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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거짓말 (85/183)

85. 거짓말2022.02.19.

풋. 은엽을 날렵하게 노려보던 지헌이 돌연 옅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16551158568968.jpg“미친놈.”

은엽은 당황스러웠다.

16551158568973.jpg“……뭐?”

16551158568968.jpg“아니, 딴생각이 나서 그냥 혼잣말한 거야.”

16551158568973.jpg“…….”

16551158568968.jpg“늦었는데 얼른 가라. 출입증 똑바로 반납하고.”

지헌이 문을 활짝 열었다. 은엽은 모양 빠지게 쫓겨나기 전에 떠나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은엽이 문밖으로 발을 내딛자마자 문은 가차 없이 닫혔다. 지헌의 행동이 괘씸하여 은엽은 화가 치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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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드르르르르르. 정오는 아침부터 요란하게 울려대는 휴대폰 진동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16551158569002.jpg“여보세요…….”

16551158569006.jpg[엄마, 일어나!]

휴대폰으로 우렁찬 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휴대폰 밖에서는 까르르까르르하는 웃음소리가. 먼저 일어난 예나가 제 휴대폰으로 정오에게 전화를 건 것이었다. 한창 신날 때다.

16551158569002.jpg“이예나. 집에서는 괜찮은데 어린이집에서도 그렇게 장난치면 안 돼, 알았어?”

16551158569006.jpg“엄마, 어린이집에서는 휴대폰 안 켜.”

예나가 명랑하게 대답했다. 아침부터 딸이 기분 좋아 보이니 정오의 얼굴도 활짝 피었다. 한편으로는 요즘 들어 감정이 굽이치는 딸이 조금 걱정되었다. 자주 눈물을 보이는 것도 신경 쓰였다.

16551158569002.jpg“예나 공주. 엄마 좀 봐봐.”

16551158569006.jpg“응.”

16551158569002.jpg“요즘 예나가 너무 자주 울어. 오늘은 울지 않기 하자. 알았지?”

정오는 예나의 어깨를 다독이며 당부했다.

16551158569006.jpg“응.”

예나가 차려 자세로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오는 예나를 끌어안고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딸이 자주 눈물을 보이는 것, 마음 상태가 불안정한 것 모두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았다. 어른들의 사정 같은 건 알 필요 없이 사랑만 받고 따뜻하게 자라야 할 나이에 너무 큰 숙제를 안겨준 게 아닌가 싶었다. 그렇다고 숙제를 미룰 수도 없다. 이 산을 넘으면 딸이 더 행복해지리라는 걸 잘 알기 때문에.

16551158569002.jpg“아침에 아빠한테도 인사해주면 좋겠는데.”

정오는 제 바람을 이야기하며 예나의 눈치를 보았다. 눈동자를 굴리는 예나의 속마음을 알기가 힘들었다.

16551158569002.jpg“그건 아직 안 되겠어?”

한참 뒤에 예나가 물었다.

16551158569006.jpg“엄마, 진짜야?”

16551158569002.jpg“뭐가?”

16551158569006.jpg“아저씨가 진짜 예나 아빠야?”

16551158569002.jpg“그럼. 당연하지!”

예나가 먼저 지헌에 대해 제대로 물어본 건 처음이었다. 조금은 희망이 보였다. 정오는 이를 기회 삼아 예나에게 사실을 털어놓았다.

16551158569002.jpg“예나야, 사실 아빠는 엄마 배 속에 있던 예나한테 오는 길에 교통사고가 크게 났어. 그래서 예나한테 오는 길을 잊어버렸던 거야.”

16551158569006.jpg“…….”

16551158569002.jpg“예나도 주사 맞는 거 아파서 싫어하잖아. 아빠는 그 아픈 주사를 몇 달 동안이나 맞았어. 너무 많이 다쳐서 수술도 하고 약도 많이 먹고.”

정오의 이야기에 금방 동화된 예나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젖었다.

16551158569002.jpg“아빠가 정말로 못 일어날 뻔했는데 살아난 거야. 우리 예나 보려고.”

16551158569006.jpg“…….”

16551158569002.jpg“그러니까 아빠 반겨주자. 응?”

