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 저 기억 나시죠? (64/183)

64. 저 기억 나시죠?2021.12.08.

작은 침대와 책상. 작은 냉장고, 작은 옷장. 작은 서랍장……. 이 가구들. 이 구도. 그 끄트머리의 주방 시설은 없었지만, 정오는 알 수 있었다. 이 방은 영락없는 정오의 예전 원룸이었다.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눈시울이 금세 뜨거워졌다. 믿을 수 없었다. 어째서, 왜, 어떻게 이런 공간이. 7년 전의 지헌은 정오의 옛날 집을 좋아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그의 오피스텔에서보다 그녀의 원룸에서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그 집을 좋아했던 이유도 투명하고 간명했다.

16551152401833.jpg“나는 이 집이 좋아. 우리 집보다 더.”

16551152401841.jpg“왜?”

16551152401833.jpg“네가 어디에 있든지 다 보이거든.”

  7년 전의 그는 언젠가 그렇게 말했다. 솔직하고 노골적이었다. 옷을 갈아입을 때, 재미난 실수를 했을 때, 왠지 기분이 좋을 때, 지헌은 옆에서 지켜보다가 매번 그녀의 허리를 당겨 끌어안았다. 그는 그녀가 눈에 보일 때 마음이 안정된다고 말했다. 반대로 그녀가 옆에 없을 때는 왠지 모를 초조함과 불안감이 있다고. 그래서 그 원룸이 좋다고 했다. 그녀의 모든 것을 볼 수 있어서.

16551152401841.jpg‘책상도 꽤 비슷한 걸 구해놨네.’

지헌이 꾸며놓은 방은 볼수록 경이로웠다. 가구의 사이즈와 디자인을 비롯해서 침대 시트 색, 커튼 색까지 엇비슷했다. 이 방은 언제 꾸민 걸까. 그의 기억이 점점 돌아오고 있는 걸까? 눈가에 묻어난 눈물을 닦은 정오는 벅찬 마음을 안고 주방으로 달려갔다.

16551152401833.jpg“구경 다 했어요?”

지헌이 부침개 반죽을 만들며 물었다. 취미 요리라고 했지만, 역시 말뿐이었던 것 같다. 7년 전엔 작은 주방도 깔끔하게 쓰던 요리 꿈나무 정지헌이, 넓은 주방을 대충대충 너저분하게 쓰는 아마추어가 되어 있었다. 지헌이 늘어놓은 것들을 보고는 슬며시 웃은 그녀가 운을 띄웠다.

16551152401841.jpg“맨 끝 방 있잖아요. 그 방은 다른 방들하고는 느낌이 다르네요. 이 집이랑 안 어울리던데.”

16551152401833.jpg“아. 거기.”

지헌은 그녀의 지적을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16551152401833.jpg“잘 기억은 안 나는데 오래전에 내가 그런 집에 놀러 간 적 있었나 봐요.”

16551152401841.jpg“……언제요? 누구네 집?”

16551152401833.jpg“아무것도 기억 안 나요. 열 살 무렵인지 스무 살 넘어서인지 아무것도.”

16551152401841.jpg“…….”

16551152401833.jpg“그냥 어렴풋이 그런 가구랑 구도가 머릿속에 남아 있어서 재구성해본 거예요. 그 기억이 왠지 좋아서.”

그의 목소리를 듣는 정오의 눈이 먹먹하게 젖어갔다.

16551152401833.jpg“실제로 꾸며놓고 나서 가끔 그 방에서 자는데, 불면증에 효과가 좀 있죠. 그 방에 들어가면 왠지 마음이 편해져서.”

하아.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16551152401833.jpg“승규가 그러는데, 그냥 전형적인 원룸이라네요.”

이 사람의 기억은 지금 어디까지 왔을까. 다시 정오의 고민은 방문을 열어보기 전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녀가 안고 있는 고민으로 인해 인생이 달라질 사람들을 꼽아보다가 엄마, 이국순 여사를 떠올렸다. 엄마는 한 번도 예나의 아빠가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애 아빠를 욕하는 일도 없었다. 정오가 먼저 입에 올리지 않은 것은 운도 떼지 않았다. 그 기억이 딸을 상처입히는 것이라면 굳이 말을 꺼내어 딸의 가슴을 후벼팔 수 없었던 것이다. 엄마의 인내가 어떤 것인지 이제야 정오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눈앞의 정지헌은 지금 그녀가 어떤 애끓는 속으로 여기 서 있는지 조금도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요리에 몰두하고 있었다. 중간중간 눈동자가 흔들렸다. 요리의 다음 단계를 까먹어 우왕좌왕하는 눈빛이었다. 이 사람은 노력하고 있어. 나는 이 사람을 믿는다. 당신은 당신의 방식으로 나를 기억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물론 너무 늦어지기 전에 내가 먼저 말할 테지만, 그전에 일말의 힌트라도 얻을 거라고 믿어. 그러니 기다릴게. 당신이 당신만의 기억을 되찾길 바라. 아무도 오염시키지 않은 그 깊숙한 기억을 당신의 힘으로 꺼내길 바라.

