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사랑하던 사람이 있었던 것 같아2021.12.04.
정오는 안내받은 방으로 들어갔다. 테이블과 의자뿐인 미팅룸이었다.
“앉으시죠.”
“네.”
그녀는 채은엽이 권하는 의자에 잠자코 앉아 상대를 바라보았다. 정오가 이 법무법인을 찾은 건 한 블로그에서 본 상담사례 때문이었다. 아이 아빠의 생사조차 모르고서 홀로 아이를 키우던 미혼모가 헤어진 지 6년이 지난 후에야 아이 아빠를 다시 만나게 된 이야기. 아이 아빠는 알고 보니 꽤 이름 있는 집안의 남자였고 다른 여자와의 결혼을 앞두고 있다는 이야기. 정오는 이 법무법인에서 그 사연의 주인공을 상담했고 분쟁이 꽤 잘 해결되었다는 정보에 혹하여 상담 의뢰를 했던 것이었다.
‘그건 내 이야기였던 건가? 대체 어떻게 알았지?’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정오는 오싹 소름이 끼쳤다. 오래전 예나의 납치 미수도 이 자의 짓이었을까? 납치 미수범도 예나가 누구의 딸인지 알고 있는 것 같았는데. 하지만, 의아한 점이 있긴 했다.
‘나라면 가장 먼저 채은비 입단속을 시켰을 텐데.’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왜 채은비가 사무실에서 내가 미혼모라고 떠들도록 가만히 놔두었을까?
‘동생 모르게 일을 벌이고 있는 건가?’
동생의 성공적인 결혼을 위해 알아서 모든 일을 처리해주는 호위무사 같은 오빠인가? 그 생각을 하니 더 오싹했다. 정오는 떨려오는 손을 테이블 아래로 감추었다. 자신을 마주한 채은엽이 영업용 미소를 짓고서 물었다.
“싱글맘이시라고요. 무슨 문제 때문에 방문하셨나요?”
이 자는 똑똑하고 교활하다. 이 자의 계책에 말려들어가선 안 돼.
‘어딘가에 녹음장치를 설치해놨을 수도 있어.’
절대 약점을 보이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내 약점을 노출시키지 않고 상담을 진행하는 방법은?
“네…… 저는 직장인 미혼모예요.”
정오는 어수룩하게 말문을 열었다.
“다름이 아니라 회사 동료 때문에요.”
“동료요?”
“네.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회사에 다니는 미혼모예요. 열심히 살았고 지금도 열심히 살고 있고요. 나름대로 회사에서도 능력을 인정받고 있고. 그런데 동료 중 한 명이 저를 너무 괴롭혀서요.”
본인이 원하는 화제가 아니란 판단 때문인지 채은엽의 눈썹이 반대로 휘었다.
“어떤 식으로 괴롭힌다는 말씀이시죠?”
“제가 회사에 미혼모라는 것을 알리기 전에 먼저 폭로한다든가, 저의 가정사를 언급하는 방식으로요. 저 역시 미혼모의 딸이거든요.”
“…….”
“미혼모라는 것, 미혼모의 딸이라는 것이 흉이 돼서는 안 되잖아요. 안 그런가요? 그런데 이 친구는, 편의상 C양이라고 할게요. 이 C양은 그런 사실을 흉으로 만들어서 악의적으로 저를 비방하더라고요. 이런 경우에 명예훼손 고소가 가능할까요?”
“정확히 어떤 비방이었는지 증거가 있다면 얼마든지 고소 가능합니다.”
“증거는 없지만 증인은 있어요. 저희 팀원들이 증인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런 경우는 고소 가능하죠?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할까요?”
“증인만으로는 죄를 입증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아주 명쾌한 증거가 하나라도 있으면 일이 쉬울 텐데. 아무 증거도 없나요?”
“후우. 증거라고 할 만한 건 없어요.”
정오는 한숨을 푸욱 쉬며 체념의 표정을 지었다.
“아쉽네요. 당장 고소장을 쓰고 싶었는데.”
“증거를 모아서 다시 방문해주시죠. 방문이 어려우시면 다른 수단으로 보내셔도 좋고요. 제가 확인하고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고맙습니다.”
