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다시 만나 반가워요2021.10.23.
금요일 저녁.
“엄마아. 잘 갔다 와. 선물도 많이 사 와.”
예나가 출장을 떠나는 엄마에게 손을 흔들었다. 정오가 짐을 챙기는 내내 울다가 뽁뽁이 장난감을 사주겠다는 할머니의 약속에 마음이 풀려 작별인사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애 걱정은 하지 말고 일 열심히 해. 음식 조심하고!”
딸을 떠나보내는 국순도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응. 엄마도 잘 있어. 우리 공주님은 할머니 말씀 잘 듣고!”
정오도 씩씩하게 인사하고 문을 나섰다. 미란이 입원해 있는 며칠 동안 정오는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미란의 대리로서 병원을 오가며 미란과 협의하고 박영광 차장과 함께 촬영 스케줄을 챙기며, 출장으로 자리를 비우는 동안의 현업에도 차질이 없도록 조율하며 빠듯한 시간을 보냈다. 한시라도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광고주가 미란의 부재로 제작물의 퀄리티가 낮아졌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했다. 정오는 기내에서도 계속 방대한 자료들을 훑었다. 환승 시간까지 포함해서 15시간의 긴 여정 끝에 정오는 호주 멜버른에 도착했다.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하루를 지나 토요일 오후 2시가 되었다. 정오는 숙소에 짐을 풀 새도 없이 로케이션 매니저의 안내에 따라 멜버른 시내로 향했다. 토요일엔 모든 촬영 장소를 사전 체크하고 일요일부터 화요일 새벽까지 사흘간 촬영이 이루어진다. 7년 만에 밟는 땅. 정오는 차 안에서 시내의 건물들을 올려다보며 탄식했다. 7년 전과 달라진 게 거의 없었다. 마치 7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일었다. 건물들, 가게들이 그 풍경 그대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은 정오에게 찡한 위안을 주었다. 로케이션 매니저가 물었다.
“대리님이 예전에 멜버른에서 지내셨다고 하셨죠?”
“네. 7년 전에 몇 개월이었지만요.”
“그래도 건물들이 거의 변한 게 없어서 기억이 새록새록 나시겠어요.”
“그러네요, 정말. 저는 변했는데 여기는 그대로네요.”
정오는 멜버른의 풍경을 두 눈과 가슴에 담았다. 토요일의 벅찬 하루가 금세 지나고, 일요일이 되었다. 일요일은 새벽부터 준비를 시작해서 아침 9시부터 촬영에 돌입했다. 해변의 건물을 빌려 진행된 촬영이었는데 주변을 통제하느라 꽤 애를 먹었다. 촬영이 한창일 때, 박영광 차장이 고민스럽게 물었다.
“점심 뭐 먹지? 곧 정지헌 이사님도 오실 텐데.”
지헌의 이름이 들려오자 정오는 어깨가 뻣뻣해지는 느낌이었다. 지헌이 촬영팀에 합류하게 되었단 소식을 정오도 수요일쯤 들었다. 항공편도 숙소도 사비로 해결하는 비효율적인 출장이란다. 순전히 광고주의 기분을 맞춰주려 선택한 일이라고 하는데, 역시나 소리텔레콤의 임원진들이 크게 좋아했다고 한다. 그들이야 좋겠지만, 맥스기획 실무진들은 조금 불편하다고. 그중에서 내가 제일 불편하겠지만. 속으로는 불만이 가득했지만 정오는 내색하지 않고서 인터넷 검색을 시작했다.
“광고주가 로컬푸드가 먹고 싶다고 언뜻 말했었는데. 식당 문 연 데가 있으려나? 뭐 추천할만한 데 있어?”
“잠시만요.”
지도를 확인한 정오가 밝은 표정을 지었다. 좋아했던 식당이 여전히 그대로 그곳에 있었다.
“오. 이 식당 지금도 그대로네.”
“어디?”
정오가 박영광 차장과 기획팀 팀장에게 식당 사진을 보여주며 설명했다.
“‘더 크라운’이라고, 제가 진짜 좋아했던 식당이에요. 메뉴도 많고 맛있고 여기서 가깝고 일요일에도 영업하고요. 거기 미트파이가 끝내주게…….”
오 마이 갓! 정오의 말이 돌연 끊겼다. 그곳은 한쪽 벽면을 손님들의 사진으로 가득 채운 식당이었다. 나는 그 식당에 정지헌을 데려갔었지. 그리고 거기서 사장님이 사진을 찍어주셨었어……. 정지헌과 둘이서 찍은 사진이 벽면 어딘가에 붙어 있을 수도 있는데…….