16551152401833.jpg“자. 봐요.”

정오가 몇 마디 마음의 소리를 흘려보내고 있을 때, 그는 어느새 혼자 부침개를 굽고 뒤집었다. 아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16551152401833.jpg“봤어요?”

16551152401841.jpg“아뇨. 못 봤어요.”

한 번 더 제대로 보고 싶은 마음에 정오는 거짓말했다.

16551152401833.jpg“……제대로 좀 봐요. 알았어요?”

스윽 흘겨본 지헌이 다시 프라이팬을 굳게 잡았다. 홱! 척! 포즈는 7년 전에 비해 어설펐지만 그는 아주 능란하게 부침개를 뒤집었다.

16551152401833.jpg“어때. 내가 낫죠?”

과거의 정지헌과 겨룬 현재의 정지헌이 우쭐한 미소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오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떨려오는 목소리를 들킬까 봐 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 아이를 지키고 싶은 마음 그뿐이었는데, 어느새 정지헌 또한 이정오의 인생에 들어왔다. 그 또한 평안하길, 행복해지길 바라게 되었다. 나는 긴 첫사랑을 하고 있었구나. 가슴속의 추운 계절이 녹아간다. 정오는 마음의 불안을 다스렸다. 더 굳센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래. 지헌 씨. 열심히 기다릴게. 봄이 오기를. 우리 같이 힘내자. 나는 지금 당신이 내게 다가오고 있다고 믿어.

16551152417717.jpg

  * 은비는 오랜만에 심부름을 하게 되었다. 본가에 들러 오빠의 옷과 반찬을 챙겨 은엽의 집으로 갔다. 엄마는 은비에게 분부를 내렸다. 오빠의 오피스텔이 지저분할 테니 가는 김에 정리 좀 해주고 오라고. 평소 같았으면 귀찮아하며 짜증을 냈을 테지만 오늘은 흔쾌히 자처했다. 오빠의 집에서 찾아봐야 할 것이 있었다. 엄마의 정리정돈을 믿기 때문인지 은엽의 집은 늘 너저분했다. 그래도 꽤 철두철미한 편이어서 일과 관련된 흔적은 거의 남기지 않는다. 하여 은비는 한참 동안 흔적을 찾아 헤매야 했다.

16551152433302.jpg‘여기 있어! 역시!’

그리고 은엽의 집을 파헤친 지 한 시간 쯤 지났을 무렵 자료를 찾아냈다. 이정오에 관한 자료였다. 오빠라면 분명히 이정오에 대해 따로 조사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사는 별다를 게 없었다. 이정오에 대한 것보다 이정오의 딸에 관한 것이 훨씬 많아 은비는 자료를 읽는 내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도 애 아빠에 대한 정보는 전혀 없고. 자료조사 수준이 형편없어서 코웃음이 나왔지만 그래도 은비는 절망하지 않았다. 자료엔 이정오의 엄마, 이국순에 대한 정보도 들어 있었다. 은비는 국순이 운영하는 식당 주소를 휴대폰 카메라로 찍어 저장하고는 은엽의 집을 빠져나왔다. 다음 약속 장소는 회사와 집에서 멀찍이 떨어진 호텔이라 꽤 시간이 걸렸다. 은엽의 집을 뒤지느라 약속에는 40분이 늦고 말았다. 은비는 괜스레 조바심이 났다. 급히 호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로비로 들어갔다. 혹시나 남자가 떠나지 않았을까 조마조마했는데, 남자는 여전히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을 발견하고서 성큼성큼 다가오는 남자의 멋진 모습에 은비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조금 찔리는 마음에 목소리가 간드러지게 나왔다.

16551152433302.jpg“자기, 많이 기다렸어?”

16551152433311.jpg“그래. 그냥 돌아가려던 참이었어.”

남자는 눈을 흘기다가 은비의 미소에 어이없이 픽 웃어 버렸다.

16551152433311.jpg“내가 예뻐서 참는다.”

남자의 칭찬이 듣기 좋았다. 은비는 남자의 팔에 꼬옥 팔짱을 꼈다. 모든 면에서 정지헌과 비교되는 남자였다. 자신의 푸념과 서러움을 들어주고 받아주고 위로해주고 안아주고. 무엇보다도, 남자는 은비의 사정을 이해해주었다. 은비는 지헌에게서 받지 못한 위로를 이 남자에게 받았다. 마음씨는 정지헌보다 훨씬 고운데, 정지헌만큼 훤칠하고 잘생겨서 더욱 마음에 들었다.

16551152433302.jpg‘이 남자가 없었으면 난 견디지 못했을 거야.’