정오는 진심 어린 표정으로 인사했다. 거짓말에 능한 사람이 아니라 심장이 내내 쿵쾅댔다.
“아이 아빠는 알고 있나요? 이정오 씨가 이렇게 변호사를 만나러 오셨다는 사실을.”
역시 이런 상황에서조차 채은엽은 본분을 잊지 않았다. 지헌이 이정오의 비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느냐, 그것을 캐내려는 것 같았다.
“그거하고는 상관없는 상담이었는데요, 변호사님.”
“전반적인 도움을 드리는 것이 좋은 일이니까요.”
정오가 지적하니 은엽은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알겠습니다. 지금 적어드리는 게 제 개인 전화번호입니다. 앞으로는 이쪽으로 직접 연락 주시는 게 빠를 것 같네요.”
채은엽이 메모지에 전화번호와 이메일 주소를 적어 건넸다. 명함을 주는 것이 나을 텐데. 하지만 명함을 줄 수가 없겠지. 당신은 하진철이 아니니까.
“감사합니다, 변호사님. 혼자 오래 고민할 뻔했는데, 그래도 찾아오길 잘했어요.”
정오는 메모지를 받아들고서 미소 지었다. 실은 너무 떨려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채은엽에게 나의 연기가 통했을까. 크게 자신은 없지만 어쨌든 실수를 하지 않았으니 되었다. 채은엽과 인사를 하고 무사히 사무실을 빠져나온 정오는 택시를 타자마자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후. 하!”
살기 위한 본능처럼 꼭 쥐고 있던 휴대폰 화면엔 땀이 묻어났다. 건물을 나서는 순간까지 얼마나 긴장했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지헌의 이름을 찾아 눌러야 하는데 여전히 손이 계속 떨려서 손끝이 몇 번 미끄러졌다. 그러는 동안 지헌과의 통화와 문자메시지 기록이 화면에 모두 떠올랐다. 이게 다 뭐야……. 지헌이 생각보다 문자메시지를 많이 보냈다. 하루에 한 번 이상, 어느새 그는 꼬박꼬박 그녀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채은엽 때문에 거칠어졌던 호흡이 차츰 정리되었다.
- 회사에 왔는데, 이정오 씨는 휴가네요. 오늘 잘 쉬고 내일 봅시다.
- 점심 맛있게 먹어요.
- 예나 자전거를 사주고 싶은데, 예나는 무슨 색 좋아해요?
6월 23일 12시. 6월 24일 12시. 6월 25일 12시……. 12시. 정오. 하루의 한가운데, 일상에 자신의 존재를 새겨넣듯이, 그리고 그녀의 이름을 기념하듯이 그는 매일 정오마다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기억을 잃었으면서도 7년 전과 다를 바 없이 행동하는 이 남자가 눈물겨웠다. 실은 참 고맙기도 했다. 정오는 통화버튼을 찾아 눌렀다. 잠시 후 그녀가 사랑하는, 오랫동안 변하지 않았던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보고 싶어요!”
폭발하듯 진심이 터졌다. * 지헌은 잃어버린 7년 전의 단서를 확인한 후 주얼리숍에서 나왔다. 프러포즈 링. 누군가에게 선물하려던 반지. 어머니께 드린 것은 절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어머니는 수십 수백 번은 얘기하셨을 테지. 나는 누구와 어떤 연애를 했나. 그리고 왜 그녀는 나타나지 않는가. 지헌은 한 번도, 그 누구한테도 반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 여자에 대한 이야기는 더욱. 친한 친구 승규조차도 지헌에게 여자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내가 모든 이들에게 연애 사실을 숨겨왔던 건가? 그래서 아무도 알지 못하는 건가? 그 와중에 그토록 자신의 기억 회복을 응원하던 정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도. 만나야죠. 그 사람이 내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잊어버린 사람이 있으면 만나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던 그녀. 그때 그녀의 떨려오던 목소리를 기억한다. 그녀는 어떤 마음으로 내게 그런 말을 했을까. 내가 기억을 되찾는 것은 이정오에게 어떤 의미일까. 나는 지금의 내게 소중한 것을 놓치게 될까 봐 너무 무서운데, 당신은 어떨까. 이정오 씨. 오래전 나에겐 사랑하던 사람이 있었던 것 같아. 기억이 돌아오면, 정말로 난 그 사람을 찾아가야 하나? 사실은 그러고 싶지 않다. 한 번 상처를 받았던 당신. 전남친에게 실연당하고, 아이를 홀로 낳아 홀로 키운 당신. 나의 선택이 당신에게 또 다른 상처가 될까 봐 두렵다. 지금의 내가 지켜주고 싶은 사람은 이정오. 당신인데. 그녀의 얼굴, 그녀의 목소리, 그녀의 모든 것을 떠올리며 반지 케이스를 만지작거렸다. 그때 운명처럼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휴대폰 화면에 뜬 ‘이정오’라는 이름이 구원자처럼 읽혔다. 곧장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보고 싶어요!]
