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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각오하고 와요 (52/183)

52. 각오하고 와요2021.10.27.

식당 ‘더 크라운’의 사장이 벽에서 사진 하나를 떼어내 지헌에게 다가갔다.

16551149267217.jpg“이거 보여요? 바로 이 사람이 당신이에요.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이 사람이 당신이 데려온 여자고. 기억나요?”

지헌은 눈살을 찌푸리고서 사진을 유심히 보았다. 사장이 보여준 사진이란 사진 속의 사진. 그러니까 지헌의 사진을 배경으로 찍은 또 다른 사진이었다.

16551149267222.jpg“오! 정말 이사님 맞는 것 같은데요! 정말 신기하네요.”

박영광 차장이 사진을 확인하고서 말했다. 지헌의 얼굴은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작았다. 군대에서 제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짧은 머리에, 씨익 미소 짓고 있는 사진이었다. 그가 알 수 없는 여자와 함께 있었다. 지헌의 얼굴은 뚜렷한 반면 그 옆 여자의 얼굴은 좀 더 멀었고, 상대적으로 초점이 맞지 않아 흐릿했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머리 또한 지끈거렸다. 여자에 대해 확인 가능한 건 캐릭터가 그려진 하늘색 티셔츠. 그리고 긴 생머리. 지헌은 사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사진 이미지를 휴대폰에 저장했다. 눈으로 직접 확인을 하고서도 사실 믿을 수가 없었다. 내게 정말 여자친구가 있었나? 아니, 믿고 싶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기억을 되찾길 몸이 거부하는 건가? 이제 이정오를 마음에 담아버려서? 이 와중에도 이정오가 생각났다. 정오를 보면 명치가 욱신거리도록 아팠다. 그녀에게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인 것 같았다. 당신에게는 아이가 있고, 내게는 여자친구가 있었다면 우리의 처지가 조금 비슷해지나? 나도 당신을 원망할 필요가 없는 건가? 더 이상은 지체할 필요가 없는 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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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오는 결국 식당에 들어가지 못하고 혼자서 끼니를 때웠다.

16551149267222.jpg“이 대리도 왔으면 재미있었을 텐데. 거기서 우리 이사님의 흔적을 확인했어. 이사님이 7년 전에 그 식당에서 사진을 찍은 적이 있었더라고. 식당 사장님이 그걸 기억하신 거 있지. 근데 사진은 사라졌다더라.”

영광이 식당을 다녀온 소감을 말했다. 정오가 깜짝 놀라 물었다.

16551149267236.jpg“사장님이 기억을 하신대요? 7년 전 일을요?”

16551149267222.jpg“응. 미스터 정. 이름도 기억하더라니까. 이사님이 너무 잘생겨가지고, 사진을 붙여놓으니까 사람들이 엄청 좋아했었나 봐. 우리 이사님 외모는 국제적으로 통하네.”

16551149267236.jpg“…….”

16551149267222.jpg“근데 이사님은 기억이 없잖아. 기억상실증인가 뭐 그럴걸? 그래서 아무 기억도 못 하더라. 안타까운 일이지.”

정오는 몰래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식당에 함께 들어갔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아찔했다. 영광의 어깨너머로 지헌의 모습이 보였다. 정오는 곧장 고개를 돌렸다. 다시 일에 열중해야 할 시간이었다. 광고는 주인공 모델이 워킹홀리데이로 호주에 와 식당에서 서빙과 설거지를 한다는 설정이었다. 정오의 경험에서 얻은 아이디어를 발전시킨 스토리였다. 정오는 7년 전 워킹홀리데이로 멜버른에서 생활하며 호텔 청소를 했다. 돈도 벌고 영어공부도 하겠단 큰 꿈을 안고서 바다 건너 날아왔지만 사람을 몇 명 만나지도 못하는 일밖엔 구할 수 없었던 처지. 게다가 급료도 많지 않아 언제나 생활이 빠듯했다. 주말에도 놀러 갈 생각은 하지 못했고 참가비를 내는 모임은 끼기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불행끼리 손을 잡고 밀려온 한 주였다. 집주인이 월세를 올려버려 모아둔 돈을 탈탈 털어 월세를 치르고 다음 주급을 기다리는 며칠. 집에 먹을 게 똑 떨어져서 하루 종일 굶다가 이틀째 되던 날, 정오는 염치 불고하고 같이 일하던 친구에게 10달러를 꾸었다. 그리고 한인마트를 향해 달려가던 길, 횡단보도 앞에서 누군가와 부딪히고 말았다. 부딪힌 데가 아팠지만 얼른 마트에서 무언갈 사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시원스럽게 털어내고서 마냥 뛰었다. 그런데, 마트에 다다라 주머니를 확인해보니 돈이 없었다. 어딘가에서 떨어뜨렸을 것 같아 정오는 가던 길을 되짚어 다시 가보았다. 그러나 어디에도 10달러 지폐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의 서러움이란.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느냐며 서글프게 훌쩍거리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정오를 불렀다.

16551149267254.jpg“실례합니다. 한국분이시죠?”

