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 다시 그대에게 (1) (68/183)

68. 다시 그대에게 (1)2021.12.22.

16551153288093.jpg“한마디만 하면 돼.”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그가 입을 열었다.

16551153288093.jpg“그 아이가 내 아이라고.”

묵직한 목소리가 가슴을 저릿하게 울렸다. 어쩔 수 없는 탄식이 터져 나올 것 같았지만 정오는 입을 꾹 닫았다. 확신에 닿은 걸까, 아니면 그저 믿고 싶은 걸까. 그의 속을 알 수 없었다. 그를 향해서는 언제나 빠르게 뛰었던 심장이 이제는 욱신거렸다. 눈에 힘을 주니 눈가가 더욱 뜨거워졌다.

16551153288093.jpg“예나가 내 딸이라고.”

정오는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 또한 미약하게 떨려오는 것을 알아보았다. 목소리마저도 간절하고 절박했다.

16551153288093.jpg“우리 딸이라고 말해.”

그녀가 대답하지 않으니 지헌은 거듭 목소리를 내었다. 애써 감정을 꾹꾹 눌렀으나 목 안쪽에서 파도가 일렁였다. 모두 같은 말. 대답을 요구하며, 어느새 지헌의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용인할 수 있는 대답도 하나뿐이었다. 대답만 하면 돼. 대답만 해준다면 난 네게 모든 것을 줄 거야. 그의 절절한 감정이 전해졌을까. 정오의 오른손이 그의 뺨 위로 올라왔다. 피부를 간질이듯 부드럽고 상냥한 손길이었지만 입술은 여전히 꽉 붙인 채였다. 그가 원하는 대답은 끝내 들려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가 자신을 어르고 달래어 이 상황을 빠져나가보려는 것 같기도 했다. 불안해진 지헌은 제 뺨을 괴롭히는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16551153288093.jpg“말해.”

16551153288125.jpg“…….”

16551153288093.jpg“말해. 제발.”

이제 그의 목소리는 애원이 되었다. 그를 바라보는 정오 또한 가슴이 저몄다. 애타는 감정이 내내 일렁거렸다. 무엇이 당신을 이렇게 만들었나. 누가 이 남자를 미치게 했는가. 누가 이 남자를 이토록 절박하게 만들었는가. 그사이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 길이 없는 정오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진실이든 거짓이든, 그는 이제 상관없는 것 같았다. 그는 그저 대답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를 위해서 입을 열어야 했다. 제 대답의 무게를 가늠해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길을 잃은 아이처럼 서성거렸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현실적인 판단을 내려야 한다. 그저 그녀가 온전히 자신의 것이기를 바라는 그의 욕망이 잘못된 판단을 내린 것일 수도 있다. 그녀 하나를 움켜쥐기 위해서 다른 모든 걸 버리겠다는 위험한 충동일지도 모른다. 말해도 돼? 그래도 되는 거야? 그가 정말 진실에 닿았다면, 모두 알게 되었다면, 이제 그의 기억을 저울질하여 더 혼란케 할 수는 없다. 나는 그저 사실을 말하기 위해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그녀 또한 간절히 원하던 것이기도 하다. 스물셋이었던 그녀는 어느덧 서른이 되었다. 자그마치 7년. 이제 그만 이 고통을 끝내고도 싶었다. 자신을, 그리고 자신의 딸을 속이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결심을 굳힌 정오의 입술이 무겁게 떨어졌다.

16551153288125.jpg“맞아. 당신 아이야.”

7년의 세월. 길고긴 시간을 돌아 당신에게. 담담하게 목소리를 내었지만 말끝은 이내 흐무러지고 말았다. 가로등 불빛 아래서도 붉은빛이 묻어나는 그의 눈이 더욱 커졌다. 그가 원하는 대답을 내놓았는데도. 그토록 한가지 대답만을 종용해놓고는 사실은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이 충격에 휩싸인 표정으로 그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할 말을 잃은 것처럼, 목소리까지도 잃은 것처럼. 그의 입술은 느릿하게 위아래로 움직였지만 그녀의 귀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정오는 한 번 더 확실하게 진실을 알려주었다.

16551153288125.jpg“우리…… 우리, 아이야.”

그녀에게도 힘겨운 고백이었다. 어느새 흐려진 그녀의 눈에 고통으로 일그러진 그의 얼굴이 그득 담겼다. 허어어……. 이토록 애처로운 표정을 본 적이 있었던가. 그녀가 살면서 마주한, 세상에서 가장 슬픈 얼굴이었다. 정오 또한 가슴이 아렸다. 오랫동안 알지 못했던 진실을 알게 된 이의 비애는 처참했다. 처음 보았다. 언제나 자신의 앞에서 차갑고 오만한 모습, 당당하고 늠름한 모습, 이성적이고 강한 모습만 보여주던 남자가 인생의 모든 것을 잃은 양 무너진 얼굴을. 그를 지지하는 세상이 다 무너져내린 표정이었다. 그는 숨을 쉬는 것도 잊은 듯했다.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비틀거리는 지헌을 그녀가 붙잡았다. 그 또한 정오의 두 팔을 부여잡았으나 버티지 못했다. 그녀의 어깨에 기대는가 싶던 그는 지지할 다리를 잃은 것처럼 스르르 무너졌다. 정오 또한 함께 주저앉았다. 허어, 허어, 허어어어……. 그녀의 어깨 위에서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한, 헐떡이는 음성이 들려왔다. 정오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그저 그를 부둥켜안았다. 그의 처절한 숨소리가 어둠을 더욱 어둡게 물들여갔다. 아니, 이건 울음이었다. 허으으. 흐으으으으으…….