그녀의 한마디에 가슴이 찡해져왔다. 울컥하는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부러 점잖은 목소리로 말했다.
“집에 있어요? 내가 갈게요.”
[아뇨. 지금 택시 탔어요. 내가 그쪽으로 갈게요.]
* 지헌은 얼른 집으로 와 집 앞에서 정오를 기다렸다. 몇 분 서성이고 있으니 택시가 도착했다. 지헌이 달려가 택시에서 폴짝 뛰어내린 정오를 끌어안았다. 정오도 지헌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의 탄탄한 가슴이 어느 때보다 안락하게 느껴졌다.
도착하기까지 가슴이 울렁거릴 만큼 감정의 기복이 심했는데 그에게 닿아 있으니 거짓말처럼 마음이 진정되었다. 이내 또 다른 떨림이 시작되었지만. 그를 보고 싶어서 찾아왔지만 어쨌든 그녀는 얼른 집으로, 엄마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
“오래는 못 있어요. 그냥 이사님이 취미 요리로 부침개 뒤집기 하는 거 보고 싶어서요.”
정오는 미소를 머금고 핑계를 대었다. 지헌의 눈은 가늘어졌다. 조금 실망한 것이다.
“……날 보고 싶다는 게 아니라 뒤집기를 보고 싶다고 한 거였나?”
“어쨌든 보고 싶다는 건 비슷하잖아요?”
그녀의 능청스러운 대꾸에 지헌은 낮은 한숨을 터트렸다. 지헌 역시 그녀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다. 이정오는 어떤 순간에도 엄마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을 테지. 그녀의 그런 면 또한 좋아하고 존경한다. 하지만 그녀와 오래 같이 있고 싶은 남자의 본능도 어쩔 수 없었다.
“들어가죠.”
지헌은 정오를 집으로 안내했다. 현재 지헌이 사는 곳은 주상복합 아파트의 고층. 빠르게 올라가는 엘리베이터가 아찔하여 정오는 저도 모르게 엘리베이터 핸드레일을 꽉 붙잡았다. 보고 싶다고 먼저 대담하게 얘기해놓고서 막상 일이 닥치자 긴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진짜로 요리하는 거 보고 싶어서 온 거예요.”
정오가 다시 한번 일러두었으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릴 때까지 대답이 들려오지는 않았다. 대신 어깨에 팔이 척 걸쳐졌다. 그녀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막아보려는 의도로 읽혔다. 함께 엘리베이터를 벗어난 두 사람은 깔끔한 문 앞에 섰다.
“여기예요. 그리고.”
9, 1, 3, 0. 지헌이 정오에게 보여주며 현관문 숫자키를 눌렀다.
“곧 바꾸겠지만 일단은 알고 있어요.”
철컥, 문이 열렸다. 정오는 지헌의 안내에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숫자에 약해서 금방 잊어버릴 것 같네요.”
“어머니 생신이에요. 3월 19일.”
“그럼 어머니도 비밀번호를 알고 있겠네요.”
“그렇긴 한데, 바꾸려고요.”
“비밀번호 자주 바꿔요?”
신발을 벗을 생각도 하지 않고 그녀가 계속 대화만 이어가니 그가 뒤에서 허리를 감쌌다. 흡. 정오는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픽, 하고, 등 뒤에서, 아니, 엉덩이쯤에서 그의 실소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크고 유연한 손이 그녀의 다리를 빠르게 훑어 발목을 움켜잡았다.
“어, 어, 어?”
