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그 사람은 내내 기다렸을 테니까2021.11.27.
지헌은 묵묵히 운전했다. 주차장까지 가는 길에 현기증이 이는 것처럼 한번 비틀거린 후, 다시 말짱한 정지헌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정오는 식당으로 가는 내내 지헌이 걱정스러웠다.
‘예나를 데려다주는 게 문제가 아니라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은데.’
그래도 학원에서 식당까지가 그리 멀지는 않은 편. 지헌이 운전한 차는 금세 식당에 닿았다. 저녁 영업 준비를 하던 국순이 정오, 예나와 함께 다른 손님이 온 걸 보고 주방에서 뛰어왔다. 하지만 함께 들어온 사람이 지헌이란 걸 확인하고는 주춤했다. 지헌이 먼저 인사했다.
“여사님, 안녕하셨습니까.”
“아, 네. 그래요…… 오랜만이네요…….”
국순도 지헌을 따라 인사했다. 그의 미모에는 역시 마음이 금방 흔들리지만 딸에게 야근을 시키고 손녀딸을 울린 못된 이사라는 걸 알고 있어 마음껏 반길 수는 없었다. 그래도 깍듯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가 딸의 상사인지라.
“어째…… 같이 와?”
어색해진 국순이 정오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
“이사님이 예나한테 미안하다고 오늘 같이 와주셨어.”
정오가 밝은 목소리로 대답해주고 나서야 국순의 입술도 마음 놓고 호선을 그렸다.
“아유, 차암 고맙네요, 고마워요…….”
그럼 그렇지.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있는데.
“여기까지 귀한 걸음 하셨는데, 식사도 하고 가면 좋을 텐데.”
“아니야, 엄마. 이사님 바쁘셔서 바로 회사 들어가봐야 해.”
지헌이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정오가 대신 대답했다. 지헌은 조금 서운했으나 정오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네. 오늘은 지나는 길에 들렀고, 나중에 기회가 되면 또 인사드리겠습니다.”
“아이고, 그래요. 그래요…….”
이 짧은 만남에서 국순은 묘한 기류를 감지했다. 정오의 회사 이사님이라는 사람은 그냥 이사님이 아니라는 것을. 정오를 특별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회사로 돌아가는 길. 정오는 다시 운전대를 잡은 지헌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병원에 갈 생각은 없어요?”
“병원에 왜요? 누가 아프대요?”
“아니, 아까 머리 아파하는 것 같아서.”
정면을 보고 있던 지헌이 정오를 향해 잠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염려해주는 마음이 고마웠다. 그래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시원하게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지헌은 무표정으로 물었다.
“그때 그랬죠? 호텔에서.”
“네?”
“내가 기억을 찾았으면 좋겠다고.”
“……그랬죠.”
“지금도 그래요?”
“…….”
“내가 기억을 찾았으면 좋겠어요?”
“당연하죠.”
그녀의 쿨함은 변함이 없었다. 그 대답이 서운해지는 지헌이었다. 잠시의 정적.
“7년 전에, 내가 기억을 잃었던 그때,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을 수도 있잖아요.”
그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제기했다. 그녀가 놀라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역시나 그녀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그럼 그 사람을 만나야죠.”
하지만 대답 자체는 역시 쿨했다. 겉과 속이 다른 건가? 겉으로는 도덕 교과서 같은 대답을 하고 속으로만 앓는 건가? 지헌도 솔직하게 불평했다.
“나한텐 현재가 중요한데?”
“그래도. 만나야죠.”
“…….”
“그 사람이 내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하지만 내내 나한테 연락은 하지 않았죠.”
“연락을 할 수 없어서 못 했을 수도 있잖아요.”
“…….”
“가령…… 당신의 가족 중 누군가가 일부러 막았다거나…….”
혹시를 가정하는 그녀의 목소리엔 자신감이 없었다. 그의 눈치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그녀는 금세 기운을 차린 표정으로 말했다.
“일단 만나요. 아니, 일단 뭐라도 기억해봐요. 기억나는 사람이 있다면, 일단 만나서 사정을 얘기해요. 사정을 얘기하고, 그간의 안부를 묻고 당신이 놓친 게 있다면 미안하다는 말도 꼭 해야 해요.”
점점 그녀가 자신이 꺼낸 화제에 몰입하는 것 같았다. 신호등에 걸려 차를 세운 지헌이 고개를 돌려 정오를 바라보았다.
“그 사람은 당신이 떠난 그 자리에서 내내 기다렸을 테니까.”
내가 겪은 일에 나보다 더 진지하게 몰입하는 여자. 도무지 그녀의 속마음이 읽히지 않았다.
“알았죠?”
급기야 그녀는 싱긋 웃으며 그의 대답을 종용했다. 어느새 목소리의 떨림도 지워버렸다.
“그 사람을 만났다가, 그 사람이 날 놔주지 않으면? 내가 이정오 씨한테 돌아오지 못해도 괜찮아요?”
“훕.”
“웃지만 말고 말을 해봐.”
