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세상에 이런 일이!2022.01.19.
흐뭇하게 웃은 정오에게 지헌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런데 언젠가 예나 친자 검사를 해야 할 수도 있어.”
“난 괜찮아. 법적인 절차란 것도 이해해.”
정오는 가뿐하게 끄덕였다. 하지만 걸리는 것이 하나 있긴 했다.
“근데 내가 문제가 아니야. 예나가 문제라고.”
정오가 지적해주니 지헌의 어깨가 축 처져가는 것이 보였다.
“예나는 눈치가 빨라. 친자 검사를 받으려 한다는 말에 예나가 상처받을 수도 있어.”
“그렇지. 예나가 중요하지…….”
예나가 중요하지. 예나가 중요해……. 그의 입안에서 예나가 중요하다는 말은 기도문이 될 것 같았다.
* 출근하기도 전에 많은 일들이 일어난 아침. 하지만 지헌은 지치지 않은 모습으로 출근했다. 집무실 앞을 지키는 윤애라 비서가 일어나 인사했다.
“이사님, 나오셨습니까.”
“네. 안녕하세요.”
“저기, 이사님.”
윤 비서가 집무실에 들어가려는 지헌을 조심스럽게 불렀다. 지헌이 고개를 돌렸다.
“제가 어제 깜빡하고 말씀 못 드린 게 있는데요…….”
사실 깜빡한 건 아니었다. 말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결국 하지 못한 이야기를 용기 내어 하는 것이었다. 왠지 더 지체해서는 안 될 것 같아서.
“그저께 밤에, 장영미 여사님께서 우리 본부 이정오 대리의 사진을 요청하셨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보내드렸습니다.”
“…….”
“죄송합니다.”
미간을 좁힌 지헌이 생각에 잠겼다.
‘윤 비서가 어머니께 정오의 사진을 보냈단 말이지…….’
그러면 정말로 어머니의 해명 일부는 사실이 된다. 채은비가 ‘이정오’라는 이름을 발설하여 어머니가 이정오에 대해 따로 알아보게 되었다는 해명. 그렇다면, 정말로 예나의 유괴 미수 사건은 어머니와 관련 없다는 건가?
‘그럼 채은엽이?’
채은엽은 대체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인가. 그래도 7년 전 뺑소니 사고 이후 많은 도움을 받아 고마운 마음으로 원만하게 지내고 있었는데, 그동안 녀석에게 꽤 이용당했을지도 모르겠단 추측에 찜찜해졌다. 그래도 이정오가 있으니 곧 까발려지겠지.
“윤 비서님을 신뢰하고 있었는데. 이번 일은 안타깝네요.”
지헌은 걱정을 잠시 접어두고 비서에게 핀잔을 주었다. 비서는 몸 둘 바를 몰라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앞으론 조심해요. 회사 외부 사람에게 절대 정보 넘기지 말고.”
“네.”
“여기서 외부 사람이라는 건 협력 업체도 포함됩니다. 누군가 회사 정보를 캐물으려고 하면 내게 먼저 얘기해줘요.”
“네. 알겠습니다.”
따끔하게 주의를 준 지헌이 돌아서려는 순간, 통로 끝에서 누군가 빼꼼 얼굴을 내미는 것이 보였다. 승규였다. 오늘 말해주기로 했던 그 무언가가 궁금해서 아침부터 득달같이 달려온 것이다. 지헌은 승규와 함께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뭐야. 아침부터 왜 이렇게 살벌해.”
“그런 게 있어.”
의아한 표정으로 지헌을 살피던 승규는 바로 화제를 전환했다.
“야. 오늘 얘기해준다며. 얼른 다 털어놔봐.”
승규는 아주 오랜만에 출근 시간을, 출근을 기다렸다. 지헌이 무슨 얘기를 해줄지 궁금해서 잠도 오지 않았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여자와는 담쌓고 살 것 같은 얼굴이었는데, 이정오 대리와 썸을 타는가 했더니 예나와 만나는 데 도와달라는 요청을 하지 않나, 어제는 무려 이정오 대리의 어머니까지 만난다고 하고. 이건 분명히 결혼의 낌새인데, 애가 생긴 것도 아니라면 이정오 대리의 어머니까지 찾아뵐 일이 대체 뭐란 말인가. 지헌이 그 미스터리의 포문을 열었다.
