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7년 전 11월 2일2021.12.01.
“……엄마가 너한테 뭘 숨겨. 그런 말 서운해, 아들.”
장 여사가 지헌에게 슬쩍 눈을 흘기며 말했다. 지헌의 질문을 농담으로 넘기듯이. 어머니는 무언가 불리한 언급에는 서운하다는 소감을 덧붙인다. 지헌은 더 이상 대화할 필요는 없겠단 판단을 내렸다. 본가를 나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까마득했다. 어두운 곳에 차를 세우고 생각에 빠졌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그의 친구 관계에 개입한 적이 있었다. 그때 한번 난리를 쳤더니 어머니는 그 친구의 어머니에게 연락을 해서 완전히 관계를 망가뜨렸다. 그 후로 지헌 스스로 친구 관계를 조심했다. 어머니의 성에 차지 않는 친구는 만들지 않으려 노력했고 친구 사이의 선도 확실하게 지켰다. 그래서 친구가 많지 않다. 어머니의 눈 밖에 나는 행동을 하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어머니의 집착도 사라졌다.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자신 또한 어머니를 속이듯, 어머니도 자신을 얼마든지 속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어떻게 알아보아야 하나. 이미 7년이나 지난 일인데. 보통 사람도 7년 전 일은 기억하기 힘들 텐데. 괜스레 휴대폰 화면만 톡톡 두드리던 지헌은 정오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정오는 금방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로 앙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예나의 목소리 같았다.
“예나랑 같이 있어요? 나중에 할까요?”
[아뇨. 괜찮아요.]
미안해서 끊으려는데 웬일로 정오가 먼저 지헌을 붙잡았다. 잠시 후 예나의 목소리가 걷히고 주변이 잠잠해졌다. 정오가 예나를 피해 다른 방으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아니. 이사님이 준 코알라 인형 있잖아요. 예나가 그거 포대기를 만들어달라고 떼를 써서.]
“포대기?”
[애기 캥거루는 엄마 주머니에 들어가 있어서 따뜻한데 애기 코알라는 그냥 업혀 있어서 춥다네요. 그러니까 포대기를 만들어달라고.]
아이의 감수성에 지헌은 눈을 지그시 감고서 웃고 말았다. 왠지 아이가 정오에게 떼를 쓰는 장면이 상상되었다. 아이는 상상 속에서도 너무나 귀엽고 앙증맞았다. 이정오의 어린 시절이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미치자 당장 달려가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도 움텄다.
[예나 할머니가 예나 어렸을 때 포대기로 많이 업고 다녔었거든요.]
할머니와 엄마와 아이. 2대에 걸친 미혼모 가정. 남들이 보기엔 너무나도 부족하고 안됐다 여겨지는 구성원 집합인데 생각해보면 자신의 집안보다 못한 게 없었다. 아버지와는 일 얘기 밖에는 나누지 않고, 배다른 형과는 1년에 몇 번 만나지도 않는 사이. 어머니와는…… 사랑한다는 말 속에 속박과 의심을 숨기고서 그 겉면만 들여다보는 사이. 겉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풍족하고 완벽해 보이는 자신의 가족은 너무나 허술하고 형식적이었다. 정지헌이 갖지 못한 그 가족을 이정오는 갖고 있었다.
[아, 이사님, 왜 연락하셨어요?]
“별 이유는 없는데.”
[허. 아니 그럼 목소리를 왜 쫙 까십니까. 사람 초조하게.]
“내 목소리에 초조해하긴 합니까?”
[당연하죠. 이사님이 당장 일하러 나오라고 할까 봐 얼마나 불안한데요.]
잠깐 설렜는데 금방 허탈해졌다. 그녀에게 이사님으로 불리고 싶지 않다는 욕망과, 그래도 그게 아니었다면 그녀가 자신의 전화를 이렇게 중요하게 받을 일도 없었을 거란 계산이 맞섰다. 어쨌건 자신이 더 개인적이고 더 중요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녀에게.
“참, 나 요리 좀 해요.”
조금이라도 이 목소리를 더 붙들고 있고 싶은 마음에 무슨 말을 할까 고민하다가 지헌은 결국 아무 말이나 던지게 되었다.
“어제 취미로 요리를 하다가 부침개 뒤집기를 해봤는데, 나도 잘되던데?”
[대박! 진짜예요?]
하찮게 여길 줄 알았는데 의외로 목소리가 반갑게, 그리고 진지하게 들렸다. 지헌은 조금 우쭐하게 되었다.
“언제 구경시켜줘요?”
[네!]
“…….”
[꼭 시켜주세요.]
그녀가 단번에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 우리 집엔 언제 올래요?”
[예나 잘 때?]
헙. 그녀의 저돌성에 한 방 먹은 것 같았다. 그는 손으로 입을 막아 웃음을 감추었다.
“당장 오늘이라도 가능하다는 건가?”
휴대폰 너머의 세상이 고요해졌다.
[……생각해보니까 우리 예나가 자다 깨니 안 될 것 같네요. 예나는 내가 없으면 꼭 한 번 깨더라고요.]
……그럼 그렇지.
