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진짜 진짜 진짜 진짜2022.02.26.
항상 같은 후회를 한다. 아이와 함께하는 일상은 언제나 소중한데, 어째서 그 소중한 일상에서는 모두 간과해버리는 걸까. 왜 절박해지고서야 그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걸까. 아이가 유괴당할 위기에 처했던 그날도 일이 닥치고서야 그 소중함을 깨달았는데. 정오는 병원을 떠날 무렵의 진서에게 아이가 왜 쓰러지게 되었는지 간략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또래 아이들이 예나에게 아빠가 없다고 몰아붙인 모양이었다. 나는 아이에게 어떻게 했더라? 일곱 살 아이에게 내가 뭘 한 거지? 정오도 지난 일을 돌이켜보며 후회하게 되었다. 아이에게, 아빠가 없는 걸 창피하게 여길 필요는 없다고 가르쳤다. 자신 또한 그렇게 살아왔기에 아이도 잘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놓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어느 날 갑자기 아빠의 존재에 대해 밝혔다. 그 혼란스러웠을 아이에게 지헌을 아빠라고 부르라며 바로잡아주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은.
“요즘 예나가 너무 자주 울어. 오늘은 울지 않기 하자. 알았지?”
아이는 당연히 우는 건데, 울 수 있는데. 어른도 마음이 아프면 울어버리는데. 그저 아이가 요즘 들어 눈물이 많아졌단 이유로 어려운 숙제를 내주었다. 아이에게 아이다움을 이겨내보라고 말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정오의 눈물진 얼굴을 흘깃 확인한 기훈이 속도를 높였다. 정오에게도 기훈에게도 다급한 시간. 그 와중에 다시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이번에는 지헌이었다. 정오는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네. 이사님.”
[여기 병원이야. 걱정할까 봐 연락했어.]
지헌의 차분한 목소리에 정오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눈물이 눈꺼풀에 밀려나며 찔끔 흘러내렸다.
[지금 서울로 이동 중이지?]
“…….”
[이정오.]
“…….”
[정오야.]
마음을 가라앉혀주는 목소리가 연거푸 들려왔다. 그 음성에 도리어 감정이 일렁거려 정오의 목이 푹 잠기고 말았다. 정오는 겨우겨우 대답했다.
“……네. 이사님.”
[걱정하지 마. 예나 괜찮아.]
“…….”
[조심해서 와. 이따가 보자.]
끊어진 전화를 꼭 쥔 정오는 결국 눈물을 떨구고 말았다. 그 눈물에 놀란 기훈이 식겁하며 물었다.
“이사님이 또 뭐라고 했어요? 설마 이 심각한 와중에도 야근을 하래요?”
“아니, 그런 게 아니고…….”
변명할 말을 찾아야 하는데 머리에 돌덩어리가 들어앉은 것 같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이사님이 모르셔서 그런 거겠죠? 알면서 일하라고 한다면 그건 쓰레기지.”
정오의 그 무거운 반응을 제멋대로 해석한 기훈이 흥분했다. 정오가 안타까워 기훈 또한 가슴이 미어졌다. 기훈은 다짐했다. 정지헌, 그 피도 눈물도 없는 매정한 상사에게서 이정오 대리님을 목숨처럼 지켜야겠다고.
* 은엽은 오늘의 스케줄을 모두 취소한 지헌이 급히 병원으로 향했단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왜? 왜 병원에?’
이곳저곳에 연락하여 집요하게 캐낸 결과, 예나가 학원에서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다는 것을 알게 된 은엽도 곧장 병원으로 달려갔다. 이제 정지헌과 이정오, 두 사람은 아이의 존재를 공유하고 있다. 은엽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다음 수순은? 분명히 빠른 시일 내에 친자확인 검사를 다시 시도할 것이다. 어쩌면 지금 아이가 입원한 그 병원에서 진행할 수도 있다.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녀석의 친자확인 검사를 싹 다 망가뜨리리라. 그럼 언젠가 정지헌 또한 포기하고 이정오를 의심하게 되겠지. 다행히 이예나가 입원해 있다는 그 병원에 아는 사람이 있었다. 꽤 친한 사람이었다. 은엽은 누군가가 친자확인 유전자 검사를 의뢰하면 꼭 알려달라고 단단히 일러두고는 병원을 떠났다. * 예나의 병실. 지헌은 한참 동안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일을 맡긴 카운슬러에게 연락이 왔다. 은엽이 돌연 병원을 다녀갔다는 문자였다. 지금 지헌이 머물러 있는 병원의 이름이 문자메시지에 박혀 있었다. 아이가 쓰러져 있는 심각한 상황이라 걱정만 한 무더기였는데 문자를 확인하고선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서로 감시하고 있는 건가. 나를 뒤쫓는 녀석을, 나 또한 뒤쫓고 있었다니. 예나에 대해 알기 전에는 막연히 채은비가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채은비보다도 채은엽이 더 악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순간에도 지헌의 한쪽 손은 예나에게 붙들려 있었다. 휴대폰은 협탁에 엎어놓고 다시 예나에게 집중했다. 아이가 맞고 있는 주사약이 꽤 많이 떨어진 게 보였다. 간호사가 주사약이 반 정도 남으면 말해달라고 했었다.
