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왜 그랬어요?2021.11.17.
“안녕하세요!”
예나가 해맑게 인사했다. 그리고 더 뒤편에 있는 정오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저씨. 우리 엄마예요. 우리 엄마는 카피라이터예요.”
정오는 여전히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놀란 기색이 역력한 채로 굳어 있었다. 지헌은 그녀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또한 그랬으니까. 지헌은 예나에게 솔직히 털어놓았다.
“아저씨도 알아.”
“어떻게 알아요?”
“아저씨도 그 회사 다녀.”
“어? 엄마! 아저씨도 엄마 회사 다녀?”
예나가 고개를 돌려 정오에게 물었다.
“어…….”
정오가 움직이지 않는 입을 겨우 열어 대답했다. 말문이 막혀 그 이상 말하는 건 힘든 상태였다.
“삼촌, 선물은요?”
곧장 도빈의 질문이 이어져 화제가 전환됐다. 지헌이 조수석 문을 열어 상자 두 개를 꺼내 아이들에게 건넸다.
“와! 코알라다!”
상자의 한쪽 면이 뚫려 있어 내용물을 금방 확인할 수 있었다. 코알라 인형을 알아본 도빈이 크게 외쳤다. 정오도 아이들이 들고 있는 상자를 알아보았다. 그저께 점심때였나? 멜버른의 플린더스 스트리트 역 앞에서 교통사고가 났을 때였다. 현장에 출동한 경찰들로부터 진행 상황에 대한 얘기를 듣고, 도로가 정리되길 기다려야 하는 처지가 되어 정오는 근처 기념품 가게에 들렀다. 다행히 가게에는 예나가 얘기한 캥거루 인형이 있었다. 정오가 기뻐하며 캥거루 인형을 집어 들었을 때 지헌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지헌이 자신을 쫓아왔다고 속단한 정오는 후다닥 계산대로 뛰어가 값을 치르고 가게를 나왔다. 나올 때는 지헌이 들어온 쪽과 반대편 문을 이용했다. 그렇게 도망을 쳐버렸는데, 그 또한 선물을 사려던 거였구나. 캥거루 인형 옆에 있던 그 코알라 인형. 기억을 떠올린 정오는 괜히 멋쩍어졌다. 어쨌든 그때 그와 마주치지 않아 다행이긴 했다. 애들 선물은 캥거루가 좋다, 라고 조언했다면 예나는 캥거루 인형만 두 개를 받았을 테니. 예나는 입이 함박만 하게 벌어져서는 그 자리에서 상자를 뜯고 인형을 꺼내 끌어안았다. 엄마 코알라 등에 매달려 있는 새끼 코알라가 예나처럼 보였다.
“예나야, 고맙습니다, 해야지.”
“아저씨 고맙습니다!”
“삼촌 고맙습니다!”
예나를 따라 도빈도 우렁차게 인사했다.
“제 딸까지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애들 학원에 갈 시간이 돼서요.”
정오도 꾸벅 인사하고 다음 일정을 말했다. 이만 떠나겠다는 뜻이었다. 코끝이 찡하고 눈이 뜨거워서 그와 더 마주할 수가 없었다. 눈물이 떨어지면 이성의 벽도 무너지고 말 것만 같았다. 생각을 해야 하는데 일시적으로 머리가 마비된 듯했다. 사실 첫 번째 목표는 이룬 셈이었다. 그에게 예나를 보여주겠다는 목표. 그는 아직 예나가 자기 딸이란 걸 알지 못하니 반절만 이뤄진 셈이지만. 상상으로만 그리던 장면은 생각보다 훨씬 더 큰 감정의 파고를 만들었다. 기쁘기보다는 벅찼고 한편으로는 가슴이 아파서 먹먹하기도 했다. 정오는 선을 그었건만, 지헌의 마음은 그녀의 의지와 달랐다.
“다녀와요. 얘기 좀 하죠.”
정오는 꼼짝없이 붙들린 기분이었다. 하지만 아이들 앞에서 갈등을 보여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정오는 지헌에게 대답하지 않고 예나와 도빈의 손을 잡았다.
