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왜 엄마인가2021.10.20.
다음 날. 수요일 아침. 승규는 출근하자마자 지헌을 찾아갔다. 그리고 눈물을 머금은 눈으로 고마움을 전했다.
“그제는 덕분에 살았다, 정말 고마워, 사랑하는 친구.”
그제는 지헌이 방문해주지 않았다면 아이 셋을 줄줄이 데리고 병원에 가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아찔했다.
“어쩌다 보니 셋째가 생겼다…… 와이프가 너무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걱정이야.”
감사 인사 후에는 자리에 앉으며 신세 한탄을 했다. 그런데 지헌은 그런 승규에게 조금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이정오에 대해 알아봐 주겠어?”
무슨 일이냐 묻는 친구에게, 지헌이 대뜸 뒷조사를 부탁했다. 그 대상이 이정오라 승규도 조금 놀랐다.
“이정오 대리는…… 왜?”
“애가 있다고 하네. 미혼모래.”
“헉.”
“그냥 간단하게만 알아봐주면 돼. 누구랑 같이 살고 있는지, 남자가 있는지, 있었는지, 지금도 있는지.”
“…….”
“혹시 가능하다면 남자가 어떤 놈인지도 알아봐줘.”
“……그건 간단한 게 아닐 것 같은데.”
승규가 떨리는 음성으로 대꾸했다. 그러나 지헌은 부탁을 정정하지 않았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야. 부탁해.”
누군가의 뒷조사를 해본 적은 없어서 당황스러웠으나 승규는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헌이 이런 부탁을 한 것 또한 처음이었다. * 매월 둘째 주 수요일은 짜장면에 진심인 제작 2팀의 짜장면데이다. 정오는 잊지 않고 검정색 티셔츠를 챙겨 입었다. 어제에 이어 침울한 마음이었지만 짜장면은 못 참지. 마음과 옷이 혼연일체 블랙이 되니 블랙의 카타르시스가 솟아나는 것 같기도 했다. 복도를 걸어 회의실로 가는데, 정오와 마찬가지로 검정색 티셔츠를 입은 기훈이 말을 걸었다.
“우리 이렇게 입으니 커플 같아요.”
“그런 소리 하지 마. 내가 애 엄마라는 거까지 파다하게 퍼졌는데.”
“어쩌면 제가 대리님 좋아하는 것도 파다하게 퍼졌을지도 몰라요.”
“어휴. 매를 벌지. 기훈 씨가.”
정오는 기훈의 팔을 툭 때렸다. 성격 좋은 기훈이 맞으면서도 후후 웃었다. 겨우 지은 미소는 정면을 바라보고는 금세 풀렸다. 맞은편에서 지헌이 걸어오고 있었다. 지헌은 아무 내색도 없이 두 사람을 스쳐 갔다. 심장께에서 파직, 하고 무언가 부서지는 느낌이 났다. 그와 연인 사이로 돌아갔다고 느낀 것이 단 하루. 아니 몇 시간. 그 짧은 밀회는 하룻밤 꿈처럼 사라졌다. 원래대로, 진짜 원래대로. 혼자였던 때로 돌아왔다. 정오는 그 변화를 빠르게 받아들였다. 괜찮아, 나는. 이런 일에 일일이 절망할 만큼 약한 사람이 아니야. * 정신없는 가운데 PT 디데이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완벽하게 준비했음에도 계속 수정의 수정, 또 수정이 생기는 바람에 최종제안서는 ‘최종’으로 시작하여 ‘진짜진짜완전최최최종’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PT 당일. 만반의 준비를 갖춘 정예 멤버가 차량에 올랐다. PT 참석자는 기획팀 팀장, 성미란 팀장, 박영광 차장, 그리고 정오와 지헌이었다. PT 장소인 소리텔레콤 본사로 이동하며, 지헌이 당부했다.