“놀라지 말고 들어.”
“그래. 준비됐다. 얼른 말해.”
“내가 7년 전에 기억을 잃었잖아. 3년간의 기억이 전부 날아갔고.”
“그랬지. 근데 기억이 좀 돌아오는 것 같더라며.”
“응. 그 기억이 이정오에 대한 거였어.”
“……이정오 대리랑 그 당시에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고?”
“그냥 알고 지낸 정도가 아니지.”
“……설마.”
심장이 철렁. 눈앞이 번쩍.
“설마, 설마!”
설마! 그러고 보니 이정오와 정지헌은 첫 만남부터가 이상했다. 정지헌은 이정오의 외모에 집착했고 이정오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정지헌의 손목을 잡은 적도 있었다. 이정오는 알았던 거다. 정지헌을 알고 있었기에 나왔던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던 것이다! 승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호들갑스럽게 양손을 저었다.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듯.
“으아! 말하지 마! 나 심장이 떨어질 거 같아!”
내 일도 아닌데, 그저 남 일을 전해 듣는 것뿐인데, 승규는 제게 닥친 일이라도 되는 양 흥분하여 얼굴이 붉어졌다.
“진짜야? 진짜야?”
“그래. 예나가 내 친딸…….”
“허! 말도 안 돼!”
세상에, 세상에! 자리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승규는 뭉크의 작품 안으로 쏙 들어가버린 사람처럼 두 손을 뺨에 갖다 대고 집무실을 두 바퀴 뱅뱅 돌다가 한쪽 벽에 머리를 쿵 박고서 섰다. 세상에 이런 일이! 세상에 이럴 수가! 오만가지 생각이 요란하게 머릿속을 떠다녔다.
‘정지헌이 이정오 대리의 애인이었다고? 예나의 친아빠가 정지헌이라고? 우리 도빈이가 좋아하는 예나의, 그 없다고 했던 친아빠가 정지헌? 그럼 뭐야, 어떻게 되는 거야. 나는 우리 부인한테 이정오 대리가 미혼모라고 흉봤는데. 지헌이랑 미혼모랑 잘되길 빌어줄 순 없겠단 생각이었는데, 그랬는데 우리 진서 씨 덕분에 욕을 면한 거야? 아니지, 아니지, 아니지. 예나는 그럼 재벌집 하나뿐인 손녀딸이잖아. 예나가 우리 도빈이랑 계속 놀아줄까? 앞으로는 우리 집에도 안 오는 거 아니야? 뭐야, 두 사람 잘되라고 밀어줬는데 우리 도빈이만 낙동강 오리알 되는 거야? 내가 지금 아빠가 돼가지고 우리 아들 앞날을 막아버린 거야?’
복잡한 생각의 꾸러미가 승규의 머릿속에 쌓이고 쌓여 그의 발까지 무겁게 만들었다. 승규는 그 몇 초 사이에 몇 달은 늙어버린 것 같은 표정으로 휘청휘청 돌아섰다.
“……내가 축하해야 할 일이지?”
“그럼. 좋은 일이지.”
“좋은 일 맞지?”
“그래. 맞아.”
“…….”
“놓친 시간들이 많고, 여전히 기억은 다 돌아오지 않아서 안타깝긴 하지만.”
“…….”
“이제라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야.”
지헌의 표정은 편해 보였다. 승규는 여러모로 불편해졌지만.
“이런 얘길 들어줄 사람도 너밖에 없다.”
“그렇지?”
“…….”
“우리 도빈이랑 예나도 계속 놀게 해줄 거지?”
승규는 간절함을 담아 지헌의 대답을 구했다. 회사에서도 영락없는 을인데, 자식 관계에서도 을이 된 것만 같은 서글픈 마음이었다. 뜻밖에도 지헌은 한숨을 쉬었다.
“그건 오히려 내가 도빈이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다.”