예나는 결국 대답하지 않았다. 조금 시무룩해진 것 같기도 했다. 휴대폰을 장만해서 기분이 좋았던 딸을 다시 처지게 만든 것 같아 정오는 미안해졌다. 한 시간 후, 오늘도 어김없이 지헌이 찾아왔다. 오늘은 어제의 과오를 만회하려는 듯 지헌은 평소보다도 훨씬 일찍 나와 정오의 집 앞을 지켰다.

16551158568968.jpg“예나야. 안녕. 잘 잤어?”

16551158569006.jpg“……안녕하세요.”

그래도 아침의 대화 덕분인지, 예나가 반응을 보였다. 축 처진 목소리에 맥없는 인사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지헌은 기운을 얻었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 그 정도면 만족할 수 있었다. 내일은 더 나아졌으면 좋겠다, 하는 희망도 가질 수 있고. 예나가 떠나는 걸 보며 오랫동안 손을 흔든 지헌이 정오의 손을 잡았다. 정오는 그 손을 꼭 쥐었다가 이내 풀었다.

16551158569002.jpg“오늘은 회사로 출근 안 해. 기훈 씨랑 같이 공장에 가기로 했어. 맥주 받아다가 촬영장으로 갈 거야.”

16551158568968.jpg“송기훈?”

16551158569002.jpg“응. 기훈 씨가 차 끌고 오기로 했어. 그러니 오빠는 눈에 안 띄게 빨리 가줬으면 좋겠네.”

16551158568968.jpg“송기훈 차를 타고 간다고?”

16551158569002.jpg“응. 기훈 씨는 차가 있으니까.”

누가 감히 나와 이정오의 사이를 가로막는가. 지헌은 미간을 찌푸리며 떨떠름하게 물었다.

16551158568968.jpg“왜 송기훈이 가는데?”

16551158569002.jpg“기훈 씨가 맥주캔 패키지 디자인했잖아.”

16551158568968.jpg“고은주 대리는 어쩌고.”

16551158569002.jpg“고 대리는 아침에 일이 있어.”

16551158568968.jpg“…….”

16551158569002.jpg“기훈 씨 올 때 됐어. 오빠는 빨리 가셔.”

지헌은 정오의 말을 몇 번 곱씹으며 속으로 이를 갈았다.

16551158569002.jpg“안 가?”

둘이서. 단둘이서 공장엘 간다고. 공장에 갔다가 촬영장까지 간다고.

16551158568968.jpg“조만간 송기훈도 손 좀 봐야겠네.”

16551158569002.jpg“뭐? 뭘 본다고?”

자그마한 혼잣말을 귀신같이 알아들은 정오가 날카롭게 물었다. 지헌이 별것 아닌 말이라는 듯 슬그머니 미소 지었다.

16551158568968.jpg“농담이지 농담.”

16551158569002.jpg“지금 금방 느낌 싸했는데?”

16551158568968.jpg“농담이야.”

16551158569002.jpg“됐다 됐어. 얼른 출근이나 해.”

실랑이가 길어질 것 같아 정오는 바로 끊어내고 지헌을 길 쪽으로 쭈욱 밀었다. 하지만 지헌은 밀려나지 않았다. 잽싸게 조건을 붙였다.

16551158568968.jpg“알았어. 순순히 출근해줄게.”

16551158569002.jpg“…….”

16551158568968.jpg“저쪽 구석으로 끌고 가서 뽀뽀 한 번만 해주면.”

……애 아빠가 이렇게 잔망미가 넘쳐요. 정말 기가 막히는 건 이게 정말 진심이라는 것. 정오의 입술 사이로 한숨이 폭 쏟아졌다. * 시간이 흘러 오후 5시. 어린이집에서의 하루 일과를 끝내고 바둑학원을 찾은 예나는 수업 내내 두리번거렸다. 도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16551158569006.jpg“선생님, 도빈이는요?”

16551158715677.jpg“응. 도빈이는 치과에 갔다가 온대. 오늘은 좀 늦게 오겠다. 도빈이 기다렸다가 갈래?”

16551158569006.jpg“네.”

예나는 선생님께 대답하고 국순에게도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오늘은 늦게 데리러 와도 된다고. 누군가에게 직접 연락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참 신기하고 편했다. 친구 도빈에게도 빨리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싶었다. 예나는 휴대폰이 잘 보이도록 목에 걸었다. 선생님이 히죽거리며 자리로 돌아가는 예나를 불렀다.