“론칭이 급해서 광고를 수주하게 되면, 바로 촬영 일정을 잡아야 할 겁니다. PD님은 그 점 참고하시고 촬영 일정에 대해서 질문이 나오면 바로 대답하실 수 있어야 하고요. 우리는 일부 해외촬영이라 해외 로케이션에 대한 확신을 주면 점수를 딸 수 있을 것 같네요.”
“네, 이사님. 그 부분은 잘 준비했고 자신 있습니다.”
박영광 차장이 지헌의 말에 답했다.
“저도 잘될 거라 믿습니다.”
믿음직하게 미소 지은 지헌이 추가로 획득한 정보를 전했다.
“아시다시피 소리텔레콤 대표이사는 감동코드를 좋아한다고 합니다. 한가지 버릇이 있는데 얘기가 흥미로우면 엉덩이를 쭉 빼고 머리만 앞으로 내밀어서 발표자를 유심히 본다더군요. 그리고 최종적으로 마음에 들면 등허리를 의자에 기대고서 편한 자세를 취한다고 하고요. 대표이사의 의중을 잘 살피고, 시간 분배를 잘해서 좋은 결과를 얻길 바랍니다.”
정오는 오늘의 발표 분량만 생각하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오가 미혼모라는 사실이 밝혀진 이후로 지헌은 정오를 단 한 번도 따로 찾아오지 않았다. 발표자에게 할 말이 있을 때에도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만 말했다. 정오 또한 알게 모르게 지헌을 피해 다니게 되었다. 미란의 조언대로 회사의 소문이 잠잠해질 때까지는 지헌과 접점을 갖고 싶지 않았고, PT 준비에 집중하고 싶기도 했다. 정오는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후 은비의 괴롭힘이 없었고 PT 준비 또한 잘 진행되었으니 일상을 되찾은 셈이기도 했다.
“두 분 모두 어제 리허설 때처럼만 하시면 될 것 같네요.”
지헌의 격려에 정오는 긴장한 채로 미소 지었다. 언뜻 지헌과 눈이 마주치자 정오는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PT 장소에 도착한 멤버들은 대기실로 안내받았다. 맥스기획은 세 개의 광고대행사 중 마지막 순서였다. 정오는 바로 앞 팀의 멤버들이 회의장을 나서며 허탈한 한숨을 쉬는 것을 보게 되었다. 프레젠테이션 발표자에게 눈인사를 건네니 발표자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PT가 아니라 압박 면접이네요. 수고하세요.”
발표자의 소감을 듣게 되니 더욱 긴장하게 되었다. 정오는 마음을 다잡고서 회의장에 입장했다. 엄숙한 분위기, 시커먼 사람들. 아무리 봐도 자신의 또래는 보이지 않았다. 웃음기는 조금도 없을 것 같은 임원들의 앞에서 자신이 잘할 수 있을까 걱정되었다. 미란이 테이블 아래에서 정오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미란의 손이 왠지 차가워서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정지헌 이사님이 직접 오셨군요.”
소리텔레콤의 대표는 지헌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세련그룹 회장님의 자제분이시니 그들끼리는 서로 알고 지낼 수도 있겠지.
“네. 안녕하십니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지헌이 짧게 인사하고 기획팀 팀장에게 바통을 넘겼다. 바로 프레젠테이션이 시작되었다. 기획팀 팀장이 기획안을 발표하는 동안 정오는 임원들의 표정을 살폈다. 대표이사는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표정 변화는 거의 없었다. 기획팀 팀장이 관록 있게 내뱉은 농담에도 웃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래도 무난하게 발표를 마쳤다. 이윽고, 정오의 차례. 청중을 앉아서 바라보는 것과 일어나서 바라보는 것은 확실히 달랐다. 청중의 바로 끝, 함께 참석한 멤버들의 얼굴도 하나하나 눈에 담겼다. 그리고 그 가운데 정지헌. 무감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그 눈빛이 왠지 조금 믿음직스럽게 여겨졌다.
“안녕하십니까. 맥스기획 카피라이터 이정오입니다.”