“그렇게 끝내주게 맛있으면 꼭 가야지. 정말 여기 좋아 보인다, 이 대리.”
그러나 이미 사진을 보고 반해버린 영광은 행복해진 눈빛으로 찬성의 의사를 보였다. 정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장님, 저 잠깐만 어디 좀 다녀와도 될까요? 한 시간, 아니, 40분 정도 걸려요.”
“어? 무슨 일 있어?”
“네. 오는 길에 식당도 예약해놓을게요.”
“어. 그래그래. 그럼 되겠다.”
정오는 건물에서 나와 재빨리 내달렸다. 식당까지 가는 길은 여전히 눈에 훤했다. 가는 길에 모자까지 구입해 푹 눌러 썼다. 더 크라운. 식당은 간판부터 실내 인테리어까지 7년 전 그대로였다. 그 풍경을 다시 만나 가슴이 찡했지만 감상할 여유는 없었다. 정오는 사진이 붙어 있는 벽면 구석에 자리하여 음료수를 시켰다. 아직 점심때가 되지 않아 식당 안은 한산했다. 정오는 내부 직원들의 눈치를 보며 벽면을 빠르게 훑었다. 세상에! 사진이 있어! 정오의 눈높이보다 살짝 아래쪽에 붙어 있는 사진이라 찾기가 쉬웠다. 정오는 사람들이 보지 않는 틈을 타 사진을 떼어버렸다. 이윽고 음료수가 나왔다. 정오는 음료수를 벌컥벌컥 마시고서 식당을 나서며 테이블 예약까지 무사히 마쳤다. 흐아아아. 긴박함과 죄책감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댔다. 정오는 주머니에 넣었던 사진을 꺼내 보고는 크게 한탄했다. 이 유물 같은 것이 어떻게 지금까지 남아 있었을까. 스물여섯 밤톨머리 정지헌과 스물세 살 긴 생머리의 이정오. 입술을 길게 늘여 지은 편안한 미소가 왠지 오누이처럼 보이는 사진이었다. 그때의 우리는 뭐가 그렇게 좋아서 이렇게 예쁘게 웃었던 걸까. * 한국에서의 일정을 정리하고 토요일 밤 비행기에 오른 지헌은 일요일 오전에 멜버른에 도착했다. 여권상으로는 7년 전 제대 후 호주로 여행을 떠났었다. 그중 멜버른이 가장 마지막 여행지였던 것 같은데, 멜버른의 호텔에서 3일 머무른 후 약 3주간은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돈과 시간을 들여 여행을 했지만 기억이 없으니 추억할 것도 없는 곳. 그럼에도 왠지 멜버른의 시내 곳곳이 익숙한 느낌이라 눈이 조금 시렸다. 호텔에 짐을 풀고 바로 나온 지헌은 기획팀 팀장에게 연락했다.
[네. 이사님.]
“팀장님, 저는 해변으로 나왔는데, 건물이 잘 안 보이네요.”
[지금 이정오 대리가 나갔습니다.]
팀장이 답변을 주기 무섭게 정면에서 나비처럼 사뿐사뿐 뛰어오는 여자가 보였다. 정오가 가까워 오는 시간이었다. 낮의 한가운데. 태양 한가운데. 왠지 시린 풍경 속에 이정오가 있었다.
사뿐사뿐 뛰어오던 그녀는 지헌을 발견하고는 찬찬히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그를 의식한 듯이. 아주 더디게 가까워진 그녀가 조금의 반가운 기색도 없이 사무적인 표정으로 인사했다.
“이사님 오셨어요.”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은 이제 없는 일이 되었나? 키스 한 번 한 거 갖곤 어림없나? 당신에게 내 존재감은 그 정도인가?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을 텐데 딱 선을 긋듯이 깍듯한 태도에 지헌 또한 상응하는 대답을 들려줄 수밖에 없었다.
“네.”
“광고주 분들은 저쪽에 계십니다. 가시죠.”
정오는 뒤돌아 앞장섰다. 당장이라도 손목을 잡아끌지는 않을까, 얼마 전처럼 대뜸 입술을 맞추어오지 않을까, 그녀는 긴장하여 몸을 움츠렸다. 그에게는 형언할 수 없는 오라가 있다. 자석 곁의 철가루가 보여주는 패턴처럼 주변의 모든 것들을 제 뜻대로 정렬시켜버릴 것만 같은 카리스마. 속된 말로 ‘기가 센 놈’이라고 하지. 그래서 그의 곁에 바짝 붙어설 수가 없었다. 거리를 두고 길을 지나며 그에게 물었다.