16551158715677.jpg“예나야. 수인이 알아?”

선생님의 옆에는 예나 또래의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인어공주 같은 긴 머리에 예쁜 머리띠를 한 친구였다.

16551158569006.jpg“아뇨. 몰라요.”

16551158715677.jpg“같은 일곱 살 친구야. 홍수인.”

예나는 수인에게 인사했다.

16551158569006.jpg“안녕. 나는 이예나야.”

16551158715677.jpg“응. 나는 너 알아.”

수인은 바둑학원에 들어온 지 일주일밖에 안 되었지만 예나를 알고 있었다. 엄마가 얘기해 주어서. 엄마들의 커뮤니티에서 예나는 본인도 모르는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학원에 바둑 영재가 들어왔다더라. 일곱 살 여자앤데 엄청 똑똑하다더라. 남부럽지 않은 똑똑함으로 어린이집을 누비고 다녔던 수인은 같은 나이에 자신보다 똑똑한 아이가 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예나를 꺾어 자신의 천재성을 입증하고 싶었다.

16551158715677.jpg“선생님, 예나랑 바둑 해도 돼요?”

16551158715677.jpg“수인이는 대국 많이 해봤다고 했지?”

16551158715677.jpg“네.”

수인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아빠와 오빠에게 1년 이상 바둑을 배운 자신의 기량을 뽐낼 때가 온 것이다.

16551158715677.jpg“예나야, 대국해볼래?”

16551158569006.jpg“네.”

예나도 흔쾌히 대국을 받아들였다. 승부욕이 넘치는 두 아이의 성향을 알고 있는 선생님이 말했다.

16551158715677.jpg“시합에서 제일 중요한 건 결과가 어떻게 나든 받아들이는 거야. 졌다고 울지 않고 왜 내가 졌을까 생각해보면 나중에 더 잘 둘 수 있어. 이겼을 때도 마찬가지야. 이기더라도 상대를 놀리지 않고 같이 복기하면서 어떤 수가 강했고 어떤 수가 약했는지 같이 분석해보는 게 좋아. 알았지?”

16551158745359.jpg“네.”

두 아이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이윽고 두 사람은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예나가 백, 수인이 흑을 잡았다. 수인이 돌을 내려놓자 예나도 곧장 수를 두었다. 생각 없이 수를 두는 것처럼 예나의 움직임이 너무나 빨랐다. 툭툭, 바둑돌이 바둑판에 떨어지는 소리에 수인은 점차 마음이 휩쓸려가는 것 같았다. 수인은 선생님이 자리를 잠시 비운 틈을 타 예나에게 말을 걸었다.

16551158715677.jpg“너 한글 다 알지.”

16551158569006.jpg“응.”

16551158715677.jpg“구구단은 다 알아?”

16551158569006.jpg“아니. 몰라.”

16551158715677.jpg“그럼 7 곱하기 7이 뭔지도 몰라?”

16551158569006.jpg“아니. 그건 알아. 49.”

16551158715677.jpg“그럼 9 곱하기 6은?”

16551158569006.jpg“54.”

16551158715677.jpg“구구단 모른다면서 어떻게 그걸 알아?”

수인의 질문에 예나는 바둑판 위에 손으로 네모를 그렸다.

16551158569006.jpg“이렇게 머릿속에 바둑판을 만들어놓고 바둑알을 아홉 개씩 여섯 줄로 만들어서 세어보면 돼.”

그렇게 빨리 셀 수 있나? 수인은 미간을 좁히고 예나를 바라보았다.

16551158715677.jpg“너 영어는 알아?”

16551158569006.jpg“아니. 우리 어린이집은 영어 안 하는데. 근데 왜 너는 바둑에 집중 안 해? 네가 지겠어.”

수인이 집중하지 않는 사이에 예나는 꾸준히 집을 늘려갔다. 어느새 수인이 따라잡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16551158715677.jpg“어어! 안 돼! 이건 봐줘. 내가 잘 안 보여서 잘못 놓은 거야.”

16551158569006.jpg“안 돼. 선생님이 바둑은 무르는 거 없다고 했어.”

궁지에 몰린 수인이 사정했지만 예나는 봐주지 않았다. 결국 수인은 무참하게 패배했다. 수인이 참담하게 바둑판을 쳐다볼 때 예나가 외쳤다.