16551149267236.jpg“…….”

16551149267254.jpg“제가 아까 부딪힌 사람인데요, 혹시 많이 다치셨나 해서.”

그 사람이 정지헌이었다. 부딪힌 것이 아파서 우는 줄 알고 쫓아온 것이었다. 정오는 체면도 잊고 더 크게 울었다. 이 영어 천지의 나라에서 들려오는 반가운 한국어에, 그리고 배고픈 서러움에 눈물이 폭폭 쏟아졌다. 그게 지헌과의 첫 만남이었다.

16551149267236.jpg‘그때는 밤톨 같은 이미지였는데.’

정오는 7년 전, 조금은 소년미를 간직하고 있던 지헌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때의, 조금 더 어렸을 때의 정지헌은 예나와 약간 닮은 것 같기도 했다. 특히 시크하게 눈꺼풀을 내릴 때. 가끔 예나도 세상을 다 안다는 투로 도도한 표정을 지을 때가 있는데 그때는 성격까지 빼다 박은 것 같아 우스웠다. 부디, 아빠를 닮을 거라면 7년 전의 아빠를 닮아주길. 7년 전의 그는 무척 상냥했고 남다른 배려심을 가지고 있었다. 말은 많지 않았지만 조용히 사람을 웃길 줄도 알았다. 그래서 지헌을 좋아하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여러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데,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깜짝 놀라 화면을 확인했다. 국순의 전화번호가 찍혀 있었다. 정오는 잠시 촬영장을 빠져나와 전화를 받았다.

16551149304293.jpg[여보세요. 엄마!]

정오가 전화를 받자마자 귀여운 꼬맹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오도 함박웃음을 머금고 연락을 반겼다.

16551149267236.jpg“예나 공주!”

16551149304293.jpg[엄마, 선물 샀어?]

16551149267236.jpg“뭐 갖고 싶은데?”

16551149304293.jpg[캥거루!]

16551149267236.jpg“캥거루를 어떻게 데려가.”

16551149304293.jpg[아니 캥거루 인형! 엄마, 나는 캥거루가 좋아.]

16551149267236.jpg“캥거루가 왜 좋아?”

16551149304293.jpg[주머니가 엄청 커. 엄마 캥거루가 거기다가 애기를 넣어갖고 다녀.]

예나가 야무지게 말을 이었다.

16551149304293.jpg[나도 캥거루가 돼서 엄마 주머니에 들어가고 싶어!]

아아. 칵 깨물어주고 싶은 나의 공주님. 엄마도! 엄마도! 엄마도! 엄마도 널 주머니에 넣어서 데리고 다니고 싶다! 정오는 당장 서울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눌러 삼키며 인사했다.

16551149267236.jpg“우리 딸, 할머니 말씀 잘 듣고 어린이집도 잘 다녀와. 알았지? 엄마는 화요일 저녁때 갈게. 알았지?”

16551149304293.jpg[응! 빨리 와!]

기분 좋게 미소지으며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려는데 주머니 안에 무언가 걸리적거렸다. 낮에 주머니에 넣어놓은 사진이었다. 정오는 사진을 꺼내 다시 들여다보았다. 오늘 지헌의 표정을 확인하니 7년 전의 이 미소는 더욱 멀게 느껴졌다. 다시 죄책감이 일었다. 이 추억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식당의 재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6551149267236.jpg‘다시 몰래 갖다 놓을까?’

그 사람이 다시 식당을 찾을 리는 없을 테니까. 정오는 잠깐 밖으로 나온 김에 식당까지 얼른 뛰어갔다 오기로 했다. 지구 반대편으로 오니 계절의 차이를 실감한다. 한국은 여름이지만 호주는 겨울이었다. 날짜상은 겨울이지만 시원한 가을 날씨 정도. 그래도 아침저녁으로는 꽤 추워서 정오는 몸이 으슬으슬했다. 내가 기나긴 겨울을 살고 있을 때 당신은 짙은 여름의 어딘가를 헤매고 있었을까. 그 생각을 하니 슬퍼졌다. 몸도 마음도 추워서 계속 걸음이 빨라졌다. 그러나 횡단보도 앞에서 정오는 더 발을 내딛지 못하고 멈춰서게 되었다. 왜 여기 있는 건데!

16551149267236.jpg‘씨이…….’

어째 이렇게 되는 일이 없을까. 눈앞에서 지헌을 알아본 정오는 곧장 돌아섰다. 그녀가 말 한마디 걸지 않고 떠나려 하니 등 뒤에서 지헌이 소리를 냈다.

16551149267254.jpg“계속 피하려고?”

정오의 발이 다시 멈췄다.

16551149267254.jpg“언제까지 피하려고.”

정지헌이라는 자석에 의해 다시 정렬되는 철가루처럼 어쩐지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지도 못하는 자신이 하찮게 느껴졌다. 어느새 그는 저벅저벅 걸어 그녀의 눈앞에 와 있었다.

16551149267254.jpg“날 내 남자라고 하던 패기는 다 어디 갔는데.”