“…….”
“예나가 아직 날 못 받아들이거든.”
“아…… 혼란스러운가 보구나.”
“애들은 원래 그런가?”
“그럴 수도 있지. 평생을 아빠 없이 살아왔는데, 아빠가 폭탄처럼 하늘에서 뚝 떨어진 느낌이겠지.”
“…….”
“야. 그런데 이런 인연도 있구나.”
“그러게. 이런 운명도 있다.”
“아니, 너랑 나 말이야. 우리는 진짜 인연이다. 그렇지? 나 아니었으면 너 어쩔 뻔했어. 딸이랑 바둑 한번 못 둬볼 뻔했잖아.”
“……앞으로는 평생 바둑 못 둘 것처럼 말하네.”
“아무튼 넌 이 인연을 절대 잊으면 안 돼. 지금 현재 예나는 너보단 우리 도빈이랑 더 친하니까 부탁할 거 있으면 정중하게 부탁하고. 알았어?”
완강하게 말했지만 목소리는 한없이 살갑고 부드러웠다. 승규는 이제 지헌과 평생 싸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후, 마음을 다스린 승규가 현실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럼 이정오 대리는 어떻게 할 거야?”
“응? 왜?”
“다른 본부로 보내야지. 네가 인사고과 책임자인데, 말 나오기 쉽잖아.”
“채은비 때는 아무 말 없었잖아.”
“채은비랑은 다르지. 채은비 과장은 네가 오기 전부터 여기 있었던 사람이고, 이정오 대리는 네가 첫 고과를 주게 되는 건데.”
“…….”
“다른 본부로 옮기는 게 좋아. 너를 위해서, 그리고 이정오 대리를 위해서도.”
싫어. 지헌은 승규의 주장을 인정할 수 없었다. 정오를 다른 본부로 보낼 수는 없다. 지금도 이 집무실에 책상을 놔주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눌러눌러 참고 있는 건데.
“박승규. 내가 뭐라고 말할지 알지?”
“…….”
“모르는 척해.”
절대 이정오를 다른 본부에 빼앗길 수 없었다. * 「하진철 변호사님 안녕하세요. 이정오입니다. 며칠 만에 다시 연락드리네요. 얼마 전에 회사에서 소동이 있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그 C양이 공공장소에서 저를 모욕했습니다. 화장실에서 소리를 질러서 화장실 밖에 있는 사람들까지 모두 들었고요. 당시의 녹음 기록도 첨부하오니 확인 부탁드립니다. 첨부한 자료는 다른 데 새나가지 않게 신경 써주셨으면 합니다. 변호사님을 믿고 보내드립니다. 증거자료를 만들었으니 이제 고소 진행해도 되겠죠? 가능한 시간 말씀 주시면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대대로 미혼모 집안이 자랑이니? 몸 함부로 굴리는 건 유전인가 보지? 그래도 인생을 생각해서 애는 지우지 그랬어. 엄마 닮아서 몸 함부로 쓴다는 소린 듣기 싫었을 텐데.]
이정오에게서 온 이메일과 첨부파일까지 모두 확인해본 은엽은 거칠게 한숨을 내쉬었다. 첨부파일의 녹음자료는 영락없는 채은비의 목소리. 구역질이 나올 만큼 원색적인 비난이었다. 은엽이 들어도 맞을 만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고소 가능한 자료였다. 이정오. 딱 한 번 만나보려고 했던 여자였다. 어떤 여자인지, 어떤 약점을 가지고 있는지 판단하기 위해서. 이전의 미팅에서 수확이 전혀 없었지만 동료 변호사를 사칭하고 만났기에 추가 상담을 해줄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동생 채은비에 대한 용건만 아니었어도 절대 콧방귀도 뀌지 않았을 것이다. 「제가 업무 중에 잠깐 시간을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오늘 오후 6시에 카페에서 뵐까요? 카페 주소 보내드리겠습니다.」 은엽은 울며 겨자를 먹는 심정으로 정오에게 짤막한 답신을 보내놓고 회신을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겠다는 회신이 왔다. 그리고 오후 6시 20분. 은엽은 약속 시간보다 20분 늦게 카페에 나타났다.