[아, 이사님이 회사에 부침개랑 프라이팬을 들고 오면 어떨까요? 소문 안 내고 저 혼자 조용히 집무실에 가서 볼게요. 뒤집기 잘하나.]
“됐어.”
됐어, 이정오.
*
[안 해.]
실망하여 뾰로통해진 그의 목소리에 정오는 웃음이 나왔다.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정말 순수하게, 하루빨리 그가 부침개 뒤집기를 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 요사스러운 남자는 그녀의 말뜻을 곡해한 것 같았다. 내 잘못이지. 이 기회주의자에게 빈틈을 보였으니. 정오는 속으로 반성하며 통화를 마무리 지었다.
“예나가 불러서 가야겠어요. 그럼 행복한 불금 보내세요! 취미 요리 많이 하시고요.”
응원을 남기고서 전화를 끊은 정오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거실로 나왔다. 유쾌한 통화였다. 7년 전. 아무 용건 없이 그와 밤새 노닥거리던 그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뭐가 그렇게 혼자 즐거워?”
예나의 닦달로 포대기를 만들고 있던 국순이 정오가 웃음을 머금고 있는 것을 보며 물었다.
“아냐. 그냥 재밌는 일이 생각나서. 아, 엄마. 나 잠깐 나가봐야 해.”
“어딜 또 나가.”
“놓고 온 게 있어서 회사 좀 다녀오려고. 한두 시간 걸려. 먼저 자.”
“내일 가지. 시간도 늦었는데.”
“내일 가서 붙잡히면 답도 없어. 오늘 빨리 다녀오는 게 나아.”
“조심해서 다녀와.”
정오는 걱정하는 국순에게 손을 흔들고 집을 나섰다. 법무법인에서 연락이 왔다. 변호사가 꽤 바쁜 듯하여 밤늦게 상담 시간이 잡혔다. 그래도 다음 주까지 기다리는 일 없이 일찍 약속이 잡혀서 다행이었다. 1층으로 내려와 출입문을 열었을 때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옆집 경찰 권배일이었다.
“경사님,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셨습니까.”
그의 어수룩한 인사에 정오는 지그시 미소 지었다. 오늘 배일은 웬일로 사복도 경찰 제복도 아닌 슈트 차림이었다. 마치 선을 보러 가는 것만 같은 점잖은 차림. 멀쑥한 얼굴과 큰 키 덕분에 이 차림도 잘 어울렸다.
“어디 가시나 봐요. 슈트 차림은 처음 봐요. 오늘도 멋지네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 멋진 슈트 차림에, 다소 엉뚱한 옥의 티가 있었다. 그의 손등에 노란 박스테이프 조각이 붙어 있었다.
“근데 경사님, 손등에 뭐가 묻었는데요.”
“아, 이거.”
배일은 테이프를 뗄 생각은 안 하고 수줍게 내밀어 보여주었다.
“그때 모기 물린 자리에 테이프 붙여주셨을 때 효과가 있어가지고…….”
“아, 모기 물려서 붙이신 거였어요?”
“네. 이 테이프밖에 없어서요.”
하하하. 훈훈한 외모를 제대로 못 사용하시는 분이네. PT도 끝나서 이제 테이프도 안 갖고 다니는데, 투명테이프 사주고 싶다…….
“효과가 있었다니 다행이네요.”
정오는 그건 영 아니란 말은 못 하고 예의 있게 웃어주었다.
“이정오 씨는 이전보다 표정이 좋아 보이네요.”
“그런가요?”
“그래 보입니다. 장기미제사건이 해결의 조짐을 보이나요?”
“그건 아직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훨씬 좋아 보입니다. 힘내시고요. 도움을 청할 일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경찰에 연락하세요.”
“네. 고맙습니다.”
배일의 응원을 받아 조금 더 힘을 낼 수 있게 되었다. 정오는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법무법인은 회사와 집의 중간쯤 위치한 곳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형 로펌이라 회사를 상대로만 영업을 하는 줄 알았는데 개인 상담도 한단 사실이 놀라웠다. 정오는 사무직원의 안내에 따라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 밤 9시. 꽤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사무직원은 피곤해 보였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곧 변호사님 나오실 거예요.”
“네.”
데스크에 서서 3분쯤 기다렸을 때 저벅저벅 발소리가 들렸다.
“이정오 씨?”
남자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네.”
“안녕하세요. 오늘 상담을 맡게 된 변호사…… 하진철입니다.”
사무직원과 변호사가 묘한 눈빛을 주고받은 느낌이 든 건 기분 탓인가? 정오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인사했다. 분명히 회사 홈페이지로 하진철 변호사의 얼굴을 확인했는데. 안경을 쓴 건 비슷하지만 사진과는 많이 달랐다.
“네. 안녕하세요. ……다른 분인지 알았어요. 사진하고 인상이 많이 다르시네요.”
“그런 얘기 많이 듣습니다. 업체에서 사진에 손을 많이 댄 것 같네요. 이쪽으로 오시죠.”