16551158569006.jpg“선생님, 예나가 이겼어요!”

16551158715677.jpg“예나야, 이기면 어떻게 하라고 그랬지?”

16551158569006.jpg“수인아, 우리 복기하자. 왜 졌는지 생각해봐야지. 내가 알려줄게.”

수인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16551158715677.jpg“나도 다 알아. 알면서 져준 거야.”

수인은 먼저 일어나 교실을 떠나버렸다. 다른 교실 앞에서 수업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던 수인은 교실문이 열리자마자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16551158715677.jpg“오빠아!”

재인이 거기 있었다. 재인은 수인보다 1년 먼저 바둑학원을 다니기 시작한 수인의 오빠였다. 수인은 훌쩍거리며 재인의 팔을 붙잡고서 맞은편 교실에서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

16551158715677.jpg“뭐 그런 걸로 울고 그러냐?”

이야기를 들은 재인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동생을 위로했다. 동생과 매일 싸우고 자신 또한 동생을 울리지만, 동생이 다른 친구에게서 당하고 오는 것만은 참을 수 없는 평범한 오빠였다. 재인은 예나가 도빈을 기다리다가 화장실에 다녀오는 것을 발견하고서 다가가 물었다.

16551158715677.jpg“네가 이예나야?”

16551158569006.jpg“응.”

16551158715677.jpg“네가 그렇게 바둑을 잘한다며.”

16551158569006.jpg“응.”

16551158715677.jpg“근데 넌 왜 집에 안 가? 엄마가 데리러 안 와?”

16551158715677.jpg“아니야. 얘 엄마는 회사 다녀.”

수인이 재인의 뒤에 붙어 지켜보다가 참견했다.

16551158715677.jpg“아, 그럼 아빠가 데리러 와?”

16551158715677.jpg“아니야. 얘 아빠 없어.”

또 수인이 끼어들었다. 예나는 당황스러웠다. 자신보다 커다란 몸집의 오빠 그리고 날카로운 목소리의 친구와 마주하니 말 못 하는 강아지가 된 기분이었다. 이들이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었다.

16551158715677.jpg“아빠 없으면 엄마랑 둘이 살아?”

재인이 물었다. 입술 끝이 삐딱하게 들려 있었다. 자신을 비웃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6551158715677.jpg“아빠도 없는데 누구한테 바둑 배웠어?”

16551158569006.jpg“……아니야. 나도 아빠 있어.”

울컥한 예나가 대답했다. 재인이 수인에게 따졌다.

16551158715677.jpg“야. 아빠 있다잖아.”

16551158715677.jpg“아니야. 엄마가 분명히 그랬어! 얘 아빠 없다고.”

수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수인은 분명히 엄마가 하는 말을 들었다. 엄마가 그랬다. 예나가 제일 똑똑하더라고. 아빠도 없는 애가 그렇게 바둑을 잘하더라고. 그 말을 나는 잊을 수가 없는데. 재인이 다시 예나에게 물었다.

16551158715677.jpg“없다는데? 너 지금 거짓말하는 거 아니야?”

16551158569006.jpg“아니야. 있어.”

16551158715677.jpg“그럼 아빠한테 전화해봐.”

16551158569006.jpg“…….”

16551158715677.jpg“빨리 해봐. 너 휴대폰도 있잖아.”

재인이 예나의 목에 걸린 휴대폰을 가리키며 말했다. 예나는 떨려오는 손으로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수인이 몰아세웠다.

16551158715677.jpg“얼른 해 봐. 왜 못 해?”

16551158569006.jpg“…….”

16551158715677.jpg“너 아빠 전화번호도 몰라?”

구구단은 다 알면서 어떻게 아빠 전화번호는 몰라?

16551158715677.jpg“거짓말이지? 아빠 있다는 거.”

엄마가 울지 말라고 했는데. 예나는 아랫입술을 꾹 물고는 눈물을 삼켰다. 이미 맺힌 눈물을 집어넣으려니 얼굴에 시뻘겋게 열이 올랐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온몸의 피가 쑥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주변의 소리들이 멍멍하게 들렸다. 자신은 움직이지 않는데, 바닥과 천장이 뒤집어졌다가 뱅글뱅글 돌았다. 예나는 휴대폰을 손에 꼭 쥔 채로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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