“…….”
“괜찮냐고.”
나는 당신의 인생에서 어떤 사람인가. 예나만큼, 당신의 어머니만큼 중요한 사람은 될 수 없겠지만 그다음의 자리는 내가 될 수 있어? 그녀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엿보고 싶었다.
“장담하는데 그게 누구든 아마 내가 이길 거예요.”
괜찮다는 말도, 안 괜찮다는 말도 아닌, 자신이 이길 거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분명히 돌아올 거라는 걸, 당신은 알고 있어? 역시 이정오였다. 자신감 넘치고 대담하고 솔직한 이정오. 대답은 예스도 노도 아니었지만 그는 조금 위안을 얻었다.
“기억이나 해보고 얘기해요. 김칫국만 마시지 말고, 정지헌 씨.”
지헌은 모를 것이다. 지금 그녀가 얼마나 절박한지를. 그에게는 심각한 쿨병에 걸린 여자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정오는 사실 내내 심장이 두근거렸다. 희망의 불씨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난 절대 포기하고 싶지 않아.
“나는 당신의 7년 전이 너무 궁금하다고요. 너무너무너무너무.”
그를 설득하는 순간순간 계속 목이 메었다. * 잔무를 마치고 퇴근한 지헌은 마트에 들렀다. 문득 요리를 해야겠단 생각이 들어서. 메뉴까지 이미 정한 상태였다. 부침개. 부침개를 기가 막히게 부쳐 먹으리라. 무언가를 스스로 해 먹겠다고 애써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원체 식욕이 없는 데다 삼시 세끼를 모두 해결할 수 있는 호텔식 주상복합 아파트에 살고 있어 요리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집에는 주방 도구 하나 제대로 갖추어진 것이 없었다. 요리를 해보려니 필요한 게 꽤 많았다. 칼, 도마 외의 주방 집기류와 프라이팬 세트. 그리고 다양한 식재료…… 부침개 하나를 부쳐 먹으려는데 재료비가 30만 원 가까이 들었다. 재료 한 보따리를 이고서 집 안으로 들어왔다. 주방에 재료들을 모두 내려놓고 나서도 한동안은 머릿속이 멍했다. 하지만 정오가 했던 말을 떠올리면 불끈 화력이 생겨났다. 이정오의 전남친. 그놈보다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했다. 동영상 속 요리사의 지시에 따라 재료들을 준비했다. 재료들을 씻어서 도마 위에 올리고, 요리사처럼 애호박을 잘랐다.
“착착착착착착 칼질할 때 엄청 멋있었고요. 특히 프라이팬으로 뒤집기 할 때는 진짜 짱.”
참고하려고 틀어놓은 동영상보다 기억 속 이정오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이깟 게 뭐라고. 애호박을 숭덩숭덩 자르며 한껏 투덜대던 지헌은 동영상 속 요리사처럼 착착착착착착 칼질을 하고 싶어졌다. 동영상을 유심히 세 번 돌려본 그는 몸에 단단히 기합을 넣고 포즈를 잡았다. 착착착착착착. 칼을 잡아본 적이 없는데, 의외로 애호박은 잘고 고르게 잘 썰렸다. 내가 칼질에 소질이 있나? 지헌의 아버지는 과자 공장으로 시작한 회사를 대기업으로 성장시킨 식품 업계의 거물이었다. 그 또한 아버지의 감각을 물려받았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요리하시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잠깐의 의문은 접어두고서 계속 요리를 이어갔다. 부침가루를 풀고 채 썬 재료들을 모두 넣고 프라이팬에 식용유를 두르고 부치면 되는 간단한 음식. 동영상으로는 간단한 음식이라고 나오는데 주변은 점점 너저분해지고 있었다. 그래도 달궈진 프라이팬에 내용물을 한 국자 올리니 재료가 기름에 지져지는 소리가 그럴싸했다. 이제 어느덧 부침개를 뒤집을 시간이 되었다.
“부침개를 부쳐 먹으면 말이죠. 부침개를 뒤집어야 한단 말이죠. 그때 이렇게 이렇게. 한 손으로 뒤집기 알아요? 스냅을 이용해서. 이렇게. 확.”
역시 이번에도 기억 속 이정오의 목소리가 먼저 찾아왔다. 그녀가 시범을 보이는 깜찍한 모습도 머릿속에서 함께 재생되었다. 프라이팬의 손잡이를 꽉 움켜쥐고 들어 올린 지헌은 프라이팬을 이리저리 흔들어 반죽 아랫면이 고르게 익은 걸 확인했다. 그리고 손목의 스냅을 이용해서. 휙. 찰싹! 지헌의 눈이 커졌다. 부침개의 고르게 익은 아랫면이 거짓말처럼 위로 올라와 있었다. 너무나 쉽게. 지헌은 허, 하며 헛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이것 봐. 나도 하잖아.’
이정오의 전남친이라는 놈이 참 가소로웠다. 이게 뭐 별거라고. 그러다가.
‘가만, 정말로 된다고?’