“학원 들어가자. 아저씨한테 인사하고.”
“아저씨 안녕히 가세요!”
“삼촌 안녕히 가세요!”
아이들은 정오의 말에 따라 인사하며 손을 흔들었다.
정오는 아이들을 데리고 학원으로 올라갔다.
“오늘은 예나 어머니께서 오셨네요!”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바둑학원 원장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정오도 인사했다.
“네. 안녕하셨어요!”
“잘됐네요. 시간 괜찮으시면 잠깐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그냥 인사만 하고 가려고 했는데 원장이 정오를 안으로 안내했다.
‘밖에서 기다릴 텐데.’
잠깐 지헌이 걱정되었다. 하지만 예나에 대한 걱정이 이를 밀어냈다.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걸까. 예나가 많이 우울해 보였나? 편모가정이란 걸 알고 누가 놀리나? 정오는 긴장한 마음으로 원장을 따라 원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원장이 꺼낸 이야기는 정오의 걱정과는 전혀 다른 화제였다.
“예나 어머니, 예나가 똑똑한 거 아시죠?”
“아…….”
“많이 똑똑해요. 제가 지금까지 가르친 일곱 살 중에 제일 똑똑해요. 수를 분석하는 능력이 천재적이에요.”
원장의 말에 많이 놀랐다. 신기했다. 바둑은 가르쳐준 적도 없었는데. 6개월 전, 대뜸 바둑학원에 가고 싶다고 하여 보내주었다. 무척 똑똑한 아이이긴 하지만 일곱 살에게 바둑의 규칙이 쉬울 리 없었다. 한두 달 다니다가 금방 싫증을 내겠거니 했는데 벌써 6개월이 흘렀다. 생수병 하나 제 손으로 못 따는 꼬맹이가. 바둑알을 손에 잡을 때만큼은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예나 어머니만 괜찮으시다면 잘 가르쳐보려고 합니다. 아이들 대상으로 하는 바둑 영재 대회 같은 것도 많아요. 예나는 승부욕도 강해서 대회에 나가면 자극이 많이 될 것 같은데, 예나 어머니 생각은 어떠세요?”
“글쎄요. 일단은 예나한테 물어봐야 할 것 같아요.”
“사실 예나한테 넌지시 물어보긴 했어요. 대회 얘기를 하니까 눈을 초롱초롱 빛내더라고요. 제 또래의 겨룰 만한 상대를 예나도 만나보고 싶겠죠.”
아이는 그녀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빨리 자라고 있었다. 혼자서 제 길을 만들어나간다는 것이 신기했다. 정지헌 씨. 우리 딸이 영재래. 딸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니 제 칭찬을 들은 것 이상으로 가슴이 뛰고 기분이 좋았다. 정오는 학원 원장 선생님과 이야기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바로 문밖에 지헌이 서 있었다.
“안 나오길래.”
왜 여기 서 있었느냐고 묻기 전에 지헌이 먼저 말했다. 그녀가 자신을 피하느라 일부러 학원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정오가 딴생각을 하기 전에 지헌이 정오의 손을 잡았다.
“내려가죠.”
그녀가 손을 빼 버릴까 염려하는 것처럼 악력이 강했다. 정오가 그의 옆에 나란히 서 발을 맞추고 나서야 붙잡은 힘이 느슨해졌다. 두 사람은 편의점 앞 의자에 마주 앉았다. 지헌이 정오에게 시원한 음료수를 건넸다. 정오는 입술이 바짝 말랐는데도 음료수를 입에 대지 못했다.
“회사 안 가세요?”
“일찍 퇴근했어요.”
“아.”
그녀의 맹한 반응에 지헌은 미소를 숨겼다. 내게는 반가운 인연이지만 당신에겐 부담일 수도 있겠지. 많이 놀랐겠지. 어쩌면 내가 무섭단 생각을 했을 수도 있겠네. 그동안 어지간히 집착했는데 이런 우연으로 이어지게 되니 모두 나의 계략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수도 있겠지. 아니면 사방에서 압박하는 느낌이 들려나? 회사에서도 쫓아다니더니 회사 밖에서까지 이런다고? 물론 그녀가 자신을 절대 벗어나지 못하도록 꽉 붙잡고 싶다. 본능적으로 그런 마음이 있긴 하지만, 압박하고 싶지만 압박하지 않는다. 부디 그녀가 다시 도망가지 않길 바랄 뿐이다. 이젠 도망갈 데도 없겠지만. 그는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을 숨기고서 변명했다.