툭, 툭. 정오가 당황하여 엉거주춤하는 사이에 구두가 아래로 툭 떨어졌다. 그가 그녀의 신발을 벗겨버린 것이다. 어느새 그녀는 현관을 벗어나 집 안쪽으로 들어와 있었다. 정오의 신발을 벗기느라 현관에서 한쪽 무릎을 굽히고 있던 지헌이 몸을 일으켰다. 특별한 표정이 없는 눈빛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긴장하게 되었다. 아니, 진짜로 진짜로 그가 요리하는 걸 보고 싶은 순수한 마음이었는데. 그의 손끝이 얼굴에 닿자 숨이 뜨겁게 흘렀다. 그녀의 턱을 쓸다가 자연스럽게 뒷덜미로 넘어간 손이 간지럽고 또 한편으로는 애가 탔다. 그 마음을 알아챈 듯이 그의 입술이 다가왔다. 형식적인 요리를 선보이며 괜찮은 기회를 엿보는 그런 계산도 없었다. 7년 전에도 그랬듯이 그는 너무나도 정직하게 본능에 따라 움직였다. 문제는 그런 그가 싫지 않다는 거다. 하지만 정오는 본분을 떠올렸다. 여기는 한국. 호주 멜버른의 호텔이 아니다. 오늘의 만남은 즉흥적인 것이었고 그녀는 어서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엄마였다.
“나 배고픈데요.”
길어지려는 입맞춤을 애써 차단하고서, 짧은 틈 사이에 그녀가 말했다. 역시 그는 그녀의 목소리를 가뿐히 삼켜냈다. 그녀는 결국 그의 가슴을 꼬집어버리고 말았다. 그가 흠칫 놀라 입술을 떼었다. 뭔가 원망스러운 눈빛이었지만 정오도 지지 않았다.
“배고프다고요. 배고파.”
독하게 주장을 펼치니 그 또한 뜨거운 한숨을 식히며 꼬집힌 가슴을 뒤늦게 문질렀다.
“그렇죠. 잊을 뻔했네.”
“…….”
“우리 대리님께서는 내가 아니라 부침개가 더 보고 싶어서 오셨지.”
급기야 부침개한테까지 질투하는 그가 우스웠다. 피가 끓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정오는 가볍게 외면하고 한 발 더 안쪽으로 들어와 말을 돌렸다.
“집 구경은 내가 알아서 할게요. 그래도 돼요?”
“마음대로.”
그녀를 향해 날렵한 눈빛을 보내던 그가 기어이 체념하며 돌아서자 정오는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깊숙한 곳에는 오래 머물고 싶은 욕심도 있지만, 오늘은 그러지 말자. 정오는 지헌이 주방으로 향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발을 움직였다. 지헌의 집은 오래전의 오피스텔보다 훨씬 넓고 높은 곳이었다. 거실의 널찍한 유리창 너머로 펼쳐진 한강의 야경이 눈부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구와 세간이 별로 없어서인지 7년 전의 집보다 안락한 느낌이 적었다. 언뜻 들여다본 주방에도 조리도구는 별로 없어 보였다. 취미 요리라는 건 허풍인 듯했다. 지헌의 반대편 복도로 죽 걸어가며, 혼자가 되니 끝내지 못한 고민이 다시 펼쳐졌다. 그에게 채은엽에 대해 어떻게 물어봐야 할까. 어떻게 경고해주어야 할까. 차라리 지금 그의 기억을 일깨워주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일깨워주는 것은 나의 기억. 한 번도 들여다보지 못했던 그의 마음은 나와 다를 수도 있는 건데.
‘내 기억을 이 사람에게 주입해도 될까? 우리가 정말 사랑하는 사이였다고 말해도 되는 걸까?’
그것이 정오를 망설이게 했다. 상념에 빠진 정오는 구경을 하는 듯 마는 듯, 문이 열린 방들을 대강 훑었다. 침실, 서재, 트레이닝룸,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방을 지나 맨 끝방, 문이 닫혀 있는 방의 문손잡이를 잡았다. 정말로 아무 생각 없이 벌인 일이나 문이 열린 후, 그녀의 눈은 뜨거워졌다. ……하아. 정오의 입술 사이로 준비되지 않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