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사랑하는 너에게2022.02.23.
“예나야!”
교실에서 나온 원장이 예나를 발견하고서 깜짝 놀라 달려왔다.
“예나야! 예나야!”
그 옆에 서서 지켜보던 두 아이의 얼굴에도 핏기가 싹 가셨다.
“……죽었어요?”
수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예나의 호흡과 동공을 확인한 원장이 예나의 뺨을 두드렸다. 잠시 눈을 떠 보였던 예나는 곧 다시 눈을 감았다. 원장이 고개를 돌려 두 아이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어쩌다 쓰러졌어?”
“우리는 그냥, 너 진짜로 아빠 있냐고 물어보기만 했는데요, 얘가 자기 아빠 있다고 자꾸 거짓말해서…….”
재인이 겁먹은 얼굴로 대답했다. 원장은 엄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무랄 새가 없었다. 예나를 번쩍 안아 든 원장이 말했다.
“선생님 병원에 다녀와야 하는데 부원장 선생님한테 얘기해줄래?”
원장은 아이들에게 일러두고는 바로 떠났다. 진서와 도빈은 학원문을 나서는 원장을 발견했다.
“예나야!”
진서가 먼저 원장이 안아 든 예나를 확인하고는 달려갔다.
“이게 무슨 일이야! 우리 예나 왜 그래요?”
“선생님 예나 왜 그래요? 예나 아파요? 예나 죽어요?”
도빈도 충격을 받은 얼굴로 물었다. 원장이 다급하게 대답했다.
“쓰러졌어요. 호흡은 정상이고요.”
“예나 엄마한테 연락하셨어요? 제가 전화할까요?”
“네. 부탁드립니다.”
진서가 정오에게 연락하는 동안 원장은 급히 택시를 잡았다. 원장과 예나, 진서와 도빈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
- 좋아?
- 즐거워?
- 답문도 안 보내네. 엄청 바쁜가 보네.
정오는 지헌이 낮 12시에 연달아 보낸 세 개의 문자메시지를 확인하고는 픽 웃었다. 막중한 임무를 수행 중인 정오에게 괜한 심통을 부리는 지헌이 우스웠다.
“대리님,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응? 아니야, 아니야.”
기훈의 물음에 정오는 휴대폰을 가방에 넣었다. 서울과 가까운 공장에서 촬영용 맥주를 받아다가 강원도 강릉의 촬영장까지 운반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았다. 촬영용 맥주를 하나하나 확인하여 싣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고 거리도 거리인지라 오후 2시가 넘어 촬영장에 도착했다. 끔찍하게 더웠지만 촬영하기엔 탁월한 날씨였다. 스태프들에게 제품을 전달하고 늦은 점심을 먹고 촬영장의 풍경과 모델의 비주얼에 감탄하며 넋 놓고 촬영을 지켜보다 보니 어느덧 오후 4시. 정오과 기훈은 미란과 영광에게 먼저 인사하고 촬영장을 떠났다. 4시에 출발해도 서울에 도착하면 7시경이 될 터였다. 회사에 가서 밀린 업무를 해결하고 나면 오늘도 밤늦게 퇴근하겠구나.
“기훈 씨, 힘들지. 내가 운전하면 좋을 텐데 장롱면허라서.”
“오, 저는 대리님 면허 없는 줄 알았어요.”
“따긴 땄어. 차가 없어서 그렇지.”
아이를 키우려면 운전면허는 있어야겠다 싶어 몇 년 전에 큰맘 먹고 따두긴 했지만 차가 없어 면허증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차를 구입하기 힘들 만큼 형편이 어려웠던 건 아니었는데 막상 마음을 먹으니 자꾸 가성비를 따지게 되었다. 출퇴근은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문제가 생겼을 때는 택시로 이동하면 되니 자가용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어제 아이에게 휴대폰을 사주고 나서야 문득 미안해졌다. 정오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차를 사지 않았지만 아이는 이에 서러움을 느꼈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차가 있었다면 더 먼 거리도 편하게 놀러 다닐 수 있었을 텐데 아이의 7년 평생 그렇게 해 주지 못했다.
‘가을에 캠핑을 가기로 했으니 그전에 차를 마련할까.’
아니지. 그때 되면 오빠가 같이 가 주려나? 아이와 지헌, 그리고 국순과 함께 캠핑을 가서 고기를 구워 먹는 상상을 하니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정오가 몰래 웃는 사이에 기훈이 물었다.