“못 믿을 수도 있겠지만 정말로 몰랐어요. 예나한테 선물 주려고 전화번호를 물어보다가 알게 된 거고.”
전부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의 계획엔 분명히 예나에게 선물을 주는 것도 있었으니까. 그저께 멜버른에서 정오를 따라 기념품 가게에 들어간 지헌은 정오를 붙잡는 데에 실패하고 선물을 사게 되었다. 얼결에 선물을 사긴 했지만 도빈이 남매와 함께 분명히 예나를 떠올렸다. 그가 말문을 열자 정오도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저야말로요.”
“…….”
“몰랐어요. 정말.”
정오도 그의 말에 다른 의심을 할 수 없었다. 해외 출장을 가기 전에 알았더라면 어떻게든 그가 먼저 얘기를 꺼냈겠지. 지헌의 저돌적인 성향을 잘 알고 있기에 정오는 금방 수긍할 수 있었다. 그가 예나의 친아빠가 아니었다면, 평범하게 회사에서 만난 사이라면 조금 무서웠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 인연에 대한 떨림은 여진으로 남아 계속 심장을 괴롭혔지만, 정오는 애써 진정하고서 다른 질문을 던졌다.
“바둑을, 원래 좀 하셨어요?”
“어렸을 때는 좋아했죠.”
“그것도 몰랐네요.”
“말을 해준 적이 없으니 모를 수밖에.”
“그러니까. 왜 말을 안 해. 했어야지.”
7년 전에도 몰랐다는 뜻이었다. 그가 바둑을 둘 줄 아는 줄은 지금 처음 알았다. 그런 그녀의 속도 모르고 지헌은 그녀의 투정이 귀여워서 웃고 말았다. 웃음 뒤에는 조금 먹먹한 감정이 찾아왔다. 그녀의 세상은 생각보다 훨씬 크다. 자신은 평생 예나를 넘어설 수는 없을 것이다. 그건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아이 아빠에 대해서는 불안했다. 이정오는 전남친에 대해서 그렇게 얘기한 적이 있었다. 아주 잘살고 있을 거라고. 지금이야 연락이 없다지만 그렇게 예쁜 딸을 데리고 있으면 놈은 언제라도 그녀를 찾아올 것 같았다. 그럼 이정오는 흔들리려나. 어쨌거나 아이 아빠니까. 그건 절대 안 되는데. 내가 아이 아빠를 이길 수 있을까. 아이 아빠에 대해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목구멍에 걸려 그를 괴롭혔다. 겨우겨우 입술을 떼어볼까 싶었는데 저편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나 엄마!”
진서를 알아본 정오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헌도 덩달아 일어났다. 오늘의 만남은 진서와 승규와 지헌의 합작품이었다. 지헌이 승규에게 예나와 정오를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하여 진서가 아이디어를 낸 것이었다. 진서를 마주한 지헌의 표정이 굳었다. 진서가 오늘의 작당을 다 얘기할까 싶어서. 하지만 진서는 눈치가 빠르고 이해심이 많은 여자였다. 진서의 길어진 입술은 의미심장했지만, 진서는 딴말을 하지는 않았다.
“여기서 뵙네요. 지헌 씨.”
“네. 안녕하세요. 덕분에 선물 잘 전해줬습니다.”
지헌이 인사하자 진서가 정오를 향해 말했다.
“우리 도빈이 아빠랑 지헌 씨랑 정오 씨랑 다 같은 회사라면서요. 세상에 이런 인연도 다 있네요.”
‘인연’을 강조하는 진서의 목소리에 정오는 괜스레 두 뺨이 붉어졌다. 정오는 아침부터 생각했던 계획을 전했다.