16551153288145.jpg

  심장이 짓눌린 채로, 성대를 빼앗긴 채로 울부짖는 듯한 짐승 같은 흐느낌이 그녀의 어깨를 적셨다. 그가 부여잡고 끌어안은 그녀의 팔과 어깨는 뻐근할 정도였다. 이 여름의 한복판에서 혹한을 만난 듯 그의 어깨가 부르르 떨려오고 있었다. 얼마 전 정오가 그에게 물었다. 7년 동안 어떻게 살았느냐고. 기억을 잃으면 스스로를 잃은 것이 아니냐고. 그건 정말이었다. 그는 그 7년 동안 스스로를 잃은 채로 살았다. 눈이 감기고 귀가 막힌 채로 숨만 쉬며 살아온 것과 다름이 없었다. 나는 몰랐어. 정말로 몰랐어……. 네가 없는 내 세상엔 아무것도 없어서, 너에게 가는 방법조차 알지 못했어. 어쩌면 내게도 소중한 게 하나쯤은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무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어. 아무도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 아이에게만, 정오에게만 시간이 흐른 것이 아니었다. 스물여섯이었던 지헌 또한 서른셋이 되었다. 지금도 여전히 한창의 청춘을 살고 있지만, 그 사실이 지나간 시간을 되돌려주지는 않는다. 한 살, 두 살, 세 살, 네 살, 다섯 살, 여섯 살의 예나……. 그 예뻤을 아이를, 지금의 지헌은 안아줄 수도 만질 수도 없다. 그렇게 놓쳤다. 모든 것을. 그렇게 바보같이, 아무것도 몰랐던 스물일곱의 정지헌. 스물여덟의 정지헌. 스물아홉, 서른, 서른하나, 서른둘의 텅 빈 정지헌.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 모든 시간의 정지헌이 함께 절규했다. 으으으……. 으으으으으으……. 정오는 지헌의 어깨를 더 꽉 끌어안았다. 견디지 못한 정오의 눈물도 함께 흘러내렸다. 여전히 들썩이는 어깨가 그의 절망을 짐작케 했다. 창자가 끊어질 듯이 비통한 오열에 정오는 애처로운 사실 하나를 깨닫게 되었다. 이 남자는 정말로 혼자였구나. 그의 애통함은, 그의 시간은 누구에게서 보상을 받나. 계절이 수십 번 바뀌고, 그때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빛이 났던 어여쁜 딸아이. 지옥에 있었던 엄마를 천국으로 끌어올린 인생의 은인. 정오가 딸아이로 인해 누렸던 모든 행복을, 그 인생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그는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진짜 지옥을 걸었던 건 이 사람이었구나…….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렀다. *** 7년 전, 한 해의 마지막 날. 정오는 기차에 올랐다. 군산에서 친구와 함께 식당을 운영하시는 엄마 이국순 여사와 새해를 보내기 위해서였다. 날이 날이니만큼 기차 안은 붐볐다. 사람들과 스칠 때마다 정오의 손은 자연스레 배 쪽으로 향했다. 정오의 옆에는 30대로 보이는 여자가 앉았다. 그리고 그 옆, 통로 맞은편에는 여자의 가족으로 보이는 10살 남짓의 아이와 아빠가 앉았다. 아이의 입으로 끊임없이 먹을 것이 들어갔다. 아이 엄마는 아이에게 그만 좀 먹으라고 잔소리를 했고, 아이 아빠는 특별한 날인데 뭐 어떠냐며 아이의 두 손에 사탕을 쥐여주었다. 가족은 자기들만 아는 얘기를 나누며 별것도 아닌 농담에 시종일관 함께 웃었다. 참 예쁘고 단란한 가족이었다. 그녀는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영원히 갖지 못할. 정오는 그 모습을 먹먹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창밖, 지나치는 풍경들을 눈에 꾹꾹 눌러 담기로 했다. 그녀는 자신의 미래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세 시간여를 달린 기차가 군산역에 닿았다. 서울에서 딸이 온다며, 그 똑똑하고 기특한 딸이 온다며 동네방네 자랑을 하고 다닌 엄마가 상기된 얼굴로 딸을 기다리고 있었다.

16551153318796.jpg“이정오!”