정오는 발표를 시작했다. 정오의 발표는 기획안보다는 반응이 좋았다. 발표가 진행되는 동안 소리텔레콤의 대표이사는 의자를 뒤로 빼고서 턱을 괴고 정오를 바라보았다. 표정은 역시 변하지 않았지만 꽤나 관심 있는 눈빛이었다. 정오는 대표이사의 반응을 주시하며 완급을 조절했다. 정오의 발표까지 무사히 끝나고 다시 기획팀 팀장이 전체 일정과 매체 기획안을 발표했다. 발표 이후에는 예상한 대로 촬영 일정에 대해 질문이 들어왔고 박영광 차장이 일어나 해외촬영까지 보장할 수 있다는 점을 못박았다. 매체에 대한 질문에는 기획팀 팀장이 스마트하게 답했다. 세련그룹 계열사와의 협력안에 대해서는 지헌이 직접 대답하여 신뢰도를 높였다. 제작안에 대해선 별다른 질문이 없었다. 그렇게 끝날 줄만 알았는데, 마지막으로 대표이사가 정오를 불렀다.
“이정오 카피님?”
“네.”
정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브랜드가 엄마의 마음을 보여줘도 될까요?”
“…….”
“이정오 카피라이터 님에게 ‘엄마’란, ‘엄마들’이란, 어떤 존재죠?”
‘왜 엄마인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경쟁사의 발표자가 말한 압박 면접이란 게 이런 거였을까. 정오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생각했다. 나의 엄마가 떠오르고, 나를 엄마라고 부르는 나의 아이가 떠오르고. 아이를 떠올리니 눈앞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지헌이 더욱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다시 아이의 여러 가지 표정이 떠올랐다. 사랑해. 너를 사랑해. 너무 사랑해서, 미안해. 최선을 다했으나 결국 부족하고 말았던 모든 것들이 미안해졌다. 언제나, 매번 미안하다고 말하는 엄마의 얼굴도 떠올랐다. 자신이 부족한 엄마라고 몇 번을 얘기하던 진서의 모습도 스쳐갔다.
“엄마는. 엄마들은요.”
조용한 가운데, 정오가 입을 열었다.
“잔뜩 주고도 주지 못한 것을 굳이 찾아내 마음 아파하는 이들입니다.”
의자를 뒤로 뺀 채 정오를 쳐다보고 있던 대표이사가 테이블에 올려놓았던 손을 내리고서 척추를 바로 세웠다.
“미앤톡은 마음을 공유하는 어플이 될 거라고 확신합니다. ‘보고싶다’라는 말 속에 녹아 있는 엄마의 사랑과 아픔까지 들여다보는 어플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윽고, 어깨에 힘을 뺀 대표이사가 편안히 의자에 등을 기댔다. 보일 듯 말 듯 희미하게 미소 지은 대표이사가 말했다.
“수고했습니다. 나가셔도 좋습니다.”
맥스기획의 멤버들은 기자재를 챙겨서 밖으로 나왔다. 다들 아쉬운 게 생각나는 듯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성미란 팀장의 얼굴은 눈에 띄게 불편해 보였다. 정오도 압박 면접을 끝내고 나온 듯 다리가 후들거렸는데 지헌의 표정만은 얄밉게도 후련해 보였다.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돌아가죠.”
지헌이 모두에게 말했다. 그때 다시 회의장 문이 열리고 남자 한 명이 외쳤다.
“맥스기획 관계자분들. 다시 들어오셨으면 합니다.”
지헌의 얄미웠던 미소가 더욱 깊어졌다. 지헌이 앞장섰다. 정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뒤따랐다. 회의장 안으로 들어가니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나 지헌에게로 다가가 악수를 청했다.
“임원들 만장일치로, 맥스기획으로 정했습니다.”
지헌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접대용 미소를 일관하며 대표의 손을 맞잡았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일정이 빠듯합니다. 바로 촬영 준비하셔야 할 겁니다.”