“그동안 많이 힘드셨을 텐데, 오늘 시간 괜찮으시면 같이 저희 집에 가시겠어요? 저도 도빈이 초대하고 싶어서요. 제가 지금까지 신세 진 것도 너무 죄송하고요.”
“아유. 무슨 말씀을. 아니에요. 예나 보는 건 전혀 안 힘들어요. 신세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진서가 손을 휘휘 저었다.
“예나 집에 놀러 가고는 싶은데, 오늘 시골에서 친정 부모님이 오셔서요.”
“아…… 바쁘시겠네요.”
“바쁘지는 않아요. 임신을 하니 왠지 내가 만든 음식 말고 딴 걸 먹고 싶어서요. 지금 도빈이 데리러 갈 건데 같이 올라가실래요?”
“네, 네. 그래요.”
정오도 진서를 따라나섰다. 지헌은 또다시 혼자 남겨졌다. 다행히 이번엔 기다림이 길지 않았다. 잠시 후 정오와 예나, 진서와 도빈이 손을 잡고 나타났다. 진서가 기다리고 있는 지헌을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늘은 먼저 가야 할 것 같은데…… 지헌 씨가 두 분 태워다 주시나요?”
“그래야죠.”
지헌의 대답은 쉬웠다. 진서가 좀 전과 똑같이 입술을 길게 늘여 미소 지었다.
“네. 그럼 저희는 먼저 갈게요. 예나 어머니, 오늘 도빈이 데려다줘서 고마웠어요.”
“아니에요. 조심해서 가세요.”
정오의 인사 후에 도빈도 씩씩하게 손을 흔들었다.
“예나야, 안녕! 내일 봐! 내일 또 봐!”
“응. 안녕!”
진서와 도빈이 떠난 길엔 정오와 지헌, 예나만 남았다. 예나와 함께 지헌을 마주하고 있으니 정오는 또다시 긴장하게 되었다. 자꾸 벅차오르는 마음이 생각의 통로를 꽉 막아버리는 느낌이었다. 경쟁 PT 발표를 할 때도 이렇게까지 떨리지는 않았는데.
“이사님, 저희는 그냥 갈게요. 걸어갈 수 있는 거리라서요.”
“태워다 줄게요. 같이 가요.”
정오가 다시 거부할 것 같아 지헌은 예나의 손을 잡았다.
“예나야. 가자.”
아이를 움직이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예나가 지헌의 손을 잡고서 위로 바짝 올려다보며 물었다.
“아저씨가 이사님이에요?”
“그래.”
“그럼 아저씨가 우리 엄마한테 그 쿠키 준 이사님이에요?”
언젠가 정오에게 쿠키를 준 적이 있었다. 지헌은 반가운 마음에 고개를 돌려 정오에게 말을 걸었다.
“예나도 아네요.”
“네. 몇 개 집에 가져갔었거든요.”
하지만 예나의 용건은 다른 거였다. 이번엔 예나가 정오에게 질문했다.
“엄마. 그럼 엄마 야근시킨 이사님도 이 아저씨야?”
“어. 그게…….”
“그럼 예나 생일에 야근시킨 이사님도 이 아저씨야?”
아이는 무서울 정도로 날카롭다.
“아저씨. 5월 27일에 우리 엄마 야근시켰어요? 그때 예나 생일이었는데.”
예나가 걸음을 멈추고서 지헌에게 따졌다. 더 이상 아이의 해맑은 미소는 볼 수 없었다. 순간 지헌은 가슴이 철렁했다. 정오에게 야근을 시킨 다음 날, 그러니까 그때가 5월 28일이었나? 그때 정오는 그런 말을 했었다.
“이사님이 가진 전부를 다 줘도 내 전부와 바꾸지는 않을 거예요.”
그렇구나. 이예나구나. 이정오의 전부가. 지헌은 왜 정오가 그런 말을 했는지 그제야 깨닫게 되었다. 애정을 깨끗이 거둔 예나가 턱을 바짝 들고는 야무지게 물었다.
“아저씨 왜 그랬어요?”
지헌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