“변호사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생각보다 일이 늦게 끝나서요.”
“아닙니다. 이렇게 만나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정오는 처음 만났을 때보다 좀 더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얼굴색이 좋아 보이니 조금 예뻐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정지헌을 손에 넣기 위한 먹잇감일 뿐. 이 여자는 꿈에도 모르겠지. 아이의 할머니가 아이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친자확인까지 했다는 사실을. 은엽은 슬쩍 비웃으며 곧장 용건을 말했다.
“보내주신 자료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그 C양이, 무턱대고 이런 얘기를 하진 않았을 것 같은데요. 문맥을 생각해보니 그 이전에 무언가 사건이 있었을 것 같아서요. 혹시 이정오 씨가 C양을 흥분시킬 만한 단초를 제공했습니까?”
“단초라기보단, C양이 친구들을 이끌고 저희 엄마 식당에 방문했어요. 거기서 제 딸을 만났는데, 오만 원을 건넸다네요. 그래서 아이한테 그런 큰돈을 주면 안 된다는 말을 했을 뿐인데, C양은 이렇게 살벌하게 나오더라고요.”
은엽의 눈썹이 반대로 휘었다. 그게 아닐 텐데? 분명 네가 먼저 손찌검을 했을 텐데?
“그것 말고 다른 일은 없었나요? 가령, 이정오 씨가 먼저 손찌검을 했다든지.”
“안 하죠. 그런 건.”
“…….”
“회사에서 제가 왜 그런 짓을 하겠어요. 그냥 혼자 손뼉이나 치고 말죠.”
은엽은 그녀의 말이 거짓말이란 걸 알고 있었다. 뻔히 다 아는데도 모른 척을 하느라 잠잠히 있어야 하는 마음은 참으로 착잡했다.
“……알겠습니다. 고소장을 써보도록 하죠. 지금 여기서 쓰면 되겠네요.”
“감사합니다.”
“얼른 쓰고 일어나죠.”
화색이 도는 얼굴을 보며 은엽은 조용히 비웃음을 흘렸다. 고소장은 아주 대충 써주고 증거를 훼손시킬 계획이었다.
“그런데 몇 사람이나 들었습니까. 그 사람들이 증인이 되어줄 수 있을까요?”
“꽤 많이 듣긴 했는데 솔직히 모르겠어요.”
“증인이 함께해주면 좀 더 일이 수월할 텐데요. 아쉽네요.”
“대신 평소에도 C양이 저를 비방했다는 걸 증명할 수 있는 증인이 있어요. 마침 이 근처에서 일이 끝난 모양인데 불러 볼게요.”
아, 아니, 그럴 것까지는……. 은엽이 정오를 말리기 전에 정오는 재빨리 문자메시지를 보내고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사람을 더 부르겠다니, 왠지 모르게 불길한 느낌…….
“저기, 이정오 씨. 저도 갑자기 호출이 와서 이만 일어나야 할 것 같은데.”
불길한 기운을 감지한 은엽이 의자에서 일어난 그 순간 카페 출입문이 열리고 사람이 들어왔다.
“이사님, 여기예요.”
정오가 입구 쪽을 향해 손을 번쩍 들어 보였다. 자리에 엉거주춤 선 은엽의 얼굴이 얼어붙었다. 카페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한 가운데, 저벅저벅 지헌의 발소리만 크게 울렸다. 정오가 보란 듯이 활짝 웃으며 지헌에게 은엽을 소개했다.
“이사님, 이분이에요. 제가 말한 변호사님이요.”
“뭐야. 채은엽. 이정오 대리가 말한 변호사가 너였어?”
지헌은 기가 막히다는 듯이, 벌레 한 마리, 아니, 그보다 더 하찮은 것을 쳐다보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이사님. 하진철 변호사님이에요.”
정오가 연극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능청스럽게 큰 목소리를 내며 지헌과 은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렇죠, 변호사님, 변호사님 이름은 하진철이잖아요. 말씀 좀 해보세요.”
그 어설픈 연기에도 은엽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