지옥 같은 현실에서, 남자는 은비에게 빛과 같은 사람이었다. * 이정오를 만나지 못한 지루한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월말이라 바쁜 와중에 지헌은 카드 회사에 연락했다. 7년 전, 지헌의 명의로 가입되었으나 해지된 카드. 그 카드의 이용 내역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7년 전 11월 2일. 반지를 구입했던 신용카드. 주얼리숍에서 얻은 정보가 지헌이 아는 것의 전부라서, 지헌은 상담원에게 카드번호조차도 제대로 알려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상담원은 꽤 친절했다.

16551152433311.jpg[고객님, 카드 이용 내역은 5년까지는 의무적으로 보관을 하는데요, 7년 전에 해지된 카드의 이용 내역 조회는 가능할 수도 있고 불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우선 신분증 사본을 팩스로 보내주시고요. 제가 보내드리는 문자메시지 안내에 따라서 휴대폰 본인 확인 인증 부탁드릴게요.]

16551152401833.jpg“네. 알겠습니다. 본인 확인 후에 언제쯤 자료를 받아볼 수 있습니까?”

16551152433311.jpg[카드 이용 내역이 조회가 되면 오늘 안에 고객님의 이메일 주소로 자료를 보내드릴 수 있고요. 만약에 조회가 안 되면 따로 연락드리겠습니다.]

16551152401833.jpg“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지헌은 예의를 갖추어 인사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잠시 후 카드 회사에서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지헌은 문자메시지의 안내에 따라 신분증 사본을 팩스로 보내고 본인 인증까지 마쳤다. 이제 기다리는 시간. 마음은 계속 싱숭생숭했다. 신분증 사본을 넣어두려 열게 된 서랍에는 금요일에 구입한 반지가 있었다. 반지를 손에 끼고 활짝 웃는 이정오를 보고 싶었다. 지헌은 지금 자신이 하는 일이 ‘더 앞으로 가기 위해 꼭 정리해야 할 과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굳게 마음먹은 그에게 메일 수신 알람이 도착했다. 카드 회사에서 온 자료였다. * 저녁 시간. 국순은 저녁 장사를 시작했다. 국순이 일을 하는 동안 예나는 주방 옆에 마련된 작은 평상에서 시간을 보낸다. 신나게 뛰어놀 나이에 식당의 평상 신세. 작은 아이라 갑갑하다고 보챌 만도 한데 이런 일상에 적응이 되어서인지 아이는 덤덤한 편이다. 예나는 할머니가 얼마나 바쁜지 간간이 지켜보면서 오늘 들어온 주문들을 공책에 적어보며 수학 공부를 하고, 책도 보고 색종이도 접고 혼자 바둑도 두고, 식당을 찾은 손님들의 이야기도 엿들으며 지루한 시간을 즐긴다. 국순은 그런 손녀딸을 기특하게도 안쓰럽게도 바라본다. 그런 평화로운 일상. 오늘은 단골손님이 인사를 하고 나가며 국순에게 살갑게 말을 걸었다.

16551152433311.jpg“사장님, 잘 먹었습니다.”

16551152450707.jpg“네.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16551152433311.jpg“여기는 술만 팔면 매상이 두 배는 뛸 텐데. 두 배가 뭐야, 다섯 배는 뛸 텐데 말이에요.”

주류를 팔지 않는 가게라 저녁 손님은 많지 않은 편이다. 국순의 음식솜씨가 워낙 좋아서 단골들은 저녁 손님이 적은 것을 안타깝게 여기지만 국순은 이 정도에 만족하고 있다. 아무래도 아이가 있기 때문에 저녁 장사는 주의할 수밖에 없다. 단골손님이 떠나고 난 후, 식당은 다시 한가해졌다. 날이 더워서인지 오늘은 손님이 없었다.

16551152450707.jpg“오늘은 일찍 들어갈까?”

16551152450723.jpg“응!”

집에 일찍 가면 TV도 볼 수 있고 앞구르기도 할 수 있고. 예나는 할머니의 제안을 반기며 활짝 웃었다. 하지만 예나가 평상에서 몸을 일으키자마자 식당 문이 열렸다. 예나는 실망한 표정으로 다시 평상에 엎드렸고 국순은 자리에서 일어나 입구를 내다보며 반갑게 인사했다.

16551152450707.jpg“어서 오세요.”

그러나 자연스레 올린 입술 끝이 금세 허물어졌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을 어렴풋이 알아볼 수 있었다.

16551152433302.jpg“어머, 이게 누구야? 아주머니, 안녕하세요!”

16551152450707.jpg“…….”

16551152433302.jpg“저 기억 나시죠? 저 채은비예요.”

얼굴은 꽤 달라졌지만 은근하게 날카로운 그 목소리는 그대로였다. 국순의 얼굴색이 어둡게 변했다.

16551152450747.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