열차에서 내린 딸을 곧장 알아본 엄마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엄마의 상기된 표정은 이내 사라졌다. 엄마는 아이의 몸이 이상하다는 것을 금세 알아챘다. 게다가 사람들과 스칠 때마다 품안의 무언가를 지키듯 빠르게 물러나는 아이의 모습.

16551153288125.jpg“엄마.”

엄마를 발견하고서 다가오는 그 웃는 얼굴. 그 슬픈 얼굴에 국순은 아무 표정도 지을 수 없었다. 국순은 일을 쉬고 곧장 서울로 가 딸아이의 집을 정리하고서 군산으로 돌아왔다.

16551153318796.jpg“여기서 지내면 돼. 너는 걱정할 거 하나도 없어. 엄마랑 같이 병원 다니면서 건강하게 지내다가 다시 학교로 돌아가면 돼.”

그렇게 엄마와 딸의 한집살이가 다시 시작되었다. 국순은 굳세게 정오를 챙겼다. 그녀는 정오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이를 잘 알고 있기에 국순 또한 함부로 무너지지 않았다.

16551153318796.jpg“아무 문제 없어. 엄마만 믿어.”

정오가 잠시라도 침울해 있으면 국순은 더욱 기운찬 모습을 보여주었다. 속이 미어져도, 아이의 아빠에게 당장 쫓아가고 싶은 마음이 머리끝까지 차올라도, 딸 앞에서는 눈물을 보이거나 입에 욕을 담지 않았다. 딸을 나무라지도 않았다. 엄마가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으로 딸을 지켰다. 아이가 그 어떤 어둠 속에 갇혀 있어도, 이국순에게 이정오는 영원한 태양이었다. 엄마의 보살핌 속에서 정오는 서서히 진짜 웃음을 되찾아갔다. 지난겨울, 모든 것을 잃은 듯했던 정오는, 실은 자신이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났다. 정오는 다시 한번 사랑에 빠질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이를 위해서 더 강해지고자 하는 엄마의 마음도 알게 되었다. 정오는 자신 또한 엄마처럼 딸에게 ‘엄마만 믿어’라고 말할 수 있는 강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오래전. 이제는 지나간 이야기. 어느새 모두 추억으로 남은. *** 지헌의 차 안. 지헌은 최근의 며칠간 있었던 일과 자신이 기억해낸 것을 정오에게 털어놓았다. 자신이 정오와 연인 사이였다는 것, 그리고 태어날 아이가 있었다는 것. 그것이 지헌이 기억해낸 전부라 정오는 조금 아쉬웠다. 하지만 7년 전 자신의 흔적을 더듬어 그녀에게 닿은 의지에는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7년 전의 그가 자신에게 프러포즈를 하려고 했었단 이야기에는 가슴이 뜨거워졌다. 정오도 지헌에게 지난 7년간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들려주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때의 방황, 그때의 고생스러웠던 날들도 추억하며 웃을 수 있게 되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내내 젖어 있었지만. 묵묵히 정오의 이야기를 들은 지헌이 물었다.

16551153288093.jpg“우리는 왜 그렇게 됐지?”

우리는 왜 헤어졌어? 내가 너를 놓을 리가 없는데. 그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라 지헌의 의심은 곧장 자연스러운 방향으로 흘러갔다.

16551153288093.jpg“왜 나한테 연락하지 못했어? 누가 우리 사이를 막아놓은 거지?”

지헌의 정확한 질문에 정오의 눈동자도 꽉 긴장했다. 진실을 알려줄 시간이었다. 정오는 비교적 담담해진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16551153288125.jpg“내 이야기 들어줄 수 있겠어? 오빠한테는 조금 충격일 수도 있을 텐데.”

  * 은비가 떠난 후,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영미의 경련은 멎질 않았다.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16551153318832.jpg‘그럴 리가 없어. 동명이인이겠지.’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휴대폰을 꼭 쥔 채 부산스럽게 복도를 왔다 갔다 하던 영미는 결국 한밤중에 지헌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16551153318836.jpg[네. 사모님.]

지헌의 비서는 영미의 연락에 곧장 응답을 주었다.

16551153318832.jpg“윤 비서. 퇴근했지? 미안해요. 내가 좀 궁금한 게 있는데. 회사에 이정오라는 직원이 있어요? 지금 그 직원 사진 한 장만 보내주면 안 될까?”

16551153318836.jpg[네. 알겠습니다.]

비서는 군말 없이 영미의 요청에 응했다. 잠시 후 영미의 휴대폰 알림이 울렸다. 비서가 보낸 사진이었다. 영미는 떨려오는 손끝으로 화면을 눌렀다. 사진이 떴다. 이럴 수가! 저승사자라도 만난 듯, 사진을 확인한 영미의 얼굴이 얼어붙었다. 7년 전의 그 아이. 미혼모의 딸이라던 그 아이. 아들에게 그렇게나 집착하던 그 여자아이, 이정오의 얼굴이 휴대폰 화면에 담겨 있었다.

16551153318832.jpg‘그렇다면 그 일곱 살짜리 아이가……!’

16551153348562.pn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