“식사하셨어요?”
했다고 해. 했다고 해. 했다고 해. 정오는 마음속으로 중얼댔다.
“아직 못 했습니다.”
“다 같이 로컬푸드 식당에 가려고 하는데 괜찮으세요?”
싫다고 해. 싫다고 해. 싫다고 해.
“네. 뭐든요.”
흐아. 결국 그 식당을 가고야 말겠다는 것인가. 정오는 한 시간 전에 박 차장에게 식당을 추천해준 것을 크게 후회했다. 지헌은 광고주와 인사하고 현장을 체크했다. 마침 딱 점심시간이 되어서 현장은 제작사 감독에게 맡기고 정오는 광고주와 기획팀 팀장, 박영광 차장, 그리고 지헌과 함께 식당으로 이동했다. 식당으로 가는 동안 계속 가슴이 벌렁거렸다. 식당을 바로 눈앞에 두니 머릿속이 하얗게 질렸다.
“아아아…….”
정오는 배를 부여잡고서 앓는 소리를 했다.
“저는 갑자기 배가 아파서 화장실에 가야 할 것 같아요. 저 신경 쓰지 마시고 들어가셔서 식사하세요.”
어설픈 앓는 연기에 지헌의 이맛살이 찌푸러들었지만 정오는 능청스럽게 기획팀 팀장에게 말하고서 조금씩 발을 뒤로 뺐다.
“팀장님 이름으로 예약했어요. 그럼 잘 부탁드릴게요…….”
정오가 줄행랑친 후 영광이 걱정스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좋은 식당 추천해주고 자기는 못 먹으면 안타까워서 어떻게 하나…….”
“이 대리가 추천한 식당입니까?”
지헌이 물었다.
“네, 이사님. 이정오 대리가 워킹홀리데이 하던 시절에 갔었던 식당이라고 하네요.”
지헌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계속 자신을 피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식당 안에는 어느덧 사람이 많아져 있었다. 기획팀 팀장이 사장에게 이름을 말하니 사장이 빈 테이블로 사람들을 안내했다. 지헌이 가장 늦게 식당에 들어섰다.
“어어?”
그런데, 돌연 식당 사장이 지헌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눈이 동그래졌다. 지헌은 입술을 일자로 다물고서 사장을 바라보았다. 사장의 얼굴이 이내 밝아지더니 활짝 웃는 표정으로 지헌의 손을 귀하게 잡았다.
“다시 만나 반가워요!”
“저를 아십니까?”
지헌이 영어로 물었다.
“당신이 몇 년 전에 우리 식당에 왔었는데, 기억 못 하나요?”
“아, 죄송합니다. 기억에 없어서요.”
몇 년 전에 식당을 방문한 걸 기억하는 사장이라니, 지헌은 딱히 신뢰는 가지 않는 눈빛으로 쓰게 웃었다.
“이런. 나는 당신 이름도 안다고요. 미스터 정. 내 기억력은 이 동네 제일인데.”
사장은 기억하지 못한다는 지헌을 안타깝게 여기며 더 말을 붙였다. ‘미스터 정’이라는 호칭에 지헌이 사장을 다시 바라보았다. 사장은 사진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벽을 가리켰다.
“내가 당신 사진을 찍어서 여기 붙여놨는데, 손님들이 난리가 났었거든요. 여자친구는 잘 있어요?”
“……여자친구요?”
“같이 사진 찍은 사람, 여자친구 아니에요? 헤어졌나요?”
“저랑 같이 사진을 찍은 사람이 있었다고요?”
“잠깐만요. 찾아볼게요.”
사장이 눈을 빛내며 벽면을 훑었다. 그러나 금세 사장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정오가 사진을 빼간 딱 그 자리를 손으로 짚으며, 사장이 직원을 향해 말했다.
“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사진이 여기 붙어 있었던 거 같은데. 어디 갔지? 청소하면서 없어졌나?”
그럼 그렇지. 지헌은 무감한 표정으로 끄덕였다.
“이런. 미안하네요.”
하지만 사장은 지헌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서도 포기하지 못하는 듯 벽면의 사진을 하나하나 살펴나갔다. 그리고.
“오! 여기 있네요!”
마침내 다시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