그가 시크하게 눈꺼풀을 내리며 말을 걸었다. 놀리는 건지 정말로 그 패기가 어디 갔느냐고 묻는 건지 알 수 없었다.

16551149267254.jpg“이정오 씨, 나한테 사과해야 하지 않아요?”

16551149267236.jpg“제가 뭘요.”

16551149267254.jpg“어머니랑 둘이 산다며.”

그의 목소리가 더 날카로워졌다. 그녀의 거짓말을 책망하는 거였다. 울컥 소리를 지르고 싶어졌다. 나라고 뭐, 엄청엄청 예나의 존재를 숨기고 싶었는 줄 알아? 그러나 소리는 나오지 않고 눈물만 나왔다. 여기는. 여기는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횡단보도잖아, 바보야.

16551149267254.jpg“왜 울어.”

아무것도 모르는 지헌은 정오를 나무랐다. 지헌은 정오가 미웠다. 점심시간에 나타나지 않아 더욱 미웠다. 자신에게 솔직하지 않았다는 것, 같은 팀 동료 송기훈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자신에게 숨겼다는 것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이유를 찾았다. 그녀가 자신에게 사실을 말하지 않은 건 다른 사정이 있기 때문이라고 애써 생각했다. 이를테면 그에게 허물없이, 잘 보이고 싶은 마음 같은. 그거라면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그의 마음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거였다. 그녀가 겁을 먹은 것 같아, 화가 나는 와중에도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16551149267254.jpg“당한 건 난데 당신이 왜 울어.”

16551149267236.jpg“울 수도 있죠. 내 눈으로 내가 우는데 뭐가 어때서.”

16551149267254.jpg“그럼 뭐 때문에 우는데. 나한테 거짓말한 게 미안해서?”

16551149267236.jpg“아뇨! 내 매정한 전남친이랑 이사님 하는 짓이 똑같아서요.”

16551149267254.jpg“그런 자식 얘기를 하고 싶어요?”

화를 참으려고 했는데 그녀의 도발에 울컥 감정이 올라왔다.

16551149267254.jpg“지금 당신이 하는 짓이 얼마나 못됐는지 모르지.”

16551149267236.jpg“…….”

16551149267254.jpg“전남친 생각하면서, 왜 내 앞에서 이래. 그 자식한테나 가지.”

그런 그녀가 미련스러웠고, 미웠고, 안타까워서 아팠다. 하지만 그럼에도 포기할 수가 없는 마음. 정말로 그 자식한테 가버리면 어쩌나 하는 조마조마함이 그다음 말을 술술 불러들였다.

16551149267254.jpg“아이를 숨겼다는 건 그만큼 나한테 잘 보이고 싶었던 거 아니에요? 그래놓고 다 탄로 나니까 전남친 얘기를 해서 내 성질을 돋우려고?”

16551149267236.jpg“…….”

16551149267254.jpg“그냥 이정오 씨 목표는 나를 다 헤집어놓는 거, 그건가? 원하는 게 뭐예요, 대체.”

16551149267236.jpg“…….”

16551149267254.jpg“나한테 원하는 게 있으니 나한테 맞춰줬을 거 아니야. 키스도 다 받아주고.”

순간 그녀가 무언가를 말하려는 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서 입을 뻐끔거렸다. 누군가에게 목소리를 빼앗긴 것처럼, 말을 잃은 인어공주처럼 애달픈 눈빛이었다. 하나는 알았다. 이 여자도 자기 마음을 무척이나 억누르고 있다는 걸. 아이 때문일 수도 있고 회사의 이목이 두려워서일 수도 있다.

16551149267254.jpg“그 자식 얘기는 용서 못 해요. 말하지도 말고 생각하지도 마.”

그렇다면, 그가 한 발짝 더 움직일 수밖에 없다.

16551149267254.jpg“다시 시작하고 싶으면 뒤돌아보지 마요. 과거에 미련 남기지 말고, 나처럼 기억이 싹둑 잘렸다고 생각해요. 그럼 의외로 편하니까.”

사실 그녀가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도 이럴 생각이었다.

16551149267254.jpg“쿠키상자에는 쿠키만 담으라며. 그쪽도 그래. 나한테 올 때는 딴 놈을 담지 말아야지.”

이제 그는 그녀와 교감했던 그 시간을 없던 일로 만들 수가 없었다. 11시간 가까운 비행 끝에 이곳을 찾아온 것 또한 같은 이유였다. 당신을 보기 위해. 갖기 위해. 자꾸 내 곁에서 빠져나가려는 당신을 기어이 붙잡기 위해. 내가, 누군가의 인생에 들어가려고 이토록 간절했던 적이 있었나? 지헌은 주머니에 들어 있던 호텔 출입문 카드를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

16551149267254.jpg“올 때는 각오하고 와요. 하룻밤 놀고 입 싹 씻을 생각하지 말고.”

16551149267236.jpg“…….”

16551149267254.jpg“한 번 붙잡으면.”

16551149267236.jpg“…….”

16551149267254.jpg“안 놔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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