“예나야, 간호사 선생님한테 말하고 올게.”
지헌은 아직 깨어나지 않은 아이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그런데 지헌이 잡힌 손가락을 빼내려는 순간, 아이가 더 세게 움켜쥐는 느낌이 났다. 기운을 조금만 써도 충분히 손가락을 빼낼 수 있는 미약한 악력이었는데도 지헌은 쉽게 놓을 수가 없었다. 왠지 아이가 절박해 보여서.
“예나야. 아빠 금방 돌아올 거야.”
또다시 아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이가 자신의 목소리에 반응한다는 사실이 신기하여 지헌은 움직이지 못했다. 꿈속에서 내 목소리를 듣고 있나? 아이는 지금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 간절히 바랐던 일도 이루어지지 않았던 적이 더러 있었다. 실망하지 않기 위해 먼저 포기한 적도 있었다.
“나도 아빠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럼 내가 물어볼까? 우리 아빠한테 너네 아빠도 해달라고.”
“아마 안 될걸?”
언젠가 친구 도빈이 제 아빠를 나눠주겠다고 했다. 친구 도빈의 해맑은 제안에 가슴이 뛰었지만 예나는 언제나 그랬듯 설레는 마음을 감추고 덤덤하게 말했다. 그래야 했다. 예나는 언제나 당당하고 덤덤했다. 아빠가 없는 것이 부끄럽지 않았다. 언제나 엄마가 지켜주기 때문이었다.
“아빠가 없는 건 창피한 게 아니야. 그걸 놀리는 마음이 더 창피한 거야. 누가 예나를 놀리면 엄마랑 선생님한테 얘기해. 그럼 엄마든 선생님이든, 그 친구를 혼내줄 거야. 알았지?”
엄마 덕분에 예나는 아무렇지 않게 아빠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아저씨가 아빠에 대해 물을 때도, 처음엔 아무것도 몰랐던 바둑학원 원장 선생님이 아빠에 대해 물을 때도, 예나의 입에선 ‘아빠 없는데요.’라는 말이 거침없이 나왔다. 그 거침없는 말은 예나가 모르는 사이에 학원에 파다하게 퍼졌다. 바둑 영재라는 유명세에 미혼모의 딸이라는 얘깃거리가 더해졌다. 바둑학원에 아이를 보낸 몇몇의 엄마들은 예나를 질투하며, 한편으로는 예나의 딱한 처지를 위안 삼았다. 그때 그러지 말걸. ‘아빠 없는데요’라고 큰 소리로 말하지 말걸. 아니, 아저씨가 집으로 찾아온 그날, 아저씨한테 나가라고 소리치지 말걸. 오늘 아침에 아저씨한테 휴대폰 생겼다고 말할걸. 아저씨의 전화번호를 물어볼걸. 후회되는 순간이 계속 생각났다. 일곱 살 아이가 깨달은 인생의 무게가 눈꺼풀을 지그시 눌렀다. 꿈속에서도 자꾸 눈이 감겼다. 꿈속의 예나는 온 세상을 휘감은 오로라 속에서 아빠와 단둘이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었다.
“예나야. 잘못 둔 수는 물릴 수가 없어. 하지만 다음에 더 잘 두면 돼.”
꿈속의 아빠가 예나에게 말했다. 꿈속의 아빠는 매번 얼굴이 바뀐다. 오늘은 바둑학원 선생님과 비슷한 얼굴이었다. 언젠가 바둑학원 선생님이 아빠였으면 좋겠다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그 꿈이 꿈속에서 이루어진 듯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깨어나면 사라진다. 자신이 기억하면 그리워할 거라는 걸 꿈속의 아빠도 알고 있는 듯했다. 사라진다. 언제나. 사라진다 생각하니 예나의 심장은 더욱 가파르게 뛰었다. 어느새 예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울먹거리며 말했다.
“아빠는 없어도 돼. 근데 있다가 없어지면 그건 안 돼.”