“면허 있으시면 한번 운전해보실래요?”
“많이 피곤하지? 힘들면 내가 대리운전이라도 불러볼게.”
“아뇨. 피곤해서 그러는 게 아니고 한번 운전대 잡아보시면 경험이 되지 않을까 해서요. 연습 삼아서.”
“나한테 운전대를 맡기면 기훈 씨 목숨은 보장할 수가 없다.”
“대리님이라면 제 목숨도 맡길 수 있죠.”
기훈이 넉살 좋게 대답했다. 두 사람이 사이좋게 웃는 사이에 정오의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발신자는 진서였다.
“네. 도빈 어머니.”
[정오 씨. 지금 회사죠? 놀라지 말고 들어요. 예나가 학원에서 쓰러져서 지금 병원에 가고 있어요.]
“우리 예나가요?”
진서가 놀라지 말라고 당부했지만 정오의 심장은 철렁 내려앉았다.
[호흡이랑 맥박은 정상이고요, 원장 선생님이 예나가 잠깐 눈 뜨는 걸 봤다고 하시네요. 그런데 다시 눈을 감았대요. 일단 먼저 병원에 가서 조치할 테니까 병원으로 오세요.]
진서는 병원 주소를 얘기하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 정오는 그사이에 ‘네’라는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끊어진 전화를 잡은 손이 벌벌 떨렸다.
“무슨 일이에요? 아이한테 무슨 일이 있어요?”
“응. 기훈 씨…… 나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아…….”
“병원에요?”
“애가…… 쓰러졌다고…….”
“의식은 있대요?”
“어, 어…… 잘 모르겠어, 나도 잘 모르겠어…….”
“…….”
“기훈 씨, 빨리…… 빨리 가줄 수 있을까?”
정오는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했다. 모든 감각이 마비된 느낌이었다. 머리도 멍하여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차는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빨리 간다고 해도 앞으로 한 시간 이상 더 달려야 하는 거리였다.
“대리님, 최대한 빨리 갈게요. 걱정 마세요.”
듬직하게 정오를 안심시킨 기훈이 가속페달을 세게 밟았다. * 맥스기획 복도. 클라이언트의 방문으로 기획팀과 함께 회의에 참석했다가 나온 지헌은 얼음이 된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쓰게 한숨을 내쉬었다.
‘답문도 안 보낸다 이거지?’
12시에 정오에게 문자메시지를 세 개나 보냈는데 그녀는 답문이 없었다. 너의 이름은 이정오인가 매정오인가. 어찌 이토록 매정할 수가 있나. 어쨌든 저녁때 회사로 돌아온다고 했으니 만나면 확실하게 복수해줘야겠다 생각하며 집무실로 돌아가는 와중에 승규가 바삐 뛰어가는 것이 보였다. 바쁜 일이 있나 보다 생각하며 따로 알은체하지 않았는데 지헌을 발견한 승규가 먼저 달려왔다.
“너 괜찮아?”
“어? 왜?”
“예나가 쓰러졌다던데?”
“…….”
“나도 지금 연락받았어. 도빈이 엄마랑 바둑학원 원장님이 병원에 데려갔다나 봐.”
지헌 역시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 원장은 예나를 옮겨준 후 먼저 떠나고, 진서와 도빈만 남은 병원 응급실.
“예나야아아. 예나야아아.”
도빈은 누워 있는 예나 앞에서 내내 통곡했다.
“예나야아아아 죽지 마아아아. 내가 잘해줄게에에에.”
사랑하는 너에게, 사랑한다는 말도 못 했는데.
들어주기 힘들어진 진서가 한숨을 쉬며 도빈을 달랬다.
“도빈아. 예나 안 죽어. 제발 조용히 하자.”
“예나야아아.”
그럼에도 도빈의 목소리는 우렁찼다. 눈물도 꾹꾹 짜야 나오는 녀석이 왜 그렇게 곡을 해대는지. 요란스러운 아들 녀석 때문에 진서는 계속 난감했다. 눈이 마주치는 사람들을 향해 죄인처럼 연거푸 고개를 숙여야 했다. 이 녀석은 내가 쓰러졌을 때도 이렇게 서럽게 울었을까? 안 그랬을 것 같은데. 아이가 너무 시끄럽게 구니 병원에 더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진서에게 연락을 받은 국순이 금방 병원에 도착했다. 이 통곡 소리의 장점이 하나는 있었다. 국순이 누구보다도 빠르게 예나의 자리를 찾아내 금방 달려왔다. 국순을 발견한 진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고, 우리 예나, 우리 애 왜 그래요? 왜 그렇대요?”