“네, 대표님. 실무진들과 협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주 시원한 결정이었다. 그제야 한숨을 돌린 정오의 두 눈에 맑은 이슬이 맺혔다. 노력하고 고생한 것들이 보상받은 것 같아 울컥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성미란 팀장의 표정은 좀 전보다 더 안 좋아졌다. 에어컨 바람이 추울 정도였는데도 미란의 이마에는 송글송글 땀이 맺혀 있었다. 돌아가는 길, 기쁜 마음을 잠시 뒤로 하고, 정오가 미란에게 물었다.
“팀장님, 너무 안색이 안 좋은데요.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
“그러게, 나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은데…….”
미란이 끙끙거리며 말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PT 참석자들을 태운 차는 바로 병원으로 갔다. 이제 미란은 걷는 것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다른 이들은 회사로 돌아가고, 정오가 대표로 남아 미란의 곁에 있게 되었다. 진찰 결과 급성충수염. 급하게 수술이 진행됐다. 수술실에 실려 들어갔다가 나온 미란의 얼굴은 그사이에 반쪽이 된 것 같았다. 정오는 걱정을 하는 이들에게 소식을 전하고 계속 미란의 옆을 지켰다. 마취에서 깨어난 미란은 골골거리면서도 가장 먼저 일정을 챙겼다.
“오늘 오후에 화장품 미팅 있는데.”
“네. 박영광 차장님이 챙기실 거예요. 팀장님은 4일은 입원하셔야 할 것 같고요.”
“금요일에 당장 출장을 가야 하는데…….”
반대편을 바라보고서 한숨을 푸욱 쉰 미란이 힘겹게 고개를 돌려 정오에게 말했다.
“이 대리, 여권은 있지?”
“찾아보면 어딘가에 있긴 하겠지만…….”
“그럼 됐어. 갔다 와.”
“……호주에요? 제가요?”
“이 대리가 가본 곳이라며. 아는 데니 더 수월할 테지.”
“아니 그래도 그건 7년 전이고…….”
“이 대리가 최고 적임자야. 다녀와.”
정오는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고 미란을 바라보았다.
“나도 카피라이터 출신인 거 알지? 이 대리도 언젠가 CD(Creative Director)가 될 거잖아. 그때 되면 다 해야 할 일이야.”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미란은 정오의 부담을 덜어주고자 미소 지었다.
“잘 부탁해. 잘할 수 있을 거야.”
미란의 거듭된 설득에 정오도 결국 임무를 수락했다. 미란의 대리로 나서게 된 3박 5일간의 해외 일정. 정오는 부담감과 설렘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촬영지는 다름 아닌 호주 멜버른. 정지헌 씨, 우리가 처음 만난 곳. 그곳에 다시 가게 되었어. * 온에어까지 빠듯한 일정이라 박영광 차장은 광고 수주에 대한 기쁨을 나눌 새도 없이 곧바로 움직이게 되었다. 일단 금요일 해외 촬영 출국이 확정되었고 기획팀 팀장과 박영광 차장, 그리고 이정오 대리가 대표로 떠나게 되었다. 영광은 바로 서류를 작성하여 지헌에게 보고했다.
“성미란 팀장님이 수술을 하시는 바람에 이정오 대리가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이정오 대리가 PT 준비를 가장 열심히 했고 또 학생 시절에 호주에서 지냈던 경험이 있어서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호주에서 지냈다고요?”
“네. 촬영지 인근을 잘 안다고 합니다.”
지헌은 가늘어진 눈으로 영광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내려 서류에 사인하며 말했다.
“아무리 이정오 대리가 일을 잘한다고 해도 성미란 팀장과 직급의 차이가 있는 만큼, 우리를 신뢰해서 일을 맡긴 클라이언트가 서운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정오 대리만큼의 적임자는…….”
“저도 가겠습니다. 그럼 밸런스가 맞겠죠.”
“……네?”
“일요일에 따로 갈 테니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지헌은 무심한 어투로 대답하고는 서류를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