있다가 사라지지 마. 그건 너무 무섭단 말이야.
“잘못 둔 수는 물릴 수가 없다며. 아빠도 그러지 마.”
내 옆까지 왔으면 계속 내 옆에 있어. 떠나지 마. 아이의 말에 꿈속의 아빠는 미소 지을 뿐 대답 없이 바둑통을 더듬었다. 아빠의 바둑통 안엔 바둑알이 단 하나뿐이었다. 안 돼. 그 바둑알을 쥐었다가 내려놓으면 이 바둑이 끝나고, 아빠도 사라질 것 같았다. 예나는 급하게 일어나 아빠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바둑돌이 툭 떨어졌다. *
“예나야.”
눈을 떴지만 눈앞은 여전히 흐릿했다. 오늘 아침에 들었던 아저씨의 목소리만 고요히 들려왔다. 예나는 눈을 천천히 깜빡거렸다. 자신이 꽉 쥐고 있는 한 손에는 아저씨의 손가락 두 개가 붙잡혀 있었다.
“괜찮아? 아빠 보여?”
아저씨가 보였다. 자기 자신을 아빠라고 부르는, 일곱 살에 처음 만난 아저씨. 학원에서 만난 무서운 남매가 사라져서일까, 기운이 하나도 없어서일까. 엄마도 할머니도 없는 낯선 공간에서 눈을 떴는데, 눈에 보이는 건 그토록 미워하던 아저씨뿐인데, 의외로 마음이 편안했다. 마음에 가둬두었던 고백이 흘러나왔다.
“전화번호를 몰라서…….”
“…….”
“전화를 못 했어요.”
엄마가 울지 말라고 했는데, 목소리를 내자마자 막을 새도 없이 눈물이 주룩 흘렀다. 눈물에 놀란 지헌이 침대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예나를 끌어와 안았다. 예나는 지헌의 가슴에 기대어서도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꿈에서처럼 자꾸 얼굴이 일그러졌다.
“전화를 하고 싶었는데, 번호를 몰라서…….”
“나한테…… 아빠한테 전화를 하고 싶었어?”
“휴대폰을 샀는데…….”
“…….”
“애들이 아빠한테 전화해보라고 했는데…….”
“아빠한테 매일 전화해. 그래도 돼.”
지헌이 차분히 예나의 등을 쓸어주며 말했다. 묵직하게 울리는 지헌의 낮은 목소리에 예나의 눈물이 잠시 걷혔다.
“진짜야?”
“그럼. 당연하지. 아무 때나 전화해. 언제든 받을 테니까.”
“아니이.”
지헌의 대답에 예나는 고개를 저었다. 물어보고 싶은 건 그게 아니었다.
“진짜 아빠야?”
중요한 건 전화가 아니었다. 결국 전화는 아니었다. 제일 중요한 건.
“진짜 진짜 진짜? 아빠야?”
“아빠야.”
이제 다시는 사라지지 않을, 진짜 아빠. 지헌이 굳게 끄덕였다.
“진짜 진짜 진짜 진짜.”
“…….”
“진짜야. 진짜 아빠야.”
“…….”
“예나 아빠야. 아빠는, 진짜 예나 아빠야.”
흐으으으으윽. 으아아아아아앙. 더 이상 서럽지는 않았다. 그러나 더 큰 울음이 터졌다. 엄마에게 그러듯 생떼 같은 그 울음이 병실에 가득 찼다. 예나는 아빠의 얼굴을 툭툭 때리며 원망스럽게 투정 부렸다.
“왜 이제 왔어어.”
딱 일곱 살 아이의 어리광. 예나에게 철썩철썩 맞으면서도 곱게 실웃음을 짓던 지헌이 예나를 끌어안아 다독였다.
“왜 이제 왔어어어. 예나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에.”
얼굴도 모르는 아빠가 보고 싶었다. 꿈속 아빠의 얼굴은 자고 일어나면 떠오르지 않았다. 이제 아빠의 얼굴을 바꾸지 않아도 돼? 아빠가 있다고 말해도 돼? 아빠한테 마음대로 전화해도 돼? 다 해도 돼? 다 해도 괜찮아?
“미안해. 아빠가 미안해.”
“…….”
“늦게 와서 미안해.”
지헌이 예나를 폭 끌어안고는 가만히 등을 쓸었다. 다시 느껴보는 단단한 포근함. 그 너른 가슴 안에서 아빠의 목소리가 온 세상처럼 크게 울렸다. 아빠는 웃고 있었다. 아니, 우는 것 같기도 했다.
“아빠아아.”
예나도 팔을 뻗어 아빠를 끌어안았다.