늘 진서에게 예의를 지켜왔던 국순도 인사보다는 아이가 먼저였다. 혼비백산이 되어 달려온 국순이 진서에게 물을 때도 도빈의 곡은 계속 이어졌다.
“예나야아아. 죽지 마아아. 안 돼애애애애.”
“우리 예나가 왜! 주, 죽어? 무, 무슨 병인데!”
도빈의 울음에 국순이 깜짝 놀라 물었다.
“아, 아니에요. 예나는 놀라서 쓰러진 거래요.”
진서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원장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
“스트레스를 좀 받은 것 같아요…… 예나 또래 애들이, 예나한테 아빠가 없다고 몰아붙였나 봐요.”
“아이고 세상에, 아이고, 아이고 세상에! 우리 애기한테, 우리 애기한테 누가!”
국순의 목소리가 격해졌다.
“그래서, 아직 의식이 없는 거래요? 어떻게 해야 하나?”
“의사 선생님 소견으로는 괜찮을 것 같다고 하고요. 일단 오늘 입원해서 상태 지켜보자네요.”
아이의 상태를 확인하고 마음이 안정된 후에야 국순은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아이고, 고마워요. 우리 도빈이 엄마도 몸이 성치 않은데, 너무 고맙고 미안해요.”
“아니에요. 근데 저희는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도윤이 올 때도 됐고, 도빈이가 너무 주책맞기도 해서…….”
“아이고오, 아이고오…….”
제 이름이 들려오자 방금 전 국순의 소리까지 카피해버린 도빈이 더 크게 외쳤다. 이제 도빈의 통곡은 발악 같기도 했다. 한계에 다다른 진서가 이를 꽉 물고서 말했다.
“박도빈 이제 가자.”
“왜?”
“집에 가야지. 이제 도윤이도 올 때 됐잖아.”
“그럼 엄마는 가.”
“뭐어? 이눔 자식, 빨리 와!”
진서는 결국 무력을 행사하여 도빈을 끌어냈다. 도빈은 끌려가면서도 예나를 목놓아 불렀으나 예나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국순은 직원을 불러 신속하게 입원 수속을 밟았다. 예나를 입원실로 옮긴 후에 의사가 다시 와서 아이는 아무 이상 없을 거라고 안심시켜 주었다. 의사의 말을 직접 들으니 국순도 숨이 트이는 듯했다. 충격이 가시고 나니 새로운 걱정거리가 불쑥 떠올랐다. 다행히 늦지 않게 지헌이 달려왔다.
“어머니.”
“아이고, 아이고 잘 왔다. 예나 아빠!”
“예나는요? 괜찮대요?”
“응. 별 이상은 없을 거래. 오늘 입원해서 지켜보고 내일 퇴원하면 된다네.”
“아직 안 깨어났고요?”
“잠들었다고 생각하면 된다는데, 좀 더 지켜봐야지.”
예나를 보고 상태를 확인한 지헌이 침대 앞에 꿇어앉으며 거친 한숨을 토해냈다. 아이의 소식을 듣고 자신처럼 눈썹이 휘날리게 뛰어온 것이 뻔했다.
“어머님도 많이 놀라셨겠네요.”
“아유, 그러게. 식당에서 뛰쳐나와버렸네. 문을 제대로 닫고 오긴 한 건지, 가스불은 끄고 나왔는지 기억이 안 나.”
“여긴 걱정 마시고 얼른 다녀오세요. 아니면 제가 다녀올까요?”
“아니야. 내가 갔다 올게.”
국순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래도 우리 예나 아빠가 곁에 있으니 다행이야. 달려와 줘서 고마워.”
아빠인데, 당연한 일인데. 국순의 인사에 지헌은 멋쩍어졌다. 국순이 부랴부랴 떠나고, 지헌은 병실에 예나와 단둘이 남겨졌다. 잠든 아이를 보는 것은 두 번째. 어둡지 않은 조명 속에서는 처음이었다. 아이는 아픈 와중에도 천사처럼 사랑스러웠다. 그 사랑스러운 얼굴에 스치는 무거운 기운. 의사는 별일 아닐 거라는 듯 말했다지만 지헌은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아이는 이따금 손에 경련이 있는 것처럼 손끝을 움찔했다. 지헌은 예나의 손바닥 위에 손가락을 올려놓았다. 예나가 지헌의 손을 꽉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