을 꼈다.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이정오도 오빠가 자기 남자라고 떠들어댔다고. 미혼모에 오빠한테 밥 먹듯이 거짓말한 이정오가 어떤 앤지를 밝혀줬는데 나한테 고맙단 생각은 안 해?”
지헌이 그랬듯이, 은비 또한 주변을 개의치 않고 따졌다. 힘껏 내지른 뒤에 바라본 그는 더 무시무시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반 발짝 다가온 지헌이 고요하게 말했다.
“입 좀 닥쳐라. 응?”
정중하게 어르는 말투로 내뱉은 거칠고 섬뜩한 경고였다. * 늦은 밤. 정오는 잠든 예나의 옆에 나란히 누워 가만히 예나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평소보다 일찍 퇴근하여 집에 왔건만 예나에게 밝은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미안해. 엄마가 미안해. 엄마는 언제나 딸에게 미안하다.
롤러코스터 같았던 하루였다. 심장이 철렁했다가, 붕 떴다가, 이제는 발밑까지 추락한 기분. 인생의 쓴맛을 많이 봤는데, 그 쓴맛도 가지가지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오늘은 울지 않았다. 정지헌은 내 것이 될 수 없는 남자였다. 언제나 그랬다. 그런 체념 때문인지 마냥 절망스럽지는 않았다.
‘상관없어.’
정오는 마음을 단단히 다졌다. 그가 앞뒤 가리지 않고 밀어붙이려는 것 같아 조금 불안하던 차였다. 이렇게 제동이 걸렸으니 다시 거리를 두겠지. 지금 상황에서는 그게 나을 수도 있다. 어쨌든 채은비와 정지헌이 헤어졌다는 소문 뒤로 자신의 이름이 붙는 건 위험할 테니.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를 정리하고 있을 때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화면에 성미란 팀장의 이름이 떴다.
“네. 팀장님.”
[이 대리 괜찮아?]
미란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네. 그럼요.”
[이사님께 말씀드렸어. 채 과장은 우리 경쟁 PT에 별 도움이 안 되니까 빼는 게 좋겠다고.]
“아, 그러셨어요?”
[이사님도 흔쾌히 알았다고 하시더라. 오늘 채 과장이 참 무례했지. 들리는 소문으로는 채 과장이랑 이사님이랑 헤어졌다더라. 그 화풀이를 괜히 이 대리한테 하나 싶기도 하고 그래.]
“…….”
[그래도 소문 가까이는 가지 마, 이 대리.]
미란은 밤에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말하고 나서 당부의 말을 덧붙였다. 정오는 피식 힘없이 웃어 버렸다.
“네. 그럴게요.”
[너무 주제넘은 간섭 같아서 미안하고, 근데 이 대리가 상처받는 일 생길까 봐 그러는 거야. 조금 시간이 흐른 다음에, 그들이 좀 정리된 다음에. 그래야 이 대리도 마음이 편하지.]
“네. 걱정 안 하셔도 돼요. 팀장님.”
[어휴. 그래. 얼른 자.]
“네. 팀장님도 쉬세요.”
정오는 곧장 인사하고서 전화를 끊었다. * 은비에게 한마디 경고를 해놓긴 했지만 지헌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퇴근하는 길. 지헌은 은엽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 지헌아. 무슨 일이야?]
은엽이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지헌은 본론으로 직행했다.
“오늘 은비랑 만났지?”
[……은비한테 들었어?]
“아니. 그랬을 것 같아서. 제대로 얘기는 했어?”
[무슨 얘기?]
“낭설 좀 만들지 말라고.”
로펌 사무실. 야근을 하다가 지헌의 전화를 받은 은엽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네가 오빠니까 네 말은 좀 듣겠지. 지난주에 분명히 얘기했는데 여전히 내가 자기 남자니 하면서 떠들고 다니더라고. 명예훼손인 건 알지?]
변호사 앞에서 명예훼손 운운하다니. 역시 참 건방진 자식이야. 은엽은 소리 없이 비웃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친절하게 답했다.