변호사가 뒤돌아 쭉 이어진 복도로 걸었다. 변호사의 걸음이 꽤 빨랐다. 정오는 그를 잰걸음으로 쫓아가며 개인 사무실을 몇 개 지났다. 변호사들의 이름이 방 앞에 붙어 있었다. 김진욱, 홍다경, 이민혁, 하친철, 채은엽……. ‘채은엽’이라는 이름의 방이 정오의 눈에 들어왔다. 아주 오래전 주워들었던 기억이 스쳤다.
‘채은비가 법조인 집안이랬지.’
정오는 앞서가는 남자와 거리를 두고서 조심스럽게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변호사 채은엽’이라고 쳐넣었다. 앞서 등을 보이고서 걷고 있는 사람의 얼굴이 이미지 검색창을 채웠다. 하진철이 아니라 채은엽이었다.
“이쪽으로 들어오시죠. 이정오 씨.”
남자가 구석진 방의 문을 열며 말했다. 이 자는 나를 속이고 있다. * 정오와 통화를 마친 후에도 지헌은 그 자리에 오래 머물렀다. 그녀를 얼른 내 방으로 데려오고 싶은데. 그녀가 내 거라는 표시라도 해놓고 싶은데.
‘반지라도 끼워줄까?’
오래전 채은비가 마치 커플링처럼 생긴 반지를 하고 다니던 것을 떠올렸다. 그것 때문에 지헌과의 사이에 대해 직원들이 더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을 전해 듣기도 했다. 반지의 구속성을 믿어볼까. 선물하면 껴주기는 할까. 여러 고민이 이어지다가 다시 처음의 고민을 떠올렸다. 7년 전의 기억. 그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지헌은 오래전의 기억을 복원할 방도를 생각해보았다. 어머니가 무언가를 숨겼을 수도 있다는 전제하에. 휴대폰 통화기록은 통신사의 보관 기간이 이미 지났을 테니 복원의 여지가 없을 것이고. 카드 사용 기록은? 그런 걸로 과거를 알 수 있을까? 어머니가 그간 지헌이 사용하던 카드까지 멋대로 해지했다는 전제라면, 이 또한 지금까지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7년이라는 시간은 꽤 길다. 이미 지워진 정보는 되살릴 수도 없을 만큼 까마득한 시간이었다. 한숨을 툭 내뱉고 차를 출발시킨 지헌은 그냥 집으로 가려다가 주얼리숍에 들렀다. 강남에서 가장 유명한 주얼리숍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여자 반지를 보러 왔는데요.”
“프러포즈링 찾으시나요, 고객님?”
“비슷합니다.”
반갑게 맞이한 직원이 지헌의 앞에 예쁜 반지들을 꺼내놓았다. 부담스러울 수 있으니 너무 화려하면 안 되고, 아이가 있으니 날카로워도 안 되고. 아닌가. 그래도 기왕 하는 거 화려한 게 낫지 않나. 고심한 끝에 다이아몬드 커팅이 섬세하면서도, 디자인은 심플한 반지를 골랐다. 사실 그녀가 손에 끼면 뭐든 예쁠 거라는 걸 잘 알기에 디자인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의 손에 끼워주는 건 중대한 임무가 될 테지만.
“사이즈는 어떻게 하나요? 그 사람 손에 안 맞을 수도 있는데.”
“고객카드 작성해주시고 나중에 가지고 오시면 조정이 가능합니다. 카드 작성 도와드릴까요?”
“네. 부탁합니다.”
“연락처랑 성함 남겨주시겠어요?”
지헌은 직원의 안내에 따라 연락처와 이름을 카드에 적었다. 직원이 지헌의 기록을 컴퓨터에 입력하려다가 멈칫하며 물었다.
“고객님, 혹시 전화번호가 변경됐나요?”
“그렇긴 한데, 무슨 일로 그러시죠?”
“혹시 끝자리 ○○○○ 번호 아시나요?”
“네. 제가 예전에 쓰던 휴대폰 번호인데요.”
“전체 번호 좀 여쭤봐도 될까요?”
지헌은 직원에게 예전에 쓰던 전화번호를 읊어주었다. 직원이 빙긋 미소 지었다.
“고객님 성함이 저희 숍에 남아 있어서요. 7년 전에 방문하셨네요.”
지헌도 멈칫하고는 직원을 바라보았다.
“기억 안 나세요? 그때도 반지 구입하셨는데.”
“……7년 전 정확히 언제죠?”
“7년 전 11월 2일이라고 나오네요.”
7년 전 11월 2일. 내가 교통사고를 당하기 하루 전날. 그때의 통증을 기억하는 듯 목 안쪽이 뜨거워졌다. 지헌은 떨려오는 목소리를 숨기며 요청했다.
“그때 기록 좀 살펴볼 수 있을까요?”
“예쁜 프러포즈 링을 구입하셨어요. 정말 기억 안 나세요? 당시에 저희 숍의 최고급 제품이었거든요.”
직원이 모니터를 지헌 쪽으로 돌려 기록을 보여주었다. 구입 상품, 일시, 카드회사. 반쯤 가려진 짤막한 정보가 모니터에 떠 있었다. 7년 전, 11월 2일. 나는. 누군가에게 프러포즈를 하려고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