스스로도 믿어지지 않아 지헌은 한 번 더 힘을 써보았다. 휙! 착! 제대로 익은 부침개는 좀 전보다 더 부드럽게 뒤집혀졌다. 되네. 나는 사실 요리 천잰가?
* 다음 날. 업무시간 중에 승규가 잠시 짬을 내어 지헌의 집무실을 찾았다. 그간 업데이트된 정보를 듣고 싶어 몸이 달았던 것이다.
“친구, 바빠?”
“아니. 들어와.”
마침 지헌도 할 말이 있었던지라 승규를 반갑게 맞았다. 지헌은 승규가 앉은 자리 앞에 태블릿PC를 내려놓았다. 화면엔 어린이용 자전거가 떠 있었다.
“웬 자전거?”
“도빈이 자전거 없지? 하나 사주려고.”
“나야 고맙지만, 갑자기 왜?”
“7년 전에 말이야.”
지헌은 어제의 결론을 덤덤하게 전했다.
“내가 생각보다 훨씬 더 너를 좋아했나 봐. 내가 네 아들의 대부가 되고 싶었던 건지도 몰라.”
“대부? 그게 뭔 소리야?”
승규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뚱하게 물었다.
“잃어버린 기억이 약간 돌아온 느낌이었어.”
“오. 어떤 기억?”
“새로 태어날 애가 하나 있는데, 그 아이한테 잘해주고 싶어 하는 마음, 별도 보여주고 싶고, 자전거 타는 법도 가르쳐주고 싶은 그런 마음. 그런 게 있었던 걸 기억했어.”
지헌의 뜬금없는 기억이란 것에 승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한국어인데도 외국어를 듣는 기분이었다. 새로 태어날 아이? 그 아이한테 잘해주고 싶은 마음?
“제대로 된 기억 맞아? 너 착각한 거 같은데?”
엷게 지은 지헌의 미소가 툭 하고 풀렸다.
“도빈이 8월에 태어났잖아. 나도 와이프 임신한 거 그다음 해 1월에야 알았어. 네 사고 이후에 있었던 일을 그 이전으로 잘못 기억하는 것 같은데?”
“…….”
“아니면 다른 기억 아니야? 좀 더 생각해봐.”
다시 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이었다. 지헌은 더는 이 얘기를 다시 하고 싶지 않아졌다. 지헌의 심각해진 표정을 알아본 승규가 조언했다.
“지헌아. 네가 정말로 기억을 살려보고 싶다면, 그런 의지가 있다면, 최면 치료 같은 건 어떨까?”
“…….”
“내가 한번 알아볼까?”
승규의 제안에 지헌은 가슴이 울렁거렸다. * 일찍 퇴근한 지헌은 본가를 찾았다. 오랜만에 아들이 집을 방문하니 장영미 여사도 크게 환호했다. 하지만 지헌의 관심은 딴 데 가 있었다. 지헌은 자신의 오래된 물건을 두는 창고를 찾았다. 아주 오래전에 가지고 놀던 장난감, 앨범, 그리고 학창시절의 상장들까지. 많은 것들이 있었지만 지헌이 찾는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장 여사가 다가와 물었다.
“뭐해?”
“찾는 게 있어서요.”
“뭘 찾아?”
“예전에 제가 쓰던 휴대폰이요.”
“언제 쓰던 휴대폰?”
“7년 전에 사고 날 당시에 쓰던 휴대폰. 어디 있는지 아세요?”
“……그건 왜?”
“제가 미처 챙기지 못한 게 있을 것 같아서요. 11년 전 휴대폰은 여기 있는데 7년 전 휴대폰은 없네요.”
“그건 예전에 버렸지……. 다 깨지고 망가졌는데.”
“그럼 그 안의 데이터들은요?”
“그건 새 휴대폰에 옮겨서 넣어줬잖아. 다 알면서 뭘 물어.”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지헌은 찾는 걸 포기하고 몸을 일으켰다.
“어머니. 제가 군대 다녀와서 호주로 여행 갔다 온 건 아시죠?”
“……그래. 그랬지.”
“왜 그때의 사진은 아무것도 없을까요?”
지헌은 물음을 던져놓고 장 여사의 표정을 면밀히 살폈다.
“다른 지역 여행 사진은 남아 있는데 그때 사진만 없네요. 왜 그럴까요?”
어머니의 흔들리는 눈동자, 조금은 창백해진 낯빛. 지헌은 전날, 정오가 했던 말을 떠올려보았다.
“연락을 할 수 없어서 못 했을 수도 있잖아요…… 가령…… 당신의 가족 중 누군가가 일부러 막았다거나…….”
자신이 오랫동안 믿어온 것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채은비처럼, 오랫동안 자신을 속여온 사람이 아주 가까이 있을 수도 있겠단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아들을 구속하는 마음을 사랑이란 미명에 포장해온 한 사람.
“어머니, 혹시 저한테 숨기는 거 있으세요?”
그간 그녀의 사랑을 너무 믿었단 생각을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