“내가 다시 한번 말할게.”
[고마워. 너만 믿는다. 그리고 지금 통화 녹음했어. 이해하지?]
“친구 사이에 녹음이라니. 너무 서운하다.”
[친구 동생한테 당하고 나니 세상이 참 무섭단 생각이 들어서.]
“…….”
[그럼 끊는다. 잘 있어.]
뚝. 처음부터 끝까지 불쾌한 전화였다. 전화가 끊어진 후, 분을 삭이지 못한 은엽은 팔을 휘저어 데스크 위를 엎어버렸다. 우당탕탕. PC를 비롯하여 서류와 잡기들이 모두 떨어지며 난잡한 소리가 났다. 사무보조가 깜짝 놀라 문을 열었다. 은엽은 사무보조를 싸늘하게 바라보다가 집무실 밖으로 나서며 말했다.
“치워요.”
*** 7년 전. 은엽은 지헌의 모친 장영미 여사가 웬 젊은 남자 성우를 수소문하는 걸 알게 되었다. 지헌이 뺑소니사고로 혼수상태였던 상황이었기에 장 여사의 행동은 더욱 의아했다. 그 후 은엽은 몰래 그 남자 성우에게 우연을 가장하여 접근했다. 성우의 동선을 미리 파악하여 우연한 만남을 세 번쯤 가지니 성우와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로펌에 들어가서 주로 대기업 자문을 하는데, 그룹 회장님 자제분들은 하나같이 다들 그렇게 말썽인지. 너무 힘들더라고요. 성우님은 혹시 재벌가 만나보신 적 있으세요?”
“재벌가 진짜 이상한 사람들 많죠. 저도 개인적인 친분은 없는데 얼마 전에 일 때문에 한 번 재벌가 저택에 들어가 봤어요.”
은엽이 한번 운을 띄워주니 성우는 바로 술술 정보를 불었다. 은엽의 눈이 빛났다.
“재벌가 저택에 가셨다고요? 무슨 일로?”
“아 근데 변호사님, 이거 절대 딴 데 얘기하시면 안 돼요.”
“그럼요. 당연하죠. 변호사는 비밀 엄수가 생명입니다.”
성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무슨 식품 그룹이라고 하는데, 사실 어떤 그룹인지는 실례인 것 같아서 안 물어봤어요. 아무튼 저택 안으로 들어가면 정면에 대리석 분수가 있는, 그런 저택이었죠.”
식품 그룹, 대리석 분수가 있는 저택. 은엽은 어렵지 않게 지헌의 집이라는 걸 유추할 수 있었다.
“그 집 사모님이랑 미리 연락만 트고 지내다가 호출이 와서 가게 됐어요. 근데 되게 이상한 주문을 받았어요.”
“무슨 주문을요?”
“전화기를 하나 주더니, 어딘가에 전화해서 얼굴도 모르는 여자한테 막말을 해달라는 거예요. 대본도 있었는데. ‘부담스러우니까 더는 연락하지 말아줄래?’ ‘다시 연락할 때는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이런 말들 있잖아요. 그런 걸 해달라더라고요. 대충 감이 오시죠?”
은엽의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성우가 연기해낸 목소리는 의심의 여지 없이 완벽한 정지헌이었다.
“여자가 그 집 아들한테 매달리는데, 아들이 전화를 할 수 없는 상황이니까 아들 흉내를 내서 그 여자를 쫓아내달라는 거죠.”
“……그때 한 번뿐이었나요? 또 다른 주문은 없고?”
“그때 이후로는 연락이 없네요. 제 연기가 잘 통했는지, 그 여자가 정말 떨어져 나갔는지 그건 좀 궁금하긴 한데.”
“역시 재벌은 대단하네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여자한테 대뜸 그런 말을 하라고 시키다니.”
“이름 정도는 알죠. 기억나요.”
성우의 대답에 은엽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정오. 그런 이름이었어요. 이정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